설교말씀

그리스도인의 투쟁과 싸움(로마서/7:14-25)

열려라 에바다 2023. 11. 3. 11:52

유튜브: 진리의 증인


14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15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7:14-25)


서론: 본문은 바울 사도께서 자신의 내면세계의 영적투쟁(靈的鬪爭)을 적나라하게 고백한 주옥같이 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분열되고 일그러진 인간의 모습이요, 죄에 무능한 인간의 회한과 탄식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거듭나고 중생(重生)한 그리스도인이, 죄의 유혹과 싸우면서, 신앙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를 토로한, 위대한 성자 바울 사도의 고백입니다.
이 시간에는 “그리스도인의 투쟁과 싸움”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사람 속에는 상반된 두 인격이 존재하며, 두 인격은 서로 다투고 투쟁합니다.
21절에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 속에는 선한 인격과 악한 인격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 속에는 선하고 의로운 인격과, 죄의 인격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본문의 고백이 너무 충격적이기 때문에, 본문은 바울 사도의 체험적인 고백이 아니라,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나, 중생하기 전의 일반 신자의 고백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중생하고 거듭나지 않으면, 절대로 이런 갈등과 고민을 할 수 없습니다. 본문의 고백은 바울 사도가 중생한 후에 체험한 영적 투쟁과 갈등입니다.
인간의 내면세계에는 선과 악, 천사와 악마라는 상반된 두 인격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모든 인간은 두 가지의 본성, 즉 선한 본성과 악한 본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내면세계에는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가 있는데, 선한 천사는 인간을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려 하고, 악한 천사는 인간을 낮은 곳으로 끌어내리려 한다. 그러므로 인생이란 이 둘 사이의 싸움이요 투쟁이다”고 주장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였던 플라톤(Platon)은 인생을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에 비유했습니다. 한 마리의 말은 양순하고 훈련이 잘돼 있습니다. 이 말을 이성(reason)이라고 합니다. 다른 한 마리의 말은 사납고 다루기가 힘들고 훈련이 안 돼 있습니다. 이 말을 격정(passion)이라고 합니다. 플라톤은 인생을 이성과 격정 사이의 투쟁으로 보았습니다. 인생은 이성과 격정이 조화와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너무 이성으로 치우치면 용기와 박력을 잃게 되고, 반대로 너무 격정으로 쏠리면 법과 질서와 인간의 보편적 가치가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성과 격정이라는 두 마리의 말이,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며 달릴 수 있도록, 조종하고 컨트롤(control)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유대인의 사상처럼 선한 본성이 악한 본성을 이기고, 선한 천사가 악한 천사를 이길 수 있도록, 자신을 선하고 의로운 본성에 굴복시켜야 합니다.
인간은 두 인격의 갈등과 투쟁을 통해, 신앙과 인격이 성장하고, 인생의 지혜를 터득합니다. 철학자 파스칼(Pascal)은 “인간은 약한 갈대와 같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생각하고 고민하는 철학적인 존재라는 뜻입니다. “어떤 문제로 갈등하고, 어떤 문제로 고민하느냐?”는 차이만 있을 뿐, 인간은 누구나 갈등과 고민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의로운 인간은 정의와 진리의 문제로 고민하고 갈등하지만, 죄인은 불의한 탐심과 정욕과 세속적인 문제로 고민하고 갈등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교회와 우리 사회의 문제와 정의와 진리의 문제로 고민하고 투쟁하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일어나는 두 인격의 싸움에서, 반드시 한편을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천사의 편을 들든지 악마의 편을 택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합니다. 내면세계의 영적 투쟁에서,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인간은 천사가 될 수도 있고, 악마가 될 수도 있습니다. 거듭나고 천국에 가까이 간 사람일수록, 영적 투쟁이 심하고 처절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투쟁은, 신앙과 인격이 성장하고, 거룩한 천국 백성으로 성화돼 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영적 투쟁은,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 계속됩니다. 살아가면서, 죄의 문제로 고민하고, 양심의 갈등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구원이 의심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체험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자신의 내면세계에 영적투쟁이 없는 사람은, 영혼이 병들고 이성과 양심이 죽은 사람입니다. 영혼이 병들고 이성과 양심이 죽어있기 때문에, 갈등과 투쟁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 속에는 상반된 두 인격이 존재하는데, 두 인격의 충돌과 투쟁을 통해, 신앙과 인격이 성장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 뜻을 이루고, 정의와 진리를 위해 투쟁하는,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인간은 연약하고 죄에 무능한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바울 사도는 18절에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고 죄에 무능한 자신을 탄식했습니다. 또 15절에서는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한다.”고 고백하셨습니다. 분열되고 모순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종교개혁자인 칼빈(Jean Calvin 1509-1564)선생님은 “인간은 죄에 오염되고 타락해서, 선한 자유의지가 전혀 없다”고 인간의 전적타락(全的墮落)을 주장하셨습니다. 반면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칼빈의 완전타락설을 반대합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의 고백과, 우리 자신의 이성과 양심으로 판단해볼 때, 인간의 완전타락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완전타락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를 못합니다. 알고는 있지만 행하지 못하고, 마음으로 원하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게 전적타락의 증거입니다. 1세기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였던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B.C.4 ?-A.D.65)는, 죄를 증오하고 싫어하면서, 죄를 즐기며 살아가는, 인간의 이율배반적인 삶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문제는 세네카 자신도, 그가 비판했던 인간들과 똑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극기와 도덕적 실천을 강조한 세네카도, 부끄럽고 세속적인 삶을 산 것입니다. 세네카의 이런 모순된 삶이 인간의 완전타락과 인간이 얼마나 죄에 무능한 존재인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18절에서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한다.”고 탄식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두 가지 무능을 탄식했습니다. 첫째는 지식의 무능입니다. 알고는 있지만 행하지 못하는 지식의 무능을 탄식한 것입니다. 19절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한다.”고 탄식하셨습니다. 알고는 있지만, 행하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지식의 무능입니다. 지식에는 책임과 의무가 따릅니다. 행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고, 교육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고 있지만 행하지 못하는 지식은, 생각하는 머리만 있고 손과 발이 없는 사람과 같습니다.
바울 사도가 고백한 두 번째 무능은, 거듭거듭 깨달으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무능입니다. 이것이 죄라는 것을 알고, 이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끊지 못하고 고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술과 도박과 방탕한 생활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끊지를 못합니다. 인간이 왜 이렇게 무능한 존재가 되었느냐? 인류의 시조인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 형상이 파괴되고, 하나님이 주신 선한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가도록,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되었지만,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 형상이 파괴됐기 때문에, 알고도 행하지 못하고, 깨달으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해주시기 위해, 인간의 죗값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를 믿으면, 죄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인간은 연약하고 죄에 무능한 존재지만,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의 속죄의 공로로, 죄에서 구원받고, 하나님께 의인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중생하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도 죄를 범하고 죄의 유혹에 넘어갑니다.
바울 사도는 24-25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탄식하셨습니다. 바울 사도가 중생한 다음에, 죄의 문제로 겪은 영적 투쟁과 갈등을 고백한 말씀입니다. 거듭나고 중생한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요한일서 3:6,과 3:9, 그리고 요한일서 5:18,에 근거해서 그렇게 주장합니다. 요한일서 3:6,절과 3:9, 그리고 요한일서 5:18,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범죄 하지 아니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요한일서의 말씀은 “중생한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중생한 사람은 고의적으로 죄를 짓거나, 상습적으로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대요리 문답”의 78번에도 “신자의 성화가 불완전한 이유는, 그 사람의 각 부분에 있는 죄악의 잔재들 때문이다” 말하고 있습니다. 중생한 사람도 완전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중생한 사람도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는, 마귀와 죄악의 유혹과 투쟁하며, 영전(靈戰)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중생한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죄의 속성과 죄의 본질을 너무나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정말로 조심하고 멀리해야 합니다.
일제강점기 때에 황해도 출신의 ‘황 국주’란 사람이, 만주로 이민을 간 후, 목사가 돼서 신비주의와 이단으로 빠져, 이단 종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황 국주는 백일기도를 한 다음, 머리를 길게 길러 내리고, 수염을 길러, 사진이나 영화로 보는 예수님의 모델과 비슷하게 외모를 꾸몄습니다. 그리고 황 국주는 “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아, 내 목은 잘리고 그 위에 예수의 목이 붙여졌다. 나는 머리도 예수의 머리, 피도 예수의 피, 마음도 예수의 마음으로 나는 모든 것이 예수로 변했다.”고 주장하며, 만주 간도에서 새 예루살렘 도성을 찾아간다며 순례의 길을 떠났습니다. 황 국주의 이런 해괴한 주장은 “황 국주는 진짜 예수의 화신”이라고 소문이 퍼져 추종자가 더 많아졌습니다. 황 국주가 서울로 온다는 소문이 퍼지자,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이, 환생한 예수와, 예수의 화신을 보겠다고, 황 국주가 지나가는 길을 가득 메웠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화신인 황 국주에게 충성하고 헌신하겠다고, 남편과 가정을 버린 유부녀와 처녀들이 60여 명이나 황 국주의 대열을 따랐습니다.
황 국주는 중생한 그리스도인은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도덕적 완전주의를 외치며 남녀가 혼숙을 하게 했습니다. 다 장성한 남녀가 혼숙을 하면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안 생기겠습니까? 황 국주는 하나님 계시라며, 남녀 간의 부정한 성행위를 합리화하고, 온갖 불법을 자행했습니다. 그 뒤 황 국주는 서울의 삼각산에다 기도원을 세우고, 그의 추종자들에게 ‘목가름’과 ‘피가름’의 교리를 가르쳤는데, 이 가름의 과정을 영체의 교환(靈體 交換)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가름의 과정은 남녀 간의 혼음(混淫)인데, 통일교의 ‘문 선명’이 말하는 ‘피 가름’의 교리가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중생한 사람은 도덕적으로 완전하고, 중생한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주장은, 성도를 타락시키는 사탄, 마귀의 유혹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중생한 그리스도인은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중생한 그리스도인도 죄를 범하고, 죄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고 행위가 완전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중생해도 죄를 짓고 넘어지고 시행착오를 반복하지만, 회개하면 예수님의 속죄의 공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선과 악이라는 두 인격이 존재하며 인생은 선과 악이라는 두 인격의 투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두 인격의 투쟁은 하나님 앞에 가는 날까지 계속되며, 이 투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신앙과 인생에 승리하고 천국에 들어갑니다. 우리 힘으로는 죄악과 악의 세력에 승리할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깨어서 기도하고 믿음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만고불변의 진리인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시고, 깨어서 근신하는 진실한 믿음으로 행하셔서, 신앙과 인생에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