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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전능성에 대한 이해

열려라 에바다 2024. 2. 6. 09:12

신의 전능성에 대한 이해

"God can do anything"  신의 전능성에 대한 이 정의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서론
하나님은 무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는 인자하게도 자기 자신을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계시하셨다. 그리고 성경 속에 내포되어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창 17:1; 35:11; 출 6:3 등)고 말씀하셨기에 우리들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전능하심이 '하나님의 속성'(The Attributes of God)이다. 왜냐하면 전능이야말로 하나님께 적용할 수 있는 특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나타낸 계시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전능성(God can do anything)을 언급한다. 한편 하나님께서 행하실 수 없는 몇가지 사실도 나타난다(There are some things that God cannot do).

헨리디이슨(H.C. Thiessen)은 하나님의 성품을 본질과 속성으로 나뉜다. 본문의 주제인 '전능성'(God do anything, omnipotence)은 '하나님의 속성'가운데 '비윤리적 속성'으로 보았다. 스트롱(A.H, Strong)은 하나님의 속성을 절대적 속성(내재적 속성)과 상대적(전달적 속성) 속성으로 보았으며, 벌코프(L. Berkhof), 찰스 하지(C. Hodge), 쉐드(W.G.T. Shedd), 바빙크는 비공유적 속성, 공유적 속성으로, 에릭슨(M.J. Erickson)은 위대성과 선하심으로, 그리고 루이스(G.R. Lewis)는 형이상학적 속성, 지성적 속성, 도덕적 속성, 감정적 속성, 실존적 속성, 관계적 속성으로 세분하였다. 첫째 속성인 비공유적 속성은 단순성, 불변성, 영원성, 무소부재성, 자존성 등을 의미하고 둘째 속성인 공유적 속성은 거룩, 사랑, 자비, 정의, 인내, 지혜 등을 의미한다.

Ⅰ. '하나님의 전능성'의 개념
'전능성'(全能性, omnipotence)이란 완전한 형태의 능력을 소유하는 것을 의미하며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본질의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전능성은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행하실 수 있는 능이 있으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지는 하나님의 성품에 의해 제한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능성이란 의미는 이젠 하나님의 완전성과 조화일치되는 것은 무엇이나 행하실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개념의 근원은 분명치 않으며 사실은 상당히 논쟁과 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전형적인 스콜라 학자들은 심지어 전능하신 하나님조차도 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있다고 보았다. 그분의 피조물들이 할 수 있는 어떤 것들, 즉 걷거나 앉거나 수영하기와 같은 것들은 할 수 없다고 보았다. 전형적인 스콜라주의의 해답은 그와 같은 피조물의 행동들이 하나님이 갖지 아니한 능력들을 인간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 않는다고 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수동적인 능력에서가 아니라 능동적인 능력의 관점에서 전능하시다고 하였다. 두 가지 별개의 방법들, 즉 물리적 가능성 또는 논리적 가능성 속에서 무엇인가가 가능하다거나 또는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전능하시다. 비모순율(law of noncontradiction)을 위반하지 않는다면, 논리적 의미에서 무엇인가가 가능하다. 그러나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와 몇몇 다른 철학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비모순율에 의해서 제한된다는 견해를 반대하였다.

하나님의 전능에 대하여 윌리엄 로우(William Rowe)는 "하나님께서 절대 가능성(absolute possibility)과 그분의 기본 속성들의 어느 것과도 모순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고 말하였다. 로우의 정의는 하나님께서 죄지을 가능성에 관한 문제를 제거해준다. "악을 행하는 것은 완전히 선한 것과 모순되는 것이고, 완전히 선한 것은 하나님의 기본 속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악을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분이 전능하시다는 사실과 충돌하지 않을 것이다."

케니(Kenny)는 로우가 내린 정의에서 좀더 진전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적 전능은, 만약 그것이 논리에 맞는 주장이라면, 논리적으로 가능한 모든 능력들을 가진 완전한 전능보다 못한 것임이 틀림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들을 지닌 한 존재가 소유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한 즉 논리적으로 가능한 모든 능력들의 소유 속에 존재하는 좀더 좁은 전능임이 틀림없다."

심지어 유신론의 반대자로 잘 알려져 있는 맥키(J. L. Mackie)조차도 다음과 같이 인정한다. "일단 우리가 전능이 논리적 불가능들을 성취할 능력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을 결론짓는다면 '또 만일 그것이 논의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것을 포함해서는 안 된다'는 개념 그 자체 속에는 어떤 모순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Ⅱ.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모순(The Paradox of Omnipotence)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성경의 말씀과 학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하나님의 전능에 대하여 의심케 하는 구절들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무제한적인 능력으로 보지 않는다.

1. 하나님은 죄를 범하실 수 있는가?(Can God Sin?)
전능은 모든 것을 행할 능력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죄를 지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은 전능하실 수 있는가? 죄를 지을 능력은 능력에서 오는 결과가 아니라, 능력의 부족에서 오는 결과라고 안셀름(Anselm)은 지적하였다. 안셀름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인 전능성이라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만일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거나 정의를 왜곡시키는 그런 것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퀴나스도 죄를 범하는 것은 완전한 행위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며,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은 행위에 도달할 수 없는 능력 즉 전능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분이 전능하시기 때문에 죄를 범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은 모순을 갖고 있는 것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데까지 미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은 타고난 불완전한 것들까지 미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도덕적 불완전은 타고난 불완전의 일종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타고난 불완전을 포함하는 어떤 것을 행하실 수 없고, 도덕적 불완전을 수반하는 어떤 것도 행하실 수 없다.

죄를 짓지 않을 능력은 불완전한 것이 아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죄를 범하신다면, 오히려 그것이 불완전한 것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범할 수 없는 이유는 그분이 전능하시고, 그분의 전능은 필연적으로 도덕적 완전성과 결합되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그분이 전지하지 않다는 증거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논리적으로 가능하고 그분의 완전한 뜻에 일치하는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전능하시다와 하나님은 죄를 범하실 수 없다는 명제들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다.

2. 전능과 과거를 바꾸는 능력(Omnipotence and the Power to Change the Past)
하나님께서 과거를 되돌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을 주장하는 것이며, 따라서 어떤 전능자도 모순에 개입된 것을 행할 수 없다는 좀더 일반적인 주장에 달하게 된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은 기독교 신학자들 사이에서 크게 받아드려졌다.

카마라(E. J. Khamara)는 아퀴나스의 주장을 발전시키면서 "과거를 바꾸는 것은 발생했던 것을 발생하지 않았던 것으로 만들거나 발생하지 않았던 것을 발생했던 것으로 만들게 되는 것을 의미할 것이며, 이 경우 모두 다 논리적인 불가능으로 판단되어진다"고 말한다. 카마라는 전능자는 과거에 행사할 어떤 능력을 가질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그와 같은 권능을 갖는 것은 논리적 필연성들이나 논리적 불가능성들을 일으키는 능력에 관여하기 때문이며, 이것들은 이미 그분의 영역에서 배제되어져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래서 만약 하나님께서 과거를 바꾸는 것은 아퀴나스가 제안한 의미로 볼 때, 모순이 수반되고, 그 견해는 거짓이란 것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다른 저자들은 그 문제에 대해서 다른 접근방법을 제안해왔다. 그들은 과거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사고는 "하나님의 원인적 활동이 과거에로 지향될 수 있는가"라는 의미에서 과거를 생기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연구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의지는 미래를 생기게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그들의 원인적 활동은 미래에로 지향될 수 있고, 미래의 결과들을 생기게 할 수 있다. 전능자나 혹은 다른 누군가가 과거를 생기게 할 수 있다는 주장에 어떤 일리도 없다는 주장을 다음의 3가지 논쟁들이 지지한다. (1) 과거를 생기에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견해는 원인과 결과 사이의 차이를 제거한다. (2) 심사숙고아래 그 견해는 더 먼저와 나중에 사이의 차이를 제거할 것이다. 나중에 라는 말은 아직도 미래에 있는 것에 반대로 적용되는 것만큼 이미 발생된 것에 쉽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3) 그 이론은 또한 과거와 미래 사이의 차이를 말살할 것이다.

3. 하나님의 후회하심(Repentance of God)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후회하심이 없으신 분이시라는 기록과 함께 하나님께서 후회하셨다는 기록도 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 23:19). 한편 하나님의 후회하심에 대한 기록은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창 6:6),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삼상 15:35)는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사역을 부정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후회하심에 대한 말씀은 신인동형론적인 견해로 볼 수 있다. 성경은 때로는 신인동형론적인 표현법을 사용하고 있다. 영(Young) 교수가 말하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목소리로 말씀하시지 않았으며 히브리어로 말씀하지 않았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성경에서 ) 하나님이 사용한 (표현은 모두) 상징적이며, 하나님의 사역이나 사실은 묘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까?"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섭리하심은 분명 후회하심이 없다. 하지만 성경의 기자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사람들이 알게 하기 위하여 '후회하셨다'는 표현을 썼던 것이다.

Ⅲ. 하나님의 두가지 권능과 하나님의 자기 제한
1. 하나님의 두가지 권능
하나님은, 하나님에게 이런 식으로 행동해 달라고 강제하는 어떤 외적인 중개인에게 종속됨이 없이, 어떻게 절대적으로 믿을 만하게 행동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아베로에스(Averroes)가 제기한 결정론의 한 형태에 대한 반작용으로, 13세기 파리에서 뜨겁게 논의되었다. 둔스 스코투스와 옥캄 같은 저술가들은 하나님의 신뢰성을 궁극적으로 신적 본성 자체에 근거를 두고 있다. 사도신경 첫 문장인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에 대한 논의에서 옥캄은 바로 전능하신 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이에 옥캄은 두가지 용어를 사용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권능'(potentia absoluta)과 '하나님의 규정된 권능'(potentia ordinata)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권능은 하나님이 어떤 행동과정이나 세상의 질서에 자신을 헌신하기 이전에 존재하던 선택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규정된 권능은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확립된 질서를 반영하는 지금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이 구분은 중요하나 어려운 것이다.

옥캄의 견해대로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규정된 권능의 영역안에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 자신의 결단에 의해 제한받는 영역이다. 일단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로 선택하였다면, 세상을 창조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일은 없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한때 행할 수 있던 것 중 이제는 더 이상 행해질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거부는 이 가능성이 더 이상 열려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언뜻, 역설적 상황으로 인도하는 것 같다. 신의 전능성 때문에 하나님은 이제 모든 것을 할 수 없다. 신의 능력을 행사함으로써, 하나님은 선택을 제한시키셨다. 옥캄에게는, 하나님은 이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 하나님의 제한
하나님의 자기 제한 개념은 19세기에 특별히 그리스도론의 맥락에서 새로운 흥미를 불러 일으키며 검토되기 시작했다. 신적 자기 제한의 개념의 논의를 위해 선택된 틀은, 대개는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에 대한 빌 2:6-7에 의해 제안된 것이었다. 그리스어 kenosis(비움)에서 나온 '케노티시즘'(kenoticism)이란 용어가 이 접근을 가리키기 위해 널리 사용되었다.

토마지우스(Gottfried Thomasius, 1802∼75)와 프랭크(F.H.R. Frank, 1827∼94)와 게스(WFGess, 1819∼91)같은 독일의 전통 저술가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하실 때 자기 제한의 과정을 택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영국에서는 케노티시즘의 사상이 보다 후대에 발전되었고 약간 다른 형태를 취했다. 전통적 그리스도론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고 확신한 찰스 고아(Charles Gore, 1853∼1932), 포시스(P.T. Forsyth, 1848∼1921) 같은 이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제거하는 듯이 보이는 경향이 있는 신의 속성들은 일단 한 편으로 치워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적 자기 제한의 개념에 대한 가장 극적인 진술은 디트리히 본회퍼의 「옥중서신」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십자가 위에 달리심으로써 자신을 세상에서 밀려나도록 하신다. 그는 세상 안에서 연약하고 힘이 없으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우리를 돕는 바로 그 방식, 그 유일한 길이다. … 성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무능하심과 고난으로 인도한다. 고난당하는 하나님만이 도울 수 있다."

결 론
점점 더 능력의 개념이 의심받는 시대에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이 하나님이 전제군주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은 힘 없는 사람들 편에 서기로 선택하셨다는 것을 의심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보는 것은, 새로운 통찰을 제공해준다. 본고를 통하여 논자는 전능의 개념이 논리적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전능하시다는 주장에는 어떤 모순도 들어 있지 않다.

참고문헌(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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