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말씀

우정

열려라 에바다 2023. 11. 16. 13:40
우정
 
욥기 12:1~25
‘성공은 친구를 만들고 고난은 친구를 시험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을 통하여 진정한 친구가 누구인지 알 수있는 기회를 만났습니다. 욥의 고통을 전해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친구가 셋이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욥은 자신에게 좋은 친구가 부재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욥이 훗날 부귀영화가 회복되었을 때 그가 느꼈을 친구의 부재는 삶을 서늘하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는 우정을 먼저 회복시켜 주셨습니다(42:7~10). 재산과 자존감의 회복보다 우정이 먼저라는 사실이 놀랍고 여간 반갑지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곤 너희밖에 없는 것 같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너희와 함께 사라질 것 같구나. 그러나 나도 너희만큼은 알고 있다. 내가 너희보다 못할 것이 없다. 너희가 한 말을 모를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12:2~3) 소발의 말이 끝나자 마치 저항이라도 하듯 욥은 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재산과 자녀를 잃고 건강마저 잃은 욥은 이제 우정마저 잃을 지경에 처했습니다. 그렇기에 욥의 말은 더 격앙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통을 당해 보지 않은 너희가 불행한 내 처지를 비웃고 있다. 너희는 넘어지려는 사람을 떠민다”(12:5). 친구들의 충고는 욥을 납득시키지 못했습니다. 욥은 친구들의 말을 이해할 수는 있었으나 위로 삼을 수는 없었습니다. 친구들은 욥의 생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욥의 관점과 친구들의 생각에는 소통 불가능한 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발은 하나님을 규범적 지혜에 갇힌 분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가 모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규범적 지혜를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소발은 알 수 없었습니다. 착한 이에게 상을 주며 악한 이에게 벌을 주는 하나님은 또한 악한 이를 형통하게도 하며 의인을 고통에 이르게도 하십니다. 그것은 맹목적이거나 우연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인간이 이해하기에 한계를 느끼는 어떤 뜻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누가 자기 능력보다 큰 대접과 지위에 이른다면 그 의미를 반드시 따져 보아야 합니다. 착하고 의롭게 살았는데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다면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욥이 궁금해하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나를 죄인 취급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로 나 같은 자와 다투시는지 알려 주십시오”(10:2) 묻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친구 사귀는 일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치기 어린 시절에는 오다가다 만나 인연과 뜻이 닿으면 깊은 생각 없이 친구가 되었지만, 이제는 새 친구를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쩌다 가까워진 사람들 가운데에 흠모할 만하고 귀감 될듯하여 곁을 주었다가 내심 실망하기도 합니다. 지식은 쌓았으나 겸양이 없고, 명예는 가졌으나 진심을 알 길 없고, 아는 척하는 만큼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자기주장은 강하면서도 처지가 다른 이를 이해하는 일에 젬병일 때는 많이 아쉽습니다. 새로운 친구를 만날 기회도 없지만 더러 있어도 스스로 조심합니다. 나 역시 그에게 그처럼 비칠 것이 뻔하니 누굴 타박하기도 멋쩍습니다. 앞으로 새 친구를 사귀기는 더 어려울 듯합니다. 그저 옛 친구를 보수하며 지내다가 어쩌다 새 친구의 기회가 주어질 때 눈높이를 한껏 낮추어야겠습니다. 그러다가도 허락되는 우정이 있다면 소중히 여기며 감사할 생각입니다.
주님, 재산이나 명예보다 우정을 우선하시며 소중히 여기시는 주님을 오늘 배웁니다. 제게 과분하고도 좋은 친구들을 허락하셔서 감사합니다. 친구에게 좋은 친구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23. 11. 16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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