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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양들의 문이다

열려라 에바다 2024. 2. 8. 10:19

나는 양들의 문이다

부부나 부모 자식처럼 혈연으로 이루어진 집단이 “가족(家族)”입니다. “한 가족이 생활하는 집”을 가리켜 한자어로 “가정(家庭)”이라고 합니다. “가구(家具)”는 “집에 갖추는 것”, “집안 살림에 쓰이는 기구”를 말하는데 이렇게 “가(家)”는 “집”을 뜻하는 “집 가(家)” 자임이다.
“짐승”은 “몸에 털이 난 동물”, “사람이 아닌 동물”을 뜻하는 말입니다. 소, 말, 돼지, 개 등 “집에서 기르는 짐승”을 “가축(家畜)”이라고 합니다. “가금(家禽)”은 닭, 오리, 거위 같은 “집에서 기르는 날짐승”을 뜻합니다.
“치다”는 여러 뜻을 지니고 있고, 그중 하나가 “기른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양(羊)을 기르는 사람을 “양 치는 사람”, 즉 “양치기”라고 합니다.
“양치기 소년”은 이솝 우화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 중의 하나입니다. 어느 마을에 양치기 소년이 양을 치고 있었는데 삶이 지겹고 심심하여서 늑대가 나타났다고 소리쳐서 마을 사람들이 손에 농기구를 들고 왔는데, 사람들이 와서 보니까 양치기 소년이 심심하여서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어느 날에 진짜 늑대가 나타났을 때, 소리쳐도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소나 양을 치는 사람을 “목자”라고 하며 “목(牧)”이 “치다”는 뜻입니다. 양을 치는 일을 “목양(牧羊)”이라고 합니다.
“가축을 치는 장소”, “가축을 기르는 곳”을 “목장(牧場)”이라고 하는데 대관령에 “양떼 목장”이라고 하는 장소가 있는데 경치가 아주 좋습니다.
“떼”라는 말은 “목적이나 행동을 같이하는 무리”를 의미하는 단어여서 행동을 같이하는 양들의 무리를 “양 떼”라고 합니다.
“목초(牧草)”는 “소나 양이 먹는 풀”을 뜻하며 “꼴”이라고 하기도 하며, “목축(牧畜)”은 소나 양과 돼지 등의 “가축(家畜)을 치는 일”을 뜻합니다. 이렇게 “목(牧)”은 “치다”, “기른다”를 뜻하는 한자입니다.
오늘날의 “목사(牧師)”라는 말이 “목자(牧者)”를 의미하는 용어입니다. 크리스트교 신자를 양(羊)에 비유하여, 신자를 기르는 자가 목사입니다. 목자가 꼴을 먹여 양을 기르듯이, 목사는 말씀을 먹여 신자를 기릅니다.
사람은 개나 소나 돼지처럼 육체적인 음식만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며 영(靈)의 음식인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먹고 살아갑니다.
사람을 기른다고 하여 “목사”라고 하는데 “사”는 “스승 사(師)”입니다. “판사”와 “검사”는 “일 사(事)” 자며 “변호사”는 “선비 사(士)” 자를 쓰며, “의사(醫師)”는 목사(牧師)와 마찬가지로 “스승 사(師)” 자를 사용합니다.
요한복음 10장의 내용은 ‘좋은 목자(牧者)’입니다.
요한복음 10장은 크리스천들에게 충분하게 사랑받기에 마땅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이 크리스천들에게 사랑받기에 마땅하듯이 말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21절은 좋은 목자이신 예수님에 관한 내용입니다.
10:1-21에 나오는 좋은 목자 강화(the Good Shepherd Discourse)는 9장에 이어지는 내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양의 목자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제사장들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은 참 목자가 아니라 절도와 강도입니다.
10장 전체가 하나의 단위인지에 대해 주석자들의 의견이 갈립니다.
이 단락을 9:39부터 10:21까지로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본문 10장 1-10절은 ‘목자와 도둑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1. 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자가 그 양들의 목자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5절에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양 뜰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오르는 자는 절도와 강도나. 문을 통하여(by the door) 들어가는 자는 그 양들의 목자라. 이에게 그 문지기가 열고 그 양들은 그 음성의 듣고, 그가 자기 양들을 이름을 따라서 부르고 그것들을 인도하는지라. 그가 모든 것들을 꺼낸 때 그것들 전방에 가고 그 양들이 그에게 따르니, 그것들이 그의 음성을 알았기(know) 때문이라(because). 그러나 낯선 자에게는 그것들이 따르지 아니하겠으며 그에서부터 도망하겠으니 그 낯선 자들의 음성을 알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면서 “진실로”라는 단어를 두 번 말씀하셨는데 “진실로”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아멘”인데 이것은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진실로”라는 말이 한 번이라도 사용되었으면 강조하는 말씀인데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라고 두 번 말씀하심으로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진 자들, 당시 지도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로 백성들의 지도자였습니다.
“양 우리”, “우리”라는 말은 “안뜰”이라는 의미인데 “뜰”은 마당입니다. “우리”라고도 하는데 “우리”는 “짐승을 가두어 기르는 곳”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변에 담, 또는 담 대신 풀이나 나무로 만든 울타리가 있습니다.
그 안뜰 안으로 들어갈 때는, 법적인 것과 불법적인 것이 있습니다. 문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올라가는 바리새인들은 절도와 강도입니다. “그 양들의 안뜰”은 하늘이나 교회가 아니라, 유대교를 가리킵니다.
진실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이 이것입니다(요 10:1). 그 문을 통하여 그 양들의 그 안뜰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다른 곳으로부터 오르는 자인데, 저 사람은 절도고 강도입니다.
농부들은 가난하였으며, 목자들은 더 낮은 계급을 구성하였습니다. 하지만 목자들은 은유적인 문맥에서 지도자(leader)를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세우신 지도자가 “목자”로 언급되었습니다. 다윗 왕은 이스라엘의 목자로 언급되었습니다.
그 무엇보다 하나님 자신이 자기 백성의 목자로서 행동하셨습니다. 다윗 왕은 시편 23편에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라”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 목자와 거짓 목자의 차이점을 말씀하셨습니다. “절도”와 “강도”는 거짓된 목자들인 바리새인들을 가리킨 말입니다. 절도 및 강도는 은밀하게 침입하여 폭력적으로 양들을 강탈하여 갑니다. 이렇게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을 강탈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유대교’라는 안뜰에 문을 통하여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예언자들의 유대교를 악마의 교회로 바꾸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백성을 유대교 집단 밖으로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문을 통하여 들어가는(enters) 자는 양들의 목자입니다(요 10:2). 그 양들의 목자는 양 우리에 문을 통하여 정당하게 들어갑니다.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의 “목자”로 불리십니다(창 48:15, 49:24).
그 목자에게 그 문지기가 열고 그 양들은 그 음성의 듣고 그가 자기 양들을 이름을 따라서 부르고 그것들을 인도합니다(요 10:3).
그 목자에게 그 문지기가 문을 엽니다. 양 우리에 문이 하나밖에 없어, 문지기가 그 안에 들어가게 합니다.
“문지기”는 궁극적으로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안뜰, 양들, 문지기, 도둑들이 누구인지를 이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양으로 선택된 자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선택의 교리를 안 좋아하고 설교자들은 이것을 자주 설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택의 교리는 설교자가 무엇보다도 먼저 설교하여야 할 교리입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 자들만이 구원받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 한 가정에 약 백 마리 정도의 양이 있었는데, 양들의 특징이나 생김새에 따라서 별명을 지어서 별명을 불렀습니다.
자기 양들의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자기 양들을 부르십니다.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자기 양들인 그의 제자들을 각각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아시고 또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양들에 대하여 모르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잘 아시므로 이름을 따라서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양들을 양들 각각의 이름을 따라서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를 이처럼 아시고 이름을 따라서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나를 아시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는 때에 응답하는 자는 예수님의 백성입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이 모두 나오기까지 부르고서 양들을 인도합니다. 마치 목자가 ‘양순아’, ‘흰둥이’, ‘긴 귀’, ‘하얀 코’라고 부르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자기 백성들을 ‘OO야’, ‘대영아’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가 자기 양들을 각각의 이름을 따라서 부르시고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그가 모든 것들을 꺼낸 때 그것들 앞에 가고 그 양들은 그에게 따르니 그것들이 그의 음성을 알기 때문입니다(요 10:4).
예수님께서는 유대교의 안뜰 안에서 자기 양들을 모두 꺼내십니다. 그 음성을 아는 그 양들은 그 음성이 들리는 때에 그에게 따릅니다. 목자는 그 양들 앞에 가고 그 양들은 따릅니다(민 27:17, 시 80:1).
예수님께서 따르라고 하시니 마태가 예수님께 따랐습니다(마 9:9). 양들이 목자에게 따르는 것은 제자들의 길에 적합한 이미지입니다. 목자는 모든 양을 꺼내고서 그것들을 들판으로 인도하여 갔습니다.
그것들이 낯선 자에게 따르지 아니하겠으며 그에서부터 도망하겠으니 그 낯선 자들의 음성을 알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요 10:5).
양들은 자기들의 목자를 제외하고 다른 누구도 따르지 아니합니다.
이 말의 비유적 표현(figure)을 그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으나 그가 이야기하신 바들이 무엇인지 저들은 알지 못하였습니다(요 10:6).


2. 예수님께서 “나는 양들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7-10절에 “나는 양들의 문이라. 나의 앞에 온 모든 자는 도둑들과 강도들이나 그 양들이 듣지 않았노라. 나는 그 문이라, 나를 통하여 만일 누구든지 들어간다면 그는 구원되고 들어가고 나오고 목초를 발견할 것이라. 그 도둑은 만일 그가 훔치고 멸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면 오지 아니하며 나는 그들이 생명을 가지고 풍성한 것을 가지기 위해 왔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에 6장 35절에 “나는 생명의 떡(the bread)이다”라고 말씀하셨으며 또 앞에 8장 12절에 “나는 세상의 빛이다(the light)”라고 말씀하셨으며 여기 10장 7절에는 “나는 양들의 문(the door)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양들의 문”은 “양들의 안뜰 안으로” 들어가는 “문”과 구별되는 것인데 1-2절의 “문”은 예수님께서 유대교로 합법적으로 들어가심을 뜻합니다. 반면에 7절의 “양들의 문”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키시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의 선택된 자들은 이 문을 통하여 유대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양들을 유대교에서 꺼내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선택된 자는 예수님을 통해서 유대교, 세상에서 나오게 될 뿐 아니라, 오직 예수님이라는 문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문”은 하나밖에 없으며, “그 문”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다른 문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의 문밖에 없습니다.
이 문은 마태복음에 볼 때, 그 폭이 넓지 않고 그 폭이 좁은 문입니다. 사람은 좁은 문이시며 구원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들어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어느 길로 올라가든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된다’라고 말하나 그 꼭대기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악마가 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가 자기들을 좋은 일 많이 하는 종교로 잘 포장하였지만 그 천주교 꼭대기에 악마가 있습니다.
또한 크리스트께서 있어야 하는데. 안티크리스트인 교황이 있습니다, 교황이 예수님의 자리를 찬탈하여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일반 신부들과 수녀들과 신도들은 천주교의 실체를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황과 주교들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그들은 악마의 종들입니다.
그래서 “모범택시 2” 드라마에서 처음으로 천주교의 실체를 밝힙니다. 그랬더니 막 천주교인들이 주교를 나쁘게 말하였다고 난리 난 것입니다.
많은 드라마가 크리스트교를 나쁘게 묘사하고 천주교를 미화하였는데 “모범택시 2”라는 드라마가 드디어 천주교의 사악한 실체를 밝혔습니다. 그런데 교황과 주교들의 실체를 알고 보면 드라마보다 나쁜 자들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이르는 오직 유일한 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도달하는 유일한 길과 유일한 문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죄인이 나아갈 수 있는 문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문”을 통해서만 “영생”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왕국의 생명 안에 들어가는 문이 되십니다. 구원영생의 문인 예수님을 전하는 복된 구원영생교회 성도가 다 됩시다!


1) Andreas J. Köstenberger, 『BECNT 요한복음』, 신지철·전광규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7), 408.
2) James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서문강 옮김 (파주: 쉴만한 물가, 2017), 102.
3) Colin G. Kruse, 『요한복음』,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배용덕 역 (서울: CLC, 2013), 344.
4) G. K. Beale·D. A. Carson 편집, 『누가·요한복음』, 신약의 구약사용 주석 시리즈 2권, 우성훈·배성진 옮김 (서울: CLC, 2012), 599.
5) D. A. Carson, 『요한복음』, PNTC 주석, 박문재 옮김 (서울: 솔로몬, 2017), 696.
6) John Calvin, 『요한복음 Ⅱ』, 오광만 옮김 (서울: 규장, 2010), 10.
7) Gerhard Maier, 『요한복음』, 마이어 주석 시리즈, 송다니엘 옮김 (서울: 토브북스, 2021), 443.
8) J. Ramsey Michaels, 『NICNT 요한복음』, NICNT 성경주석, 권대영·조호영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22), 704.
9) Craig S. Keener, 『키너 요한복음 Ⅱ』, 이옥용 옮김 (서울: CLC, 2018), 2117.
10) Arthur W. Pink, 『요한복음 강해』, 지상우 옮김 (파주: 크리스천 다이제스트, 2015), 521-523.
11) Keener, 『키너 요한복음 Ⅱ』, 2124-2125.
12) Keener, 『키너 요한복음 Ⅱ』, 2128.
13) Keener, 『키너 요한복음 Ⅱ』, 2129.
14) Maier, 『요한복음』, 마이어 주석, 444.
15)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105.
16) Köstenberger, 『BECNT 요한복음』, 412.
17) Pink, 『요한복음 강해』, 521.
18) Keener, 『키너 요한복음 Ⅱ』, 2144.
19) Pink, 『요한복음 강해』, 524.
20)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106.
21)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108.
22) 권해생, 『요한복음』, 고신총회 설립 60주년 기념 성경주석, 343.
23) Maier, 『요한복음』, 마이어 주석, 444.
24) Maier, 『요한복음』, 마이어 주석, 446.
25)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107.
26)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107-110.
27)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105.
28) Köstenberger, 『BECNT 요한복음』, 413.
29) Pink, 『요한복음 강해』, 526.
30) Carson, 『요한복음』, PNTC 주석, 704.
31) Köstenberger, 『BECNT 요한복음』, 413.
32) Pink, 『요한복음 강해』, 527.
33) G. R. Beasley-Murray, 『요한복음』, WBC 성경주석 36, 이덕신 역 (서울: 솔로몬, 2001), 378.
34) Keener, 『키너 요한복음 Ⅱ』, 2149.
35) Michaels, 『NICNT 요한복음』, 716.
36) Pink, 『요한복음 강해』, 529.
37)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114.
38)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114.
39)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115.
40) Beasley-Murray, 『요한복음』, WBC 성경주석, 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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