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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목숨

열려라 에바다 2024. 2. 1. 11:38

생명과 목숨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하나님의 생명은 인간의 목숨과는 다르다. 하나님의 생명만이 참 생명이다. 인간의 생명은 그것의 모형일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은 헬라어로 “조에”(ζωή)라고 하고, 인간의 생명은 “프쉬케”(ψυχή)라고 한다. 사람에게도 생명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과는 차원이 다르다. 인간의 생명은 “목숨”일 뿐이다. 성경에선 그것을 생명이라고 하지 않는다. 곧 “조에”라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생명만이 참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어 성경 등 대부분의 성경에선 조에나 프쉬케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혼용하고 있다. 단어가 분명히 다른데도 모두 생명, 곧 라이프(life)라고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두 단어의 근원과 본질은 전혀 다르다. 요한복음 12장 25절이 대표적인 구절이다. “자기 생명(ψυχή)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ψυχή)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ζωή)하도록 보존하리라”(He who loves his life(ψυχή) loses it, and he who hates his life(ψυχή) in this world will keep it to life(ζωή) eternal. NASV) 이 구절처럼 한글성경이나 영어성경 대부분이 인간의 목숨을 생명이라고 번역했지만, 인간의 것은 헬라어로 프쉬케라고 되어 있다. 인간이 사랑하는 자기 생명은 프쉬케일 뿐이다. 인간의 자기 생명은 프쉬케이고, 하나님이 주시려는 것은 “영생하도록” 하며 조에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생명은 조에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하는 영원한 생명은 조에다. 그래서 요한복음 12장 25절은 “자기 생명(프쉬케)을 미워하는 자가 그 프쉬케를 영생하도록 지킬 것이라.”라고 하였다. 프쉬케를 미워해야 그 프쉬케가 멸망하지 않고 영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구원하려는 것은 우리의 프쉬케인데, 그 프쉬케의 구원을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자기 프쉬케를 미워해야 한다고 하셨다. 자기 목숨을 미워한다는 것은 자기 목숨과 반대되는 하나님의 계명을 따른다는 것이다. 하기 싫은 것을 하는 것인데, 쉽겠는가? 사랑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인데, 쉽겠는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남이 미워하는 것도 힘든데, 자기가 자기를 미워하는 것은 더 더욱 쉽지 않다. 그러나 자기 목숨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마음을 먹고 행동하면 하나님이 영생을 주신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1장 9절에서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했다. 거기서도 구원받아야 할 “영혼”은 프쉬케다. 프쉬케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게 바로 구원이다. 프쉬케를 영생하게 하기 위해선 프쉬케를 미워해야 한다는 역설과 모순이 바로 신앙이다.

프쉬케의 목숨은 육체를 기반으로 하는 생명을 말한다. 조에는 영에게 속한 생명인데, 프쉬케의 목숨은 육체에게 속하려는 속성이 있다. 자기 프쉬케를 미워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기보다 육체의 소욕을 따르려는 게 바로 프쉬케다. 따라서 프쉬케의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 아니다. 육체의 사람이다. 따라서 인간의 생명이란 육체를 유지해 줄 때만 의미가 있는 생명이다. 그런 육체적 생명은 하늘나라에서 영생하는 게 아니다. 주 예수의 생명을 소유하지 않으면 멸망하게 되는 생명일 뿐이다.

우리에겐 조에가 없기에 믿음이 필요하다. 그 믿음이 바로 이 세상에서 우리 프쉬케를 영생하도록 역사한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생명, 곧 하나님의 조에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일서 5장 12절에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조에)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조에)이 없느니라”라고 한 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조에)이니” 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이다. 예수만이 조에다. 우리 인간에게 있는 것은 생명이 아닌, 목숨일 뿐이다.

우리가 미워해야 할 프쉬케가 무엇인지는 그와 관련된 형용사를 보면 알 수 있다. “프쉬키코스”(ψυχικός)라는 형용사는 성경에 여섯 번 나온다(스테판본). 프쉬케와 관련된 프쉬키코스는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됐다. 프쉬키코스가 부정적인 개념으로 사용된다는 것은 프쉬케를 미워해야 한다는 말씀과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성경에선 그 단어를 “육에 속한”이라든가, “정욕적이요”라고 번역했다.

○ 육에 속한(ψυχικός)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린도전서 2:14)

○ 육의(ψυχικός)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ψυχικός)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린도전서 15:44)

○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ψυχικός)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고린도전서 15:46)

○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ψυχικός) 마귀적이니(야고보서 3:15, 개역한글)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개역개정)**개역개정은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했다.

○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ψυχικός)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유다서 1:19)

프쉬키코스라는 프쉬케의 형용사는 고린도전서에서 “육에 속한”으로 번역했는데, 그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한다고 하였다. 프쉬키코스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일이 미련하게 보인다는 것이고 그것을 조금도 깨닫지도 못한다고 하였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목숨(프쉬케)으로 신앙적인 것, 영적인 것을 보면 미련한 것이다. 인간적으로 보면 영적인 것은 미련한 것이다. 유다서에선 그 단어를 “육에 속한” 사람으로 번역했다. 그런 자에겐 성령이 없다고 하였다. 자기 목숨을 사랑한다는 게 왜 육에 속한 것이고, 성령이 없는 것일까? 영의 세계를 모르면 육신으로밖에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없이 살며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이다.

야고보서에 따르면 그 단어를 “정욕적이요”라고 번역했다. 한글개역개정에선 “정욕의 것이요”라고 번역했다. 육신적이라는 의미인데, 그 단어를 정욕의 것이라고 번역했다. 자기 목숨을 돌보는 것일지라도, 그것이 결국 자기 영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정욕적인 것일 뿐이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선 프쉬키코스를 “정욕적”이라고 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말한 것이다.

그래서 죽음도 프쉬케가 떠나는 죽음은 부정적인 것이었다. 육신이 죽을 때 영이 가야 할 곳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것은 좋은 죽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보통 말하는 비명횡사(非命橫死)와 같은 것을 프쉬케가 떠난다고 하였다. 한글성경에선 그런 죽음을 “혼이 떠났다”라고 했다. 헬라어로 “프쉬케가 떠난다”라는 것을 “에크프쉬코”(ἐκψύχω)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프쉬케(목숨)가 떠날 때 이 단어가 사용됐다. 이 단어는 부정적인 죽음을 말한다. 갑자기 죽는, 저주 받은 죽음을 이 단어로 표현했다.

그에 반해 영, 곧 프뉴마가 떠나는 것은 긍정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에크프네오”(ἐκπνέω)라는 단어로 표현된 죽음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바로 이 단어로 표현됐다. 프뉴마가 떠날 때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성경에 세 번 나온다. 에크프쉬코도 세 번, 에크프네오도 세 번 나온다.

○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ἐκπνέω)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마가복음 15:39)

○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ἐκπνέω, 마가복음 15:37)

○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ἐκπνέω, 누가복음 23:46)

에크프네오가 모두 예수의 죽으심에 사용됐다는 것은 긍정적인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속임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한 날에 죽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는 이 단어가 사용되지 않고 에크프쉬코가 사용됐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아 죽은 헤롯왕에게도 이 단어가 사용됐다.

○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ἐκψύχω)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사도행전 5:5)

○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삽비라의)혼이 떠나는지라(ἐκψύχω)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사도행전 5:10)

○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ἐκψύχω, 사도행전 12:23)

에크프네오와 에크프쉬코라는 두 단어는 의사인 누가가 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온다. 예수의 죽음과 아나니아와 삽비라, 그리고 헤롯왕의 죽음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는 신령한 사역으로 죽는 죽음이요, 하나는 육신적인 활동에 매여 있다가 죽는 죽음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프쉬케의 삶, 목숨과 관련된 삶을 살지라도 프뉴마, 곧 생명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프쉬케의 삶에 만족하다가 그 삶을 마감하면 에크프쉬코의 죽음으로 마무리될 수 있음을 우리는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나 프뉴마의 삶을 목표로 산다면 에크프네오의 죽음으로 마무리될 수 있음을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물론 에크프쉬코의 죽음, 즉 혼이 떠나는 죽음으로 육신을 마감한다고 할지라도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니다. 육신은 멸망당할지라도 그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받기 때문이다.

영이 떠나면 인간은 죽는다. 혼이 떠나도 죽는다. 그런데 어떤 이는 영이 떠나는 게 아니라 혼이 떠남으로 그 영을 이 땅에서 혼비백산(魂飛魄散) 하게 한다. 혼백이 이리저리 흩어지게 한다.

영은 인간의 생명이다. 죽은 자의 육체나 살아 있는 자의 육체나 겉으로는 표시가 나지 않는다. 사람의 몸에서 영이 떠날 때 어느 누가 그 영을 붙잡을 수 있겠느냐? 성경에 보면 영이 돌아와서 살아난 경우는 있어도 혼이 떠난 후엔 기회가 없다. 그런데 어느 누가 그 영이 들어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느냐?

○ 그 영(πνεῦμα)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누가복음 8:55)

부활하신 예수께서 잠긴 문을 통해 들어오듯이, 영은 물리적인 벽을 통과한다. 제자들이 두려워 문을 잠그고 모여 있을 때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는데, 그때 벽이 무너졌는가? 그렇지 않다. 영이 물리적인 것을 통과한다고 해서 물리적인 것이 손상되는 게 아니다. 따라서 사람 몸에서 영이 떠난다고 해서 육체적으로 어떤 손상이 일어나는 게 아니다.

예전에는 심장 박동, 즉 호흡을 하는 것을 근거로 살아 있다고 판단했지만, 최근에는 뇌사를 기준으로 죽음을 판단한다. 뇌사란 뇌가 죽었다는 말이다. 산소호흡기를 꽂으면 뇌사했어도 호흡을 하는 경우가 있다. 중환자실에 가면 심장이 박동하는지, 뇌가 움직이는지 측정을 한다. 침대 옆 모니터에 심장 박동이 되는지, 뇌가 움직이는지 표시가 나온다. 검은 바탕에 녹색 선 등 여러 가지 선이 위아래로 움직인다. 움직인다는 것은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심장은 인공호흡기로 인해 숨을 쉬는 듯 하지만, 뇌가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뇌가 죽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영이 떠났다는 말이다. 호흡을 한다고 해서 살아 있는 게 아니다. 뇌가 살아 있어야 정말로 살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육체는 살아 있을지라도 뇌가 죽으면 실제로는 죽은 것이다. 육체가 죽어 뇌가 죽는 경우도 있고, 뇌는 죽었으나 육체는 살아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뇌사는 영이 떠나 완전히 죽은 것을 말한다. 즉, 영이 떠나면 뇌가 죽고, 뇌가 죽은 후엔 결국 심장도 박동하지 않게 된다.

이와 같이 죽음에도 프쉬케가 떠나는 죽음, 곧 에크푸쉬코의 죽음이 있고, 영이 떠나는 죽음, 곧 에크프네오의 죽음이 있다. 생명에도 영을 영생하게 하는 생명인 조에가 있고, 육신에 매이게 하는 생명인 프쉬케가 있다. 프쉬케가 육신을 따르면 멸망하지만, 영을 따르고 하나님을 따르면 영생하게 된다.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조에)을 소유한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생명이 하나님에게 있으면 단순히 생명이라고 하지만, 그 생명이 사람에게 있으면 영생이라고 한다. 영원은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인데,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함으로 영생하게 되었고, 영생의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은 영생의 계획을 준비하셨다. 그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을 인간에게 부여하고자 계획하셨다. 프쉬케의 존재를 프뉴마의 존재로, 조에의 존재로 계획하셨다. 육체로 마감하지 않도록 영적인 존재가 되게 하셨고, 생명을 소유하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그 계획을 위해 태초에 있는 “말씀”을 “생명의 말씀”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생명을 아들에게도 있게 하셨다. “태초에” 계신 말씀을 “태초부터” 있게 하기 위해 생명의 말씀이 되게 하셨다.

말씀은 아버지 속에 계심이요 생명의 말씀이란 아버지 품에서 나오심이다. 나오심을 나타내는 말이 “태초부터”이다. 하나님은 “태초에”를 “태초부터”라고 하며 경륜을 시작하셨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에”는 하나님의 영광, 즉 생명이 충만한 상태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요한일서 1장 1절의 “태초부터”라 함은 생명의 진행을 뜻한다.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요한복음 1:1)

○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한일서 1:1)

○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한복음 1:4)

○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한복음 5:26)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생명으로 계시는 것에 그치지 않으시고, 아들에게 생명을 주어 생명의 말씀으로 계시게 하셨다. 그 생명을 사람에게도 있게 하셨다. 이런 생명의 이동은 경륜의 전개가 진행된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말씀이 태초에 계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태초부터 독생자가 되게 하심으로 생명의 말씀으로 계시게 하셨다. 요한복음의 “태초에”(엔 아르케, Ἐν ἀρχῇ)에 등장하는 “엔”(ἐν)을 요한일서의 “태초부터”(ἀπ’ ἀρχῆς)로 바뀌게 하셨다. 따라서 요한복음 1장 1절은 하늘 영광의 상태를 말한 것이라면, 요한일서 1장 1절은 경륜의 활동을 말한 것이다. 요한복음 서두는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을 말하고 있고, 요한일서 서두는 그것이 인간에게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말하고 있다. 요한복음 서두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지는 것을 말한다면, 요한일서 서두는 그 뜻이 이 땅에서 이뤄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 “참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각각 나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참 하나님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오니까 혼동을 한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선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고 하면서, 요한일서 5장 20절에선 ‘참된 자 곧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라’고 하니까 어떤 이는 이런 내용 대해 헷갈려 한다. 요한복음에선 하나님과 예수를 알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동등하다는 의미요, 경륜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함께 요한일서에서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체가 영생이라고 하는 것도 혼동이 될 수 있다.

그런 것은 요한복음이 말하려는 의도와 요한일서가 말하려는 의도를 오해한 것이다. 공생애의 예수를 볼 때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고 믿어야 한다. 예수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알아야 한다. 하향식이다. 그러나 요한일서에선 육체로 오신 예수를 보고 그를 참 하나님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예수를 어떤 존재로 믿느냐는 것인데, 요한복음에선 예수를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요한일서는 예수를 참 하나님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향식이다. 동일한 존재를 어느 방향에서 보느냐 하는 것이다.

성령이 오신 것은 예수 안에 생명이 있음을 증거하려 함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경륜이 생명의 경륜, 곧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에게로, 그것이 우리 인간에게로 전해지고 있음을 증거하신다. 성령이 오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다. 이를 위해 태초에 계시는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 되셨음을 성령은 증거하신다.

우리 믿는 자는 하나님의 생명 곧 조에를 소유함으로 프쉬케가 멸망하지 않게 되었으니, 우리 모두는 프쉬키코스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자기 목숨(프쉬케)을 최고로 여기며 살지 말아야 한다. 프쉬키코스는 육신적인, 정욕적인 자아를 말한다. 육신에 속한 자에겐 하나님의 모든 것이 미련해 보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의 프쉬케가 육체에 기울어지지 않도록 역사하신다. 우리 모두는 성령을 의지하며 신령한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의 죽으심이 에크프네오로 표현되었듯이, 조에를 향한 삶은 에크프네오의 죽음으로 마무리되고, 그 죽음은 부활로 이어진다. 그러나 자기 목숨, 곧 프쉬케에 매여 있는 자는 에크프쉬코의 죽음으로 마무리될 수 있음을 두려워해야 한다.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생명은 예수 안에 있다.

**하나님의 생명은 내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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