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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윤복희 (3) 최승희 제자였던 엄마… 서른의 짧은 삶 남기고

열려라 에바다 2012. 2. 5. 20:24

 

[역경의 열매] 윤복희 (3) 최승희 제자였던 엄마… 서른의 짧은 삶 남기고


당초 내 성은 윤씨가 아니었습니다. 하도 교복을 입고 싶어서 고등학교 편입을 위한 서류를 떼다가 내가 아버지 호적에 오르지 못한 딸이란 걸 알았지요. 별 수 없이 엄마의 성씨를 따라 ‘성복희’로 올리고 학교에 갔어요.

엄마와 아버지는 일제시대 일본에서 유학생으로 만났습니다. 한데 아버지는 엄마를 만날 때 이미 결혼한 몸이었습니다. 엄마는 아버지를 총각으로 알았던 모양입니다. 엄마와 아버지는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채 오빠(윤항기 목사)와 나를 낳았습니다.

솔직히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엄마에 대한 기억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엄마는 워낙 내가 어렸을 때 하늘나라로 떠나셨죠. 내가 어른이 된 뒤 명창 김소희 선생님이 엄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선생님은 엄마와 자매처럼 친하게 지냈다고 했습니다.

엄마는 서울에서 성씨 집안 부잣집 막내딸로 태어나 귀하게 자랐지만 기생학교를 다녔습니다. 점쟁이가 엄마의 짧은 수명을 길게 하려면 천한 일을 해야 한다고 해서 외할아버지가 그렇게 했습니다. 엄마는 거기서 창도 배우고 고전 악기도 배웠답니다. 당대 최고의 춤꾼이었던 최승희의 제자로 들어가고 나중에 스승을 따라 일본으로 유학까지 갔습니다. 일본에서 아버지가 사생결단하고 엄마에게 접근했다고 하니 상당히 미인이었던 모양입니다.

엄마의 삶도 참 기구했습니다.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집안과 학력, 외모를 갖고 있으면서도 온갖 고생을 하다 짧은 생을 마감하셨으니까요. 요즘도 엄마 생각을 하면 짠한 마음이 밀려듭니다.

내가 다섯 살이나 여섯 살쯤 됐을 때 같습니다. 어느 날 엄마가 울고 있었습니다. 낙랑악극단의 전국 공연에 따라 나설 때였습니다. 아버지가 아편중독자 수용소로 들어가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악극단에서 선급을 받았던 것입니다. “복희야, 조금만 기다려라. 엄마 금방 돌아올게.” 그렇게 떠난 엄마는 몇 달이 지나도 오지 않았습니다. 엄마가 보고 싶어 매일 눈물짓고 있던 어느 날 우체부 아저씨가 전보를 갖고 왔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강원도 묵호에서 공연을 하다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는 전보였습니다. 나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오빠와 나를 데리고 묵호로 향했습니다. 묵호로 가는 길은 참으로 험난했습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로 곳곳에 길이 끊겼습니다. 나와 아버지, 오빠는 차를 타고 가다 걸어서 가다를 반복하며 며칠을 걸려 묵호까지 갔습니다. 우리가 도착하자 엄마는 이미 땅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여보! 여보, 여보오오…” “엄마! 엄마, 엄마아아아…”

아버지와 오빠는 시뻘건 황토로 덮인 엄마의 무덤 앞에서 통곡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맨손으로 엄마의 무덤을 마구 파헤치셨습니다. 근데 왜일까요?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나는 울지 않았습니다. 엄마를 고생시킨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컸던 것 같습니다. 나는 산판을 이리저리 다니며 들꽃을 한 아름 꺾어와 엄마의 무덤 앞에 놓았습니다.

엄마의 무덤에서 돌아서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어린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습니다. 엄마에게 잘못한 것을 눈물로 갚으려 한다 싶으니 아버지가 더욱 미웠습니다. 잠시 개었던 하늘이 다시 비를 뿌렸습니다. 몇 달 전 지방으로 공연을 떠나며 나를 붙들고 울던 엄마의 눈물처럼 장대비가 쏟아졌습니다. 미끄러운 산길을 내려오면서 엄마의 나이를 생각했습니다. 겨우 서른 살.

세월이 한참 지난 뒤, 나와 오빠는 묵호에 묻힌 엄마의 유골을 수습해 충청도 안골에 있는 아버지 무덤 옆에 묻었습니다. 1993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때는 눈물이 났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희 불쌍한 엄마를 부탁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