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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아브라함)이 살았던 지역들

열려라 에바다 2024. 1. 4. 12:16

 

 

아브람(아브라함)이 살았던 지역들              

 

출처: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tistory.com

 

출처:하나성경

 


※가나안 땅-세겜, 벧엘, 헤브론 / 블레셋 사람의 땅-그랄/ 네게브 지역-브엘세바



1. 우르(<영> Ur; <히> ''우르''-“빛”; 수메르어 ''우림''에서 유래됨)
(→갈대아 우르)

수메르 문화의 중심지. 월신(月神) 난나(Nanna)를 섬기는 많은 신전들이 있었다.
아브람은 북쪽 '밧단 아람'에서 출생했으나(창 24:4, 7), '우르'에서 성장하였다.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창세기 11:28)"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창세기 11:31)"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창세기 15:7)"




2. 밧단 아람(<영> Paddan-Aram, <히> 팟단 아람)

하란과 같은 곳. ‘아람의 평야’라는 뜻으로 유브라데 강 상류 지역을 말한다. 성경에서는 메소포타미아로 지칭되기도 하였는데(창 24:10) 메소포타미아의 북부 지방을 말한다(창 25:20).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그의 종을 보낸 곳이며(창 24:4, 10) 이삭의 아내가 된 리브가가 이곳 출신이다(창 25:20). 야곱이 에서의 복수를 피하기 위해 도망간 곳이기도 하다(창 28:2-7). 또한 이곳에서 그는 레아와 라헬과 결혼하여 자녀들을 낳았다(창 29:1-30:24). 야곱은 이곳에서 라반의 양을 쳤다(창 29:20; 30:25-43).

"이에 종이 그 주인의 낙타 중 열 필을 끌고 떠났는데 곧 그의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나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창세기 24:10)"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창세기 25:20)"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네 외조부 브두엘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네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이삭이 야곱을 보내매 그가 밧단아람으로 가서 라반에게 이르렀으니 라반은 아람 사람 브두엘의 아들이요 야곱과 에서의 어머니 리브가의 오라비더라 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맞이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라 하였고 또 야곱이 부모의 명을 따라 밧단아람으로 갔으며(창 28:2~7)"

"그 모은 바 모든 가축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모은 가축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가려 할새(창세기 31:18)"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창세기 33:18)"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창세기 35:9)"


"레아의 여종 실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창세기 35:26)"


"이들은 레아가 밧단아람에서 야곱에게 난 자손들이라 그 딸 디나를 합하여 남자와 여자가 삼십삼 명이며(창세기 46:15)"




3. 하란(<영>haran; <히> '하란' - '산이 많은')

밧닷아람과 같은 곳. '길'이란 뜻. 북 메소포타미아에 있던 고대의 도시이다(창 11:31-32; 12:4-5; 왕하 19:12; 사 37:12). 유프라테스 강의 북쪽 지류인 발릭(Balik) 강 유역에 위치했으며 니느웨와 바벨론은 물론, 다메섹과 두로와 애굽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의 중심지였고, 메소포타미아의 다른 도시들과 애굽과 소아시아를 연결하는 중요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무역이 성행했다(겔 27:23). 이곳은 고대의 우상 월신의 숭배지로도 유명하다. 데라와 아브라함 일가는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이곳에 머물렀다가(창 11:31; 12:4)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얻은 모든 소유물과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창 12:5). 이때 나홀의 가족은 하란 땅에 남았던 것으로 보이며(창 24:10, 24; 28:5, 10; 29:5) 형 에서를 피해 집을 떠났던 야곱은 하란에 있는 나홀의 손자 라반의 집에서 머물렀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창세기 11:31)"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창세기 11:32)"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창세기 12:4)"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창세기 12:5)"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창세기 27:43)"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창세기 28:10)"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형제여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하란에서 왔노라(창세기 29:4)"


"내 조상들이 멸하신 여러 민족 곧 고산과 하란과 레셉과 들라살에 있는 에덴 족속을 그 나라들의 신들이 건졌느냐(열왕기하 19:12)"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사도행전 7:2)"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사도행전 7:4)"




4. 가나안 땅(가나안 <영> Canaan; <히> '케나안' - '법률, 평평한 땅' )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창 12:5)"

가나안 족속들이 거주하던 곳.
B.C. 14·13 세기 애굽 문서에 의하면 가나안의 남쪽 경계는 실레(Sile)로부터 가사에 이르는 군사로, 곧 와디 엘 아리쉬(애굽 시내)가 그 경계가 된다. 이 경계는 수 15:1-4에 의하면 사해 남동 해변까지 연장되어 있다. 민 34:1-12과 겔 47:15-20; 48:1-28에서 설명하고 있는 그 경계에 의하면, 가나안 족속의 영토가 서쪽으로는 지중해, 북쪽으로는 멀리 아무르(Amurru) 왕국 곧 하맛 어귀까지 그 접경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하살에난에서 바산 산까지, 서쪽으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요단강을 따라 사해에 이르는 곳까지 그 경계가 된다.
[출처: 아가페 성경사전]




5. 세겜( <영> Shechem, <히> '쉐켐' - 어깨, 목)-가나안 땅

아브람이 가나안에 들어와 처음으로 머무른 곳. 예루살렘 북쪽 65km에 위치한다. 발산과 그리심산 사이의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한, 가나안 족속과 이스라엘 자손의 한 성읍이다. 이곳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함께 모여 언약 의식을 행한 장소이다(수 24장).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들의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선지라(여호수아 24:1)"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도착한 후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서 여호와를 위한 단을 쌓았다(창 12:6-7).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창세기 12:6)"

야곱은 밧딘아람에서 돌아온 후 이곳에 그의 장막을 치고 세겜 사람으로부터 토지 일부를 구매하였다(33:18-19).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그도 또한 세점에 단을 쌓았다(20절).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그들의 성읍 문에 이르러 그들의 성읍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창세기 34:18~20)"

또한 이곳에서 야곱의 딸 디나가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을 당했는데 그녀의 오빠 시므온과 레위가 복수를 행하였다(34장).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의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창세기 34:2)"
"세겜의 아버지 하몰은 야곱에게 말하러 왔으며(창세기 34:6)"
"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자가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의 말을 듣고 성문으로 출입하는 그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으니라(창세기 34:24)"
"칼로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오고(창세기 34:26)"

야곱은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그의 아내들이 간직하고 있던 가정 우상들을 묻었다(35: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창세기 35:4)"

요셉의 뼈는 야곱이 하몰로부터 구매한 바로 그 땅에 묻혔다(수 24:32, 참조. 행 7:16).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여호수아 24:32)"

여호수아는 세겜에 서행한 언약 의식 중 일부로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큰 돌 하나를 세웠다(수 24:26).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가져다가 거기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세우고(수 24:26)"

므낫세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의 영토경계에 인접한 세겜은(수 17:7) 레위지파의 성읍인 동시에 도피성이 되었다(20:7, 21:21).
"므낫세의 경계는 아셀에서부터 세겜 앞 믹므닷까지이며 그 오른쪽으로 가서 엔답부아 주민의 경계에 이르나니(여호수아 17:7)"
“이에 그들이 납달리의 산지 갈릴리 게데스와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과 유다 산지의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과(여호수아 20:7)”

바알브릿(엘브릿)의 신전은 세겜에 서 있었다(삿 9:4, 46).
기드온이 죽은 이후에 세겜의 주민들은 이 신전의 보고에서 은 70개를 꺼내어 그의 아들 아비멜렉에게 주고, 그를 왕으로 삼았다(4절).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 아비멜렉이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자기를 따르게 하고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으되 다만 여룹바알의 막내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 세겜의 모든 사람과 밀로 모든 족속이 모여서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니라(삿 9:4~6)”

그런데 그들이 아비멜렉의 통치에 반기를 들자, 그는 이 성읍을 파괴해 버렸다(45절).
이때에 세겜 망대(히. '미그달-쉐켐')-아마도 성읍 외곽의 한 요새(6, 20절에 나오는 벧밀로와 같은 곳으로 추정 됨)인 것 같다-의 거민들은 신전으로 피신했으며, 아비멜렉은 이곳을 불질러 버렸다(46-49절).
“아비멜렉이 그 날 종일토록 그 성을 쳐서 마침내는 점령하고 거기 있는 백성을 죽이며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니라 세겜 망대의 모든 사람들이 이를 듣고 엘브릿 신전의 보루로 들어갔더니 세겜 망대의 모든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비멜렉에게 알려지매 아비멜렉 및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살몬 산에 오르고 아비멜렉이 손에 도끼를 들고 나뭇가지를 찍어 그것을 들어올려 자기 어깨에 메고 그와 함께 있는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내가 행하는 것을 보나니 빨리 나와 같이 행하라 하니 모든 백성들도 각각 나뭇가지를 찍어서 아비멜렉을 따라 보루 위에 놓고 그것들이 얹혀 있는 보루에 불을 놓으매 세겜 망대에 있는 사람들이 다 죽었으니 남녀가 약 천 명이었더라(삿 9:45~49)“

솔로몬이 죽은 이후에, 르호보암은 세점에서 거행된 즉위식에서 회유적인 제스처를 씀으로써 북쪽 지파들이 돌아와 유다 지파와 연합하기를 희망하였다(왕상 12장, 대하 10장).
“르호보암이 세겜으로 갔으니 이는 온 이스라엘이 그를 왕으로 삼고자 하여 세겜에 이르렀음이더라(열왕기상 12:1)”

그러나 북쪽 지파들은 그를 떠나 여로보암 1세를 왕으로 삼았으며, 세겜을 첫 번째 수도로 건설하였다(왕상 12:20, 25).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열왕기상 12:25)”

이 도시는 북왕국의 수도가 디르사로 옮겨진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 지방의 중심지로 존속하였다. 세겜은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파괴되었다. 세겜에서 온 순례객들은 바벨론 총독 그다랴를 살해한 사람들에 의해, 또한 미스바에서 살해당한 사람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렘 41:5).
“그 때에 사람 팔십 명이 자기들의 수염을 깎고 옷을 찢고 몸에 상처를 내고 손에 소제물과 유향을 가지고 세겜과 실로와 사마리아로부터 와서 여호와의 성전으로 나아가려 한지라(예레미야 41:5)”

이 성읍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에스라와 느헤미야 공동체와 관련해서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세겜의 위치는 오늘날의 나블루스(Nablus)에서 동쪽으로 1km 지점에 있는 '텔발라타'이다. 이 지역에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에서 청동기로 넘어가는 시대(B.C. 3600년경 )에 몇 군데 조그만 촌락이 생기면서부터였다. 청동기시대 중기(B.C. 1900-1540), 특히 애굽의 힉소스(Hyksos) 왕조 시대에 세겜은 중요한 도시 국가가 되었다. B.C. 16세기에 이 지역은 무참하게 파괴되었다가. B.C. 14세기까지 중요한 도시 국가로 재부상하였다. B.C. 1125년경에 이 도시는 재차 파괴되었으며-아마도 아비멜렉에 의해서 (삿 9장) -1세기 또는 그 이후에 겨우 재건되었다가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다. 헬라 시대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세겜을 복구하고, 그리심 산에 사마리아 신전을 세웠다. 하지만 B.C. 107년에 히르카누스가 세겜을 완전하게 초토화 시킨 이후에 이 지역은 완전히 버려졌다. 세겜에 대한 발굴 과정에서 몇몇 신전이 발견되었다. 가장 초기의 것은 마당 성소(courtyard sanctuary)들인데, 이것들은 창세기에서 언급된 것과 같이 어떤 나무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후에 이것은 거대하고 견고한 신전으로 대체되었는데, 어떤 기간에는 여호수아가 세운 큰 돌과 같은 것으로 보이는 여러 주상들을 갖추고 있었다. 아무튼 구약에서도 반영되어 있듯이, 성소로서 세겜의 전통은 그 지역의 정치적변화 속에서도 지속되었음이 분명하다.




6. 벧엘(<영> Bethel; <히> '베트 엘' -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종교 중심지. 벧엘이 성경에 처음 언급된 것은,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이주하기 전에 벧엘에 제단을 쌓고 장막을 쳤던 때였다(창 12 :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창세기 12:8)”

야곱도 이곳에서 사닥다리의 환상을 보고 돌 기둥을 세운 후에 하나님께 서원을 하였다(28 : 11-22; 참조. 31 : 13).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창세기 31:13)”

그 후 야곱은 다시 가나안으로 평안하게 돌아왔으나 하나님과의 서원은 지키지 않았다(33 : 18-34; 31).
이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벧엘로 가라고 지시하셨다(35 :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창세기 35:1)”

야곱은 이방 우상들을 버리고 벧엘로 올라가 하나님께 단을 쌓았다(35 : 3, 7).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창세기 35:3)”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창세기 35:7)”

그 후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바꿔주셨는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던 장소가 벧엘이었다(35 : 15).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창세기 35:15)”

이스라엘 가난안 땅을 정복한 직후에는 벧엘이 베냐민 지파의 성읍이었다(수 18 : 22).
“벧 아라바와 스마라임과 벧엘과(여호수아 18:22)”

그러나 후에는 이곳이 에브라임의 영토가 되었다(참조. 삿 4 : 5; 대상 7 : 28).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사사기 4:5)”

여사사 드보라는 벧엘 근처에서 살았으며(삿 4 : 5), 사무엘도 해마다 벧엘을 순회하였다(삼상 7 : 16).
엘리야도 이곳에 선지학교를 세웠다(왕하 2 : 3).
벧엘이 그 종교적인 중요성을 상실하게 된 때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정하던 때부터였다. 그러나 여로보암 1세가 이곳에 금송아지를 세워놓음으로 인하여 다시 이곳은 우상 숭배의 중심지로 명성을 되찾게 되었다(왕상 12 : 29).
유다의 한 선지자가 찾아와 이러한 행동을 질책하였으나(왕상 13 : 1-3), 여로보암은 회개하지 않고 금송아지를 계속 숭배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이 곳에서 거행되는 이방 종교적인 행위에 대해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8세기경 아모스 선지자는 벧엘의 멸망을 단호하게 선포하였다(암 5 : 5; 참조. 7 : 13).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것은 종교개혁의 차원을 넘어선 우상 숭배의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 후 유다의 요시아 왕이 벧엘의 제단을 헐어버림으로, 그 때까지 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종교적으로 중요한 영향력을 끼쳤던 벧엘 시대는 끝나버렸다(왕하 23 : 15).





7. 남방 지역(네게브(<영> Negeb; <히> '네게브' – '남쪽, 남쪽 지방')

'네게브'라고 불리는 곳으로 팔레스타인 남부를 가리킨다.
사해 남서쪽에 위치한 삼각형 모형의 사막 지대. 네게브는 북쪽으로 유다 산간지역, 동쪽으로는 아라바, 서쪽으로는 지중해 연안의 좁고 긴 땅으로 둘러싸인 유다 최남단 지역이다(참조. 수 10:40; 11:16).
구약시대에는 이곳으로 몇 개의 무역로가 통과하였다. 곧 애굽으로 가기 위해 동서로 관통한 '가데스 바네아 길', 애굽의 온(헬리오폴리스)과 아라비아의 사막 도시테마 사이를 잇는 '엘랏 길',그리고 남북간을 지나가는 '왕의 대로' 등이 네게브를 통과하거나 교차하였다.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애굽으로 여행할 때 네게브를 통과하였으며 (창 12:9), 돌아오는 여정에서는 네게브에 잠시 정착하기도 했다(2O:1).
이삭이 리브가를 처음 만나던 즈음에 그는 남방(네게브)에 거주하고 있었다(24:62).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네게브 땅으로 정탐꾼을 파견했으며(민 13:17), 네게브는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해야 할 영토에 포함되어 있었다(신 1:7; 34:1-3).
여호수아는 원정대를 이끌고 네게브 지역의 원주민을 진멸한 후 이 지역을 차지하였다(수 10:40; 11:16 ; 12 : 8).
결국 이 지역은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에게 분할되었다(수 15장; 19:1-9; 삿 1:9).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블레셋으로 도망했을 때, 블레셋 왕 아기스는 다윗에게 남방에 위치한 시글락성을 주었다(삼상 27:5-7).
아말렉족은 시글락과, 갈렙 족속의 네게브와 유다의 네게브와, 그렛 족속의 네게브를 침략하여 약탈해갔다(30:1, 14).
이외에도 아랏의 네게브, 겐 족속의 네게브, 여라므엘 네게브 등의 지명이 나타나 있다.
B.C.587년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부터 네게브는 에돔과 나비티아족의 치하에 들어갔다. 애굽을 의지하려는 유다의 죄악에 대한 경고에서, 이사야는 '남방(네게브)짐승'과 '위험하고 곤고한 땅'에 대하여언급하였다(사 30:6-8).
예레미야도 안식일을 준수하고 예루살렘에 제물을 드리기 위해, 네게브를 포함한 많은 지역에서 유다 백성들이 몰려올 것에 대하여 언급하였다(렘 17:26).
오바댜 선지자 역시, 포로 기간이 끝나고 이스라엘이 회복되면 '남방(네게브) 사람은 에서의 산을 얻을' 것이며 '예루살렘의 사로잡혔던 자는 남방(네게브) 성읍들을' 차지할 것이라고 선포를 하였다(옵 1:19-20).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창 12:9)”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창 13:1)”




8. 애굽(<영> Egypt; <히> '미츠라임'; <헬> '아이굽토스', '메스라인')

애굽은 젖줄인 나일강에 의해 유지되었으며, 고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북동 아프리카에 자리잡은 나라이다. 고대 애굽의 영토는 북쪽으로 지중해 연안부터 남쪽으로 나일강 제4폭포까지 이르는 광활한 지역이었다. 애굽인들은 자기 나라를 '검은 땅'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주위 사막의'붉은 땅'과 대조를 이루는 나일 계곡의 검은 퇴적물 때문인 것 같다. 그들은 또한 자기 나라인 애굽을 상•하로 구분하여 '두개의 땅'이라고도 불렀다.
일반적으로 애굽의 역사는 31왕조로 구분한다. 이는 애굽의 사제 마네토(B.C.270년경의 인물)의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마네토는. 메네스에 의해 세워진 통일 왕국 때부터 (B.C.약 3200년) 알렉산더 대제가 정복할 때까지(B.C.332년)의 애굽 역사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제26왕조(B.C.663년) 이전의 연대를 정확하게 확정짓기는 매우 어렵다. 사람들이 최초로 애굽에 정착했던 시기는 B.C.약 8000년경으로 추정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갔던 시기가 바로 제12왕조 때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창 12:10-2)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창세기 12:10)”

다윗이 에돔을 정복했을 때 에돔의 왕자 하닷의 망명을 받아준 애굽 왕조가 제21왕조였다. 그리고 솔로몬이 결혼동맹을 맺은 애굽 왕조도 이 왕조였다(왕상 3:1; 9:16; 11:15-22).
제22왕조(B.C. 945-730년)는 파윰과 델타 지역에서 위세를 떨치던 리비아족 계열의 시삭에 의해 창건되었다. 시삭은 국내적인 안정정책을 펴고 자기 아들을 테베의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팔레스타인을 침범하여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모두를 굴복시켰다(참조. 왕상 14:25, 26; 대하 12:2-9).
제23왕조 오소르콘 1세는, 그의 부하인 에디오피아 사람 세라가 유다에 쳐들어 왔으나 아사 왕에 의해 패하고 돌아갔다(대하 14:9-l5).
제25왕조의 솨바타카(쉐비트크) 왕은 젊은 장수 디르하가를 유다의 히스기야 왕에게 보내 앗수르의 산헤립 과 대항하여 싸우도록 하였다(B.C.701년; 참조. 왕하 19: 9; 사 37: 9).
제27왕조 느고 2세는 앗수르를 공격하러 가는 도중에 므깃도에서 친앗수르파인 유다의 요시야 왕과 안나 전투를 벌였는데, 이때 요시아 왕이 전사하였다(왕하 23:29). 3개월 후에 느고 2세는 유다 왕 여호아하스 대신 친애굽파인 여호야킴을 유다 왕으로 임명하였다(12:33-34).
그후 느고 2세의 군대가 갈그미스에서 바벨른의 느부갓네살에게 패배한 후부터(B.C. 605년), 수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 애굽의 영향력은 상실되었다. 그러나 애굽 본토에 대한 바벨론의 침공은 강력히 맞서 싸워 물리쳤다. B.C.589년에 애굽 왕 호프라(아프리스)는 히스기야를 선동하여 유다가 바벨론에 항거하게 만들었는데(렘 37:5; 겔 17:15), 결국 이 일로 인하여 예루살렘은 멸망당하고, 많은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애굽은 압제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성경은 모세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을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부터 인도해 냈다고 말한다(출20:2; 신 5:6).
이와 같은 관념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상 속에 항상 자리 잡고 있었다(수 24:17; 삿 6:8, 9; 호 11:1; 참조. 행 7:9-34; 13:17).
그러나 또 한편으로 애굽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기근을 당했을 때나(창 12:10, 46-47장), 외부에서 침입을 받았을 때(왕상 11:17; 12:2; 사 30:2; 렘 43:7; 겔 17:15; 참조, 마 2:13-15), 종교적 탄압을 받았을 때(렘 26:21; 참조. 행 2:10)에 피신을 갔던 곳이다. 애굽의 세력이 쇠퇴해지자 이스라엘은 더 이상 애굽을 의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한 갈대 지팡이인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경고하였다(왕하 18:21; 사 30:7; 31:1; 36:6).
선지자들은 더 나아가서 애굽의 다신론적 우상 숭배를 비난하였는데(겔 30:13, 17; 참조. 렘 44장), 이와 같은 애굽의 다신론은 광야 생활 초기부터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배반하게 하였다(참조. 겔32:4; 행 7:35 이하).
[출처: 아가페 성경사전]




9. 헤브론(<영>Hebron; <히> ‘헤브론’ - ‘연합, 동맹’)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창 13:18)”

유다 산지에 있는 한 도시로 예루살렘 남남서쪽 약 30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에르-루메이데'(er-Rumeideh)로 확인되고 있다. 요단강 서편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해발 약 927 m )에 위치한 도시인 헤브론의 유적들은 비옥한 포도원과 과수원 지역을 굽어보고 있다. 처음에는 '기럇아르바'('네 도시', 예. 창 23:2; 35:27, 이 지명은 고대의 주변도시들의 동맹을 암시한다. 참조. 14:13, 24)로 불리워진 이 도시는 B.C.1700년경에 건설되었다(소안이 힉소스 왕조의 수도로 재건되기 '칠년 전'에 세워짐; 민 13:22).
아브라함이 그의 장막을 치고(창 13:18),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되기 전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신(18:1) 곳이 바로 헤브론에서 북쪽으로 3km 지점에 위치한 마므레에서였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죽자 그 매장지로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한 굴을 헷 족속 에브론에게서 샀다(23:17-19).
그리하여 후에 아브라함(25:9-10), 이삭, 리브가, 레아 그리고 야곱 역시 그 곳에 장사되었다(49:29-32; 50:12-13).
십자군 시대에 '에르-루메이데'의 동쪽에 건설된 현재의 헤브론은 이 동굴 지역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기 이전에 헤브론은 가나안의 도시 왕국의 하나로(수 12:10) 민족의 다양성을 과시하였다. 즉, 그 거주민들은 아낙 자손(민 13:22; 수 11:21; 참조. 14:15; 15:13) , 아모리 족속(창 14:13), 헷 족속(23:3 이하) 그리고 가나안 족속(삿 1:10)을 포함하고 있었다. 헤브론은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이 정찰한 견고한 도시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민13:22).
여호수아가 아모리 도시들의 연합군을 공격했을 때에 그는 헤브론 왕호함을 잡아 나무에 매달았다(수 10:1-27).
이어서 그는 이 도시를 공략하여 철저하게 파괴하였다(36-37절).
이곳은 갈렙이 그 정복 시에 세운 공로 때문에 그에게 분배되었다(14:12-13; 삿 1:20; 참조. 10절).
후에 이곳은 도피성의 하나로 레위 자손의 성읍이 되었다(수 20:7; 21:11).
헤브론은 다윗이 시글락의 탈취물을 보낸 성읍들 가운데 있었다(삼상 30:30).
그가 유다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삼하 2:4), 칠년 반 동안 남쪽 지파를 다스린 곳이 바로 헤브론이었다(11절; 5:5).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헤브론에 와서 그를 또한 북쪽 지파들을 다스리는 왕으로 기름 부었을 때(5:3;참조. 대하 12:23) 다윗은 보다 중립적인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겼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통치하는 동안에 그는 북쪽의 왕위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아브넬과 언약을 맺었다(삼하 3:12-21).
하지만 후에 그의 장군 요압은 헤브론 성문에서 아브넬을 살해하였다(3:27, 30).
암살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는 아브넬의 무덤에 장사되고, 암살자들은 오늘날의 '비르케트에스-슐탄' (Birket es-Sultan)으로 추측되는 헤브론의 못가에 매달렸다(4:12).
다윗의 여러 아들들이 헤브론에서 태어났으며(3:2-5), 그들 가운데 하나인 압살롬은 그곳에서 반역을 선포하였다(15:7이하).
왕국이 분열된 직후에 르호보암 왕은 이 도시를 견고하게 하였다(대하 11:10).
바벨론 포로기 후에 이곳은 유다 자손이 재정착한 성읍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느 11:25, '기럇아바').
그러나 에돔(이두메) 사람들이 이 지역으로 그 지배권을 확장시킴으로써 헤브론은 유다 마카비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 그들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마카비 1서 5:65).
이 도시는 다시 재건되었으나, 제1차 유대인 반란 동안에 로마사람들에 의해 파괴되었다(A.D.68년, 요세푸스 유대전쟁사 iv.9. 9).
영역 KJV 수 19:28에서 '헤브론'(한글 개역 성경, RSV'에브론')으로 읽은 곳은 오히려 '압돈'(JB, NIV, 참조. 21:30)을 가리키는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10. 브엘세바(<영> Beer-Sheba; <히> '베에르쉐바')

네게브 지방에 위치한 종교적 중심 성읍인데,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영토의 남방 한계선으로 지칭되었다('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예. 삿 20:1 ; 삼상 3:20 ; 왕상 4:25).
그 이름의 뜻은 “일곱개의 우물” 또는 “맹세의 우물”이다. 브엘세바(오늘날의 '텔 에스-세바')는 북부의 유다 산맥과 남부의 네게브 고원 지대 사이의 우묵하게 들어간 분지에 위치하였다. 그래서 고대에는 이곳이 애굽으로 가는 길과 유다 해안으로 가는 길의 분기점이었다. 족장 시대에 아브라함 이삭은 이곳에서 체류한 적이 있었다(창 22:19; 28:10).
이 성읍이 처음에는 유다 지파에게 분배 되었으나(수 15:28), 후에는 시므온 지파가 차지하고 살았다(19:2).
사사 시대와 왕국 시대에는 이곳이 행정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새였다. 그래서 사무엘도 자기의 두 아들을 이곳의 사사로 머물게 하였다(삼상 8:2).
이 성읍은 B.C.701년 산헤립에 의해 멸망당했으나, 후에 바벨론에서 귀향한 사람들에 의하여 다시 재건되었다(느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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