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누가복음 10장 38~42절) 김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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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 본문은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누이들인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입니다. 베다니 라는 동네는 예루살렘 외곽에 위치하고 있으며 감람산(올리브산) 동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참고로 감람산의 서쪽에는 겟세마네 동산이 있습니다.
나사로의 집은 예수님이 사역 하시는 동안 중요한 거처였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이 머무르실 때마다 정성껏 모셨고 숙소와 음식을 제공하는 등 예수님의 사역에 큰 도움을 돕는 동역자로 봉사하였습니다.
우리가 마르다 마리아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면, 마르다는 제 할 일만 열심히 한 사람이고, 마르다는 일 보다 말씀 듣기를 사모했던 사람 이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 속에서 이런 겉보기 현상이나 이미 확정된 사실처럼 되어 있는 두 사람의 상황을 좀더 깊게 보면서 본문에 담긴 속내들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8절을 읽어 드립니다.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아멘.
예수님이 길을 가시는 중에 마르다가 자기 집으로 에수님을 영접했다는 단순한 문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마르다 두 명에게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함께 있었겠지만 예수님 한 분만 영접 된 것처럼 언급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도 나사로와 마리아는 없고 마르다 한 명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한 여자 마르다가 독대한 것처럼 기록한 것은 매우 다분한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왜 이렇게 두 사람만 두드러지게 부각 되게 기록을 했을까요?
예수님은 원래 이야기의 주인공 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이름이 들어간 것이고, 마르다를 단독으로 내세운 것은 그녀가 누구보다도 마음과 정성과 열심을 다해 예수님의 사역을 돕는 위치에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그녀가 예수님과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성경 장면을 보면 답이 명확하게 나옵니다. 한 곳은 요한 복음 11장 인데 여기에서는 죽은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를 살리시는 기적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요 11:5) 아멘
오빠인 나사로가 첫째 이고, 마르다는 둘째, 마리아가 막내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 사람을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마르다가 첫 번째로 이름이 나오고, 마리아는 이름 대신에 그 동생 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나사로는 이름은 나오지만 오빠이고 남자였음에도 마지막에 이름이 나옵니다.
이러한 특이한 이름 순서 표기 방식을 보거나, 누구는 실명으로, 누구는 익명으로 기록한 것도 다분히 마르다를 부각 시키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름을 기록하는 순서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구약에서 아브라함의 족보를 언급 할 때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순서는 형제들의 나이 순서가 아닙니다. 나중의 여러 가지 기록과 정황들을 살펴 보면 하란이 장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브람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앞에 나온 겁니다.
노아의 세 아들의 경우에서도 셈과 함과 야벳으로 되어 있는데, 뒤의 기록 된내용을 살펴 보면 야벳이 셈보다 먼저 출생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 셋 중에 누가 장자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름 순서의 앞에 나오는 것은 중요한 인물, 주인공이기 때문임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고린도와 에베소에서 바울을 돕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있는데, 브리스길라가 여성이면서도 당시의 관습상 파격적으로 남자인 아굴라보다 먼저 언급되었습니다. 브리스길라가 더 중심적으로 바울의 사역을 도왔던 여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 마리아, 마르다를 다 사랑하셨지만, 왜 이름 순서의 앞에 마르다가 오게 했는지 추적해 보기 위하여 요한복음 11장 20절을 보겠습니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아멘.
죽은 나사로를 살려 주시려고 오시는 예수님을 누가 맞이하러 갔습니까? 마르다입니다. 그런데 나가서 예수님을 맞이한 마르다와는 대비 되게 마리아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집에 앉아 있었어요. 마르다와 마리아를 아주 대조적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마르다는 오빠 나사로를 살려 주시러 오실 때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집으로 영접하러 맞이하러 달려 나간 상황이나 어느 때 이든지 예수님이 오신다고 하면 맞이하러 나가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런 일상이었습니다. 맞이하러 가는 것 자체가 습관이고 그녀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이 오빠와 동생 보다 맨 앞에 나올만 하지 않습니까?
더 결정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요한 복음 11장 27절입니다.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아멘.
이 말은 “부활과 영생을 네가 믿느냐”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마르다의 대답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보다 훨씬 앞선 신앙고백이 여성의 입에서 나온 겁니다. 왜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 세 명을 언급하면서 마르다가 앞서 나왔는지 이 장면만 보아도 충분히 납득이 됩니다.
물론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다시 흔들리는 연약함 믿음을 보인 마르다였지만(베드로도 신앙 고백후 세 번 부인), 예수님이 보시기에 마르다는 언제나 자기를 기쁘게 영접하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특별한 사랑의 대상 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렇게 마르다의 열심과 믿음이 있었기에 오늘 본문 장면에서도 마르다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단독 장면에 등장한 겁니다. 마르다가 마리아에 비해 믿음이 적기 때문이라는 편견은 잘못된 고정관념이라는 사실을 아셨을 겁니다.
영접하는 것, 맞이 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가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와 같이 예수님을 영접하는데 가장 먼저 열심을 내는 사람을 사랑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영접하는 것이 늘 습관이 되고 가장 기쁜 일이 되는 사람의 이름을 가장 먼저 불러 주십니다.
우리 모두가 마르다와 같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이 늘 기쁘고 습관이 되셔서 매일 같이 하나님 나라가 일상에서 경험되는 심령 천국의 일상으로 살아가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의 집에 들어간 이후의 상황이 이어집니다. 39, 40절을 읽어 드립니다.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아멘.
38절 집 밖에서는 영접하는 사람인 마르다에게 초점이 맞추어졌다면,39절 집 안 실내에서는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라고 시작합니다. 마르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가 마리에게로 초점이 바뀌었습니다.
마리아는 주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마르다는 대접해 드릴 음식 준비하느라 마음이 분주합니다. 정적인 마리아와 동적인 마르다, 말씀 듣기를 선택한 마리아와 음식을 맛있게 준비하여 대접하는 일을 선택한 마르다, 두 사람의 대비된 모습이 나옵니다.
제가 마르다를 옹호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본문을 보시면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그 일행들에게 음식을 드시게 하려면 많은 양이 필요했을 겁니다. 그들은 걸어서 왔기 때문에 피곤하고 배가 고픈 상황이어서 빨리 음식을 해서 드시게 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 였습니다.
아마도 손님을 초청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음식 대접 준비하는 일이 가장 우선 이었을 겁니다. 밥하랴, 국하랴, 반찬하랴, 나물 무치랴, 고기 삶으랴, 음식 세팅 하랴,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어서 마르다는 마음이 분주 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동생인 마리아는 너무나 태평스럽게 예수님 앞에서 앉아 있기만 하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몇 마디 나누다가 주방으로 오겠지 했는데 계속 앉아 있습니다. 눈치를 주었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바쁜 언니를 외면하고 모른체 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면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올 법 합니다. 이야기 나누는 것은 밥 먹고 해도 되는데 언니가 이토록 바쁜 것을 뻔히 보면서도 저렇게 여우짓만 하고 있나 라고 생각하며 마르다는 인내의 한계가 왔습니다. 우리 모두도 저런 상황이었으면 울그락 불그락 하면서 싫은 소리로 쏘아 댔을 겁니다.
마르다는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합니다.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마르다는 마리아에게 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해서 원망을 쏟아냈습니다.
성경은 참 점잖게 표현 했지만 현장 언어로 재생해 보면, “예수님 진짜 너무 하시네요, 저 혼자 음식준비하느라 정신 없는 것 뻔히 다 보고서도 애 붙들어 놓고 지금 뭐하시는거예요, 혼자 막 이렇게 일하게 내버려 두게 하는게 애 한테 잘하는 일은 아니잖아요, 빨리 애 한테 언니 도와주라고 말씀해 주세요, 아셨죠” 이런식으로 말했을 것이기에 예수님도 당황 하셨을 겁니다.
“어우 짜증나, 어우 신경질 나, 어우 내가 미쳐 버리겠어” 이런 직접적인 표현을 안 했을 지라도 마르다가 예수님에게 직접 따지듯이 한 이 말은 굉장히 도전적이고 거친 어투로 말했을 것이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
우리 같은 보통의 사람이라면 다 이정도의 반응은 했을 겁니다. 그것도 남도 아닌 동생이 저러고 있었다면 더 직선적이고 강하게 이야기 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방금 전 마르다가 밖으로 나가서 예수님을 홀로 영접한 상황과는 사뭇 다른 냉랭한 장면이 연출 되었습니다.
대개는 예수님에게 항의한 이 장면을 보고 마르다의 잘못된 반응, 그리고 말씀을 선택하지 않은 부정적인 견해를 이야기 합니다. 자, 이야기의 결론을 보겠습니다. 마르다의 항의성 발언에 예수님이 말씀 하십니다. 41, 42절을 읽어 드립니다.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아멘.
예수님은 “마르다야 마르다야” 두 번이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이두 번의 이름을 부른 다는 것은 심히 사랑하고 계시다는 애정 표현이자 안타까운 동정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이름을 두 번 씩 부른 경우가 또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다”(눅 22:31) 라고 하신 것과, 바울을 향하여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 라고 이름을 두 번 반복하셨습니다.
시몬(베드로)에게는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고 보호해 주시기 위해서이고, 사울에게는 잘못된 행동을 바로 잡아 주시려고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긍휼함과 훈계의 이 두 가지 마음으로 마르다를 두 번 부른 겁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진단에 의하면 지금 마르다가 원망하는 원인은 사람에 대한 미움이 아닙니다. 일이 많아서, 일이 몰려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가 겪고 있는 불안과 부담감에 대한 해법으로 한 가지만 해도 족하다 라고 간단 명료하게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향한 헌신과 열심을 낼 때 몸에 무리가 가고 마음이 분주하여 짜증이 날 정도의 분량을 할 필요가 없이 단 하나만 제대로 한다고 하여도 예수님은 충분히 기뻐하시고 칭찬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르다가 식사 준비를 선택한 것이 잘못되었다거나, 마리아의 원망이 못되 먹은 버릇 없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과주의에 매몰되거나, 목표지향적인 열심이 가져다 주는 과부하를 제거해 주시려는 해법을 주신 겁니다.
우리가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너무 열심이 지나치면 오류가 생기고 버그(bug, 오류 및 오작동)가 작동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몸과 마음을 망가트리면서까지 헌신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평안하고 여유롭고 기쁨을 만끽하며 즐거움 속에서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단순하고 가볍고 거뜬히 소화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해서 하면 됩니다. 잔꾀 부리지 않고 작은 일에 열심을 낼 때 우리 주님은 그 일을 가장 잘했다고 칭찬해 주실 겁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분주한 마음을 진정시켜 주시고 그에게 평안과 여유로움을 주시고 싶어 하셨던 겁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마르다가 원망하고 있을 동생 마리아의 행동에 대해서 말씀 하시기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말씀 하십니다. 이 좋은 편 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발치 아래서 말씀을 듣는 선택을 한 것을 말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먼저 선택하고, 예수님만 최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어느 누구에게도 양보하거나 빼앗기지 않겠다는 선택을 1번으로 한 것이고, 마르다는 그것을 2번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마르다가 매 번 이렇게 2번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먼저 뛰어나가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좋은 선택, 빼앗기지 아니하는 선택을 하기도 했습니다. 단지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리아는 말씀을 듣는 것을 선택했기에 옳고, 마르다는 일만 생각했기에 잘못 선택했다는 식의 해석은 무리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이셨기에 배가 고프셨을 겁니다. 마르다가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여 예수님을 잘 대접해 주려는 그의 열심과 순수한 마음도 이미 다 받으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라고 마르다를 두 번 부르셨을 때 이미 예수님은 마르다의 속상한 마음을 받으시고, 네가 예전에 나를 영접하는 좋은 선택을 했던 것처럼, 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던 좋은 선택을 했던 순간 처럼, 언제 어떤 상황에서나 나를 만나고, 나와 대화 하고, 내 손을 잡는 선택을 계속 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속마음을 보여 주신 겁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어느 누구에게도 예수님 자신이 빼앗김 당하거나, 양보되거나, 포기 되거나, 나중에 선택 되는 후 순위가 되시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질투하시는 마음으로 항상 자신을 선택 해 줄 것을 요구하고 당부하는 말씀으로 “이 좋은 편을 택하였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라고 강조 하신 겁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의 다음 장면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상생해 보십시오. 마리아는 계속 앉아 있고 마르다는 또 다시 일하러 갔을까요? 아니면 마리아가 미안한 마음에 자기도 일어나 언니를 도와 주러 갔을까요? 아니면 마르다가 음식 만드는 것을 중단하고 마리아와 같이 예수님 발치에 앉았을까요? 무엇이든지 상상이 가능 합니다.
저는 마리아가 언니를 도와서 맛잇게 식사를 준비 하고 식사 후에 언니와 동생이 사이 좋게 예수님 발치 아래에 앉아서 빼앗기지 아니하는 영적 양식을 충만하게 얻었을 것으로 상상해 보았습니다. 이렇게 되었다면 모두에게 해피엔딩의 결말이죠.
어쨌든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를 둘다 사랑하셨기 때문에 서로가 민망하거나 미움의 감정이 남는 상황이 없이 그 자리에서 해결 되도록 해 주셨을 겁니다. 우리가 언제나 좋은 선택을 하기란 어렵겠지만, 내가 이 상황, 이 순간에서도 예수님을 선택하지 않는 바보 같은 행동을 했구나 라는 깨우침의 감각은 있어야 하겠습니다.
바쁘기 때문에 예수님을 선택할 시간이 없다, 중요한 일 때문에 이것부터 해 놓고 예수님은 다음에 선택 해야 한다, 분주한 마음 때문에 예수님을 선택할 틈이 없다라는 말들은 다 이유가 안 됩니다. 마리아는 그런 상황이 눈 앞에 있음에도 예수님 발치에 앉았고, 마리아는 그 상황에 휩쓸려서 예수님을 일 순위로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삶도 바쁘게 돌아 갑니다. 하루 지나면 몸과 마음이 녹초가 됩니다. 기도 하고, 찬양 하고, 감사하고, 말씀 읽고, 이런 신앙의 기본을 지켜 가면서 예수님 발치 아래 앉는 선택을 하기는 갈수록 어려워 집니다.
사실은 거의 선택의 고민을 하지 않거나, 이래 저래 못하는 상황이 반복 되다 보니, 이제는 좋은 것을 선택하여 빼앗 기지 아니하는 평안과 위로를 받아야 겠다는 마음조차 식어 버렸습니다. 선택 안하고 나만의 자유로움으로 지내는 것이 일상이 되어서, 내가 마리아 인지, 마르다 인지 생각해 보는 것조차 귀찮기만 합니다.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마리아는 고사하고 우선 마르다처럼 만이라도 하자, 적어도 마르다는 예수님을 위하여 열심과 헌신의 마음을 꺾지 않고 꾸준히 이 일 저 일을 앞장서서 했으니, 나도 우선 저 만치라도 꾸준히 해 보자, 그러면 예수님 발치 아래 앉아 있는 마리아가 보일 터이니, 나도 그 곳에 앉기를 선택하는 흉내라도 한 번 내보자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마리아의 선택 이거나 혹은 마르다의 선택 이라면 성공한 겁니다. 이도 저도 아니다 라고 생각되시면 이 두사람의 선택과 행동 범위 안에는 반드시 들어가야 합니다.
선택은 우리가 하지만 예수님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시면서 선택 받을 준비를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꼭 기억 하십시오. 예수님은 매 순간 선택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너는, “이 좋은 편을 선택했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들려지는 은혜와 사랑의 말씀으로 매일 같이 삶의 자리에서 우리 마음 깊이 들려 질 수 있기를, 그리하여 매일 같이 빼앗기지 아니하는 좋은 선택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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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마르다와 같이 열심으로 헌신하며, 마리아와 같이 예수님 곁에 머무는 선택을 할 수 있는 마음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옵소서. 빼앗기지 아니하는 믿음과 은혜를 간직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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