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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윤복희 (2) 젖니도 안빠진 4살… 조명에 홀려 첫 무대를 밟다

열려라 에바다 2012. 2. 5. 20:22

 

[역경의 열매] 윤복희 (2) 젖니도 안빠진 4살… 조명에 홀려 첫 무대를 밟다


대부분 사람들의 어린 시절 추억에는 고향 마을이나 가족, 친구 등이 등장할 겁니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다릅니다. 내 어릴 때를 추억하면 먼저 무대와 극단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길거리, 떠돌이, 외로움, 배고픔 등이 나옵니다.

저는 1946년 3월 9일 서울 회현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아주 어릴 때의 기억은 두 살인가 세 살 때 어떤 아저씨의 목말을 타고 아버지(윤부길씨)가 만든 뮤지컬을 본 겁니다. ‘부길부길 쇼단’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서울 을지로의 수도극장(후에 스카라극장으로 됐다가 지금은 없어졌음)에서 ‘춤추는 함대’라는 뮤지컬을 올린 겁니다. 아버지가 극을 쓰고 작곡과 연출까지 한 이 뮤지컬은 광복 후 아버지와 엄마가 일본에서 귀국해 만든 첫 작품이면서 한국 최초의 뮤지컬입니다.

나는 젖니도 빠지기 전인 네 살 때부터 무대에 섰습니다. 그것도 ‘천재소녀 윤복희’라는 타이틀로 말입니다. 기네스북에 올라도 되는 게 아닌가 모르겠네요. 아버지 쇼단을 따라 다니다가 우연찮게 그렇게 된 겁니다. 한번은 한창 공연이 진행 중인 무대 옆에서 구경을 하다가 평소 하던 대로 열심히 따라서 춤을 췄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조명이 나를 비추는 겁니다. 나는 조명을 따라 무대 중앙으로 나와 더 열심히 춤을 췄습니다. 객석에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렇게 신이 날 수 없더라고요.

나는 일찌감치 엄마 아버지의 품을 포기했습니다. 두 분은 언제나 무대 위에 계셨습니다. 나를 챙겨 주실 틈이 없었지요. 대신 아버지 쇼단의 아저씨 아줌마들의 귀여움과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참으로 일찍부터 어른들 틈에서 어떻게 굴어야 사랑 받을 수 있는지를 터득했던 것 같습니다.

노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노래를 부르던 어린 시절의 무대는 항상 즐거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칭찬해주고 박수쳐 주는 게 너무 좋았습니다. 게다가 어른들이 하는 탭댄스도 하고 뜻도 모르는 미국 노래들도 불렀지요. 또래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나는 그렇게 지냈습니다. 말 그대로 동가숙 서가식했던 거죠.

이쯤에서 아버지 이야기를 좀 해야겠네요. 솔직히 나는 아버지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위에서 아버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더라고요. 그에 따르면 아버지는 가정과 가족들에게는 엉망이었지만 예술 쪽으로는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코미디 연극 뮤지컬 등에 두루 능했습니다. 극본을 직접 쓰고, 연출하고 출연까지 하신 분이었습니다. 쇼단을 직접 운영하기도 했고요. 많은 사람들은 아버지를 ‘천재’ ‘선구자’ ‘진정한 예술가’ 등으로 설명했습니다. 경성음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 동경음악대학에서 순수음악을 공부했습니다. 해방 전 한국에선 처음으로 ‘견우와 직녀’ ‘콩쥐팥쥐’ 등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습니다. 뮤지컬 영화 ‘안개 낀 서귀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한국전쟁 때에는 군예대를 창설해 ‘지리산의 봄’ ‘동트는 새벽’ 등 반공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는 무대에만 서면 1인 10역의 코미디를 했습니다. 한 마디로 못하는 게 없었습니다. 가히 사람들이 천재라고 할 만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만큼 고단한 인생을 살고 외로움도 컸던 분입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무척 싫어했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다 이해하고 용서하지만요. 오히려 내 인생을 연출하시는 하늘 아버지께서 주신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아버지의 예술적 기질을 많이 물려받았으니까요.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 1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