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시50:16-23)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열려라 에바다 2023. 11. 14. 09:50

50편 16절-23절: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도적을 본즉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며 네 입을 악에게 주고 네 혀로 궤사를 지으며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미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시는도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22절: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종교행사도 성대히 했고, 아침저녁으로 성경구절을 암송하며 살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린다고 하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이렇게 말을 한다면 그들의 입장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로 들릴 거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파 교인들은 표면적 액면적으로는 성경대로 종교생활을 다 잘 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저주를 했다. 그러면 표면적 액면적으로 종교생활을 잘 했는데도 저주를 받았다면 그들이 종교생활을 잘 못했다는 말이냐, 마음을 뜯어고치는 신앙생활을 잘 못했다는 말이냐? 신앙생활 믿음생활을 잘 못했다는 거다.

 

주님께서는 “말세에 세상에서 ‘믿는 자’를 보겠느냐?”가 아니라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셨다. 믿는 자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과 똑같은 믿음을 가진 자가 없다는 말이다. 보기 드물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표면적 액면적으로 눈에 보이는 면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며 종교적인 활동을 힘써서 애써서 열심히 할지라도 하나님의 본질에서 떠난 신앙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우리가 용어로 붙인다면 ‘신념적 신앙’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닌 인간의 뿌리로부터 나오는 열심이요 이성적인 신앙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신의적 믿음’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내가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것. 자꾸 알아가고 써먹고, 알아가고 써먹고 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게 ‘신의적 신앙’이다. 하나님의 뜻이란 한 마디로 자기 고치는 거다.

 

지금 다 말세라고 하는데, 지금은 예수님 당시 때보다도, 100년 전보다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 말세가 될수록 이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하나님을 잊어버렸다고 말하는 교인이나 인도자는 없을 거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며 ‘키우자. 키우자. 덩어리 부피 키우자. 합치자. 모두가 하나가 되어 사랑하자’ 라고 하고 있는데, 이런 오늘날의 교인들에게 하나님을 잊어버렸다고 한다면 이건 말이 안 되는 거다.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을 부르며 살았는데 하나님을 잊어버렸다는 게 무슨 뜻이냐? 기독교인들이 종교생활 종교활동은 열심히 부지런히 많이 한다. 갈수록 그 활동의 부피가 커진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다는 거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뭐냐? 종교생활을 많이 크게 하는 거냐, 아니면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거냐?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거다. 예수님의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을 내가 가지는 것이 참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들고 생명과를 따먹으라고 하는 것은 하늘나라의 질과 똑같은 사람으로 만들어서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려는 것으로, 이것이 인간창조의 목적이다. 모든 인간들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로 오늘날까지 안 믿는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것에 소원 목적을 두고 살아가고 있다. 세상 속화된 기독교인들은 외모 모양, 부피적으로 건물 키우고 사람 끌어 모으는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보암직 먹음직 탐스러운 것을 추구하고 목적하는 것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과 똑같다.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입고 닮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거다.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인 하나님의 성품을 잘 입어가는 일이 잘 되도록 움직여 나가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는 목사님이나 교파나 교인들은 기본구원만 붙잡고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눈에 보이는 종교적 사업과 업적을 크게 이루고자 한다. 그리고 이 기본구원의 감사만 알다 보니 다른 사람의 기본구원을 위해 열심을 내게 되는데, 문제는 기본구원의 바탕을 자기가 깔려고 한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 이미 깔아 주었는데도 자기가 자꾸 깔려고 한다. 그러니 이건 기본구원도 제대로 모른다는 말이 된다.

 

또한 기본구원만 아는 사람은 행동이나 활동적으로 나가게 되는데, 기독교인들만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세상사람들을 위해 세상 밑에 들어가서 소금노릇을 한다고 열심히 종교적 활동을 한다.

 

그러면 이게 어째서 소금노릇이냐? 자기가 복음으로 절여지지를 않았는데, 자기의 소원이나 목적이나 지혜나 지식이나 모든 사고방식이나 이해타산이나 평가나 판단하는 것이 예수님처럼 되어있지를 않는데 어떻게 소금노릇이 되는 거냐? 먼저 소금으로 되는 것이 없으면서, 즉 예수님의 것으로 절여진 것이 없으면서 종교적인 행동 활동을 열심히 하면 소금노릇이 되는 거냐? 믿는 사람은 이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기본구원이 바탕으로 깔려있으니 그 위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기를 잘 건설해 나가야 한다.

 

자기가 전도를 해서 참 옳은 신앙의 질로 갈 수 있는 교훈을 주고 이끌어서 이 사람이 하나님의 본질에 입각된 정말 세상바람에 안 흔들리는 신앙으로 살아간다면 이 사람을 전도한 사람은 소금노릇을 한 거다. 이건 없이 전도를 한다고 한 게 이상한 교회로 보내서 가정파탄이 되고, 얻어맞고, 심지어 자기 스스로마저 옳은 교훈을 못 받아서 자기 속에 옛사람이 죽지를 않아서 집에 가면 맨날 식구들과 티격태격하며 전쟁을 한다면 전도를 한 보람이 어디 있느냐?

 

온 세상사람들이 각 가정마다 평화를 부르짖는데 왜 평화가 안 되는 거냐?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심술을 부려서 더 평화가 안 되게 하신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세상 끝 날까지 평화가 없다. 성경이 이 말을 하고 있다.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끼리도 평화가 안 된다. 왜 그러냐? 한 하나님 한 예수를 믿는데 왜 평화가 안 되는 거냐? 교인들 각자가 하나님의 본질에 단일성으로 안 되어있기 때문이다. 신앙의 질이 하나님과 단일로 안 되어있다. 그러니 제각각이다.

 

교인들끼리 만이 아니라 개인마다 자기 스스로의 속에서도 분쟁이 일어난다. 그래서 평안하지를 못하다. 옛사람이 주격이 되면 그 마음이 항상 세상 쪽으로 가 있기 때문에 세상은 여러 가지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곳이라서 그 바람을 따라 자기 마음도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니 그 마음이 어떻게 안정이 되겠느냐? 평안이 없다. 각자가 이런 상태로 예수를 믿고 있으니 어떻게 하나가 되겠느냐? 안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질적으로 주님의 의사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자기를 질적으로 하나님의 것으로 바로 잡지를 못하면 자기는 주님과 하나가 안 된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면 너도 나도 주님의 질을 붙잡아야 하나가 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온 교인이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입어야 한다. 이게 하나님의 본질이다.

 

16절-20절: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도적을 본즉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며 네 입을 악에게 주고 네 혀로 궤사를 지으며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미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사는 자가 이런 더러운 짓을 했다는 거다. 그런데 곧 죽어도 그런 짓을 안 했다는 거다. 행동적으로 이런 짓을 안 했을 런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적으로는 다 그런 일을 했다.

 

22절: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하나님의 종이요 성도라면 16절로 20절을 보고 자기의 신앙의 성격과 성질과 성분과 신앙노선을 철저하게 심사 분석을 해야 한다. 종교사업이 문제가 아니라, 일에 대한 물질적 충성봉사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우리를 향하신 영원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 바로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적인 신앙을 가져야 한다.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안 하면,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입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세상을 소원 목적하고 세상을 보고 따라가고, 세상사람의 마음을 사기 위해 세상을 의지하고 부러워하고 돋보면 하나님은 그 자를 찢어버리겠다는 거다.

 

이런 예를 보면 역사적으로 하나님이 말씀을 버리고 이방우상을 섬기던 이스라엘이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다로 찢어졌다. 한 이스라엘인데 남북으로 찢어졌다. 북조는 앗수르에게, 남조는 바벨론에게 먹혔다. 이로 인해 부모형제와 자식들이 갈갈이 찢어지고 흩어져 버렸다.

 

우리나라도 6. 25후에 남북으로 갈라졌는데, 남북으로 갈라지기 전에 기독교 종교계가 싸움이 붙어서 장로교가 통합측과 합동측으로 나눠졌다고 한다. 구원론 때문에 갈라지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 일 후에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진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 주려고 세상 것을 들어서 사용하기도 하신다.

 

노아홍수 이후에 노아의 세 아들 중 셈은 동양계, 함은 아프리카계로 노예생활을 했고, 야벳은 서양계 사람이 되었는데, 야벳계열의 서양사람들은 과학문명이 발달을 해서 함의 후손인 흑인들이 이 서양사람들에게 노예생활을 하기도 했고, 그 후에 서양사람들이 물질적으로 아프리카 사람들을 많이 도움으로서 노아의 입으로 한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이걸 볼 때 물론 하나님께서 각 개인의 구원을 입히는 방편이 다 다르겠지만 전체적인 면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즉 하나님의 백성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대국적인 뜻이 있으니 믿는 사람은 세상만사가 돌아가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눈에 보이는 면을 들고 와서 직접 간접으로 겪게 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신다.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하나님께서 부모형제와 자식들을 갈갈이 찢어버리고 흩어버린다면 거짓되고 악한 자들이 이 일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느냐? 그러니 슬픔과 고통과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볼 때도 온 가족이 말씀으로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이건 찢어지게 되어있는 거다. 자기 마음부터 하나님과 하나가 안 되고 찢어진 상태이니 그 성격 그 성질을 가지고 가족을 대하게 될 것이고, 이러면 그 가정은 찢어질 수밖에 없는 거다.

 

23절: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느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감사에는 제물이 있다. 무슨 제물이냐?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 어떤 제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겠느냐? 이방사람들이 조상에게 제를 올릴 때 상에 뭘 놓느냐? 문어다리나 사과나 배나 나물 등을 올리는 것을 보면 이방신은 먹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다. 이걸 보면 꼭 어린아이들이 소꿉장난하는 것 같다. 요즘은 모형으로 된 과일이나 생선을 올리기도 하는데 이게 뭐하는 짓이냐? 이게 장난이지 이치에 맞는 짓이냐? 왜 예수는 안 믿고 그런 짓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이건 미쳤다고 본다. 왜냐? 이치에 안 맞는 짓을 하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세상은 성령의 눈으로 보면 눈 감았지, 귀 먹었지, 벙어리지, 곱추지, 앉은뱅이지, 여기에 더해 오만 잡귀신적인 것으로 가득 들어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영은 죽어있다. 예수 믿는 자기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라.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 어떤 제물이 가장 값진 것일까? 구약성경에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 어떤 짐승을 드렸느냐? 3년 된 어린 양을 드렸다. 이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으로, 예수님께서는 33동안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에, 절대적인 법에 100% 만족을 드린 의로운 삶을 사심으로서 우리 대신 우리의 제물이 되셨다. 즉 내 몸 대신 당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린 셈이다.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되려면 흠과 티가 있으면 안 된다. 깨끗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 그래서 죄로 더렵혀진 우리 대신 흠과 티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대속의 제물이 되신 거다. 이 은혜를 입은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을 드려야 하는데, 감사가 뭐냐? 상대로부터 뭔가를 받아야 감사가 되는 거다. 안 받았는데, 상대가 나에게 줄 마음도 없는데 상대 앞에 가서 ‘아이고,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 되는 거냐? 감사는 받은 게 있어야 감사가 되는 거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기본구원 기본은혜를 받아서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던 영이 살았다. 하나님의 질과 똑같은 생명으로 살아났다. 예수님이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 영이 살아난 우리는 혹 실수를 해서 죄를 짓는다고 해도 살아난 영은 하나님의 질과 같은 것으로 살아난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래서 믿는 우리가 이 은혜를 기초로 하고 진리의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의 인도대로 생명 길 좁은 길로 걸어가면 이 길은 하나님을 향한 길이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입을 수 있는 성격이고 성질이라서 하나님처럼 온전케 되어져 가는 거다. 이렇게 되면 자기의 성격도 성질도 고쳐지고, 예수 믿기 전의 이 땅을 향한 사고방식이나 이해타산 평가성을 신령천국에 놓고 살게 된다. 이처럼 성도가 하나님처럼 온전케 되고자 하는 소원 목적과 뜻을 가지고 하는 예배의 행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거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면 ‘하나님은 영화롭다. 영화롭다’ 라는 찬송만 하면 되는 거냐? 그 노래를 안 부른다고 할지라도 자기의 모든 사고방식과 뜻이 하나님의 뜻대로만 나간다면, 이렇게 할 때 물론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향해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나간다는 것을 아는 거고, 자기의 마음과 정신이 하나님으로 것으로 바꿔져 가는 것을 아는 거다. 그래서 감사가 나오는 거다.

 

‘내가 나 된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았구나’ 하게 되는 건 참 하나님의 은혜다. 그러면 내가 이런 사람으로 되는 게 내 마음대로 되는 거냐? 하나님의 역사라야 만이, 성령님의 역사라야 만이 되는 거다. 이런 내가 된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니 이에 대한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게 되는 거다. 이런 사람, 이런 생활이 삶의 예배요, 이것이 나로 인해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는 거다. 이러면 내가 하나님을 닮으니 만큼 누가 더 영화로워지는 거냐? 하나님이 영화로워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이러면 또 내가 기쁘고, 내가 기쁘니 하나님도 기쁜 거다.

 

그런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을 자칫 잘못 생각하면 마치 독재자 한 사람의 영광을 위해서 백성들은 고통과 고난을 받아도 좋다는 식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알면 안 된다. ‘하나님에게만 좋으면 나는 고생이 되어도 좋다. 나는 몸이 아파도 좋다’ 이런 게 아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하나님만 좋다면 나는 죽어도 좋다’ 이런 소리를 듣는다면 하나님의 기분이 어떨까? ‘그래, 너는 죽어도 좋다. 나만 좋으면 된다’ 그러시겠느냐, 화를 내시겠느냐? 화를 내시면서 ‘이놈아, 네가 왜 그렇게 생각을 하느냐?’ 라고 하실 거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히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음을 알아야 한다.

 

장OO목사가 테레비에 나와서 ‘예수님인들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며 죽는 것을 원하셨겠느냐? 아프고 고통스러워서 죽기는 싫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죽었다’ 라는 설교를 하던데, 이러면 어떻게 되는 거냐? 이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교인들로 하여금 좀 고통스럽고 하기 싫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거다. 이게 어떻게 들리느냐? 그 분이 말하는 예수님이라면 나 같으면 이 예수를 안 믿겠다.

 

그런 말은 예수님을 타락된 인간 자기와 같은 줄로 알고 하는 말이다. 그런 식으로 말을 하니 예수님께서 죽기 직전에 ‘엘리 엘리 사마 사박다니’ 라고 외친 것이 인간구원의 성업을 완수한 것에 대한 감사와 환호의 외침이 아닌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라고 하는 원망의 소리로 알게 되는 거다. 그러니 이건 예수님을 일반사람만도 못한 분으로 만들어버린 거다.

 

그런 식이라면 33동안 죽도록 복음을 전했음에도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예수 당신을 죽이는 것인데 예수님이 뭐 하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겠느냐? 신령계는 국경이 없는 곳이니 아예 도망을 가버리면 될 게 아니냐?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는 천군천사를 불러서 ‘예수를 잡아와라’ 할 것이니 천국 전체가 난리가 날 거다.

 

그러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신학대학을 안 나왔겠느냐? 박사증이 없겠느냐? 오늘날 기독교가 이 모양이다. 우리가 그런 말을 그냥 부분만 들으면 ‘옳거니’ 하겠지만 성경을 그렇게 보는 것은 근본적으로 선악과를 따먹은 지식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고 나온 소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거다. 성경을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그 신앙사상의 뿌리가 선악과를 따먹고 나온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걸 받아먹게 되면 신앙 믿음이 죽는다. 못 자라난다. 깨닫지 못하고 미련해진다.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이 말씀이 믿어지느냐?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겠다고 하는데, 무엇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행위가 옳게 되겠느냐? 우리는 이것부터 생각을 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려면 자기의 행위가 옳게 나와야 한다. 그러면 무엇으로 행위가 옳게 바르게 나오겠느냐?

 

이 세상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의 행위가 옳게 될 기준이 없다. 세상의 모든 학문과 지식도 사람의 행위가 옳게 되는 기준이 없다. 왜 그런가 하니 모두가 선악과 따먹고 타락된 그 기준적 지식에서 나온 도덕성이요 행동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걸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세상의 그 어떤 훌륭한 인물이라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안 먹은 자는 선악과를 따먹고 나온 지식을 써서 훌륭하게 된 거다.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과는, 천국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 불에 태워버린다. 말씀을 먹고 훌륭하게 된 것이라면 왜 불에 태우시겠느냐?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은 아무리 행위가 옳다고 해도 생명과는 안 따먹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옳은 행위를 하려면 먼저는 예수를 믿고 생명과를 먹어서 사고방식 가치판단 평가성이 하나님의 것으로 바꿔져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행위가 옳다고 인정을 받고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다. 진리이치 도덕이치 생명이치, 즉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밖에 없다.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이 인격과 성품이 하나님의 것으로 닮아지는 거다.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을 성경에서는 ‘구원’이라고 한다. ‘예수 믿어 천국’ 하는 것만 구원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닮아지는 것도 구원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져야 만이 천국을 다스리고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이 되기 때문에 이것을 영능의 실력이라고 하고, 천국은 이 실력을 가지고 누리는 곳으로, 이렇게 누리는 것을 ‘누릴 구원’이라고 한다.

 

구원은 이렇게 다양하고 다각적인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품을 입는 자에게는, 닮는 자에게는 이 모든 구원을 줄 수 있다. 교훈으로 상대방에게 입힐 수 있고, 진리로 사람을 건질 수 있다. 이게 다 구원이다. 한 가지의 구원만 아니라 건지는 구원, 입히는 구원 등등 모든 구원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가는 자에게 일이 잘 되게 만드는 구원도 있을 수 있고, 어려운 사건을 주어서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게 하는 구원도 있을 수 있고, 미련함에서 깨달아지는 구원도 있을 수 있고, 병에서 낫는 구원도 있을 수 있고, 죽음에서 살리는 구원도 있을 수 있고, 가난에서 부자로, 부자에서 가난으로 되는 구원도 있을 수 있는 거다. 가난에서 부자로 되는 것만 구원이 아니라 부자에서 가난으로 되는 것도 구원이다. 이게 왜 구원이냐? 가난에서도 깨닫고 부자에서도 깨달을 수 있는 거다. 즉 깨닫는 게 구원이라 그 말이다. 또 어떤 어려움에서 건지는 구원도 있을 수 있고, 육신의 생명을 죽여서 천국에 데려가는 구원도 있을 수도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닮는 자에게 다양한 뜻을 가진 구원이 있을 수 있는 거다. 구원이라고 할 때 성경에서는 이처럼 다양한 신령한 성질이 들어있는 건데 이걸 무시하고 육신이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것만 생각하면 자기의 구원은 그만큼 축소가 되는 거다.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위를 하는 자에게 무엇을 보여주겠다? 구원을 보여주겠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를 보여주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역사를 안 보려면? 보기 싫으면? 자기 행위를 아무렇게나 하면 된다. 이러면 부정적인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게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