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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로움, 체다카

열려라 에바다 2024. 4. 9. 08:07

하나님의 의로움, 체다카

 

의로움은 헬라어로는 '디카이오쉬네(dikaiosyne)'는 히브리어로 ‘체다카(Tzedakah)’, ‘미쉬파트(mishpat)이다.

 이 단어들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먼저, '체다카(Tzedakah)’는 첫째는 “자선(Charity)”,  둘째는 “정의(Justice)” 그리고 "의로움, 경건, 덕(창15:6)"을 뜻한다.

다음은,  ‘미쉬파트(mishpat)는 재판의 태도, 옮음, 공평(신16:19~20)의 뜻이 있다. 

그리고,  '디카이오쉬네(dikaiosyne)'는 광의의 뜻으로는 올바름, 생각이나 뜻이 하나님의 뜻과 합하는 사람(히5:13,7:2), 예수님의 위엄과 무죄성을 표현할 때(요16:8)에 쓰였으며 협의의 뜻으로는 정의, 공평(행17:3) 등을 뜻한다.

 체다카는 “자선이란 곧 정의”라는 뜻이 있다고 하겠다.
 
 히브리어에는 ‘남에게 베풀다’라는 자선을 의미하는 단어가 없지만, 가장 비슷한 말이 ‘체다카’이기에 ‘자선’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체다카는 ‘해야 할 당연한 행위’를 뜻하는 것이다.
 어감의 차이가 있음에도 언어의 한계성으로 인해서 언어를 차용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롬3장에  '이 세상 아무도 의로운 자가 없다고 했고, 예수님도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이 선하시다'고 하셨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다른 거짓 신들과 달리 의로우신 것인가?
하나님의 의는 어디에서 비롯되며, 무엇이 하나님을 의롭게 하는 것일까?
 의로움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체덱 또는 세덱’이다.
창14장에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였던 ‘멜기세덱’의 이름은 바로 ‘의(세덱)의 왕(멜기)’을 뜻한다.
 이 ‘체덱’과 어근이 같으면서 또한 성경에서 같은 의미로 쓰이는 단어가 ‘체다카’이다.
 그런데 ‘체다카’의 의미는 해야 할 당연한 행위 이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체다카’는 ‘선한 행위’, 기부, 특히 가난한 자를 도와주는 행위를 의미한다.
  유대인들의 체다카 교육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저금통을 갖는다.
저금통이 채워지면 시나고그(회당)로 저금통을 가져간다.
회당에서는 저금통의 돈을 모아 가난한 이웃들을 위하여 사용한다.

 복지제도의 바탕이 되는 구민법의 제정은 영국에서 17세기에 시작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저금통으로 해야 할 당연한 행위 을 실천하도록 교육을 항다. 때문에  ‘체다카”가 몸에 베어 있다.
 유대 사회는 동족끼리는 마치 친형제처럼 가깝게 지낸다.
그러므로 자기 형제가 어려움을 당할 때는 기꺼이 돕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유대인의  해야할 당연한 행위로서의 자선은 자기 수입의 어느 일정한 한도 이상을 내놓는 것을 금한다.
 예를 들면, 부자로서 여유가 있을 경우에는 수입의 1/5 정도가 허용되고, 보통 가정의 경우에는 1/10 까지만 허용된다.
 이와 같은 자선 기금은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받게 된다.
 복지국가로 가려면 유대인들처럼 어려서부터 돈을 절약할 수 있는 훈련과 자기 몫을 이웃을 위하여 바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될 때 시작할 수 있다.
 그들의 이 작은 저금통을 일컬어  ‘체다카’라 한다.
체데카는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자선행위를 말한다.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인간을 인간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긍휼을 베풀며 어려운 자를 도와주는 자가 진정으로 의로운 자, 의인인 것이다.
 
 유대인들의 또 다른 체다카를 소개하면, 시장에서 오후가 되면 그들이 팔건 물건의 일부를 비닐에 담아놓거나 한쪽으로 떼어놓는다. 한국에서는 그 시간 마트에서 ‘마지막떨이 세일’을 하지만 유대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무료로 가져갈 수 있게하는 상인들의 배려이다.

시편125편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그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로다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그의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의 대적들이 받는 보응을 마침내 보리로다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 
 악인은 이를 보고 한탄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되리니
  악인들의 욕망은 사라지리로다 –시편 112:1-10
하나님의 의는 바로 이러한 사랑의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도다” (시편 34:18).  곤궁에 처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그의 사랑이 바로 그의 의의 본질인 동시에 그 근원인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하여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고(레위기 19:18) 과부와 고아와 이방인을 도와줄 것을 가르치셨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미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남을 해하려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 ” -슥 7:9-11-

하나님의 체다카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예수님을 보내시어 우리가 진 죄의 값을 치르게 하셨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우리 모두를 의인으로 만드셨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5:21-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사랑으로 큰 의의 행위, ‘체다카’, 즉, 그의 아들 예수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베푸셨고, 그럼으로써 그의 공의를 이루셨다.
여기에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진리가 있다.
체다카’의 베품이 없이는 어떤 의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 것을 희생하여 사랑을 행함이 없이 이룰 수 있는 공의는 아무 것도 없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의로 만드셨다고 했다.
의인은 두려움 없이 사랑을 베풀고 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면, 우리의 의는 어디서 오는가?
우리의 의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온다.
 롬1:17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라 하셨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과 의로우심을 믿는 믿음 때문에 우리도 아무 걱정이나 두려움 없이 우리의 생명을 베풀고 의를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공의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고(시25:9) 성령을 받으며(사42:1) 교육될 때(창18:19)에 가능하다.
 공의를 행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굳건해지며(잠16:12) 공의 행한 사람은 큰 은혜를 누린다.(시15:1~2, 습2:3))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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