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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의 효도교육 이렇게 시켜라,

열려라 에바다 2024. 4. 23. 16:30

자녀의 효도교육 이렇게 시켜라, 현용수  

탈무드의 효도교육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효도란 무엇인가? 두 가지를 실천해야 한다. 자녀가 부모를 경외하고(Fear),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다(Honor).

 

부모경외의 정의는 첫째, 자녀가 아버지의 자리에 서지 아니하며, 아버지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는 것이다.

부모공경의 정의는 부모에게 의식주를 제공해 주고, 부축해 드리며 받드는 것이다. 즉 부모를 경외하는 일은 하지 말라고 하는 부정적인 법을 지키면 되는 것이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하라고 하는 긍정적인 법을 지키면 되는 것이다.

 

즉 부모를 경외하는 일은 부모에게 해서는 안될 일들을 하지 않는 것이고,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부모를 위하여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토라에는 부모 공경에 대해 두 가지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첫째, 너희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출 20:12).

 

둘째, 사람은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경외해야 한다(레 19;3).

 

공경이란 단어를 쓸 때에는 아버지가 먼저 나오고, 경외란 단어를 쓸 때에는 어머니가 먼저 나온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할 때에는 어머니를 먼저 공경할 줄 아시고 아버지를 어머니보다 먼저 어머니를 후에 놓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녀들이 부모를 경외할 때에는 자연히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더 무서워할 줄 아시고, 어머니는 먼저 그리고 아버지를 후에 놓으셨다. 이는 자녀들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동일하게 공경하고 경외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너를 낳은 아비에게는 청종하고 네 늙은 어머니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잠 23:22). 아버지는 말씀을 맡은 자이기 때문에 지혜가 있다(잠 4:1-7).

 

인생의 풍부한 선배로 풍부한 경험에서 나오는 삶의 지혜가 있다. 따라서 자녀는 아버지의 지혜를 가볍게 여기면 안된다. 언제나 아버지의 말씀에 청종해야 실수를 줄기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따뜻한 사랑을 전해준 분이기 때문에 함부로 대하기가 쉽다. 더구나 힘없는 늙은 어머니에게는 더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 점을 이미 아시고 자녀들에게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라고 하셨다.

 

옛날에는 자녀들이 부모의 심정을 헤아려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최선을 다했다. 요즘은 부모가 자녀의 심정을 헤아려 비위를 맞추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자녀된 사람들이 무슨 일에나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는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자녀 교육—이대로 좋은가?

 

최근 수십 년간 서구 여러 나라에서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부모가 주도권을 갖고 있었고 자녀는 부모의 말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요즘 일부 가정에서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자주 접하는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엄마가 네 살짜리 아이와 함께 가게에 들어와 있습니다. 아이가 진열된 장난감을 집으려고 하자 엄마는 “집에도 장난감 많잖아”라고 하면서 아이를 달래 봅니다. 하지만 이내 엄마는 좀 더 단호하게 말했어야 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이는 “저거 사 줘!” 하고 떼를 쓰기 시작합니다. 엄마는 아이가 또 울고불고 투정을 부릴까 봐 겁이 나서 그냥 장난감을 사 줍니다.

 

아빠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데 다섯 살짜리 딸아이가 “나 심심해. 집에 갈래!” 하고 말합니다. 아빠는 하던 말을 멈추고는 딸을 보면서 “딱 5분만 더 있다 가자. 알았지?” 하고 달랩니다.

 

열두 살인 제임스는 선생님한테 소리를 질렀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또 혼이 났습니다. 제임스의 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 화가 났습니다. 아들한테가 아니라 선생님한테 말입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왜 그 선생은 툭하면 널 혼내는 거야? 내가 교장 선생을 찾아가든지 해야지 안 되겠다!”

 

물론 이 이야기들이 실제 상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것도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부모는 자녀가 버릇없이 행동해도 내버려 두고, 자녀가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며, 자녀가 잘못해도 대신 뒷수습을 해 줍니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세상」(The Narcissism Epidemic)이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요즘은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권위를 내주는 것이 너무나 흔한 일이 되었다. ···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은 집안의 권위가 자신들이 아니라 부모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사실, 많은 부모가 자녀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 주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들은 좋은 본을 보이려고 노력하고 필요할 때는 단호하면서도 애정 어린 징계를 베풉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책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그런 부모들은 “시대적인 흐름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상황이 이렇게 된 것입니까? 부모들이 자녀를 징계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약해진 부모의 권위

 

일부 사람들은 1960년대를 기점으로 부모의 권위가 약해지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그 무렵,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부모가 자녀를 엄격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들은 칭찬과 징계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라고 권하는 것이 아니라 ‘권위적이 되지 말고 친구가 되어 주라’, ‘징계보다는 칭찬이 좋다’, ‘자녀의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말고 잘한 것에 초점을 맞추라’고 주장했습니다. 전문가들의 주장에는 부모가 혼을 내면 아직 감정이 예민한 자녀가 상처를 입고 훗날 부모에게 반감을 품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얼마 안 있어, 전문가들은 갑자기 좋은 자녀 양육법을 발견했다는 듯이 자신감의 중요성을 역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을 간단히 말하면 자녀가 자신감을 갖게 해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자녀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자신감 키워 주기 운동’은 극단으로 흘러서 전문가들은 ‘자녀에게 “안 돼”나 “틀렸어” 같은 부정적인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자녀가 특별한 존재이고 원하는 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반복적으로 말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어떻게든 자신감을 키워 주는 것이 실제로 올바른 사람이 되게 도와주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어린 남자아이가 왕좌에 앉아 있고 부모가 지나치게 칭찬을 하면서 아이를 떠받들고 있는 모습 ‘자신감 키워 주기 운동’은 자녀들에게 잘못된 특권 의식만 심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자신감 키워 주기 운동’이 가져온 부정적인 결과를 지적합니다. 그 견해에 따르면, ‘자신감 키워 주기 운동’은 자녀들에게 세상이 자기들을 떠받들어야 한다는 잘못된 특권 의식을 심어 주기만 했을 뿐입니다. 또한 「나밖에 모르는 세대」(Generation Me)라는 책에서는 그 운동의 결과로 많은 청소년이 “싫은 소리를 듣는 일이 다반사이고 때때로 실패를 경험할 수밖에 없는 현실 세계에 대처할 준비를 전혀 갖추지 못하게 되었다”고 기술합니다.

 

그 책에서 한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직장에는 자신감 키워 주기 운동 같은 것이 없다. ··· 엉터리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보고서 색깔이 예쁘다고 칭찬해 주는 상사는 없을 것이다. 자녀를 그렇게 양육하는 것은 자녀의 앞길을 망치려고 작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갈팡질팡하는 견해

 

지난 수십 년 동안 자녀 양육법은 끊임없이 변하는 인간의 견해에 자주 영향을 받았습니다. 교육자인 로널드 G. 모리시는 이렇게 썼습니다.

 

“사회가 계속 변해 감에 따라 자녀를 어떻게 징계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도 계속 변하고 있다.” * 따라서 부모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온갖 가르침의 바람으로 인해 파도에 떠밀리듯 흔들리고 이리저리 밀려다니”게 될 수 있습니다(엡 4:14).

 

분명, 징계에 인색한 오늘날의 풍조는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부모는 권위가 약해졌고 자녀는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진정한 자신감을 갖는 데 필요한 지도를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자녀를 양육하는 더 나은 방법이 있습니까?정말 좋은 부모일까요?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자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열성 엄마입니다. 평일 방과 후는 물론이고 주말에도 자녀를 스케이트 레슨, 피아노 학원, 축구 교실에 직접 데려다줍니다. 자녀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 시켜 줍니다. 그러다 보면 피곤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아이는 자기가 내 인생의 전부고 내가 자기를 위해서 뭐든 해 줄 거라는 걸 알 거야. 엄마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녀를 위해 녹초가 될 때까지 뛰어다니는 부모를 보면서 자녀가 실제로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어른들 특히 부모가 자녀를 시중드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해 보십시오: 부모에게도 나름의 삶이 있다는 것을 자녀에게 알려 주십시오. 그러면 자녀는 부모를 비롯해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엄한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당신은 자녀에게 그런 부모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에게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심지어 칭찬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을 때도 칭찬을 해 줍니다. 당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떻게든 자신감을 심어 줘야 해. 잘한다는 말을 자꾸 해 줘야 자신감도 갖고 성공도 할 수 있을 거야.’

 

생각해 보십시오: 단지 자신감을 키워 주려는 목적으로 사실이 아닌 칭찬을 해 주면 자녀가 실제로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그렇게 무조건 자신감을 키워 주면 자녀에게 지금은 물론 훗날 어떤 해로운 결과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해 보십시오: 균형을 잡으십시오. 실제로 잘한 일에 대해 칭찬해 주고, 자녀를 지나치게 꾸짖지 마십시오.

 

당신에게는 여섯 살짜리 딸과 다섯 살짜리 딸이 있는데, 큰아이가 화를 잘 내는 편입니다. 어제도 큰아이가 갑자기 화를 내더니 동생을 때렸습니다. 당신은 어제 상황을 떠올리며 이렇게 생각합니다. ‘혼내지 않고 그냥 타이르기를 잘했지. 왜 그런 나쁜 짓을 했냐고 혼냈으면 애가 상처를 받았을 거야.’

 

생각해 보십시오: 여섯 살짜리 아이를 타이르기만 하는 것으로 충분합니까? 자녀의 행동이 “나쁜” 것이라고 말해 주는 것이 정말 해롭습니까?

 

이렇게 해 보십시오: 자녀가 잘못을 하면 그에 맞는 징계를 하십시오. 사랑에서 우러나와 징계를 하면 자녀는 잘못된 행동을 고치게 될 것입니다.

 

‘미더운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미덥지 않다’고 노자는 말했습니다. 여기서 미더운 말이란 진실하고 소박한 말. 아름다운 말은 화려하고 가식적인 말을 뜻합니다. 언행일치. 말과 행동은 참 중요하지요. 요즘 한국은 어떠한가요? 사회지도층 인사 중에 하나인 검사들은 술 향응을 받고, 잘 알려진 연예인은 차사고가 나자 뺑소니를 치고, 오락 하지마라는 질타를 받은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하고, 정치인들은 자라나는 아이들이 얼굴 내밀기 힘들 정도의 거친 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말한 명함을 꺼내들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아름다운 말의 진위를 가리기도 힘들어졌습니다.

 

최근 경희대 재학 중인 여학생이, 환경미화원에게 욕설 하는 장면이 공개되어 인터넷과 언론을 뜨겁게 달구었지요.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기도 하지만, 사람을 절망과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말이 무기가 될 수가 있지요. 천차만별, 인간사.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고, 자라온 배경이 다르기에 별의 별 일들이 다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 같은 사람에게 그런 욕을 할 수가 있을까요?

 

천륜이 무너지고 인륜이 무너진 세상. 너무 많은 정보, 물질적 풍요가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정신력 분산의 시대, 집중력 결핍증에 빠진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고 있습니다. 집중이 되지 않으니, 불안하고 신경만 날카로워져 있습니다. 속도의 시대, 빠름만을 재촉하고 경쟁지상주의는 한국 사회 곳곳에 암초처럼 도사려 있어 사람의 심리 상태를 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인간관계가 신뢰를 잃어가고 있는 현실. 사회적 쇠퇴기(도덕적 쇠퇴기)에 가장 필요한 것은 정직성, 배려, 신뢰, 겸손, 도덕성입니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의 현주소는 어떤가요?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다양할 수가 있겠지만, 인문학과 대학의 추락 때문이고 말하고 싶습니다. 인문학을 협소하게 정의 내려 말씀드린다면, 교양입니다.

 

미국 역대 두 번 째 갑부의 아들로 태어난 미국 인기 앵커 앤더슨 쿠퍼는 아이티 지진 현장에서 생사의 기로에 선 사람들을 직접 구출해서 화제를 모았습니다. 앤더슨 쿠퍼는 말합니다. “인간이 되는 게 먼저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인간이 갖추어야 소양을 체득하는 겁니다.

 

소양은 어떻게 얻어지는 걸까요?

가정과 학교에서입니다. 어쩌면 평생에 거쳐 인간이 인간다움을 추구해 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인문학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인문학은 자라나는 세대에게 거름 같은 존재입니다. 출세학도 필요하지만 인문학독서를 통해 사고하고 고민하고 깨닫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외국의 석학들은 지금 세계촌은 문화의 쇠퇴기를 맞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런 징후들이 보이니까요. 독서의 힘과 함께 필요한 것은 대화의 복원입니다.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의 대화는 너무 중요하지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고 있습니다. 깊이도 없어지고 있지요. 집중력 상실의 시대는 사람들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고, 우울증에 빠지게 만듭니다. 미국인 중에 4분의 1은 마음을 터놓을 절친한 친구가 없다고 합니다. 가정에서 생활하는 6세 미만의 어린이 중 3분의 2가 깨어 있는 동안의 절반 이상을 TV를 켠 채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과학문명은 이렇게 발달되고 있는 있는데 인간은 정서를 불안하게 만드는 수많은 장치들이 삶 주변을 옥죄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관계가 점점 더 신뢰를 잃고 소모적이 되어 가는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정직성, 서두르지 않는 침착함, 그리고 배려가 아닐까요? 도덕적해이는 왜 발생할까요? 도덕성은 왜 추락하고 있는 걸까요. 대화는 막히고, 말의 폭력이 기승을 부리는 걸까요.

 

가정과 대화의 붕괴가 가장 큰 이유라고 꼽고 싶습니다. 비폭력 대화와 관련된 책을 쓴 분의 글이 떠오릅니다. “ 서로 존중하는 대화는 가정에서 시작해서 직장, 공동체 등에 이르기 까지 갈등을 해결하고 유지하고 화합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일 뿐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에 절실한 시대적 요청입니다”

 

억압과 저항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풍토를 넘어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나브로 도덕불감증은 더 심해질 것입니다. 건강한 공동체, 시민사회를 가로막는 벽은 먼저 대화의 회복입니다. 그런데 대화문화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정과 직장, 사회 곳곳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학습을 받아야 합니다.

 

싸움의 상대가 나에게 굴복하기를 바라지 말고, 상대가 나에게 찬사를 보내도록 마음을 써야 합니다. 상대가 ‘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도덕적 해이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습니다. 상대를 죽이고 가려하면 악순환만 초래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한국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도덕성과 신뢰의 추락과 사례들을 지켜 보면서, 인간의 길을 다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몇 년 전인가 절친한 선배의 아버님이 살해당하는 사건을 지켜보았습니다. 선생을 하시다가 정년퇴직한 이후 소일삼아 경비 일을 하셨던 아버님은 저녁 무렵, 한 젊은이가 술을 먹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시비를 거는 모습을 보고 말기다가, 칼에 찔려 숨졌습니다. 대학생이었지요. 언론에서나 가끔 듣던 이야기인데... 가까운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선배에게는 딸 같은 동생이 있었습니다. 아들만 셋 두다가 힘겹게 얻은 어린 딸을 위해 평생을 교육계에 종사하고, 딸 시집보낼 때까지 살아야겠다고 야밤 경비 일을 하셨는데..

 

개인 탓으로 모든 것을 돌릴 수는 없습니다. 범죄를 어떻게 다 예방 하겠습니까. 하지만 소중한 공동체의 복원이 필요할 때입니다. 옛날에는 동네방네 어르신들이 다 스승이었지요. 핵가족화 된지 오래된 오늘은 어떠한가요.

 

평생 학습하는 마음으로 어른들도 공부를 할 때입니다.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배우고 나눌 때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언어폭력은 폭력을 부르고, 도덕성을 실추하게 만듭니다. 폭로나 비판 가지고는 이제 변화될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