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바울서신 서론

열려라 에바다 2024. 4. 11. 16:13

바울서신 서론

신약성경에서 저자를 바울로 칭하는 서신들(Epistles)은 모두 13개이다. 정경화 과정에서 히브리서는 처음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고 동방 정교회에서, 그리고 4세기 이후에는 서방 교회에서도 바울서신으로 생각하였지만, 최근에 와서 바울의 기록으로 보는 학자는 드물다. 또한 목회서신, 곧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는 바울서신 중에서도 특수한 부류에 속한다. 그리고 옥중서신, 곧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등은 바울이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 기록되었다. 그런데 수신자별로 분류해 본다면 빌레몬서와 목회서신들을 제외한 모든 바울서신들은 초대교회 공동체에 보내어진 것들이다. 한편 이들 바울서신들에 대한 극심한 비평이 19세기 초 이후 튀빙겐 학파(Tuebingen School)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들은 바울서신의 진정성은 물론 바울의 사도성까지 의심하였다. 하지만 바울서신들에는 바울의 기록이라 할 만한 독특한 바울적 언어의 통일성이 엿보일 뿐만 아니라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확증들이 포함되어 나타난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바울은 많은 부분을 서기들에게 맡겨 썼지만, 그 문안은 바울의 것이라고 한다. 여하튼 바울은 자신의 선교 활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와 끝맺어야 할 시기에 서신들을 기록하였으며, 그 서신들은 신약 시대 공동체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신학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하겠다.

 

   Ⅰ. 문학 형식으로서의 서신

 

     신약성경에 나타난 21개의 서신들은 특별한 경우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끼리의 직접적인 의사소통을 위해 쓰여진 문서는 아니다. 따라서 편지(letter)의 일반적인 양식을 벗어난 것들도 발견된다(히브리서, 야고보서, 요한계시록 등). 특히 요한계시록은 편지의 범주에 속하지만, 문학적으로는 묵시문학에 속한다. 결국 문학 장르로서의 서신들은 외관상으로나마 당시 헬라의 편지들에 나타난 관례적인 구조를 갖추었다. 즉 서두에는 발송인과 수취인의 이름과 문안의 말이 나오고, 다음으로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간구가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문안의 글을 길게 하고 발송자 친필로 축복의 서원을 하였다. 이러한 구조를 갖춘 편지 양식은 고고학적인 발견물들(특히 파피루스)과 충분한 예증 자료에 의해 비교 연구되었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일반 영역에서 벗어났다. 아마도 바울은 서신이 전제하고 있는 상황에 따라 서두와 종결부에서 헬라 관례의 공식들을 자유스럽게 재구성하였던 듯하다. 특별히 초기 기독교 선교에 있어서 주어진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복음의 씨를 어느 곳에서나 서로 교환해야 했던 선교적 수단으로서 편지는 매우 유용하였다. 따라서 서신은 선교 활동의 수단이었으며, 초기의 교회가 후손들을 위해서 교훈적이고 신학적인 사상들을 기록하는 형식이었다.

 

   Ⅱ. 바울서신의 분류

 

     히브리서를 제외한 13개의 서신을 바울의 기록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지만, 일부 극단적인 비평학자들은 소위 목회서신으로 알려진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그리고 디도서를 바울의 기록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인다(Bauer, Deissman, Naber, Loman 등).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바울이 활동하던 당시는 유명한 신앙적 위인의 이름을 저자로 이용하여 글을 쓰는 일이 흔하였기 때문에 저자의 이름이 밝혀졌다고 해서 그 저자가 실제 그 책의 저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소박한 생각일 뿐이라고 한다. 더욱이 이들 학자들은 바울의 이름으로 된 서신들 중에서도 발송자가 바울 한 사람으로만 기록된 서신은 오직 로라서, 갈라디아서, 그리고 에베소서뿐이라고 하고 다른 서신들이 복수 발송자를 취한 것들은 바울이 문안 인사만 했을 뿐 바울 자신이 그 서신을 기록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고린도전서는 바울과 소스데네 두 사람을 기록하였으며, 고린도후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그리고 빌레몬서 등은 바울과 디모데 두 사람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는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 세 사람의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따라서 비평학자들은 바울서신의 대부분은 대서자에 의해 기록된 후에 바울이 문안인사만 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불트만'(Bultmann)과 '콘첼만'(Conzelmann)은 목회서신을 제외한 10권의 서신들 중에서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그리고 데살로니가후서의 진정성을 의문시하고, 바울서신으로 분류될 수 있는 책은 오직 7권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통적인 학자들은 바울서신들의 영성과 보편성, 그리고 특정 문제에 대한 논리적이고 개인적이며, 수사적이고 서정적이며, 실제적인 면들을 강조하여 비평학자들의 견해를 일축해 버린다. 이들 전통학자들에 의하면 바울서신 내에는 많은 사상들의 응축된 통찰력이 엿보이며, 각 서신들이 실제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될 뿐만 아니라 각 서신들 사이에도 밀접한 연관을 지니기 때문에 그 통일성과 저자의 단일성을 의심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비평학자들의 일각에서조차도 전통적인 학자들과 같이 바울서신을 13개로 보고 편의상 초기 서신들(데살로니가전ㆍ후서), 주요 서신들(갈다리아서, 고린도전ㆍ후서 로마서), 옥중서신들(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그리고 목회서신들(디모데전ㆍ후서, 디도서)로 분류하였다. 바울서신을 위와 같이 분류한 기준은 바울의 사역에 따른 분류로서 전통적인 학자들에 따르면 문학적인 질과 신학적인 깊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신적 계시의 매개자로서 바울의 사역이 갖는 의미를 보다 심도 있게 고찰할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고 한다.

 

   Ⅲ. 바울서신의 형식

 

     바울서신은 서간문의 일반적인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세분해 보면 ① 서두(발신자, 수신자, 문안 인사), ② 감사 또는 축복, ③ 교리적 내용, ④ 윤리적 내용, ⑤ 결어(문안인사, 마지막 출도)로 구분된다. 먼저 서두의 경우 비평학자들의 주목을 끈 것은 발신자에 대한 언급이었는데, 그 이유는 바울 외에도 발신자로 언급된 다른 동역자들의 이름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발신자가 다수로 언급된 것은 바울서신들이 사사로운 개인적인 서신이 아니라 모두 교회나 성도들에게 보내진 대중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목회선신 제외). 또한 서두에서 문안 인사는 대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참조, 롬 1:7고전 1:3고후 1:2갈 1:3엡 1:2빌 1:2살후 1:2딤전 1:2딛 1:4)로 기록하였다. 한편 디모데후서의 경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언급한 면에서 독특한 인사말이라 하겠고, 골로새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언급이 없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라고 언급한 점에서 독특하다 하겠다. 두 번째로 감사 또는 축복의 말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 됨이로다'(롬 1:8), 혹은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골 1:3)의 형태를 취하였다. 이 경우 대개 수신자의 믿음과 사랑의 충만함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내용이었다. 세 번째로 대부분의 서신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내용 전개는 전반부의 교리적인 내용과 후반부의 윤리적인 내용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서신이 갖는 목적에 따라 교리적인 내용과 윤리적인 교훈의 비중은 약간씩 차이를 보인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ㆍ후서는 서신의 목적이 고린도 교인들의 윤리적인 생활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기 때문에 교리적인 주제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또 로마서도 전반부의 교리적인 내용과 후반부의 윤리적인 내용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서신이 갖는 목적에 따라 교리적인 내용과 윤리적인 교훈의 비중은 약간씩 차이를 보인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ㆍ후서는 서신의 목적이 고린도 교인들의 윤리적인 생활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기 때문에 교리적인 주제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또 로마서도 전반부의 교리적인 내용과 후반부의 윤리적인 내용 사이에 유대인과 이방인의 문제를 특별히 다룸으로써(참조, 롬 9-11장) 다른 바울서신들의 형식과 구별된다, 또 다른 예외적인 서신이 빌레몬서라고 하겠는데, 빌레몬서는 사사로운 개인적 차원의 편지글이라는 성격을 지님으로 해서 다른 바울서신들과 구별된다. 마지막으로 결어 부분을 살펴보면, 여기에는 마지막 문안인사와 축도가 나타난다. 먼저 문안인사에서 두 가지 형태를 발견하게 되는데, 하나는 '…에게 문안하라'(롬 16장), 혹은 '서로 문안하라'(고전 16:20고후 13:11)는 권면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고후 13:12), 혹은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롬 16:21)는 형태이다. 그리고 결론의 두 번째 부분인 축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지어다'(고후 13:13), 혹은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 아멘'(롬 15:33) 등의 형태를 취하였다.

 

   Ⅳ. 바울서신의 성격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서신은 사실상 형식만 서신의 형태를 취했을 뿐 편지와 비슷한 점이 없을 정도로 그 내용에 있어서 공개적이고, 윤리적 교훈과 교리적인 내용을 포함하였다. 이에 대해 '다이스만'(Deissmann)은 '편지'(Letter)와 '서신'(Epistle)을 구별하고 전자를 비문학적이며, 개인적인 통신 수단이라고 하였으며, 반면에 후자를 인위적인 문학 형태로서 대화록, 웅변, 혹은 드라마와 같은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특히 그는 고대 서신들에 대한 파피루스 자료들을 연구한 이래로 서신은 꼭 구체적인 상황에 의해 기록된 것이 아닌 주의 깊게 만들어진 일종의 문학 작품이라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문학 양식으로서의 서신은 B.C. 4세기 헬라 철학 학파들 가운데서부터 발전되어 어떤 주제에 관련해서 교육하고 변론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바울서신을 이러한 문학 양식으로서의 서신과 구분하여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바울서신들은 거의 모두 구체적인 상황에서 구체적인 목적을 지니고 기록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곧 바울서신은 일반 대중 또는 특수한 교회의 특정한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쓴 글들이다. 이러한 점에서 바울서신을 문학으로서의 서신에 분류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바울은 자신의 서신들을 기록하기 위해 많은 자료들을 이용하였으며, 어떤 서신들에서는 구체적인 상황과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반적인 교훈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서신'의 형태에 가깝다. 따라서 '다이스만'의 뛰어난 분석과 설득력 있는 제안에도 불구하고 편지와 서신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바울서신들에 적용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바울서신은 '다이스만'이 제안한 두 요소 모두를 포함한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로마서 서론

 

   로마서는 대체적으로 난해한 책으로 알려져서 요한계시록과 함께 그 내용에 있어서 해석상 난해한 부분이 많다. 즉 요한계시록은 불가해하고 로마서는 그 중에 귀한 말이 산견(散見)되지만 전체로서는 해득하기 어려운 책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영국의 시인이자 문학 비평학자인 '콜러리지'(Coleridge)는 로마서를 일컬어 '세계 최대의 책'이라고 했으며, '고데트'(Godet)는 본서를 '기독교 신앙의 대전'이라고 했다. 특히 '루터'(Luther)는 자신의 종교개혁의 모티브를 로마서에서 발견하고 본서는 '신약성경의 중심으로 가장 순수한 복음서'라고 하였다. 아마도 '루터'는 본서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인 '개인의 변화를 통한 세계 개조'를 자신이 종교개혁 모티브로 삼았던 듯하다. 이처럼 로마서의 독특성에 대한 긍정적 내지 부정적인 평가 모두는 본서가 성경의 무한한 보고로 들어가는 문의 열쇠임을 시사한다. 즉 본서의 독특성은 새로운 교훈이나 복음이라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의 복음을 분명하고 완전한 형태로 기록한 것인데, 이는 복음의 중요한 요소들에 대해 의심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바울은 이미 예수께서 말씀하신 진리들을 해석하도록 사명을 받았으며, 그의 사명과 그가 성경 기록자로 선택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하겠다. 때문에 본서의 신학은 실천적 권면과 균형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은 신자의 입장을 실천을 위한 근거로 파악하여 주요 주제를 의의 문제와 의의 규정, 의의 능력, 의의 계획, 그리고 의의 실천에 두었다. 본 서론은 바울 신학의 배경적인 연구로서 제1부 역사적인 배경과 제2부 로마서의 특별 주제들을 다루고자 한다.

 

   제1부 로마서의 역사적인 배경

 

   Ⅰ. 저자 및 수신자

 

     1. 저자

 

     로마서의 저자가 '바울'이라는 의견은 많은 증거와 함께 학자들 사이에서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바울의 친저성을 밝힐 수 있는 증거들을 교회사 속에서 살펴보면, 먼저 4세기 초에 활동한 교회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의 보고는 매우 고무적이다. 그는 바울서신을 14개로 열거하는 가운데 로마서를 언급하였다. 물론 그는 210-250년 사이에 활약한 '터툴리안'(Tertullian), 그리고 동시대인인 '클레멘트'(Clement) 등의 자료에 힘입은바 크다. 곧 이들은 모두 신약성경의 목록을 제시하였는데, 그 안에는 모두 로마서를 바울서신으로 분류하여 정리하였다. 또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경 목록을 수록한 무라토리 단편(The Muratorian Fragment)에도 로마서에 대한 언급이 나타난다. 즉 이 단편집에 의하면 바울은 고린도전ㆍ후서, 갈라디아서 다음으로 로마서를 기록하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로마서의 저자를 바울이라고 언급한 문서는 '이레니우스'(Irenaeus)의 '이교도에 반하여'(Against Heresies)라는 책을 들 수 있는데, 여기에는 롬 5:17이 자유롭게 인용되어 '바울은 로마 교회에 대하여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라고 하였다. 심지어 신약성경은 삭제하고 재편집하여 바울서신과 누가복음으로 자신의 정경 목록을 정한 '말시온'(Marcion)조차도 로마서를 바울의 주된 저서 가운데 하나로 인식하였다. 이처럼 초대교회의 역사가 본 궤도에 오를 즈음 저자 문제와 정경성의 문제들이 대두되었을 때에도 로마서의 바울 친저성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이제 사도 시대의 교부들과 교회의 감독이었던 사람들의 증거를 살펴보자.

   먼저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Polycarp)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그의 서신에서 로마서를 포함한 바울서신을 매우 잘 안다고 썼다. 그는 롬 14:10, 12고후 5:10을 인용하여 서로 용서하라고 하고 자신은 복되고 영광스러운 바울의 지혜를 재현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가 바울서신에 얼마나 깊이 빠졌었는가를 보여준다. 또한 안디옥 교회 감독인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2세기 초에 교회들에게 보낸 많은 편지들에서 로마서를 포함한 바울서신을 언급하였다. 1세기 말에 로마 교회의 감독이었던 '클레멘트'는 바울의 옹호자로서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하나님의 축복하신 사도 바울의 편지를 취하라'고 하였다(참조, 롬 1:29-32고전 3:1-9). 이렇게 볼 때 본서의 저자 문제에 대한 외증은 분명히 바울의 친저성을 옹호한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성경 내적인 증거들을 살펴보면 베드로전서와 로마서는 매우 유사한데, 베드로가 편지를 쓰면서 바울의 가르침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침으로 생각한 것에서 바울의 편지를 인용하거나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게 한 것으로 생각된다(참조, 벧후 3:15, 16). 결론적으로 바울의 로마서 친저성을 의심한다는 것은 소위 바울서신으로 알려진 고린도전ㆍ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등의 저자성도 의심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서신들은 로마서와 사상적 통일성과 내적 연관을 가지며, 문체면에서조차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롬 3:20-24; 4:3에서 '인간의 행위가 아닌 믿음에 의한 칭의'라는 교리를 선포한 바울은 갈 2:16; 3:6, 11딛 3:5-7에서도 역시 같은 교리를 선포하였으며, 롬 12:5과 고전 10:17; 12:12-14, 27엡 1:22, 23골 2:19은 서로 유사하며 일관된 작품을 보여 준다. 이처럼 19세기 이전까지 본서의 바울 친저성은 의심받지 않았다. 하지만 19세기 초에 '바우어'(Bauer)가 로마서의 바울 친저성을 의심한 이래로 로마서의 통일성과 바울의 친저성 문제가 크게 대두되었다. 곧 '바우어'는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로마에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바울이 로마 교회에 편지를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 후로 본서의 통일성 문제가 대두되었는데, 몇 가지 제기된 난점은 ① 마지막 송영 부분(참조, 롬 16:25-27)이 후대에 첨가된 것이라는 의문, ② 롬 16장의 나머지 부분이 로마보다는 오히려 에베소에 보내진 독립된 편지일 것이라는 의문, ③ 초기에는 14장으로 끝난 편지의 사본들이 회람되었다는 증거가 많다는 점 등이다. 먼저 로마서 마지막 부분인 송영의 문체와 어휘가 바울의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해 많은 비평학자들이 동의한다(Naber, Kee 등). 그들은 바울의 서신들을 수집하면서 맨 마지막으로 로마서를 수집 편찬하였는데, 그때에 바울서신 전체의 결론격인 이 송영을 첨가하였다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그들이 근거로 삼는 '체스터 베티 파피루스'(Chester Beatty Papyrus P6)에 의하면 이 송영은 롬 15장 끝에 첨가되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본에는 이 송영이 나타나지 않을 뿐더러 많은 사본에서는 롬 14장 끝에 첨가되어 나타난다. 이처럼 사본들은 각기 로마서의 완전한 형태든지 혹은 부분적인 형태든지를 수록하는데, 각 사본별로 구성된 형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로마서를 거의 완전한 형태로, 그리고 그 순서에 있어서도 오늘날의 성경과 같은 순서로 보존된 사본은 시내(a) 사본, 파피루스(P61), 바티칸(B) 사본, 에브라임(C) 사본, 베자(D) 사본, 페시타 시리아(SYp) 역본 등이다. 두 번째는 롬 14:23 뒤에 송영(참조, 롬 16:25-27)이 따라 나오는 형식을 취한 사본으로서 알렉산드리아(A) 사본, 코이네(R) 본문, 하클린 시리아 역본(SYh) 등이다. 세 번째는 롬 15:1-16:23이 생략된 형태로 보존된 사본으로서 불가타(V2089) 역본이 있다. 마지막으로 롬 1:1-15:33 다음에 롬 16:25-27이 나오고 그 다음으로 롬 16:1-23이 나오며 롬 16:24이 생략된 사본으로 파피루스(P46)를 들 수 있는데, 학자들은 이들 사본 내지 파피루스의 파편들을 토대로 로마서의 저작성을 바울에게 돌리려 하지 않는다(Naber, Deissmann). 하지만 전통적인 학자들은 사본의 보존 형태가 비록 좋지 않다고 해서 본서의 바울 친저성을 의심할 수 없다고 보고 비평학자들의 제안을 일축해 버린다.

 

   2. 수신자

 

     시내(a) 사본과 베자(D) 사본 등에는 로마서의 서두 위에 <pro;"  JRwmaivou" ; 프로스 로마이우스>라는 간단한 표제어가 붙었는데, 이는 '로마인들에게'라는 의미이다. 보다 후대의 사본들에는 보다 더 상세한 표제가 나타난다. 예를 들면 바티칸(B) 사본에는 '축복받은 사도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보낸 서신'이라고 되었으며, 에브라임(C) 사본에는 '바울을…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라는 표제가 부기되었다. 이 표제를 통해 볼 때 본서의 수신자는 로마 교회 교인들이거나 로마인들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서신을 로마에 보내려는 목적은 분명하지만 먼저 일반에게 회람될 목적이 우선적이었다는 추측이 있어 왔다. 이러한 추측의 근거는 롬 1:7에 언급된 '로마에 있는'이나 롬 1:15에 언급된 '로마에 있는 자들에게'라는 표현이 초대교회에 알려진 로마서 본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이를 단순하게 필사자의 오류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아마도 이 같은 결과는 개교회의 전례적인 동기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생략된 듯하다. 아무튼 본서의 서두와 결미에 언급된 내용들은 로마 교회에 보내는 특정한 서신이란 점을 추호도 의심할 수 없게 한다. 한편 로마서의 수신자를 논함에 있어서 비평학자들의 견해를 간과할 수 없다. 즉 그들은 사도행전에 로마 교회 설립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따라서 본서는 로마 교인들에게 보내기 위해 저작된 서신이 아니라 일반 교회에 보내기 위해 저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그들은 본서의 내용이 일반교리를 말하기 때문에 어느 특정 교회에만 어울리는 내용이 아니라 보편적인 내용으로 널리 회람될 목적을 지닌 서신이라고 하였다(Deissmann). 하지만 본 서신의 저작 동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바울은 로마 교회를 방문하고자 했으나 다른 일들 때문에 그 일은 성취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늦게나마 로마 여행의 전망을 발견하고 본 서신을 로마 교회에 먼저 보낸 것이다. 따라서 본 서신의 수신자는 비평학자나 그 외의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로마인이며, 그 중에서도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롬 1:7)로 결론짓는 것이 타당하겠다.

 

   Ⅱ. 기록 연대

 

     본서의 기록 연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저작 장소가 어디인가를 먼저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서신의 경우 선교 여행으로 인해 여러 차례 그 체류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서신의 각 연대는 바울이 머물렀던 체류지와 연관을 갖는다. 그런데 로마서의 경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고린도가 기록 장소임이 분명하다. 먼저 그는 교회에 그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롬 16:1)으로 지칭하는 뵈뵈를 천거하는데 이 겐그레아는 고린도 동쪽의 항구였으며, 뵈뵈는 바울의 서신을 로마 교회에 전달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두 번째로 그는 롬 16:23에서 '가이오'를 언급하였는데, 그는 바울이 고전 1:14에서도 언급한 사람으로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로부터 세례를 받은 인물이다. 세 번째로 바울은 역시 '에라스도'를 언급하였는데, 그는 딤후 4:20에 의하면 고린도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러 가지 증거들은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때 고린도에 체류하였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그는 언제 고린도에 머물면서 로마서를 기록하였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하지만 이 문제만큼은 확정적인 의견이 제시되지 않았다. 그만큼 로마서의 기록 연대에 대한 제견해들은 다양한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본서의 기록 연대를 살펴봄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관점은 로마서에서 묘사되는 상황과 일치되는 고린도의 환경에 언제 바울이 체류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답하기 위해 먼저 바울이 고린도에 체류한 시기를 살펴보아야 한다. 바울이 최초로 고린도에 체류한 것은 제2차 전도여행(참조, 행 15:36-18:22) 동안이었다. 이 여행은 A.D. 50년에 회집된 예루살렘 회의 직후에 시작되었지만, 회의가 끝난 후 얼마 후에 여행이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학자들은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을 50년 혹은 51년에 시작하여 53년 혹은 54년에 끝났을 것이라고 융통성 있는 입장을 취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 고린도를 방문한 것은 분명하지만 이때 로마서를 기록하였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한편 롬 15:19에 따르면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다고 하며, 롬 15:23에 보면 이제는 이 지방에 임할 곳이 없다고 하였다. 즉 전자는 제1차 고린도 방문에서 만족한 결과를 얻었음을 시사하며, 후자는 제2차 고린도 교회 방문의 어려움을 토로한 구절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바울의 고린도 교회 2차 방문 시에 로마서를 기록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게 된다. 왜냐하면 로마서에서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는 것이 어려운 문제였다고 한 사실이 고후 12:4에 나타난 고린도 교회의 사정과 어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마서의 기록 연대를 두 번째 고린도 방문과 연관지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바울의 고린도 2차 방문은 그 방문부터가 어려움에 직면했었고, 로마서와 같이 긴 서신을 저술하기에는 적합한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학자들은 로마서의 기록 연대가 이 시기보다 조금 이른 시기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Godet). 하지만 바울이 고린도에 체류했던 기간에 본서가 쓰여진 것이라는 전제에 배치될 뿐만 아니라, 고린도 전서의 기록 이전이 됨으로 바울서신 전체의 순서가 뒤바뀌게 되는 현상을 초래한다. 왜냐하면 학자들 사이에서 로마서는 고린도전ㆍ후서의 기록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마서의 기록 연대를 바울의 고린도 방문과 연관짓는다고 할 때 첫째와 둘째 고린도 방문과는 연관성이 없다 하겠다. 다음으로 바울의 세 번째 고린도 방문은 제3차 전도여행(참조, 행 18:23-21:16)의 막바지에 이루어졌다. 제3차 전도여행 중 바울은 에베소에서 두 해 동안 머물면서 성도들을 권면 하였다(참조, 행 19:10). 그리고 행 20:31의 언급으로 보아 바울의 제3차 전도여행은 3년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그 사역 기간은 53년 내지 54년부터 57년 내지 58년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만약 바울이 이 세 번째 고린도 방문에서 로마서를 기록하였다면 그가 고린도를 떠나기 직전인 57년 혹은 58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러 가지 자료들은 바울이 행 20:3에 기록된 아가야에서 있었던 3개월에 걸친 전도의 막바지에 고린도를 방문하였을 때에 로마서를 기록하였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런데 바로 이 기간이 제3차 전도여행 기간 중에서도 고린도를 마지막으로 방문한 시기이다. 따라서 로마서는 고린도를 떠나기 직전(A.D. 57년)의 겨울이나 58년 봄에 기록된 것이라 하겠다(Hodge, Bruce, Murray, Michel, Meyer).

 

   Ⅲ. 기록 목적

 

     3차에 걸친 전도 여행의 막바지에 이르러 바울은 로마 제국의 동부에서 그의 선교 사역의 종착점에 도달하였다. 그는 수리아의 안디옥, 빌립보, 고린도, 에베소와 같은 대도시들에 복음을 심었다(참조, 행 19:20, 26고전 3:6). 사실 그는 소아시아와 오늘날의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에 이르는 전역에 전도하였다(참조, 롬 15:19). 그러면서도 바울은 더 나아가 로마를 방문하여 전도하기를 갈구하였다. 그런데 로마에는 이미 교회가 설립되었고, 바울의 소식은 로마 교회에까지 전파되어 적지 않은 사랑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수년 동안 염원했던 로마 방문을 시도하려고 했다(참조, 행 19:21롬 1:10, 11; 15:23). 그러나 그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처지가 로마로 갈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고린도 해협과 이오니아해를 통하여 로마에 가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드는데, 그 당시로서는 예루살렘의 어려운 성도들을 위해서 모금을 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모금한 연보를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전달한 연후에 로마로 향하려고 했다. 이처럼 그가 로마를 방문하려고 하는 것은 로마의 동료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고(참조, 롬 1:10, 11), 그들과 함께 편히 쉬기 위해서(참조, 롬 15:32)였다. 그러나 상황은 그가 로마에 가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였기 때문에 그는 서신을 통하여 그들과 교제하기를 원하여 로마서를 썼다. 이처럼 본 서신을 쓰게 된 첫 번째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본서에서 때때로 신학적인 동기나 선교적인 동기만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그의 로마 방문 목적이나 로마서의 기록 목적은 율법주의자들의 오류를 정정하는 문제와, 로마를 스페인 선교의 중심지로 삼으려는 의도가 깃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바울이 처한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의 개인적인 이유가 부각될 수밖에 없다. 그는 고린도에 머물면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모금을 하였지만 그는 예루살렘에 연보를 들고 간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그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염려와 이방인의 연보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염려 때문에 근심하였다. 곧 그는 예루살렘에 가기는 하지만 예루살렘에서 살아남아 로마 여행을 실현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매우 불확실한 것으로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는 로마에 대한 염원을 고린도에 체류하는 동안에 로마서를 통하여 로마 교회에 전달하려고 하였다. 또한 그는 로마 교회가 처한 입장을 고려하여 교리적인 입장을 분명하게 하였다. 따라서 본서는 '기독교 교리의 완전한 개요'(Griffith-Thomas)는 아님이 분명하다. 만일 그가 그러한 의도로 본 서신을 기록하였다면 더 많은 자료와 내용을 첨가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로마 교회의 당면한 문제들을 정확하게 알고 그것에 대한 권면과 충고를 계획하였다. 사실 로마 교회는 매우 고무적이어서 교회 구성원들의 지적 수준이 뛰어났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신앙이 완전하며 도덕적이나 영적으로 성장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완전하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들 나름대로의 약점도 지니고 있었다. 다만 그들의 신앙에 대한 열심이 기존의 어느 교회 못지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교훈이 필요했으며, 교회 생활에 대한 지식들이 필요했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실제적인 지식뿐만 아니라 국가 권위에 대한 복종이라든가 약자에 대한 강자의 올바른 태도 등에 대한 권면이 필요했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바울로서는 로마 교회와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하는 열망에 더하여 스페인 전도의 대 계획에 부풀어 그들을 훈련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 모든 정황들이 바울로 하여금 로마서를 기록하게 하였으며, 본서 내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도의 윤리, 그리고 구원에 이르기까지 총망라하여 성공적으로 전달하였다고 하겠다.

 

   Ⅳ. 특징 및 구조

 

     1. 특징

 

     1) 용어상의 특징

   본 서신은 특별한 용어들이 핵심적으로 사용되었다. 먼저 '하나님의 의'라는 용어의 사용인데 이는 매우 반복적이고 또한 조화롭게 사용되었다. 헬라어 동사 <dikaiovw ; 디카이오오>의 일반적인 의미는 '의롭다고 선언하다' 혹은 '무죄를 선고하다'인데, 이는 '유죄를 발견하다' 혹은 '정죄하다'의 반대말로 사용된 법정 용어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 용어를 사용할 때, 이미 법정 용어로서의 사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상태의 인간들을 의롭다고 선고하신다'는 역설적인 의미로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을 의롭게 하시는 것이요 인간 스스로가 의로워질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즉 '의롭게 된다'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올바른 관계로 회복된다는 적극적인 의미를 가리키며, 더불어 본질적으로 '용서받음'을 함축한다. 결국 바울이 이 용어를 선택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체적 행위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두 번째 핵심 용어는 '구속'인데, 이는 '구출'이라는 기본 사상을 함축한 용어이다. 헬라어에서 '구속'이라고 번역된 말은 <ajpoluvtrwsi" ; 아폴뤼트로시스>인데, 일상용어에서 이 말은 몸값을 지불하고 노예나 포로를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이 이 용어를 사용한 일차적인 의미는 죄의 노예가 자유를 얻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단순한 자유만을 가리키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는 구약성경에서 '구속'이라는 용어가 내포하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 그 자체를 유대인뿐만 아니라 전 인류를 영혼의 굴레로부터 구출해 내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세 번째 핵심 용어는 '화목 제물'이다. 이 말은 '화해시킨다'는 의미의 헬라어 동사 <iJlasthvrion ; 힐라스테리온>에서 유래한 용어인데, 일반적인 용법에서 이 용어는 노한 신을 진정시키며 그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신을 유화한다는 사상을 전달하는 데 사용되었다. 바울은 이 용어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련시켜 인간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희생시킨 그리스도를 '희생 제물'로 생각하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은 것은 바울은 결코 하나님께서 유화되거나 분노를 누그러뜨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점인데 이 점은 분명히 그가 옳다. 따라서 그는 인간에게 눈을 돌려 하나님과의 교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죄를 지워 주고 정결케 하는 희생 제물로 그리스도를 제시한 것이다.

 

   2) 내용상 특징

   로마서는 다른 바울서신들보다 바울 자신을 길게 소개한다. 아마도 그 이유는 자신이 세우지 않은 로마 교회에 보내는 서신이기 때문에 자신을 상세하게 알릴 필요를 느낀 듯하다. 이 점은 로마서의 특징을 이루지만 바울서신의 전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는 역사적인 예수를 만나보지 못하고 사도로 소명을 받은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자격지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다만 본 서신에서는 그에 더하여 자신이 세우지 않은 교회에 편지를 띄운다는 점이 그로 하여금 긴 자기 소개를 쓰게 한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면은 본 서신의 종결에서도 나타난다. 즉 그는 종결 부분의 문안 인사에서 개인적으로 문안 인사를 하면서 그 문안자의 이름을 열거하였는데, 이는 앞에서 지적한 바울 스스로의 느낌에 대한 예증이라 하겠다. 내용상의 또 다른 특징은 구약에 대한 직접 인용이나 간접 인용, 그리고 용어상의 유사성을 들겠다. 즉 그는 구약성경을 광범위하게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이 내포하는 예표적 성격을 잘 간파하였다. 물론 이는 그가 유대적인 토양에서 자란 배경에서 온 것이기도 하겠지만, 본 서신의 내용으로 볼 때 그의 인용은 단순한 앎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행동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의 연관을 비상한 통찰력으로 파악하였다. 또한 그는 본 서신의 내용 전개에 있어서 교리적인 내용을 언급할 때는 토론 형식을 취하였는데, 마치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이 자기 앞에서 질문하는 것처럼 묘사하였다. 반면에 그는 본 서신에서 화평과 화해의 사상을 말할 때는 대조적으로 조화적인 표현을 사용하였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선포를 강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면에서 의도적인 문체와 내용 전개를 시도한 듯하다.

 

   3) 신학적인 특징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신학적 특징은 자신의 신학적 중심 교리에 대한 기초적인 문제를 제시하였다는 점이다. 먼저 그는 복음의 위상을 분명하게 밝혔는데, 복음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든 믿은 자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수단이며, 하나님의 의를 드러냄에 있어서 복음은 하나님의 의로운 성격일 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에게 의로운 상태를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복음에 대한 신학적 위상을 밝히면서 두 가지를 의도하였다. 곧 이방인을 포함한 전 인류에게 전해지는 복음의 보편성을 분명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의 근원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의 신학적 주제를 전개시킴에 있어서 인간의 노력으로서는 결코 제거할 수 없는 상황, 즉 인간의 보편적 죄성과 범죄를 치료하는 하나님의 권능 있는 치료책으로서의 복음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로마서는 비록 편지의 형식을 취한 책이며, 특정한 집단을 위해 마련된 개인적 서신이라 할지라도 다른 바울서신들보다도 격식이 잘 짜여진 신학적 논문의 성격을 지녔다고 하겠다.

 

   2. 구조

 

     로마서의 구조는 당시에 유통된 서신의 관례적인 구조를 거의 완전하게 따른 다른 바울서신과는 구별되는 형식을 취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과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따라서 로마서는 서신의 양식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로마서의 구분에는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기 때문에 어느 의견을 따라야 할지를 결정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임에 분명하다. 다만 여기에서는 로마서를 서신의 양식에 따라 구분한 '젠센'(Jensen)과 '캐제만'(Kaesemann)의 견해를 참고로 하였다. 이들 양자는 보수 진영과 비평학 진영의 대표자로서 탁견을 제시하였다. 이들은 먼저 롬 1-11장을 교리적 내용으로 구분하여 하나님의 의의 보편적 필요성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설명으로 규정하였으며, 동시에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규범적 해석 등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다음으로 롬 12-15:13을 윤리적 교훈으로 구분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 대한 구체적인 권면이라고 설명하였다. 그 외 구분은 서신의 양식에 따랐다 (참조, 로마서 도표1).

 

   제2부 로마서의 특별 주제들

 

   Ⅰ.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

 

     로마서에서 바울은 레 18:5에 언급된 원리를 믿음에 속하는 의와 대치되는 개념으로 생각하여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라고 하였다. 하지만 바울이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언급한 본문은 믿음의 의에 상반되는 율법적인 의를 다루는 문맥에서 나타나지 않고 다른 주제들 속에 포함되어 나타났다(참조, 롬 10:1-15). 또한 레위기의 문맥에서도 이는 하나님의 구속함을 받은 언약 백성 위에 내리신 하나님의 권리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주장되어지며 촉구되는 의를 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레 18:1-5은 출 20:1-17신 5:6-21과 유사한 문맥을 갖추었다 하겠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것은 십계명이 계율주의가 아니듯이 이들 본문들도 계율주의가 아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레 18:5)고 할 때 이는 율법주의적인 구조 안에서 행함으로 생기는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구속적이고도 언약적인 관계 속에서 순종에 따른 축복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구약성경은 이러한 관점에서 율법을 언급한 유사한 구절들을 포함한다(참조, 신 4:6; 5:32, 33; 11:13-15, 26-28; 28:1-14겔 20:11, 13). 그런데 바울은 믿음의 의에 대치되는 것으로 행함의 의를 실례로 들면서 레 18:5을 인용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행함의 의가 무엇을 내포하며 어떤 문맥 속에서 언급된 것인가를 살피고자 한다.

 

   1. 계약 개념으로서의 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롭기 위해서는 여호와와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사항들을 수행해야 했으며,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복종을 의미하였다(참조, 시 1편). 따라서 이는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다는 당연한 원리이자 하나의 요구를 충분하게 충족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 따른 칭의와 생명을 보장해 준다. 그러나 율법의 요구는 충족시킨다고 해서 의로워지는 것은 아니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의로움에 관계되어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이 주어졌고 관계가 수립된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서 율법주의적인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그것은 율법이 아닌 은혜에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이 은총의 관계 속에서 율법은 하나님에 의해 자신의 계약 백성들에게 하나의 지침으로서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목적은 여호와가 거룩한 만큼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참조, 레 19장).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율법은 하나님과의 관계 밖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다. 곧 믿음 안에서 여호와의 선택을 받은 자, 여호와의 주권 아래 자신의 삶을 놓은 자도 율법을 따른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계약으로 맺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 없는 율법은 쓸데없는 것이며, 율법의 수행은 의를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은 율법을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신 인도하심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것을 수행한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공로는 그것이 믿음으로 쌓아올린 공로라 할지라도 의를 이루지는 못한다. 하지만 공로 안에 드러난 믿음만이 의를 이룬다. 곧 믿음은 여호와에 대한 관계의 성취이며, 따라서 그것은 의이다(참조, 창 15:6합 2:4).

 

   2. 의와 죄

 

     구약성경에서 의인은 종종 죄인으로도 불린다. 예를 들어 시인은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는 또 여호와의 의에 호소하며 구원을 요청한다(참조, 시 143:1, 3, 9, 11, 12). 물론 이렇게 호소하는 시인 자신은 의롭지 않다(참조, 시 51:14). 그리고 시인은 자신의 유죄성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증거한다(참조, 시 40:10, 12; 65:3, 5; 103:17). 그러나 '행하는 자가 살리라'는 레위기의 원리는 죄의 영역에서 전적으로 무용하다. 그만큼 악을 정죄하고 의로운 심판을 행하시는 분은 사람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간섭이자 하나님의 권리이다. 그러한 면에서 행함에 대한 칭의는 믿음에 의한 칭의와 대치된다. 곧 행함은 드러난 인간적 의이다. 그러나 우리의 죄악된 상태에서 의롭게 하는 유일한 의는 복음이 계시한 하나님의 의(God-righteousness)이다(참조, 롬 1:17; 3:21, 22; 10:3). 아마도 바울이 롬 10:5, 6에서 제시하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와 '믿음에 의한 의'의 대조점이 여기에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레 18:5을 인용하는 가운데 '사람이 의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고 한 원리를 믿음의 의와 대조를 이루는 행함의 의의 원리, 그 자체의 적절한 표현으로 사용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3. 의와 믿음

 

     구약성경에는 믿음의 다양한 모습들이 제시되었다. 그런데 이들 믿음의 다양한 모습들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의존이란 점이 공통적인 특징이다. 곧 신실한 자들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들이며(참조, 사 33:2미 7:7-9),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지닌 자들이며(참조, 시 69:6; 71:5, 14; 146:5),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이다(참조, 시 71:5; 143:8). 이렇게 볼 때 믿음은 여호와와의 관계에 대한 이스라엘의 당연한 수행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억압당하고 있어서가 아니며, 그 백성들이 곤핍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는 회개를 위해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심판이고, 이것이 이스라엘의 의이다. 즉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것을 통하여 자신이 신실하게 되는 것이 이스라엘의 의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자신을 의롭다고 부르는데(참조, 시 37:39), 이는 그들이 윤리적으로 흠이 없어서가 아니며, 그들의 공로가 의롭다 함을 받을 만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요, 하나님은 그 산성이기 때문이다(참조, 시 5:12; 14:5 ; 31:18; 33:1; 36:10; 52:6; 94:15, 21; 118:15, 20). 바울이 믿음에 의한 의를 제시할 때 그는 이미 구약성경이 포함한 사상을 잘 알았으며, 그것에 대한 충분하고도 올바른 이해를 가졌었다. 따라서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로 인한 칭의의 교리를 말할 때 그는 이미 그리스도의 의안에서 의로운 자로 하나님께 합당하며, 새 생명을 받은 성도를 바라본 것이다. 곧 새 생명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가운데서 나온 의의 생명이다(참조, 롬 6:13, 14, 16, 17, 22; 8:4). 결국 바울은 의와 믿음에서 중요한 관건은 순종의 생활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4. 의인과 계약

 

     여호와를 믿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구원으로 인도하리라는 신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셨고 계약을 맺으셨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즉 여호와의 의는 자신이 선택한 백성을 구원하심으로 이루어지며,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심으로써 여호와께서는 계약 관계의 요구 사항들을 성취하신다. 따라서 계약 관계는 이스라엘의 의에 우선한다. 곧 이스라엘은 의롭든지, 불의하든지 간에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에 서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의롭다고 선고받는다면 그것은 계약의 주님에 의해 의롭다고 여김 받은 것이다(참조, 사 60:21). 더욱이 이러한 의의 선물은 종말론적인 선포 안에서 두드러지게 작용하였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계약을 잊어버렸다(참조, 사 44:9-20; 50:11; 53:5, 6, 8, 11; 54:7, 8). 그런데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잊으실 수 없다고 선포하고 여호와와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은 지속된다고 선포하였다(참조, 사 40:8; 49:15; 55:11). 이 같은 이사야의 선포는 종말론적인 분위기에서 이스라엘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에게는 자신들을 구원할 힘이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참조, 사 50:2). 결국 그들에게는 믿음이 전혀 없었으며, 따라서 이스라엘의 의도 전혀 없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백성들을 향하여 권면한 내용도 모두 진실하시며 영속하는 하나님의 의를 믿으라는 것이었다. 곧 여호와께서는 계약 관계를 계속 유지하실 것이며, 이스라엘을 의롭다 하심으로 자신의 의를 유지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에서 의는 하나님과 백성 간의 관계에서 그 요구 사항의 성취를 의미한다 하겠다. 곧 비록 인간의 의가 신뢰의 부족으로 실패할지라도 하나님의 의는 지속되고, 자신의 백성들을 의롭다 하시며, 그 백성들을 구원하신다. 바울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믿음에 의한 의를 강조한다. 즉 그는 그리스도께서 죄인 된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죄인 된 몸에서 벗어나 예비된 의를 받기 위해서는 그분을 믿어야 한다고 하였다. 결국 바울이 강조하는바 '믿음에 의한 의'는 구원과 칭의의 은혜 안에서 성도들에게 주어진 것이자 하나님의 성도들로부터 취하실 영역의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치되는 개념으로서의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는 순종의 영역 안에서 성도들의 삶의 방식이라 하겠다.

 

   Ⅱ. 믿음으로 믿음에 이름(From faith to faith)

 

     최근 롬 1:17의 '믿음으로 믿음에 이름'이란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두 가지 견해가 대립되었다. 하나는 믿음의 주체를 성도가 아닌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신실성으로 보고 롬 1:17을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인간의 믿음으로'라고 해석하는 견해이다(Herbert). 다른 하나는 믿음의 주체를 단지 그리스도의 신실성이나 아니면 인간의 신실성에 응답하는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생각지 않고 본질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신실성을 주된 것으로 간주하면서도 인간의 신실성에 대한 표현이라는 양극적인 입장을 취하는 견해이다(Torrance). 이 두 견해를 고찰하기 위해 먼저 '믿음'이라는 헬라어 <pivsti" ; 피스티스>의 쓰임을 살펴보자.

 

   1. 인간 편에서의 믿음

 

     롬 1:8에 언급된 <pivsti" ; 피스티스>라는 단어는 분명히 신자들의 믿음을 가리킨다(참조, 롬 14:1, 22, 23고전 2:5; 12:9; 13:2고후 1:24갈 5:6엡 6:23빌 2:17살전 1:3 등). 바울은 이들 구절들을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주된 성질로 여기지 아니하고 단지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를 향한 신자 편에서의 마음과 정신의 작용이라는 관점에서의 믿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특히 바울의 이 같은 관점은 롬 4장에서 창 15:6을 인용하여 제시하려고 한 자신의 칭의에 관한 주제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즉 그는 행위에 의한 칭의와는 대조를 이루는 개념으로서 믿음에 의한 칭의를 변호하기 위해 아브라함의 믿음을 원용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하여 제시하고자 한 의도를 고려할 때 믿음은 비록 대상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그 대상으로 하지만 인간 편에서의 자발적인 믿음을 강조하고자 한점은 분명하다. 또 다른 예를 롬 10:3-12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고발의 형태를 취하였지만 바로 뒤에 언급한 '모든 믿은 자에게'란 표현은 신자 편에서의 믿음의 활동이란 말로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 경우 믿음을 하나님의 신실성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한편 바울은 이러한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믿음으로부터'라는 의미의 <ejk pivstew" ; 에크 피스테오스>를 즐겨 사용했다는 점이 주목을 끈다. 특별히 그는 칭의에 관한 주제를 언급할 때 이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는데, 아마도 이는 '하나님을 믿은 신자의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전치사 구문인 듯하다. 따라서 바울은 믿음이라는 인간의 반응에 중요성을 부여함으로써 하나님을 믿는 신자의 믿음을 강조하였다 하겠다.

 

   2. 믿음의 대상인 그리스도

 

     믿음을 '하나님을 믿는 신자의 믿음'이라고 할 때 그 대상은 하나님이며 그리스도이다.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 3:26) 하는 표현이나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의 믿음을 듣고…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엡 1:15, 16)라는 표현들은 간접적이지만 그리스도 안에 믿음이 내재해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보다 직접적인 표현으로는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딤전 3:13)와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는 표현을 들 수 있겠다. 이 경우 모두 '안에'라는 의미의 전치사 <ejn ; 엔>을 사용하여 그리스도 '안에' 내재된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의 믿음이 굳은 것에 대해 언급하기도 하였다(참조, 골 2:5). 물론 이 경우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이지 주체가 아니다. 그리고 이 때에 사용된 전치사는 <eij" ; 에이스>로서 '안으로'라는 방향을 나타낸다. 그러나 다른 구절에서 사용된 이 전치사의 쓰임을 고려해 볼 때 믿음을 가능케 하는 인격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믿음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가능한 작용이라 할 수 있으며, 어느 경우든지 신자들에 의해서 활용된 믿음임은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믿음에 대한 바울의 언급은 비록 그리스도안에 내재한 믿음과 그리스도를 대상으로 믿는 신자들의 믿음이 거의 비슷한 비율로 나타나지만, 전체적인 면에서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으로서 인격성을 지니며 신자의 믿음을 작용하는 동인의 가능성을 포함한다 하겠다.

 

   3. 그리스도의 믿음

 

     이제 믿음이 그리스도, 혹은 하나님의 신실성을 나타내며,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내포한다는 주장의 근거들을 고찰하기로 한다. 신약성경에서 '믿음'은 소유격으로 된 예수 그리스도의 수식을 받는 구문으로 나타난다(참조, 롬 3:22, 26갈 2:16, 20; 3:22엡 3:12빌 3:9). 그러나 이들 본문의 소유격은 헬라어 원문에 나타나는 예이고,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목적격으로 번역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번역상의 차이는 헬라어 구문법과 관련된다. 즉 본문에 쓰인 소유격이 주격으로서의 소유격이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되고, 목적격으로서의 소유격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 된다. 먼저 '믿음'이 소유격 구문에서 목적격 수식을 받는 경우들을 살펴보면 막 11:22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믿음'은 명백하게 하나님을 목적어로 취하는 믿음이다. 이러한 구문의 예는 행 3:16에서 '그 이름을 믿음으로'라는 표현과 약 2:1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표현한 것에서 발견된다. 이 경우 믿음은 신자가 기꺼이 받아들이거나 실행하는 믿음이 명백하다. 이들의 쓰임을 통해서 볼 때 믿음은 믿음의 말씀, 곧 복음의 진리에 대한 목적격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하는 것이 가장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토랜스'(Torrance)는 소유격 구문에서 주격 수식을 받는 예들을 열거하면서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믿음'이라는 용어 속에 그리스도의 믿음과 신자들의 믿음의 행위가 모두 나타난다고 한다. 물론 헬라어 문법이 갖는 독특성에 비추어 볼 때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은 아니다. 다만 모든 소유격 구문을 일반화시켜서 양극적 상황이 전체 구문 속에 포함되었다는 '토랜스'의 주장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랜스'의 주장은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그리스도 외에 신앙의 근본적인 동인이신 그리스도를 인식케 하는 데 도움을 준다.

 

   4. 믿음으로 믿음에 이름

 

     이상의 고찰을 통하여 롬 1:17의 언급을 살펴볼 때 '믿음으로'가 반드시 하나님의 신실성을 가리킨다고 주장해야만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오히려 이때의 '믿음'은 신자 편에서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에 직결되는 믿음을 가리키기 위해 바울이 즐겨 사용했던 표현임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이 경우 '믿음'은 신자에 의해 활용되어진 믿음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그런데 바울이 이러한 표현을 즐겨 사용한 것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즉 바울은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으며 또 믿음이 있는 곳에 칭의가 일어난다는 동의 진리의 두 국면을 강조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라는 표현을 꼭 사용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롬 1:17에서도 똑같은 맥락에서 강조적인 표현으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름'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즉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데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라고 한 롬 1:16의 내용을 17절에서 다시 반복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설명하자면 '토랜스'의 견해는 양극적인 입장 내지 국면이란 표현에서 이미 칭의와의 마찰이 생긴다는 문제가 있다. 만약 신약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구문들을 양극적인 표현으로 인식한다면 보다 복음의 구체적인 면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신약성경에서의 사용은 하나님의 신실성이나 신자 편에서의 믿음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주제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곧 '믿음'이 하나님의 신실성 내지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리킨다는 주장에서 믿음이 주어지는 은혜임을 알게 되며, 한편으로는 믿음이 인간 편에서의 믿음 내지 그것의 실행을 가리킨다는 주장에서 신자들의 의무를 깨닫게 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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