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갈라디아서 서론

열려라 에바다 2024. 4. 11. 16:15

갈라디아서 서론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으로서 그 중요성에서 훨씬 더 긴 로마서나 고린도서에 필적한다. 그래서인지 많은 학자들은 본 서신을 가리켜 '짧은 로마서'라고 부른다(Luther, Duncan, Cartledge, Thiessen, Tenney, Allan, Barclay). 사실 연대적으로 살펴볼 때 로마서는 갈라디아서를 확대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모두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와 사랑의 복음은 결실인 윤리적 명령을 대담하게 가르쳤다. 한편 갈라디아서는 종교개혁자들에게 성경적 진리의 자유와 부흥의 선언서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루터'는 갈라디아서에서 자신의 신앙과 생활을 위한 힘과 개혁 사업을 위한 튼튼한 병기를 발견하였다. 그는 갈라디아서에 대하여 말하기를 '갈라디아서는 나 자신의 작은 편지이며 나는 갈라디아서와 약혼하였다'고 했다. 또한 그는 본 서신을 자신의 아내 이름인 '캐티 폰 보라'(Katie von Bora)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영국의 유명한 석학인 '윌리암 람세이'(William Ramsay)는 '갈라디아서는 유일무이한 훌륭한 서신으로 여러 가지 열렬하고 격렬한 감정을 짧은 여섯 장에 모두 포함하였으며, 다른 어떤 저서도 이 서신에 필적할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또한 '파라'(Farrar)도 이 서신에 대해 '비록 그 분량은 짧지만 여기에 기록된 말씀들은 살아 있는 메아리를 불러일으킬 만하며, 이 말씀들은 영원토록 살아서 영적 해방의 대헌장으로 남을 것'이라고 극찬하였다. 또 다른 학자들은 갈라디아서를 물맷돌이라고 보고 종교개혁자들이 이 물맷돌로 거인 교황을 쓰러뜨렸다고 하였다(Findlay). 이 외에도 많은 신학자, 사상가들이 본 서신에 대해 많은 관심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갈라디아서가 지닌 고차적인 교리적 내용과 변증적 성격 및 시적 아름다움의 결여 때문에 교회사의 몇몇 시대에는 잘 알려지지 못하거나 총애를 받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종교개혁 이후로는 본 서신의 진가를 정당하게 평가받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억압된 마음들을 풀어 주는 역할을 했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어 왔다.

 

 

   제1부 갈라디아서의 역사적인 배경

 

   I. 저자 및 수신자

 

   1. 저자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하였다는 교회의 주장에 대해 심각한 문제 제기는 없었다. 본문 비평이 가장 활발하던 시기에도 갈라디아서의 바울 저작 문제를 의심하는 일은 거의 없었으며 대부분의 급진적인 비평가들도 바울서신의 특징뿐만 아니라 바울의 저작성에도 일치한다. 이처럼 갈라디아서의 저자 문제에 대한 일치된 입장을 보이는 명백한 이유는 모든 가능한 고찰, 즉 고대 문헌의 증명과 문체, 교리적 내용과 역사적 배경, 그리고 문학적인 분석을 통하여 볼 때 갈라디아서의 저자가 바울이라는 것을 의심할 만한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비평학자들은 만약 바울과 동류의 사람이 바울서신이라 불리는 다른 서신들을 썼다고 하더라도 갈라디아서만큼은 틀림없이 바울의 작품인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호언하였다(Schmidt, Nicol). 그리고 최근 수십 년 간 갈라디아서가 바울서신임을 부정하는 비판에도 확고한 입장을 표명하여 온 '핀들리'(Findlay)와 '라이트푸트'(Lightfoot)는 갈라디아서의 저작 문제나 진정성, 혹은 사도적 정경성이 고대로부터 의심받은 적이 없다고 말하고, 갈라디아서의 모든 문장이 이방인들에 대한 바울의 생활과 성격을 아주 완전하게 반영하기 때문에 갈라디아서의 진정성은 크게 문제시 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제 바울의 저작성을 증명하는 내적?외적 증거들을 살펴보자. 먼저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전하는 외증은 매우 명백하게 바울 저작성을 옹호한다. 초대교회 교부중의 한 사람인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는 자신의 저서에서 갈라디아서를 언급하면서 바울의 기록이라고 하였다. '허마스'(Hermas)와 '이그나티우스'(Ignatius)가 갈라디아서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폴리캅'(Polycarp)과 '바나바'(Barnabas)도 이 서신을 알고 있었으며, 바울의 기록이란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정경 목록에서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제외시켰던 '말시온'(Marcion)조차도 갈라디아서를 그의 정경 목록에 포함시켰다. 또한 갈라디아서의 내용을 인용한 교부들 중의 한 사람인 순교자 '저스틴'(Justine)은 바울 교리의 관점에서 구약성경을 해석하기 위해 갈 3장을 사용하였다. 또한 초기 영지주의자들도 이 서신을 사용하였으며, 바울이 기록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마지막으로 '이레니우스'(Irenaeus)와 '터툴리안'(Tertullian)과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도 이 서신을 인용하고 바울이 그 저자라고 하였다. 다음으로 내적 증거들도 외적 증거 못지않게 바울 저작성에 대해 강렬하고 확고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본 서신의 저자가 자신에 대하여 대담하게 증거한다는 사실이다. 즉 그는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들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갈 1:1)이라고 자신을 밝혔다. 또한 본문 가운데서도 전례 없이 바울이 본 서신의 저자임을 밝히는 언급이 나타나는데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갈 5:2) 한 본문이 그것이다. 갈 1, 2장에 나타난 바울의 개인적인 상황과 역사적인 배경들은 모두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의 선교 활동과 생애에 완전히 일치한다. 뿐만 아니라 본 서신은 바울서신으로 알려진 다른 서신들에서 볼 수 있는 논리와 문체를 상세하게 보여 준다. 또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에 관한 바울의 교리는 다른 서신들에서 강조된 바와 어긋남이 없다(참조, 갈 5:1). 더욱이 바울이 제시한 논점과 즐겨 사용하는 용어에서도 바울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즉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보는 당시의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반대의 논지를 폈던 것이나 신앙과 칭의 등의 용어를 자주 사용한 점들은 바울 저작임을 분명히 한다. 이 외에도 바울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용한 구절이나(참조, 롬 4:3-5갈 3:6), 베드로를 비난하는 관점(참조, 갈 2:14엡 2:4-19), 그리고 할례에 관한 논의(참조, 롬 4:9-12갈 2:12; 5:2-6; 6:12-16)와 성령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참조, 롬 5:5갈 5:16-25), 그리고 신앙과 자유의 복음에 근거한 바울의 윤리적 교훈(참조, 갈 5:13-23골 3:1-11) 등은 바울의 문체와 가르침에 일치한다. 따라서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하였다는 점에 대해서 어떤 의심이나 문제 제기가 있을 수 없다 하겠다.

 

   2. 수신자

 

     1) 수신자

   갈라디아서의 수신 지역 문제에 있어서는 크게 두 가지 설로 나누인다. 하나는 소아시아 지역 북방에 위치한 고대 갈라디아 왕국의 영역이라는 북갈라디아설이며, 다른 하나는 남방인 로마제국의 식민지 판도 내를 가리킨다는 남갈라디아설이 그것이다. 물론 이 문제가 갈라디아설의 근본적인 가치나 그리스도교 교리 자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신약학의 한 상식적인 문제로 학자들 사이에서 관심을 끈 이후 영국의 석학 '라이트푸트'와 '윌리엄 람세이'가 양 견해의 주요 대표자로서 흥미로운 논쟁을 편 바 있다. 그리고 최근 이 논쟁은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초대교회사를 연구하는 가운데 갈라디아 지역의 선교 양상을 재구성하면서 이 문제가 중요한 초점으로 부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2세기 가까이 의견 대립을 보였던 두 가지 견해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① 갈라디아의 역사적 배경

   갈라디아는 '소아시아'(Asia Minor) 반도의 중앙 부분을 형성하는 고원 지대의 북부에 위치한 지방을 일컫는다. 이 고원 지대는 B.C. 3세기 이래 이 지역에 정착한 일단의 '골'(Gauls) 유목민들에 기원을 두어 헬라어로 '갈라디아'라고 불렸다. B.C. 189년에 그 종족은 로마의 '만리우스 불소'(Manlius Vulso)에 의해 정복되었으나 로마는 오랫동안 그 왕국의 독립을 허용하였다. 그리고 왕국 스스로 군주를 세워 자치하도록 인정하였는데, 최후의 왕인 '아민타스'(Amyntas)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유력한 동맹군으로 자치권을 누렸다. 특히 '아민타스'(B.C. 36-25)는 '브루기아'(Phrygia), '루가오니아'(Lycaonia) 등을 합쳐 세력을 크게 확장하였다. 그러나 '아민타스' 왕의 사후(B.C. 25년)에 이 확장된 갈라디아는 로마제국의 한 행정 구역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갈라디아는 고유의 갈라디아 지방을 가리키는 광의의 의미와 단지 로마의 행정 구역 중 하나로 간주하는 협의의 의미를 시대에 따라 달리 사용하게 되었다. 바울 당시의 갈라디아에 속한 부속 지역은 '루가오니아'와 '이수리아'(Isauria), 그리고 '비시디아'(Pisidia) 일대이다. 이 지역들은 모두 고유의 갈라디아 지방 곧 북갈라디아 지방에서 서남쪽과 남쪽에 위치한다. 만약 사도 바울이 로마의 행정 구역으로서의 갈라디아 지방을 언급했다면, 갈라디아서의 독자들은 '루가오니아'의 도시들인 '이고니온'(Iconium), '더베'(Derbe), '루스드라'(Lystra)의 교회들뿐만 아니라 '비시디아' 지방인 안디옥 교회도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들'(갈 1:2) 가운데 포함시켜야 한다.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갈 1:2의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이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지에 대한 논쟁이 야기되었다.

   ② 북갈라디아설

   갈라디아서의 수신지가 북갈라디아라는 주장은 초대 교부들을 위시하여 18세기 말엽에 이르기까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Lightfoot, Chase, Moffatt, Dods, Ellicott, Conybeare, Neander). 이들이 주장하는 북갈라디아설 논증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북갈라디아 지역을 대상으로 갈라디아서를 보냈다는 사실은 초대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인식된 것이었다. 둘째로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문체를 고려할 때 북쪽 사람들의 언어와 상통한다. 즉 바울은 로마의 행정적인 명칭인 '갈라디아와…지방'이란 표현보다는 직접적인 지명을 즐겨 사용하였다. 세 번째로 본 서신에 기록된 특징들이 '시저'(Caesar) 당시의 '골'족과 연관된다. 즉 마음이 잘 변하고 자랑하기 좋아하며, 다투기 좋아하고, 음란하며, 사랑스러우며, 노하게 하는 갈라디아인들의 특징은 고대 '골'족과 연관된다고 한다. 네 번째로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자신이 시작한 갈라디아 복음화에 관계된 상황들을 서술하였는데 그의 갈라디아 복음 전도는 그의 신병 때문이었다(참조, 갈 4:13). 이는 그가 원기 왕성했던 제1차 전도여행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따라서 행 16:6에서처럼 성령이 허락지 않아서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갔다고 한 것은 그가 북갈라디아로 가서 전도하였다는 사실을 암시한다(참조, 행 18:23).

   ③ 남갈라디아설

   남갈라디아설은 18세기 말에 이르러 '슈미트'(Schmidt)에 의해 처음으로 제창된 것이었으나 '윌리암 람세이'(William Ramsay)의 현지답사에 근거한 실증으로 현재에는 오히려 유력한 학설이 되었다(Zahn, Burton, Weiss, Renan, Rendall, Thiessen). 이들 학자들이 주장하는 남갈라디아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먼저 바울이 북갈라디아 지방에 여행하였거나 전도한 흔적이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남갈라디아 지방에는 바울의 제1차 여행 때 전도하였으며, 제 2, 3차 전도여행 때에도 이 지역을 다시 방문하였다. 비시디안 안디옥(참조, 행 13:14-50), 이고니온(참조, 행 13:51-14:5), 루스드라(참조, 행 14:6-23), 더베(참조, 행 14:20) 등지에서의 전도 활동에 대한 기록이 상세하고, 또 이는 갈 1:9; 4:13의 기록과 상통한다. 두 번째로 바울은 갈라디아의 교회 명을 부를 때 로마의 행정 구역에 따라 불렀다(참조, 고전 16:19고후 8:1; 9:2갈 1:22살전 2:14). 세 번째로 바울은 신병 때문에 이 지방을 방문하였는데(참조, 갈 4:13), 몸이 쇠약해진 바울이 불편한 북방 여행보다는 남방 지역을 여행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더욱이 그가 언급한 지역은 모두 남방 지역이었다. 네 번째로 본 서신의 기록 동기를 살펴보면,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혼란케 한 유대인의 진출에 대해 기록하였는데 유대인들이 북방 지역까지 여행하여 교회를 혼란케 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다섯 번째로 갈 6:17에서 바울이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말한 것은 아마도 루스드라에서 받은 상처(참조, 행 14:19)를 가리키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행 16:6과 행 18:23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는 '브루기아 갈라디아'로 불리는 한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남부 갈라디아 지방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두 견해 모두 장단점을 지녔고, 또한 유력한 학적 논증이 뒷받침해 주기 때문에 두 견해 중 어느 것 하나를 취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바울의 전도 여행에 깊이 연관된 남부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에게 본 서신을 보냈다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성이 있다.

 

   2) 갈라디아의 교회들

   바울은 자신의 복음 전도를 위하여 소아시아 지역에서는 에베소를, 아가야 지방에서는 고린도를 중심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그런데 갈라디아 지역에서는 그 같은 중심 교회를 두지 않은 듯하다. 곧 본 서신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보내졌는데, 이 지역에는 특별히 부흥된 교회가 없거나 다른 교회들 가운데서 두드러지게 뛰어난 교회가 없어서인 듯하다. 바울의 복음 전도 당시 기독교가 광범위하게 퍼진 도시에서는 장로들이 운영하는 도시 자체의 교회들이 있었는데, 그 교회들은 조직에 있어서 다른 교회들과는 독립적이었다. 성경에서 갈라디아 교회, 혹은 유대 교회라고 부르지 않고 갈라디아의 교회들, 마게도냐의 교회들, 그리고 유대 교회들 등으로 불리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에는 그 도시의 인구가 얼마나 되며, 교회 수는 얼마인지 등에 관한 기록은 없다. 따라서 초대교회의 수가 얼마나 되며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성경의 기록으로 추측컨대 갈라디아 지방에는 그 지역이 광대한 만큼이나 상당히 많은 수의 교회들이 분포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① 서신들이 보여주는 갈라디아 교회들

   바울은 갈라디아의 개종자들에게 자신이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말하였다(참조, 갈 4:13). 하지만 이 말의 내용이 바울이 육체의 병 때문에 갈라디아인들에게 왔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그 병 때문에 더 머무르게 될 것이라는 의미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다만 학자들은 전자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Bingham). 곧 갈라디아의 내륙 고원지대는 기후가 건조하여 신체 요양에 매우 좋은 곳이었으며, 또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개종자들의 극진한 보살핌에 대해 감사하는 것(참조, 갈 4:14, 15)으로 보아 그는 육체의 병으로 인해 요양 차 갈라디아에 여행한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시작된 바울의 갈라디아 전도는 새로운 이웃을 만날 때마다 복음과 성령의 능력을 함께 줌으로써 복음의 진가를 그들에게 확신시켜 주었다(참조, 갈 3:2, 5). 그러나 바울은 두 번째 갈라디아 방문에서 실망하게 되는데, 이는 처음 방문 시에 친절했던 그들이 더 이상 친절하게 맞이하지 않았던 때문인 듯하다. 더구나 갈라디아 교회 내에는 '유대화 논쟁'으로 큰 혼란에 빠지기도 하였다(참조, 행 15:1).

   ②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갈라디아 교회들

   갈라디아서보다 약 4, 5년 늦게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누가는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을 두 번 방문하였다고 한다. 즉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고, 또 제2차 여행 때에도 갈라디아 지방을 돌아보았다. 수리아 안디옥을 떠난 바울과 바나바 일행은 먼저 구브로 섬으로 건너가 전도했고, 밤빌리아의 버가에 상륙하여 소아시아 전도를 시작하였다(참조, 행 13:13). 그리고 길리기아의 관문이라 불리는 다소(Taurus)를 지나 51년 봄 경에 두 사도는 더베와 루스드리와 이고니온에 도착하였다. 이 지방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동력자로 삼아 복음 전도에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하였다. 누가는 갈라디아의 교회들이 믿음을 굳건히 하고 교인의 수가 날마다 더해졌다고 기록하였다(참조, 행 16:5). 또한 그는 행 18:22에서부터 바울의 전도 여행 중 특징적인 사건들을 기록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에는 실라와 동반하지 않고 디모데를 동반한 바울의 여행을 묘사하였다. 즉 누가는 바울 일행이 여러 동역자들과 함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지역을 거쳐 에베소로 오는 동안에 일어난 전도 행적들을 묘사하였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유럽 전도였기 때문에 자세한 기록이기보다는 특징적인 기록들이라고 봄이 타당하겠다.

 

   II. 기록 연대

 

   신약성경의 연대기 중에서 갈라디아서의 기록 연대만큼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서신은 없을 것이다. 그 만큼 본 서신의 기록 연대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제1차 전도여행이 끝날 무렵인 48년 경을 본 서신의 기록 연대로 보고 기록 장소도 안디옥으로 잡는다(Chase, Neander). 그리고 53년에 에베소에서 기록되었다는 주장이 있고, 56년 마게도냐에서 기록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극단적인 주장을 내세우는 비평학자들은 갈라디아서의 기록 연대를 바울의 로마 구금 기간(60년 경, 또는 그 이후)과 결부시키기도 한다(Duncan). 그런데 학자들 사이에서 이와 같은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는 이유는 바울의 전도여행 시기 중 언제 기록하였는가에 대해 정보가 미약할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의 수신 지역이 어디였는가에 대한 견해를 학자들 사이에서 서로 달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서신의 기록 연대 문제를 해결하는 지난한 작업을 위해서 학자들은 매우 다양한 시도를 하였다. 먼저 북부 갈라디아설의 지지자들은 비교적 후대의 기록 연대를 채택하는데, 그들은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길에 오르기 전에는 그 지역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이 제 3차 전도여행 기간 중에 북갈라디아를 방문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들 학자들은 갈라디아서의 기록 연대를 바울의 제3차 전도여행기간 중으로 본다. 예를 들어 '크레이다누스'(Greijdanus)는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 도중 에베소에서 썼다고 보고 그 연대는 약 53년으로 본다. 또한 '워필드'(Warfield)는 좀더 정확하게 고린도서보다 한두 주 앞서 갈라디아서가 기록되었다고 보고 그 기록 연대를 53년 겨울 경으로 본다. 더 나아가 북갈라디아설의 대표적인 지지자인 '라이트푸트'(Lightfoot)는 바울이 마게도냐를 떠나 아가야 지방을 여행하였던 제3차 전도여행 중에 본 서신을 기록하였다고 주장하고 '로버트슨'(Robertson)은 고린도에 도착하여 기록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본다면 그 시기는 56년 경이 된다. 이처럼 북갈라디아설을 주장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비교적 소폭이기는 하지만 의견의 차이를 보인다.

   다음으로 남갈라디아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의 경우, 그들은 북갈라디아설을 채택한 학자들에 비하여 보다 이른 시기를 잡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울이 자신의 제3차 전도여행 기간 동안 다른 어떤 교회들에서보다 먼저 남갈라디아에서 사역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지지하는 남갈라디아설에 준하여 바울의 갈라디아서 기록 연대를 추정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갈라디아서는 예루살렘 공의회 후에 기록되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는 예루살렘 공의회와 같은 중대한 회합 석상에서의 바울과 다른 지도자들 사이의 관계를 묘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갈 2:1에 서술된 바울의 예루살렘 여행은 행 15:1-4에 시사된 바울의 예루살렘 여행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해야 된다. 두 번째로 갈라디아서는 남부 갈라디아 지방에 대한 두 차례의 방문 후에 기록되었다. 1차 방문은 행 13, 14장에서 발견되고, 2차 방문은 행 15:40-16:5에 시사되었다. 따라서 갈 4:13은 바울이 육체의 연약함을 인하여 요양 차 갈라디아 지방을 방문했던 2차 방문을 가리킨다. 그리고 바울은 바로 이 사건, 곧 육체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천사와 같이 혹은 예수그리스도와 같이 영접한 사건에 대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감사의 글을 전한다(참조, 갈 4:14). 세 번째로 갈라디아서는 제2차 갈라디아 방문 후 얼마 안 되어 갈라디아 사람들의 회심을 보고 기록되었다. 곧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회심하였으나 너무나 빨리 자신들을 부르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본 서신을 기록한 것이다(참조, 갈 1:6). 네 번째로 갈라디아서는 2차 전도여행 도중 갈라디아에서 디모데와 실라의 도착 이전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Zahn, Berkhof, Hiebert, Lenski, Ridderbos). 만약 이 견해가 옳다면 갈라디아 교회의 여러 사람들에게 있어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자들인 디모데와 실라 두 사람이 보내는 안부 인사가 생략된 사실을 설명하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참조, 행 15:40; 16:1-3). 이 두 사람의 이름이 생략된 갈 1:1, 2과 그들의 모두 언급된 살전 1:1 및 살후 1:1을 비교하면 분명히 갈라디아서에 생략된 두 사람은 갈라디아서의 기록 시기에 갈라디아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전?후서를 토대로 볼 때 갈라디아서 기록 후에 디모데와 실라가 이곳에 도착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갈라디아서의 기록 연대는 데살로니가전서가 기록되기 직전인 50-53년의 거의 중간쯤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볼 때 갈라디아서는 현재까지 보존되어 온 바울의 다른 서신들보다 가장 이른 시기에 기록된 것이 된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이 같은 견해에 대해 반박하고 바울이 다른 서신들 속에서 밝히는 서신들의 내용들로 볼 때 바울의 서신은 일목요연한 사상적 흐름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Machen). 때문에 이들 학자들은 갈 2:16에서 기록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라는 구절이 살전 1:9, 10에서는 번복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의 기록 연대를 고찰함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몇 가지 사항들을 유의해야 한다. 먼저 바울서신의 주제는 다양한 교회들의 특수한 상황과 개별적인 구체적 요구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지 결코 사도의 점진적인 정신력의 발달에 의해 기록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갈라디아 사람들은 은혜로 말미암아 오직 믿음을 통해 얻는 구원의 교리에 대한 관심을 되찾도록 자극받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특별히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그들의 극적 회심과 관련된 격려와 그리스도의 재림 문제에 관련된 격려가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갈 2:16과 살전 1:9, 10의 관계는 바울이 마음이 변해서 그렇게 기록한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 사이에 구체적인 상황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 사람들과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서로 다른 지역에서 서로 상이한 환경 속에서 살았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두 번째로 갈라디아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상황이 달랐다고 하더라도 극단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한 학자인 '핸드릭슨'(Hendricksen)은 본 서신의 기록 연대를 데살로니가전서와 데살로니가후서 사이로 보지만 이들 세 서신은 모두 52년 경 고린도에서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갈라디아서의 기록 연대에 대한 여러 견해들을 살펴보면 각 견해들마다 장단점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극단적인 견해를 제외한다면 거의 비슷한 시기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 서신의 기록 연대를 결정함에 있어서 비록 어느 견해가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회의적인 태도에 대해 전해들은 직후에 지체 없이 본 서신을 기록하였으며, 그 시기는 대략 2차 방문 직후인 53년 경이거나 3차 방문 직후인 56년 경 혹은 그 시기 중간쯤에 에베소에서 기록하였다고 생각된다.

 

   III. 기록 목적

 

   갈라디아서가 받은 '종교 자유의 대헌장'이라는 칭호는 본 서신의 기록 목적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스도교는 구약성경에 깊이 근거하며, 구약성경에서 출발한 종교이다. 그러나 유대인의 우월감과 편견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와 결별하고 그리스도교라는 새로운 체계를 취하게 되었다. 사도행전이 바로 이러한 전환의 사정을 밝혀 주는 책이라고 한다면 갈라디아서와 히브리서는 새로운 전기에 맞추어 그리스도교를 변증하고 유대교를 공격하는 책이라 하겠다. 그 중에서도 갈라디아서는 히브리서의 변증적 성격과는 달리 공격조의 글이다. 바울은 전도여행에서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과 만났다. 갈라디아 지방만 하더라도 B.C. 2세기 초에 안티오커스의 통치 시기에 2천 명의 유대인들이 이 지역에 이주되어 정착하였으며, 로마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때에는 갈라디아 지역의 유대인에게 보호령을 내릴 정도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런 유대인 및 유대교와의 조화에 최대의 노력을 경주하였으며, 가능하면 그리스도교가 유대교를 그대로 계승하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가는 곳마다 유대인의 회당에서 유대인을 상대로 구약 성경을 해석하며 그리스도교를 전도하였다. 그러나 유대인의 집요한 방해로 인해 제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참조, 행 19:8, 9)에서 강론을 한 이후 유대인 회당을 떠나 독자적으로 전도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 같은 일은 필연적인 결과인지도 모른다. 제1차 전도여행 이후에 예루살렘에서 모인 예루살렘 공의회(참조, 행 15장)도 이같이 유대교와의 마찰에서 빚어지는 일들에 대한 중대한 결단을 촉구하는 고비였다. 즉 사도 공의회에서 문제가 된 것은 유대인 신자들로서 그들은 예수를 믿기는 해도 모세의 법을 지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도 공의회에서 성령의 증거를 강조한 결의는 유대인들의 주장을 누르고 믿음의 길에 어떠한 장애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에서 교인들이 사도 자신으로부터 처음 받아들인 복음, 즉 유대인들이 강조하는바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구원받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자 하였다. 즉 그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불변의 진리를 갈라디아인들에게 상기시키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목적을 위해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변증하여 그것의 신적 기원과 예루살렘 것임을 분명히 천명하였다(참조, 갈 1:1-24; 3:1). 더불어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필요한 것들이라고 인정되는 말씀을 기록하였다. 즉 그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참조, 갈 3, 4장)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의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었으며(참조, 갈 5:1-15), 성령 안에서 성장해야 한다는 점 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들의 유혹으로 범죄한 자들에게는 온유하게 대하며 유혹한 유대인에게는 단호하게 대해야 한다고 권면하였다. 이렇게 볼 때 갈라디아서는 유대인과의 관계에서 부딪치는 여러 가지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변증과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좋은 유대인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유대인들의 끈덕진 주장을 공격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라 하겠다.

 

   Ⅳ. 특징 및 구조

 

     1. 특징

 

     갈라디아서는 비록 짧지만 성격이 매우 뚜렷한 서신이기 때문에 그 특징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특징들을 살펴보면 첫째, 본 서신은 강한 도전적 또는 반박적인 내용의 서신이다. 갈 1:1에서 바울이 자신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고 선포한 것은 선전 포고이다. 그리고 갈 3:1, 3에서 갈라디아인들에게 사용하는 과격한 표현들을 위시하여 본 서신 전체적인 분위기는 다분히 전투적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끝맺는 표현(참조, 갈 6:17)에서도 바울의 단호한 입장은 쉽게 발견된다 하겠다.

   둘째, 갈라디아서는 고린도후서에 비하여 바울의 자서전적인 면모가 부족하긴 하지만 자신의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파헤쳤다는 면에서 자서전이라고 할 수도 있다. 곧 위기에 직면한 복음과 복음을 위하여 역시 위기에 처한 자신의 사도권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여 변증하는 사정이 이 같은 적나라한 자서전을 산출하였다. 특히 갈 1:18-2:12의 내용은 바울 개인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의 모습을 연구함에 있어서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셋째, 갈라디아서는 '짧은 로마서'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로마서와 매우 유사하다. 즉 로마서는 바울 신학의 결정으로서 그리스도교 교리의 근간을 이루는데 갈라디아서는 기록 동기와 서신의 체계적인 면에서 로마서와 오히려 대조를 이루지만 중심 사상은 완전히 일치하여 '소로마서'로 불린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관통하는 사상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의 대 진수이다(참조, 롬 3:20갈 2:16). 즉 구원은 율법을 행함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의롭게 되고(참조, 갈 3:1; 6:14), 성령 안에서 새로운 생활을 함으로써(참조, 롬 8:4갈 5:16-25) 그리스도와 일치되는 것이다(참조, 롬 6:6, 8갈 2:20). 이와 같이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 믿음으로 의롭게 됨 및 성령 안에서의 새 생활 등은 그리스도교 교리의 핵심적인 요소로서 두 서신 모두가 핵심적인 내용으로 다룬다. 이처럼 사상적인 면에서 두 서신이 유사한 반면에 그 체제에 있어서는 오히려 대조적이다. 즉 본서가 철저하게 전투적이며, 비조직적인 데 비하여 로마서는 설명적이고 논리적이며 조직적이다. 학자들은 이러한 체계적인 대조점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 근거를 두 서신의 기록 동기에서 찾는다. 즉 갈라디아서는 자신이 설립한 갈라디아 교회가 유대인의 모략으로 인하여 와해될 위기에 처하자 이를 반격할 목적으로 본 서신을 기록하였다. 반면에 로마서는 제3차 전도여행을 통하여 소아시아와 마게도냐, 아가야의 선교를 일단락지은 저자가 당시 세계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로마를 전망하면서 새로운 대 선교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하여 보낸 서신이었다. 여하튼 같은 내용이면서 전연 체계를 달리하는 두 서신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여러 가지 뜻이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넷째, 갈라디아서는 고린도후서와 매우 유사하다. 이는 문체적인 면에서의 유사점인데 두 서신 모두 극한 표현으로 일관하는 전투적인 서신이다. 그 중에서도 갈라디아서의 전투적 성격은 고린도후서에 비해 보다 심화된 양상을 보인다. 그리고 두 서신간의 내용 면에 있어서의 유사점도 로마서에 비해 덜 유사하지만 공통되는 점들이 많다. 예를 들어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변증(비교, 고후 10, 11장; 갈 1:1, 11-23), 바울의 자서전적 성격(비교, 고후 11:16-12:10갈 1:13-2:12), 그리스도의 속죄 교리(비교, 고후 5:21갈 3:13), 행함의 보응 교리(비교, 고후 9:6갈 6:7) 등에 있어서 내용상 매우 유사하다.

 

   2. 구조

 

     갈라디아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참조, 갈라디아서 도표1), 복음에 대한 정의에서부터 복음의 증거와 요구, 그리고 실천 및 복음의 최종적 승리에 대하여 일목요연하게 다룬다. 구조적인 특징이라면 다른 바울서신과는 달리 수신자에 대한 감사의 말이 없는 것을 비롯하여 서신의 일반적인 구조를 탈피하여 곧바로 사도권에 대한 논증이 시작된다는 점이다. 한편 갈라디아서의 구조를 통해서 볼 때 바울은 복음을 통한 그리스도인들의 자유에 대한 전기적 신학적 도덕적인 논증을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로마서의 체계를 따라갈 수 없지만 갈라디아서도 그에 못지않은 훌륭한 체계를 지닌 신학 논증서라 하겠다.

 

   제2부 갈라디아서의 특별 주제들

 

   I. 갈라디아 지방의 유대인

 

   갈라디아 교회에 몰래 들어와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면서 '다른 복음을 전한 자'들이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은 본 서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때문에 이 문제는 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갈라디아 교회에서 바울에 대해 대적한 자들이 그 지역에 이미 정착하고 있던 유대인 내지 유대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갈라디아 지방에 광범위하게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들과, 그들과 바울의 대적자들과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1. 갈라디아의 유대인

 

     갈라디아의 유대인들에 대한 기원은 B.C. 191년 이전까지 소급된다. 당시 시리아의 왕 안티오커스(B.C. 223-187)는 소아시아 대륙을 횡단하여 바벨론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였다. 그리고 그의 정책 중 하나가 자기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을 메소보다미아와 바벨론에서 루디아(Lydia)와 브루기아로 이주시키고, 그들을 다루기가 가장 편리한 성곽 지역에 거주하도록 하는 것이었다(Josephus). 동시에 이주된 유대인들에게 종교적인 자유를 허락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땅을 지급하였으며, 이 이주민들이 정부에 대해 충성하여 신임을 얻으면, 면책 특권을 부여하기도하였다. 만약 '요세푸스'의 보고대로 이 이주 계획이 시행되었다면 적어도 일만여 명의 유대인들이 소아시아 지역에 이주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안티오커스의 이 같은 정책은 '골'(Gaul)족의 침입으로 인한 갈라디아 지역의 소요 사태로 인해 취해진 것이기 때문에 이는 시행되었을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 어쨌든 브루기아 지방에 정착한 유대인들을 필두로 갈라디아와 같은 비옥한 지역에 뻗어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그들은 종교적인 자유가 허용되었기 때문에 본국의 유대인들과도 잦은 교통이 있었고, 종교적인 자문도 받았을 것이다. 이 같은 교류는 로마의 통치 하에서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즉 로마의 상업주의적 성향에 힘입어 갈라디아 지역의 유대인들은 다른 지역으로의 진출도 꾀하였다. 더욱이 로마의 보다 편리한 운송 시설과 도로 때문에 유대인들도 상업적인 민족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지금도 현존해 있는 이 도로는 소아시아 지역에서 교차하여 갈라디아의 서북쪽 변경으로 뻗어 있으며, 동부로는 상업 중심지인 '다비움'(Tavium)으로 연결되었다. 아마 사도 바울도 이 도로를 이용하여 전도 여행을 다녔을 것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전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가 태동하게 되었다.

 

   1) 초기 장로들

   행 14:21-23에 의하면 바나바와 바울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그리고 안디옥을 방문하였으며,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삼고 그들을 위하여 각 교회에 장로들을 임명하였다고 하는데, 이 초기의 장로들은 유대인 개종자들이었다. 물론 어떤 학자들은 초신자들에게 장로직을 임명한 것은 매우 위험스러운 조처였다고 생각하여 이 초기의 장로들을 예루살렘 등지에서 파견된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한다(Jowett). 그러나 이 유대인 개종자들은 회당(synagogue) 출신들이었으며, 그 중에는 거룩한 말씀들(those sacred writings)을 익히 알고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아볼로는 그가 비록 유대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증거하였다. 물론 아볼로는 갈라디아 지역의 유대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볼로의 개종과 같은 유대인 개종자가 갈라디아 교회에서 장로로 피택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더욱이 갈라디아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자'로 임명된 사람들도 역시 유대인 중에서 개종한 사람들이었다(참조, 갈 6:6).

 

   2) 랍비식 교육

   유대인들이 개종하였다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구약성경이 유일한 경전이었으며 교육 방식도 유대인 학교의 방식을 따랐다. 때문에 매주일 읽혀진 유일한 성경은 구약이었으며, 그 구약성경은 기독교인들의 모임에서 설교와 교훈의 근거가 되었다. 따라서 구약의 역사, 예언, 경건한 말씀, 영적 표준으로서의 모세 율법의 교훈 등이 매주일 마다 원래부터 유대적 문화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졌다(참조, 고전 9:9). 그런데 그러한 유대적 요소들이 복음의 진리 가운데 매우 중요한 요소들이 되었다. 하지만 초대교회에서 구약성경을 읽고 랍비식 교육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초대교회의 경전이나 예배 의식은 유대인들의 안식일 예식과 별 차이 없었지만 초대교회만의 특별한 의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곧 매주일, 혹은 더 자주 성찬식이 거행되었으며, '사랑'(Agape)이라고 불리는 축제가 열려 신앙의 교제를 할 기회가 마련되었다. 뿐만 아니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을 부르며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다(참조, 엡 5:19).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성경을 반복하여 읽고 가르치는 가운데 유대적 색체가 기독교 안에서 계속 잔존하였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편지를 썼을 당시까지도 유대적 사고방식으로 옷 입혀진 기독교 진리를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계속 주입하였다. 그리고 이 같은 분위기에서 태동한 부류의 사람들이 곧 바울의 대적자들이었다.

 

   2. 바울의 대적자와 유대인

 

     전통적인 견해에 의하면 갈라디아 교회에서 바울에 대해 반기를 든 사람들은 유대주의자, 혹은 율법주의자들이라고 한다. '조웨트'(Jowett)는 이 대적자들을 40년대 후반에서 50년대 초반에 나타난 열심당 운동, 특히 '쿠마누스'(Ventidius Cumanus)가 유대 총독으로 있을 때 일어났던 이방적 요소를 제거하려는 운동과 관련시켜서 생각한다. 그 결과 그는 이 열심당원들이 자연히 바울과 같이 이방인을 동정하는 자들도 배척하였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들에 들어온 바울의 대적자들은 세상적인 요소들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끌고 가는 것으로 보아 바리새인적 유대주의자들은 아닌 듯하다. 더욱이 그들이 예루살렘에 유대인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사도 회의에서 자기의 복음에 대하여 일단 합의를 보았기 때문이다(참조, 갈 2:7-10), '리츠만'(Lietzmann)은 대적자들을 바울을 반대했던 베드로 계통의 유대주의자로 생각한다. 물론 그는 바울이 베드로와 바나바를 꾸짖은 것에 근거하여 이 같은 견해를 내세웠다(참조, 갈 2:11-14). 하지만 바울이 베드로를 꾸짖었던 것은 사도 회의의 합의를 어겼기 때문이 아니라 행동에 일관성이 없었기 때문이었으므로 그의 견해는 타당성이 없다. 또한 '쉴리어'(Schlier)는 이 유대주의자들이 랍비적 유대교에 속한 부류가 아니라 묵시문학적 유대교에 속한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견해도 입증할 만한 근거가 결여된 주장에 불과하다. 한편 '쉬탤린'(Staehlin)은 이 대적자들이 영지주의적 색체를 지녔으며, 동시에 율법주의적인 유대 기독교도들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이들은 넓은 의미에서 유대주의로부터 율법주의적인 요소를 받아들여 영지주의와 기독교적 요소들을 결합시킨 일종의 절충주의자들이라고 한다. 절충주의자들이라는 '쉬탤린'의 견해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를 하지는 않지만 그의 견해에서 하나의 가능성을 발견한 '뤼트게르트'(Luetgert)는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두 대적자들과 싸웠다고 설명한다. 즉 그에 따르면 바울은 한편으로는 유대주의자들을,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적 방종주의로 빠지는 영적인 열광주의자들을 상대로 싸웠다고 한다. 유대주의자들은 할례를 보편화시켜 갈라디아 교인들을 율법에 종속시키려 했다. 때문에 바울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하게 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영적 열광주의자들은 이미 영에 의해 구원과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혹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율법은 이제 무용지물이 되었기 때문에 율법의 행함이나 도덕적 행동이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도덕적 방종주의에 빠져들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자유를 육적인 욕정을 위한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권면하였다. 이러한 근거들을 살펴 볼 때 '뤼트게르트'의 견해는 매우 타당하다. 따라서 이 견해에 의지하여 결론을 내린다면 바울의 대적자들은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자들이자 영지주의적 성향을 띤 도덕적 방종 주의자들이며, 이들은 갈라디아 지역에 이미 정착했던 유대인들 중에서 나온 자생적 대적자들이라고 하겠다.

 

   II. '사도'라는 말의 신약적 적용

 

   1. 그리스도 이전에 적용된 '사도'

 

     '사도'란 단어의 헬라어는 <ajpovstolo" ; 아포스톨로스>인데 이 말은 고전 작가인 '헤로도투스'(Herodotus)에 의해서 '특사'(envoy), 혹은 '위임받은 사자'(commissioned messenger)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애틱(Attic) 헬라어에는 이 단어의 의미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즉 '사도'란 용어는 애틱 헬라어에서 결코 개인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해군 탐험대'라는 엉뚱한 의미로 사용되었다(Liddel, Scott).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헬라어 가운데서 '헤로도투스'가 사용하였던 것과 같은 의미가 다시 나타나는데 이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 또한 분분하다. 왜냐하면 '헤로도투스'가 사용한 용례와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용례가 전이되는 과정을 설명할 만한 중간 작가의 글에서는 이 단어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70인역의 알렉산드리아(A) 본문에 번역된 것을 통하여 이 단어를 발견한다(참조, 왕상 14:6). 약 2세기경 유대인 번역자인 '심마쿠스'(Symmachus)는 사 18:2을 번역하면서 한글 개역 성경에 '사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ykia;l]m' ; 말라킴>을 <ajpovstolo" ; 아포스톨루스>로 번역하였다. 이 외에도 '사도'라는 말은 당국에 의해서 발송되는 순회 서신을 전국에 배달하기 위하여 고용된 사람들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특히 유대인들의 종교적 지도자인 주교를 보좌하기 위한 일정한 종교 회의 회원들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회원들은 주교의 안건 심의를 도와주고 그의 명령을 멀리 있는 유대인들에게 발송하고 종교적인 목적을 위하여 그들의 연보를 수집하는 등의 역할을 하였다. 또한 유대인 랍비들은 모세를 '사도'로 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들을 근거로 그리스도 이전에 사도라는 말이 사용된 범위를 생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 단어는 그리스도교 초기에 개인을 명명하는 것으로 통용되었다. 둘째, 유대인들은 이 단어를 특정한 당국에 의해서 위임받은 사람들에게만 배타적으로 사용하였으며, 단순히 일반적인 사자를 묘사하는 데에는 문제와 관련된 어떤 사명  받은 사람들에게만 배타적으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이 단어는 일반인들에게나 이 칭호를 받는 자에게나 모두 신성한 의미로 연상되었다.

 

   2. 위임과 사도직의 형태

 

     1) 그리스도에 의해 위임된 사도들

   히브리서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용된 경우(참조, 히 3:1, 2)를 제외하면 '사도'란 말은 두 가지 형태의 위임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하나는 어떤 개인적인 개입이 없이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직접 위임받은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나 교회 제직들에 의해 위임받은 경우이다. 또한 이 두 가지 형태의 위임은 두 가지 형태의 사도직을 낳았으며, 그 사도들의 활동분야도 뚜렷하게 구별되었다. 먼저 성경에 묘사된 보다 고등한 형태의 사도직을 가진 자들로서 그리스도에 의해 직접 위임받은 사도들을 살펴본다. 이들은 모두 열두 제자, 혹은 열두 명의 사도로서 복음서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또한 그들은 모두 예수께서 공생애 초기에 사도라고 칭한 자들이다(참조, 눅 6:13).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도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이 사도임을 재확인시켜 주셨다(참조, 행 1:2). 한편 사도 맛디아는 유다의 배반으로 결원된 열두 명을 보충하기 위하여 사도들에 의해 제비뽑기로 결정된 사람이다. 바울의 경우도 비록 그가 역사적인 예수를 만나지는 못하였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받은 사도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환상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만났으며, 그리스도의 부활 증인으로서 스스로 사도되었음을 공표할 뿐만 아니라 사도들 사이에서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사도들은 우선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들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 후에 그가 살아 계심을 목격한 사람들이다. 두 번째로 그들은 복음의 진리를 간직한 수탁자들이었다. 곧 그리스도의 가르치는 영을 통하여 그 사도들에게 전달되었으며, 또한 사도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전 세계에 전파되어야 했다. 그리고 이 복음으로 인해 교회가 조직되고 형성되었다. 세 번째로 그들은 이적을 행하는 은사를 받았다. 이 은사야말로 그들이 그리스도의 위임을 받은 증거였으며, 이 은사로 인해 그들의 사도직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네 번째로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은사를 다른 사람들에게 분여해 줄 수 있는 유일한 특권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이들 사도들이 가졌던 특징이나 특권 중에서 무엇보다도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특별한 지위가 약속되었다는 점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상징적인 열두 지파를 심판할 심판관들이 되었으며, 교회가 세워지는 열두 반석이 되었다.

 

   2) 교회에 의해 위임된 사도들

   초대교회 내에서 공공연하게 사용된 '사도'란 말은 분명히 그리스도에 의해 직접 위임된 사도들과는 구별되었다. 교회에 의해 위임된 사도로서 대표적인 사람은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인데 이들은 교회로부터 파견자로 여러 차례 위임을 받았으며, 성도들 사이에서 존경을 받았다. 또한 이들은 성도들로부터 여러 가지 칭호를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예루살렘에 방문하였을 때에는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개종한 로마 신자들을 방문하도록 위임을 받았다. 이때 그들은 '사도'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교회에 의하여 위임된 자들은 특사와 같은 직분을 가졌으며, 평범한 사자라는 말과도 구별되는 매우 독특한 신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참조, 롬 16:7고후 8:23빌 2:25).

 

   3. 교회에서 '사도'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게 된 이유

 

     위에서 열거한 두 종류의 사도직에 대한 몰이해로 인해 초대교회 내에는 사이비 사도들이 난립하는가 하면 사도라는 말은 허영심이나 자만심, 심지어는 물욕을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악용되었다(참조, 고후 11:13). 이처럼 경솔한 사람들이 사도직에 대해 잘못 인식하고, 파렴치한들이 '사도'라는 말을 정욕에 따라 사용함으로써 진실한 사도들이 전파하였던 하나님 나라의 우수성이 침해받게 되었고, 사도들의 권위가 손상을 입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회에서는 오직 교회의 사도들에게만 적용되었던 '사도'라는 칭호를 얼마 되지 않아 전면적으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참조, 계 2:3).

 

   III. 예루살렘 사도 회의

 

   1. 역사적 배경

 

     바울과 바나바가 제1차 전도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주의자들은 복음이 이방 세계에 전파된다는 소식으로 인해 걱정하게 되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사실이나 바울이 이방 선교를 하는 사실에 대해 유대주의적 성향의 어떤 사람들은 분명히 우려를 나타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교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유대인의 습관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그들은 초대교회 내에서 분파를 조성하여 유대주의 관습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학자들은 이들을 개종한 바리새인들이거나 제사장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유대인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Ridderbos). 사도행전의 보고에 의하면 이들은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일원이었으며 점차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고 한다(참조, 행 6:7). 더욱이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이방 신자가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없다고 가르치기까지 했다(참조, 행 15:1). 그러나 그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다수는 물론 아니었으며, 교회 지도자들의 호응도 받지 못했다(참조, 행 15:5). 다만 그들은 단순히 예루살렘의 유대주의자들을 대표할 뿐이었다(참조, 행 15:24, 25갈 2:4). 예루살렘 사도 회의는 바로 이들 유대주의자들이 이방 교회에 미치는 영향력 때문에 소집되었다. 즉 바울이 선교 방식으로 도입한 이방인과의 직접 대면은 예루살렘의 유대주의자들에게 비상한 관심을 갖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이방 교인들 편에서도 유대주의자들의 요구와 바울의 선교 방식 사이에서 오는 오해를 해결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게 된 것이다. 49년에 열린 예루살렘 사도 회의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 중요하다. 즉 이 회의의 주요 의제는 바울의 선교 방식과 유대 관습에 대한 태도였으며, 이 회의에서 내린 결정 사항은 유대인들에 대한 선교와 이방인들에 대한 바울의 선교에 다같이 영향을 미쳤다.

 

   2. 제기된 문제

 

     구약에 예언된바 약속의 담지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참 이스라엘이요 유대 민족 속에 남은 이들이라고 자처하는 예루살렘 교회는 기독교 선교에 있어서도 구약에 나타난 대로 그 노선을 따라서 진행될 것을 기대하였다. 예루살렘 교회의 존재 이유가 바로 이러한 가정에 근거하였다. 사도 회의에 제기된 실제적인 쟁점을 보더라도 매우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는 예수를 믿는다 하여 유대인이 덜 유대적인 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할 수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사실상 회당과의 관계가 밀접하지 않았던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음으로써 유대교의 관습이나 윤리적 이상에 보다 잘 상응하게 되었다. 어쨌든 기독교는 언제나 이스라엘의 종교와 민족에 대한 특수한 관계를 주장하였다. 그 결과 기독교는 유대교와의 사이에서 풀 수 없는 애매성을 포함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울의 새 선교 정책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이방 선교의 사명 그 자체가 본질적인 요소였으며, 그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바울은 회당을 이용하지 않고 직접 이방인들과 만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러한 선교 방식을 사람들도 이미 인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바울의 선교 사역이 예루살렘 교회의 역할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저해할 뿐만 아니라 사실상 그것에 모순된다고 생각하였다. 바울의 주장이 그들에게는 이스라엘 신앙과 모순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제기하는 문제점이란 첫째, 이방인에 대한 직접 선교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이고, 둘째는 편의를 위해 세워진 바울의 선교 정책과 모세의 율법을 계속 준수해야 한다는 원칙에 입각해서 세워진 정책의 관계에 대한 해명 문제였다. 일반적으로 보면 이방인 선교의 타당성이나, 유대 기독교인들은 삶의 한 방식인 유대 관습과 제도들을 계속 준수해야 한다는 것 등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질문들은 기본적으로 이미 해결되었었다. 즉 49년 경에 이방인 개종자의 이야기는 큰 화제일 수 없을 만큼 흔한 일이었으며, 때문에 암묵적이든 표면적이든 이방인에 대한 문제들은 서로 합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암묵적 합의까지도 재론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 자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비롯한 최근의 유대적 영향을 간과할 수 없었던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경주하였다. 바울도 안디옥 등지에서 야기된 문제가 더 이상 파급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바나바를 비롯한 일단의 대표자를 이끌고 예루살렘 사도 회의에 참석하였으며 자신의 선교 경험을 토대로 주장을 펴나갔다.

 

   3. 논란의 과정

 

     예루살렘 사도 회의에 참석한 자들은 크게 네 부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분명히 유대주의자들을 지원하였던 부류의 사람들은 '이방인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참조, 행 15:5). 이에 대한 반론으로 베드로는 고넬료의 개종을 예로 들었다. 베드로의 주된 논증은 믿음만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점이다. 그는 유대인들 자신도 율법의 멍에를 감당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 멍에를 지우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고 말했다(참조, 행 15:10). 물론 베드로의 행적을 살펴볼 때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이란 주제와 벗어난 점들도 발견된다(참조, 갈 2:15, 16). 하지만 베드로의 강력한 주장은 바울의 입장과 같다. 그러므로 바울의 선교 방식은 원칙적으로 보아 혁명적인 일탈 행위가 아니었다. 이어서 바나바와 바울은 자신들이 이방인 전도 과정에서 행한 표적과 기사를 보고함으로써 자신들의 선교 정책이 하나님께 인정받았음을 입증하였다(참조, 행 15:12). 곧 바울 일행은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했고 그 축복에 의해 이방 선교에서 많은 결과물을 얻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에 대해 야고보는 결론적인 연설을 하였다.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는 사람이었다. 그는 교회 내의 화목을 깨지 않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해 나갔다(참조, 행 15:19). 야고보는 바울의 선교가 예루살렘에 거하는 기독교인들의 전도에 줄 영향을 실제적으로 고려하였으며, 유대인 신도들의 생각을 무시하고 방종에 빠질지도 모를 이방인 개종자들을 염려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결론적으로 이방 기독교도들에게 네 가지의 결정 사항을 고지하였다. 그것은 첫째, 우상 숭배와 일체의 관계를 끊을 것, 둘째, 부도덕은 모양까지도 버릴 것, 셋째, 목 졸라 죽인 짐승은 먹지 말 것, 넷째, 피를 먹지 말 것 등이었다.

 

   4. 결정 사항

 

     1) 우상 제물

   이방인들은 음식을 성결하게 하기 위해서 먼저 우상에게 음식을 바친 다음에 그 음식을 먹는 관습이 있었다. 그런데 이방 기독교인들이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문제가 야기되었다. 곧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음식으로 먹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죄악시하였다. 따라서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약한 형제들을 실족하게 하지 않기 위해 이방 기독교인들에게 우상 제물을 금하라고 권고하였다(참조, 고전 8:1-13).

 

   2) 음행

   이방인들 사이에서 만연된 부도덕 중 음행은 가장 심각할 뿐 아니라 모든 부도덕의 원인이었다. 그러나 사도 회의 결정이 이방 기독교인들의 직접적인 음행을 지적하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야고보는 부도덕한 것은 모양이라도 취하지 말라고 권면하였는데 이는 이방 종교와 연관된 음행의 의식조차 취하지 말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도 회의의 결정은 우상 숭배와 관련된 제의식 자체를 버리고 그에 따라 파생된 관습들을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3) 목 졸라 죽인 동물과 피

   목 졸라 죽인 동물을 먹는 일을 금지한 것과 피를 먹지 말라는 사도 회의의 결정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물론 십계명과 결부시켜서 이해하려는 학자들은 이 결정에서 목 졸라 죽인 동물에 관한 규정을 삭제하기도 하였다(Harnack). 그러나 여기에서 야고보가 십계명과 결부시켜 말하였다고 단정할 수 없는 한 굳이 이 규정을 삭제할 만한 이유는 없다. 어쨌든 피를 생명으로 생각하여 피를 먹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금지되었다(참조, 대상 14:32-34). 따라서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은 구약의 사상이다. 그리고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이 구약의 규정에 따라 피를 먹지 않았다. 그러나 이방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구약의 규정에 대해서도 생소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활 습관과 음행을 만드는 습관에 비추어 볼 때 피를 먹는 일은 자연적인 일이었다.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방 기독교인들과 더불어 식사하는 것을 꺼려했다. 이러한 사정에 대해 사도 회의는 양자를 화합시키기 위해 이방인도 당분간 피를 먹지 않는 규례를 지키라고 명령한 것이다(Lenski, Calvin).

 

   5. 사도 회의 결정의 성격과 영향

 

     1) 결정의 성격

   사도 회의에서 바울의 선교 정책을 공식적으로 다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바울의 선교 정책을 세밀하게 다루다 보면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약속된 선민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의를 해야 되고, 또한 그 논의는 분명 이방인을 선민으로 받아들이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회의의 구성원들은 성경의 일반적인 교훈과 하나님께서 기적과 섭리로 밝히 보여주신 이방인 수락의 증거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 이스라엘을 향한 선교와 관련하여 실제적으로 부딪치는 관습의 차이를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사도 회의는 이방 선교를 철저하게 배제할 수도 없었고, 유대인들 사이에 떠도는 이방 세계의 무절제한 타락상을 버려 둘 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그러면서도 예루살렘 사도 회의의 결정은 유대주의자들의 과격한 주장과는 결별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결정은 바울과 그 후의 이방 선교에 지대한 중요성을 지닌다. 특히 49년의 예루살렘에 교회 사정을 고려한다면, 예루살렘 사도 회의의 결정은 교회사에 길이 남을 가장 대담하고 관대한 결정이었다. 곧 사도 회의 결정의 성격은 유대인들의 염려와 민감성을 염두에 두고 이방 개종자들의 전통적인 악덕이라고 지적된 몇 가지 관습을 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결정의 부정적인 면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관계를 실제적인 면에서 고려하여 내려진 결정이지 하나님의 의를 염두에 두고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여하튼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 회의의 결정에 즐거이 순복했으며, 이 결정은 이후 이방 교회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2) 결정의 영향

   예루살렘 사도 회의의 결정의 영향은 매우 광범위했다. 먼저 복음을 유대교와 이스라엘의 제도에서 해방시켰다. 하지만 이스라엘 종교와 전통 내에서 지속되는 기독교의 표현과 선교의 정당성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유대인을 향한 선교 사업과 이방인을 향한 선교 사업이 본질적으로는 갈등 없이 나란히 진행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이 결정은 예루살렘 교회 내에 나타난 바울에 대한 반응이 명료하게 나타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물론 유대인들 중에는 이러한 결정으로 인해 바울을 증오하는 부류들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바울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하였다(참조, 행 15:27, 32, 34, 40). 세 번째로 이 결정은 유대인들과는 영원한 대립을 낳았다. 즉 이 결정을 계기로 하여 예루살렘 주변에서는 기독교를 전파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사태를 악화시켰다. 그리하여 바울은 이들을 향해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롬 11:28)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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