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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왕의 사역 : 유대인 문둥병자를 치료하심.

열려라 에바다 2024. 2. 7. 10:37

 

 

천국 왕의 사역 : 유대인 문둥병자를 치료하심(마8:1-4)
천향추천 0조회 1224.02.07 05:35댓글


예수께서는 천국을 설립하신 후에
유대인 문둥병자를 치료하시고 이방인 백부장의 종을 고치시며 제자 베드로의 장모를 낫게 하신다.
이러한 치료 사역에는 평가 구절이 없고 이사야 예언의 성취라는 해석을 덧붙인다(참조 마12:17-21).
이러한 기록방식은 예수의 사역이 종말론적인 성격임을 나타낸다.
예수의 사역은 유대인 문둥병자와 이방인 백부장, 제자 베드로의 장모를 치료하는 순서로 진행된다.
이는 이사야가 예언한 ‘자기 백성의 연약함을 짊어지고 고난을 받는 여호와 종의 사역’의 성취이다(마8:17).
예수께서는 여호와 종의 권세로 모든 질병으로부터
유대인 문둥병자와 이방인 백부장의 종, 제자 베드로의 장모를 치료하신 것이다.
그런데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문둥병자를 치료하신 사역의 위치가
예수께서 전도사역을 확장하실 때이다.
예수께서 전도사역을 확장하실 때
한 문둥병자를 치료하신 일과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신 일을 배열하고 있다.
특히 누가복음에서는 두 사건 앞에 네 제자를 부르신 일을 배치한다.
이는 네 제자를 부르신 일도 선교사역의 확장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전도사역을 시작하실 때에 네 제자를 둘씩 차례로 부르셨다고 기록한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는 도입하는 말이 없이 예수의 사역을 기록한다.
이는 마가복음의 초점이 하나님 아들의 사역과 복음 전도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라는 말로 전도사역을 시작한다.
한 동네에 계신 예수는 광야에 거하는 세례 요한과 대비된다.
광야의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심판과 회개를 외치는 엘리야 모델이다.
그러나 동네에 거하는 선지자는 남은 자를 위하여 회복 사역을 펼치는 엘리사 모델이다.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치료사역을 시작할 때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를 수많은 무리가 따르는데’라는 말로 시작한다.
천국 왕께서는 갈릴리 산에서 종말의 천국을 설립하신 후에,
유대인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서 깨끗하게 하시고,
이방인 로마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셔서 천국 백성으로 영접한 후에,
제자인 베드로의 장모와 백성들의 모든 질병을 치료하신 순서로 기록한다.
이러한 천국 왕의 치료사역이
이사야가 예언한 ‘자기 백성의 연약함을 짊어지신 여호와의 종의 사역’이라고 해석한다.
이처럼 마태는 천국 왕의 권세와 긍휼의 완전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마가와 누가는 병 고침을 받기를 원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강조한다.
그래서 마가는 문둥병자가 나아와서 예수께 꿇어 엎드려서 간구하였다고 말한다.
그 결과 문둥병이 그 사람을 떠나 깨끗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누가는 문둥병이 떠났다고만 기록한다.
문둥병이 떠났다는 말은 문둥병이 악한 권세임을 의미한다.
이는 누가복음이 악한 권세로부터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말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가복음에서만 예수께서 문둥병자를 불쌍히 여기셨다고 기록하는 것은
그가 악한 권세에 억눌린 불쌍한 자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이처럼 마가복음은 악한 권세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아들의 복음을 말한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천국 왕의 행차 앞에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서 엎드려 절한다.
이는 천국 왕의 판단을 기다리며 조아린 죄인의 모습이다.
그러자 수많은 무리와 함께 행차하시던 천국 왕께서는
손을 내밀어 문둥병자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고 말씀하신다.
그 결과 즉시로 문둥병은 깨끗하게 된다.
율법에 따르면 문둥병자는 하나님 앞에서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와 율법으로부터 구원하시는 천국 왕이심을 말한다.


예수의 세 가지의 치료사역은 천국의 생명을 나타내신 일이다.
천국의 생명은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된 하나님 백성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이다.
이러한 천국의 생명은 모세가 아니라 천국 왕으로부터 주어진다.
따라서 천국 왕의 사역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구원하시는 사역이다.
율법 아래에서 각종 부정과 병마로부터 고통받는 백성들에게 천국의 생명을 부여하시는 사역이다.
이러한 사역이 부정한 문둥병자와 이방인 백부장의 하인과 제자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사역이다.
이러한 세 가지 이적은 언약 체결적인 내용으로 묶어져 있다.
마태복음의 이적은 ‘셋’의 묶음으로 반복적으로 기록된다.
이러한 사역은 천국 왕께서 나아온 자들에게 천국의 생명을 베푸시는 일이다.
예수께 나아온 유대인의 문둥병을 치료하심을 통해서,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온 백부장의 종을 낫게 하심으로,
율법 아래에서 자신을 따르는 제자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치료하심으로 천국의 생명을 베푸신다.
따라서 예수의 사역은 그가 종말의 천국 왕이심을 나타낸다.
이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옛 통치질서를,
모세를 통해서 규정된 부정과 정결 규례를 온전케 하신 치료사역이다.
레위기 13-14장에는 문둥병에 대한 부정과 정결 규례를 기록한다.
율법 아래에서 이스라엘이 문둥병에 걸리면 진 밖으로 쫓겨난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 부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둥병자는 여호와와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지 못한다.
제사장은 7일을 주기로 문둥병이 나았는지를 살펴야 한다.
문둥병 환부가 엷어졌거나 줄어들었으면 7일을 더 기다려야 한다.
이는 여호와께서 치료하시는 7일의 약속을 바라보는 일이다.
문둥병이 나았다면 7일을 기다렸다가 진으로 돌아와서
율법의 규례를 따라 여호와께 제사하도록 하였다.


모세율법은 문둥병자는 여호와 앞에서 부정하다고 규정한다.
따라서 그는 이스라엘 진 밖으로 추방된다(레13:-14:).
문둥병을 선언하고 나았음을 판별하는 판정권은 제사장에게 있다.
문둥병자는 병이 나은 지 7일이 지난 후에야 몸을 정결하여 집으로 돌아올 수가 있다.
그는 제 8일에는 몸을 정결하게 하고
여호와께 속죄제와 번제, 소제물을 드려서 여호와의 백성으로 온전케 된다.
문둥병자에 접촉되면 그에게도 부정이 옮아져서 부정하게 된다.
따라서 사람이 접근하면 문둥병자는
    “부정하다. 부정하다. 부정하다”
라고 외쳐서 접근을 막아야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문둥병자에게 의도적으로 손을 대시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고 말씀하신다(마8:3).
이러한 의도적인 접촉은 모세율법에서는 엄금하는 일이다.
그런데 개혁신학(칼빈주의 신학, 장로교 신학)은 예수께서 율법을 온전히 지키셨다고 주장한다.
예수께서 율법을 온전히 지키셔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게 되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께서 결코 율법을 지키신 적이 없다고 말한다.
산상수훈이나 경건에 관한 가르침,
예수께서 행하신 사역도 모세율법에 반하는 것들이다.
이처럼 율법에 반하는 내용은 산헤드린 공회의 두 증언으로 요약된다.
그것은 예수께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다시 세우리라”
는 주장이다.
이러한 두 증언은 모세율법의 토대와 근본을 허물고 부인하는 내용이다.
물론 종말에 아들을 보내시기 전에는 모세율법은 여호와의 뜻이다.
그래서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라고 노래한다(시1:2).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이후에 율법은 우리가 지켜야 할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백성들이 지켜 행해야 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직접 세상에 등장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종 모세를 통해서 하신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 아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신약에서는 모세율법이 아니라 아들의 가르침을 듣고 행해야 한다.
이는 모세율법(구약성경)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지 말고
아들의 복음을 따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겨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종말에는 하나님께서 오직 아들을 통해서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히1:1-2).


미리암은 모세를 대적하여 여호와의 징벌을 받아 문둥병에 걸린다.
그 결과 7일 동안 이스라엘 진 밖으로 쫓겨났다.
이처럼 미리암을 문둥병으로 심판하시고 진 밖으로 쫓아내셔서 누가 하나님의 중보자인지를 나타내셨다.
무엇이 여호와 앞에서 부정하며 무엇이 여호와와 멀어지게 하는 일인지를 나타내셨다.
따라서 모세를 대적하는 일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이다.
이는 모세의 말은 여호와의 음성이며
모세의 사역은 여호와께서 그의 영으로 행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세를 믿고 그의 말에 순종함이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일이다.
이처럼 구약에서 문둥병은 여호와 앞에서 부정한 병이다.
따라서 문둥병자는 7일을 주기로 하여 여호와께서 은혜를 베푸신 여부를 기다렸다.
여호와께서 문둥병자를 치료하셨다면
제사장은 그가 정결하다고 선언한 후에 율법의 규례를 따라 제사하도록 하였다.
또 문둥병자와 접촉되는 자마다 부정하여졌다.
따라서 문둥병자는
    “부정하다. 부정하다. 부정하다”
고 외쳐서 사람들의 접근을 막아야 하였다.
그런데 무엇을 만지더라도 거룩하게 되는 것은 성전 안에 있는 기물이다.
성전의 기물을 만지면 거룩하게 된다.
이는 성전에는 여호와께서 임재하여 계시기 때문이다.
이는 유대인들이 잘 알고 숙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성전에 계셨던 여호와께서 사람으로 자기 땅에 오셨다.
예수께서는 의도적으로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셔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부정한 자기 백성에게 손을 대셔서 정결하게 하시고 천국 백성으로 받아들이셨다.
그리고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고 말씀하신다(마8:4).
이는 여호와의 율법 통치를 인정하시고 율법이 명하는 바를 따라 행하라는 말씀이다.
왜 예수께서는 문둥병자를 의도적으로 접촉하셔서 율법에 저촉되는 행동을 하시고
한편으로는 문둥병을 치료받은 후에는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서 증거하라고 말씀하시는가?
왜 의도적으로 율법에 저촉되는 행동을 하시고
깨끗해진 후에는 율법을 따라 행하라고 하시는가?
공생애 당시는 기존의 율법의 통치와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가 병행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율법과는 다른 새로운 통치를 시행하기 위하여 세상에 보냄을 받으셨다.
아들을 통한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는 예수와 제자들의 사역을 통해서 확장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 후에는 종말의 통치질서로 보편화가 된다.
따라서 오순절 이후에는 모세율법은 설 자리가 없다.
이는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율법에 대해서는 죽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에 대하여 산 자이기 때문이다.


유대인 문둥병자가 나아와서 예수께 절하고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라고 간청하였다.
이에 예수께서는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고 하자 즉시 문둥병이 깨끗해졌다.
이처럼 문둥병자를 의도적으로 손을 대신 것은 율법이 금하는 행동이다.
이는 구약에서는 여호와께서 엄금하는 행동이다.
그 후에 예수께서는 나은 자에게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고 말씀하신다.
이는 율법의 통치를 인정하고 모세의 명대로 행하라는 말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자신은 율법을 지키지 않으시고
문둥병이 나은 후에는 모세가 명한 대로 행하라고 명하신다.
이는 공생애 기간은 율법의 통치와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가 공존하는 과도기이기 때문이다.
모세 율법은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종말에는 보내신 아들을 통해서 참되고 온전한 하나님 뜻이 나타난다.
따라서 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공생애 동안 대립하고 충돌하면서 공존한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완성된 후에는 그리스도의 통치만이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신약시대에서 모세 율법은 설 자리가 없다.
모세가 명한 성전제도와 성전제사, 제사장 제도와 십일조 제도는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종말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율법 아래에 보내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속량하여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
고 말한다(갈4:4-5)
이처럼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유대인 가운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리스도임을 말한다.




하늘에 속한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