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폴더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2.

열려라 에바다 2024. 1. 16. 13:03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2.

 

 

천향추천 0조회 924.01.16 05:17댓글 0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2(마6:19-24)
 
본문의 주제문은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이다(마6:20).
이러한 주제를 강조하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율법 아래의 경건과 대비하신다(마6:19).
이는 제자들이 율법 아래에 있던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율법에 부착하여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던 남은 자들이다(마4:18-22, 요1:35-51).
본문의 결론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다(마6:33).
이처럼 시작하는 말과 결론은 서로 상응하며 중간에 있는 내용은 주제를 설명한다.
주제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함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이다.
그러면 구약에서의 경건은 무엇인가?
성소에 계시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이다.
율법에 부착하여 여호와와 교통하는 삶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배경은 신명기 8장이다.
신명기는 가나안땅을 하나님 나라로 경영하는 율법을 말한다.
따라서 신명기에는 긴 서론과(신1:-11: ) 긴 결론이 언급된다(27: -34: ).
이는 율법을 온전히 지켜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율법을 지킨 여부에 따라 복과 화가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신명기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돌보심을 기억하고 율법에 순종하라고 권면한다.
여호와의 율법에 지키면 여호와께서 복을 베푸시리라고 말한다.


예수께서 천국 경건을 가르치시는 방식은 대조법이다.
율법과의 대조는 거짓과 참됨의 대조가 아니다.
겉을 치중하는 외식과 참된 실체의 대조도 아니다.
이는 구원 역사적이며 언약적인 대조이다.
옛 언약과 새 언약에 의한 하나님 통치의 대조이다.
이는 율법 통치와 그리스도 통치의 대조이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종말의 그리스도 통치관점에서 이전의 율법 통치를 정죄한다.
그리스도의 나라 백성의 경건을 통해서 율법 나라 백성의 경건을 비판한다.
이는 율법의 나라 백성에서 그리스도의 나라 백성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천국 왕 그리스도의 통치질서를 따르라는 말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옛 백성과 세상을 율법으로 경영하셨으나
이제는 아들을 통하여 믿는 자들과 종말을 경영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통치는 종말에서 나타난 하나님 뜻과 경륜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께서는
    “땅에 보물을 쌓지 말고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
고 말씀하신다(마6:19-20).
땅에 보물을 쌓는 것은 율법 아래에서 삶의 질서이다.
이는 율법 아래에서 여호와께서는 세상에 속한 성소에 계셨고(히9:1)
이스라엘도 아래로부터 나서 땅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삶의 방식은 땅에 속한 것들을 구하고 그들의 보물을 땅에 쌓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주신 가나안땅의 소산물과 가나안에서의 평화와 건강, 장수를 구하는 삶이다.
이것이 율법 아래에 세워진 이스라엘 삶의 질서이다.
따라서 땅에 속한 이스라엘은 가나안땅의 소산물과
가나안땅의 평화와 가나안땅에서의 장수와 번영을 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이스라엘은 먹고 마심을 구하는 육신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늘의 성소가 아니라 세상에 속한 성소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먹고 마심을 구하고 보물을 땅에 쌓는 일은 이스라엘 경건의 모습이다.
이러한 삶은 언약 밖에 있는 이방인들도 구하는 일이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은 모두가 세상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휘장 밖 죄 아래에 세워졌다는 점에서는 50보, 100보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썩어지고 없어지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와 땅의 속한 보물로 경쟁하고 싸웠다.
그러나 그들은 언약을 범하여 모든 보화를 빼앗기고 이방의 포로가 되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신다(마6:19-20).
이는 모세율법(구약성경)과는 다른 가르침이다.
왜 예수께서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시는가?
종말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심에서 하늘에 열렸기 때문이다.
예수의 오심에서 휘장의 장벽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휘장 밖 영역은 세상을 가리킨다.
세상은 좀이나 녹이 슬어서 없어지는 영역이다.
그러나 하늘은 휘장 안 하나님의 거처이다.
거기에는 썩지도 않고 녹이 슬지도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온전한 품 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온전한 하난 통치의 나라가 종말의 천국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참되고 온전한 뜻과 경륜이 시행되는 나라이다.
이는 천국 왕 예수께서 아버지의 참되고 온전한 뜻을 시행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국에는 죄나 사망의 권세가 범접할 수 없다.
천국은 썩지 않는 생명의 나라이며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권세의 나라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나라에 백성들을 초대하신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천국으로 초대하신다.
이러한 초대의 말씀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이다(마11:28-30).
이 말씀은 모세가 명한 율법의 짐을 벗어버리고 예수께 나아오라는 초대이다.
모세가 명한 각종 제사와 예물, 십일조와 같은 짐을 벗어 버리고 예수께 나아오라는 초대이다.
이는 율법 아래에서 구원을 받아서 내 백성이 되라는 부르심이다.
이러한 초대를 맨 처음 받은 자들이 제자들이다(마4:18-22).
그렇다면 보물을 쌓는 것은 무엇인가?
온 마음을 보물에 두고 구하는 삶이다.
보물을 마음에 두고 전심으로 구함은 보물의 가치를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보물이 모든 것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물의 가치를 알아보는 것은 그 사람의 눈이 성하기 때문이다.
눈과 마음은 하나이며 일치한다.
눈이 보물의 가치를 알아보면 마음이 보물로 향하게 된다.
제자들은 눈이 성하여 예수를 알아보았다.
예수께서 하나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즉시에 모든 것들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나서서 함께 거하였다(마4:18-22).
그러나 눈이 상하면 예수를 알지 못한다.
예수를 알지 못하면 온몸은 어두움에 거하게 된다.
그래서 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은 예수를 거절하고 대적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확대해석하는 내용이 밭에 묻힌 비유이다(마13:44).


예수 당시의 유대 사회는 모세의 율법이 시행되던 율법 사회이다.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제사장이 짐승 제물로 제사하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제자로서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마23:2),
장로들의 규범과 유전을 따라 백성을 지도하고 가르치고 있었다.
당시에 갈릴리 지방은 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리고 있었다.
이방의 갈릴리라는 호칭은 유대인들에게 천하게 일컫는 말이다.
갈릴리는 예루살렘과는 멀고 이방과 접경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갈릴리 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처럼 여김을 받았다.
이방인들처럼 무시되고 천히 여김을 받았다.
따라서 제자들은 율법 아래에서 작고 나중 된 자들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부르시자 그들은 따라나서서 함께 거함으로 천국에서 크고 먼저 된 자가 된다(마19:27-29).
이처럼 예수를 따른 것은 제자들의 눈이 성하였기 때문이다.
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율법 아래에서 크고 먼저 된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거절함으로 천국에서 작고 나중 되게 된다(마19:30).
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거절하고 대적하는가?
그들의 눈이 나쁘기 때문이다.
제자들과 제사장, 서기관과 바리새인 모두는 율법 아래에 세워진 자들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어떻게 성한 눈을 갖게 되었는가?
제자들이 눈이 성하게 된 상황을 요한복음을 잘 보여준다(요1:45-51).
그들의 눈과 마음은 항상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었다(요1:47).
여호와께서 주신 복에 있지 않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가 있었다.
제자들의 시선과 마음은 여호와께 향하여 있었다.
이것이 제자들의 눈이 성하게 된 원인이다.
이런 눈을 가진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와(요3:1, 7:50-51, 19:39) 바울이 있다(빌3:5).
그러나 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은
여호와께서 주신 사회적인 지위와 복을 누리는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마23:2-7).
여호와께서 복을 주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께서 주신 복과 율법 아래에서 주어진 사회적인 지위와 풍요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처럼 여호와에게서 벗어난 시선은 눈을 상하게 한다.
하나님에게서 벗어난 마음은 어둠으로 가득하게 된다.
그 결과 그들 앞에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들은 예수를 이단의 괴수로 정죄하고 십자가에서 죽게 한다.


종말의 천국은 밭에 묻힌 보화이다(마13:44).
농부는 밭에 묻힌 보화를 발견하면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서 밭을 산다.
이는 밭이 아니라 보화를 소유하기 위함이다.
종말의 천국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다(마13:45-46).
진주 장사가 좋은 진주를 만났을 때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판다.
이는 좋은 진주를 자기의 것으로 하기 위함이다.
예수 당시의 제자들과 서기관과 바리새인 모두는 율법 아래에 있던 자들이다.
그런데 종말에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유대 땅에 오셨다.
제자들과 서기관, 바리새인은 모세와 예수의 중 어느 한 분을 선택해야 한다.
이는 다윗왕국 백성으로 남아서 살아갈 것인지, 천국 백성으로 살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눈이 성한 제자들은 예수를 선택한다.
이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았기 때문이다(요1:45, 49).
당대에 예수에게 나아와 따르는 것은
율법과는 다른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
곧 종말의 천국에 들어가는 일이다.
종말의 최고 표적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일이다.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은 종말에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표적이다.
그러나 예수 외에 다른 표적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는 완악함의 증거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니느웨 사람들과 남방 여왕이 이 세대를 정죄하리라고 말씀하신다(마12:38-42).
이는 니느웨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보내신 종(머슴) 요나의 말을 듣고도 회개하였고,
남방 여왕은 대리통치자 솔로몬을 통한 여호와의 지혜를 사모하여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친히 말씀하시는데도,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직접 오셔서 말씀하시는데도,
당대의 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과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거절하여 자신들의 완악함을 확증하였다(마12:41-42).
그래서 예수께서는 요나가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던 것처럼,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마12:39-40).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게 된 것은 니느웨로 가라는 여호와의 명을 거절한 그의 완악함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을 것은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거절한 이 세대의 완악함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처럼 요나의 표적은 당대 이스라엘 백성의 완악함을 확증하는 표적이다.
이는 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을 머리로 하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정죄하는 말씀이다.
당대의 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들과 백성들이 완악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 모두의 눈과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율법 아래에서 주어지는 사회적인 지위와 명예,
율법 아래에서 주어지는 가나안땅의 풍요와 재물에 눈과 마음이 가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의 눈은 상하여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온몸이 어둠으로 가득하게 되었다(마6:23-24).
그러나 제자들과 바리새인 출신인 니고데모와 바울은 율법 아래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마4:18-22).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의 방해물은 재물에 대한 사랑이다.
예수께 나아왔던 젊은 관헌을 생각해 보라(마19:16-22).
그가 부자가 된 것은 어려서부터 율법을 온전히 지켰기 때문이다(마19:20).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신명기에서 약속한 복을 그에게 베푸셨다.
그가 부자가 된 것은 율법을 온전히 지킨 결과물이다(마19:20).
이처럼 율법을 지켜서 가나안땅의 풍요를 누리는 그에게 한 가지가 부족하다.
그것은 하나님 아들(자녀)의 명분을 얻는 일이다(갈4:5).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는 말이다(마19:16).
그것은 아무리 율법을 온전히 지키더라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율법으로는 결코 영원한 생명을 누리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네가 온전하고자 한다면 나를 따르라”
고 말씀하신다(마19:21).
그러나 그 청년은 많은 재물을 포기할 수가 없어서 예수를 떠났다(마19:22).
이에 예수께서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고 말씀하신다(마19:24).
이처럼 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과 젊은 부자 청년은 율법 아래의 삶을 포기하지 못하였다.
율법 아래에서 주어진 복을 누리는 삶이,
땅에 속한 보물을 구하며 누리는 삶이,
그들 앞에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이는 그들의 눈이 상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과 마음이 율법 아래에서 주어진 복과 보물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과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험성에 대하여 신명기는
   “여호와께서 만나를 주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
고 말씀하신다(신8:1-20).
이는 여호와께서 공급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에게만 초점을 맞추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먹을 것 때문에 에덴에서 쫓겨났다.
이스라엘은 이방의 권세를 사모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영광과 권세를 빼앗기고 이방의 포로가 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고 말씀하신다(마6:24).
이러한 천국 왕의 금령은 천국의 금령이다.
이러한 금령을 발하시는 것은 종말의 천국이 하늘에 속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재물을 더 중히 여김은 천국의 질서에 어긋난 우상숭배이다.
재물에 대한 염려는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대신하는 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은 하늘에 속한 교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엡2:6).
이것이 우리의 본질이며 삶의 원리이다.




하늘에 속한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