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지(독보리)와 배교(背敎)의 비유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마 13:24-26)
예수님은 종종 씨앗을 비유의 소재로 사용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할 때, 생명력 있는 믿음에 대해 가르치실 때 씨앗은 이주 젛은 비유의 소재이다. 오늘 비유에서 예수님은 천국을 설명하시며 다시 씨앗을 그 소재로 가지고 오셨다. 그러므로 먼저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그 비유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나오는 한 종류의 '좋은 씨'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 반면 본문의 '좋은 씨'는 마지막 주님의 심판을 직면(直面)해야 하는 성도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보리• 세상의 통치자, 그리스도
좋은 씨를 뿌리는 이가 누구인지 설명해 주신다. 그는 바로 인자라고 하는 설명(37절)하신다. 이에 따르면 본문의 구절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대하여 그의 소유권을 주장하신다는 말씀이다. 주의 몸된 교회만이 그의 것이 아니라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다(시 24:1). 따라서 '제 밭(에 뿌린 사람)'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창 1:1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는 말과 의미상 동일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신 이후에 그 세상에 대해서 아무런 관여나 관심을 기울이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본문에서처럼 사람의 거듭난 탄생을 위하여 세상을 보호하시고 가꾸신다. 세계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버려진 쓸모없는 땅이 아니라 악이 만연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가꾸어지는 좋은 땅이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3-23절)에서는 예수를 비롯한 12제자들과 많은 복음전도자들이 씨뿌리는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가라지 비유에서의 씨를 뿌리는 일은 오로지 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비록 종들이 가라지의 연유(緣由)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그 집 주인(27절)은 직관적으로 그것이 원수의 방문에 의한 것임을 감지했던 것이다. 이러한 선과 악의 구별 및 그 기원에 대한 완전한 통찰력을 가지신 한 분은 오직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뿐이시다.
• 원수의 짓거리
1. 사람들이 잘 때에
여기서 '잘 때에'란 농부의 태만함을 꼬집는 말이 아니라 원수가 농부 모르게 슬그머니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절호(絶好)의 기회를 암시하는 말이다. 사실 악한 어두움의 세력은 주로 사람들이 일하지 않고, 경계(警戒)도 하지 않는 평화와 안식의 시간인 밤에(at night) 활동한다. 여기 농부의 원수도 농부가 휴식을 취한 밤에 몰래 들어와 악한 씨앗을 뿌리고 간 것이다. 한편 그 당시 로마에서는 보복하기 위해 상대방의 밭에 가라지와 같은 잡초들을 뿌리는 행위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2. 덧뿌리고 갔더니
'위에'를 뜻하는 말인 '에피'와 '씨를 뿌리다'의 뜻인 '스페이로'의 합성어로서, 뿌린 시 위에 한 번 더 씨를 뿌리는 행위를 가리킨다. 레 19:19과 신 22:9에서는 다른 종류의 씨앗을 섞어 뿌리지 말라고 하는 규정이 있다. 이는 두 씨앗 중 어느 한 씨앗의 열매조차도 올바로 수확할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난 조항인 동시에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과 비타협성을 상징하는 교훈적 율법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과 민족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가나안의 이방신앙과 그들과의 혼혈 결혼을 철저히 배격하였다. 바로 그런 점에서 악한 씨앗, 곧 가라지의 씨앗을 곡식의 씨앗 사이에 덧뿌려 놓은 원수의 행위는 도덕적으로나 율법적으로 모두 부정한 것이었음이 명백해진다.
원수가 하는 일은 진리에 거짓을 교묘하게 섞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얼마나 아름답고 친절하고 거룩해 보이는지. 그러나 속으로 들어가 보면 온갖 거짓과 추악함으로 가득한 존재들과 단체들이 많다. 그들은 덧뿌려진 존재들이다. 종교의 탈을 쓴 이익집단이며 양의 탈을 쓴 늑대일뿐이다.
'원수'는 '미움', '증오'의 뜻인 '에크드로스'에서 파생된 말로 문자적인 의미로는 '원수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는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부정하는 자이며 예수가 다시 오실 때까지 성도들을 미혹하고 박해하는 적그리스도(antichrist)이다.
보리 추수 때• 원수가 세상에 뿌린 씨앗
'가라지(ζιζάνιον 지자니온)' - 독보리(lolium temulentum)의 일종으로 '가짜 밀'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싹의 모습이 밀이나 보리와 아주 흡사하여 실제로 이삭이 패기까지는 얼른 식별하기 어렵고, 잘못해서 먹었을 경우 급한 설사와 구토 등의 여러 증상이 있으며, 심할 경우에는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다. 예수의 설명에 의하면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로서(38절), 사람들을 의의 자리에서 넘어지게 하는 자이며, 또한 불법과 부정을 행하는 자들이다(41절).
그들의 특징은
(1) 위장성(僞裝性)
곡식과 가라지가 싹이 난 초기부터 결실을 거둘 때까지 사람들의 눈에 잘 분별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 끝이 올 때까지는 성도들과 잘 분간되지 않도록 위장되어 있다.
(2) 잠복성(潛伏性)
이삭이 나오기까지 평상시에는 곡식과 마찬가지의 외형과 생장 과정을 보이는데 일단 이삭이 패면서부터 알곡과 확연한 차이를 드러낸다. 즉 가라지들이 평소에는 잠복해 있다가 결정적 순간에 그 감춰진 마각(馬脚)을 드러내 놓고 알곡에게 해를 끼친다.
(3) 해독성(害毒性)
가라지는 알곡 뿐 아니라 인체에까지 큰 피해를 준다. 세상에 해악을 끼치눈 존재들이 얼마나 많은가?
• 그 끝에 판명될 것이다.
열매로써 그 나무나 씨앗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영원한 진리이다(7:17). 여기 가라지도 생장기에는 그 악한 실체를 감출 수 있을지 모르나 그 결실기에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 놓을 수밖에 없다.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마 13:26)
그런데 이 결실의 때는 영적으로 최후심판이라고 하는 마지막 추수기 이전까지의 기간으로 악의 세력과 죄악의 관영이 그 절정에 달한 시기를 상징한다. 따라서 빛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이 때는 고난의 때이고 신앙의 시련을 통과하는 때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끝까지 견디는 자에게는 의의 면류관과 영생이라고 하는 주님의 약속이 곧이어 실현되려고 하는 때를 의미하기도 한다(마 10:22).
한편, 추수는 마지막 심판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비유이다. 심판이 행해지는 종말의 때는 세상의 끝이라고 하는 시간적 의미를 가짐과 함게 성취, 완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삶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끝나버리며 최후의 대심판에 의해 악한 자는 영원히 멸망할 곳으로, 의인은 추수가 끝난 마당에서의 축제와 같이 기쁨과 평화가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
• 제자들의 성급함
1.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종들의 이 두번째 질문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밭에 있는 가라지를 지금 당장 모조리 뽑아 버리고자 하는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의 이러한 성급함과 경솔은 추수(秋收)의 '때'(카이로스)를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영적 우둔함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알곡(곡식)은 곳간에 가라지는 꺼지지 않는 🔥 구덩이에 던져질 것이다.
• 집주인의 전략
1. 가만 두어라
'그대로 가만 두고 지켜보도록 하라'는 의미로서, 이는 바로 이 세상의 악의 세력들에 대한 주님의 지혜롭고 여유있는 태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가 악을 그대로 방치하거나 악의 근절(根絶)을 아예 포기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의 악행을 허락하시는 경우는 하나님의 은혜가 일층 더해지기 위한 도구로 사단이 이용되는 때 뿐이다(욥 2:4-7; 눅 13:16).
이유는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곡식 하나하나에 대한 애정과 염려 때문에 주님께서는 악을 멸하시지 않고 있다. 가라지는 보통 곡식보다 더 강한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리지를 뽑을 때는 종종 어리고 약한 곡식이 함께 뽑힌다. 따라서 곡식에 대한 주인의 관심이 가라지에 대한 관심에서 생겨난 종들의 열의 보다 우선적인 것이다.
2. 함께 자라게 두어라
여기서 '두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테' 는 '완전히 포기하여 버린 상태대로 방치하라'는 뜻이다. 이 말은 결국 집 주인의 주권적 명령으로서 '내가 그대로 자라게 내버려두기로 결정했으니 너희들은 관여치 말라. 너희들의 소관(所關)이 아니다'라는 의미를 함축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이 비유는 로마 제국의 여러 황제들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아 수 많은 순교자와 배교자를 낼 수밖에 없었던 초대 기독교회의 현실에서 자주 인용되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대박해때 어쩔 수 없이 배교(背敎)를 했던 많은 사람들이 박해가 끝나자(A.D. 4C경) 다시 교회로 돌아오고자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들의 행동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용서하고 다시 교회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도나티스트파) 한 번 배교하여 파문(破門)을 당한 사람은 영원히 교회에 들어올 수 없는 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갈등이 점차 심하여지자 성(聖) 어거스틴(Augustine)은 말하기를 '교회는 완전히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들만이 모이는 완벽한 곳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치 못한 자들을 함부로 제거해서 교회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실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을(16:17, 18)토대로 하여 세워진 하나의 거룩한 몸이다. 그런데 세상의 교회는 절대 완전한 천국 상태에 있다기 보다는 세상 끝날까지 알곡과 가라지, 즉 의인과 악인의 복합체(複合體)의 상태로 존속(存續)할 것이다.
• 세상 끝에 일어날 가라지의 운명
1.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결실기에 이르게 되면 가라지는 알곡과 확연히 구별된다. 이로써 추수 일꾼은 손쉽게 가라지를 수거(收去)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알곡보다 먼저 가라지를 거두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알곡이 가라지보다 많이 수확되었음을 의미한다. 그와 더불어 가라지를 단으로 묶는다고 하는 표현은 가라지의 숫자도 꽤 많은 것임을 암시한다. 또한 일상적인 추수 방법, 즉 알곡을 먼저 단으로 묶어 곳간에 들인 다음 쭉정이는 한 곳에 모아서 불사르는 것과는 달리 가라지를 먼저 추수하는 독특한 방식은 재림하신 예수께서 그의 대적 마귀의 우두머리를 먼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 처넣기 위에 결박하는 것으로부터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신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실로 하나님의 나라는 죄악이 완전히 도말되는 것으로부터 완성될 것이다.
2. 알곡은 내 곳간(ἀποθήκη, 아포테케)에 두어라
'위'를 가리키는 말인 '아포(ἀπο)'와 '두다', '쌓다'의 뜻인 '티데미(τίθημι)'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말로서 물건을 넣어두는 창고나 곡식을 쌓아두는 곳간을 가리킨다. 이는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와 함께 거하실 안전한 처소, 곧 하늘에 예비해 두신 하나님의 집으로 의인(義認)된 성도들만이 들어가기를 허락받는 곳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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