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어떻게 고난을 극복할까요?

열려라 에바다 2024. 4. 29. 15:18

어떻게 고난을 극복할까요?

베드로전서 4:16

이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고난과 고통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에 갑작스런 질병이 침투하여 가정이 풍비박산시키는가 하면, 삼대 독자 또는 사대 독자가 교통사고로 죽기도 합니다.
9.11테러나 전쟁, 쓰나미 지진해일 같은 재해로 한꺼번에 온 가족을 잃게 되는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어려움, 즉 고난이 오기 마련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범죄한 이후로 인류에게는 그 죄에 따른 고통과 아픔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종류와 정도는 다르지만 여러 가지 고난이 오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고난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고난에 대하여 대처하고 반응하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우리의 자세에 따라 인생이 크게 좌우되는 것입니다.

1. 고난의 이유
2002년, 미국에서 일어났던 9.11사건을 겪은 많은 사람들은 마음속에 ‘왜 이런 고통스런 일이 벌어지는가?’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전능하시고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라면 그런 사건을 미리 막을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고난이 생길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사랑의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그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을 거야. 하나님은 무능하신가? 아니면 우리에게 무관심하신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방관하시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사고를 당한 후에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왜 내가(Why me?)” 왜 자신만이 그런 슬픔 일을 당해야 하는가를 하나님께 물은 것입니다.
그 때 한 전도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왜 나는 아닌가?(Why not me?)"
신문에 실리는 그 많은 사고들을 접하면서 왜 나만 그런 사고를 당하지 않아야 하는가도 물으시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고난은 있으며 없을 때에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태엽을 따라 움직이는 인형이나 조작에 의해 정확하게 반응하는 컴퓨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일방적으로 평생 사랑하도록 작동해 놓고 다른 것을 하지 못하도록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 속에는 하나님의 속성과 같은 ‘자유 의지’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선과 악 앞에서 선택의 자유가 있으며 그 결과를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오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1) 우리의 잘못으로 고난이 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고통이 온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사단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이 고난 당하는 것을 보면서 즐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모든 고난에서 건져주시려는 마음으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안전하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길이 마련되어 있지만 의식적으로 불순종을 선택하여 범죄한 것입니다.
그리고 범죄의 결과로 고통과 수치와 죽음이 온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잘못 때문에 오는 고통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왜 끔찍한 교통사고가 일어날까요?
왜 그런 사고를 막지 않으셨냐고 하나님을 원망하시겠습니까?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 아닙니다.
그건 운전자의 운전이 서툴거나 과속하거나 졸거나 아니면 부주의 때문에 생기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뜨거운 국그릇을 맨 손으로 잡다가 상처를 입게 되었을 때 그것은 누구의 잘못입니까?
잠언 19:3을 보면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고난이 올 때는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다만 하나님께 잘못을 자백하십시오.
먼 산을 보고 길을 걷다가 넘어진 사람이 하늘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왜 나를 넘어뜨립니까?”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다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치료를 간구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매맞을 짓을 하는 것을 다 하시면서도 긍휼을 베푸십니다.

2)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고난이 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잡혀가 믿음을 지키다가 역적으로 몰려 사자굴에 갇혔습니다.
왜 하나님은 다니엘이 외국에 끌려가는 것과 사자굴에 던져지는 것을 막지 않으셨을까요?
하나님이 계시지 않거나 하나님이 무능하시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은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지도록 허용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고 그 일로 다니엘은 더 크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노예로 끌려가 고통을 당하는 것을 하나님은 왜 막지 않으셨을까요?
그가 무슨 악을 저질렀습니까? 그러나 그의 고난도 허용하셨습니다.
요셉은 고난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후에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일어났으며 결국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그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때마다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계셨습니다.

아이가 놀이터의 철봉대에서 놀다가 떨어져 눈가가 찢어졌습니다.
급히 병원에 데려가니 의사는 마취도 하지 않고 그대로 찢어진 것을 꿰매는 것이었습니다.
수술을 하는 동안 고통을 줄이려고 국부 마취를 하면 수술 후에 더 아플 뿐 아니라 위험하기 때문에 의사를 마취를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그 의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것은 아이를 위한 판단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정말 메시아라면 뛰어내려 노든지 옆 사람을 살리든지 무슨 대책일 세우시오.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무능합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침묵하시고 온갖 모욕과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의 고난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찔리고 상함으로, 채찍으로 맞음으로, 그가 피를 흘림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 모든 고난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은혜의 고난이었습니다.
이사야 55:8~9에서 처럼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3) 죄에 대한 징벌로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거액의 뇌물을 받은 사람이 경찰에 붙잡혀 결국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 고난은 자기 죄 때문에 당연히 받아야 하는 대가입니다.
술을 많이 마셔서 뇌출혈로 병원에서 오래 고생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고난에 대하여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니코틴 중독으로 폐암에 걸린 사람이 담배 회사를 원망할 수 있습니까?
베드로전서 4:15을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베드로전서 2:20에서는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쁜 짓을 하다가 들켜서 고난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과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앞에 나아와 죄를 회개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면 그 고난의 기간이 감소되거나 지나가기도 합니다.

아모스서에서 아모스가 다섯 가지 환상을 보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때 아모스가 땅에 엎드려 이 백성을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재앙을 중지시키셨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재앙을 중지시키셨습니다.
광야에서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려는 찰라 모세가 땅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자 재앙이 지나갔습니다.
죄에 대한 벌로 고난을 당하게 되면 어떻께 할까요?
즉시 죄를 자복하고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재앙과 형벌이 속히 지나가도록 간구하십시오.

4) 하나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19을 보면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고 말씀합니다.
어느 장군에게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들은 자신도 아버지처럼 장군이 되겠다는 꿈을 가졌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군에 입대하자 편지를 써 주면서 감독관에게 보여주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든든한 지원으로 근무하기에 편한 곳으로 가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힘겨운 훈련소 생활도 잘 견뎌냈습니다.
드디어 부대를 배치하던 날, 가장 훈련이 심하고 잠시도 긴장을 훌 수 없는 부대였습니다.
그곳은 육군의 맨 밑바닥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장군의 아들을 진짜 군인으로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훈련이 심하고 어려움이 많은 부대에 배치되도록 부탁한 것입니다.
그 들이 받게 되는 고난은 지혜로운 아버지의 계획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제물로 바치러 가던 사흘 동안 깊은 고통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겪은 고난은 아브라함이 무엇을 잘못해서 당하는 것이라기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려고 그의 뜻대로 시험하신 것이라고 성경은 밝힙니다.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십시오.
당장은 어렵고 “왜 나만 이런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라고 질문할지 모르나 시간이 지난 후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탈무드에 자식을 사랑한다면 거칠게 키우라는 말이 있습니다.
온실에서 자란 식물은 약하기 때문입니다.

5) 이유를 알 수 없는 애매한 고난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없는 어려움을 종종 겪을 때도 있습니다.
내가 잘못했기 때문이라면 마음속으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참지만 무슨 이유가 있으면 좋겠는데 아무런 이유도 찾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못된 것이 없는데 어려움이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일마다 때마다 엉키고 넘어지고 때어지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답답하고 고통스럽습니다.
성경은 사도 베드로를 통해서 권고합니다.
베드로전서 2:19을 보면 “애매한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라고 말씀합니다.
기도하고 구해도 아무런 답변도 얻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평안한데 자신만 고난을 당한다는 생각에 절망하기도 합니다,
범죄한 인생이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환난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환난과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기대하는 것이 잘못된 생각일 수 있습니다.
욥기 5:7을 보면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흙집과 장막에 사는 것이 우리의 인생인데 어찌 강한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궂은 비에 젖지 않겠습니까?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 닥치면 더 심한 고난을 받으신 주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인내하십시오.
이유를 알아도 참고 이유를 몰라도 참는 것이 고난을 극복하는 하나의 좋은 방법입니다.

2. 고난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
무슨 일이 생기면 다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는 것일 조심하십시오.
자신의 게으름 때문에 공부하지 않아 시험에 불합격했으면서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으로 일을 그르친 후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마치 아이가 넘어진 뒤에 앞에 가던 엄마를 붙잡고 화를 내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고난은 하나님의 특별한 이유로 겪어야 하는 경우가 있지만 사사건건 하나님을 들먹이는 것은 다분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기심입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당하는 고난이라면 그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수해야 합니다.

1) “무슨 죄가 있을 것이다.”
욥은 어느 날, 무서운 재난과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일종의 어려운 시험이었습니다.
그런데 고통하는 욥을 위로하려고 왔던 친구들이 그에게 어떻게 말했습니까?
욥기 4:7~9을 보면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무엇인가 약한 것을 심었기 때문에 그것을 거두는 것이 틀림없다는 논리입니다.
욥기 18:20에 보면 다른 친구는 “그의 운명에 서쪽에서 오는 자와 동쪽에서 오는 자가 깜짝 놀라리라” 고 말했고
욥 18:21에서 보면 세 번째 친구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참으로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이러하니라.”
그들은 상당히 일리가 있는 주장을 했지만 욥의 가슴을 더 아프게 했습니다.

죄에서만 고통의 원인을 찾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친구나 교인들에게 심방을 갈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원에 가서 기도가 끝나자마자 “너, 죄 지은 거 있으면 똑바로 이야기해. 하나님이 죄 없는 사람 치는 거 봤니?” 이렇게 다그칩니다.
그러면 환자가 병이 나으려다가 오히려 더 악화되지는 않을까요?
특히 환자 앞에서는 사소한 말이라도 주의해야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을 보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사람의 소경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질문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 사람들은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그게 누구 잘못 때문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요한복음 9:3에서 말씀합니다.
사고나 질병으로 고통하는 이들에게 무슨 죄를 지었다고, 잘못을 저질렀다고 함부로 이야기한다면 얼마나 큰 상처가 될까요?
성경을 통해서 분명하고 시원한 대답을 할 수 없을 때에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격려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2) “모두 사단의 짓이다.”
이것 또한 위험한 생각입니다.
미신을 믿는 사람들은 어느 지역에서 교통사고가 나면 그곳에 있는 귀신을 달래기 위해서 사고 지점에 고사를 지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질병이나 사고를 당하면 마치 다 사단의 짓인 양, 특별 기도를 하거나 안수기도를 받기도 하는데 이런 생각은 건전하지 못합니다.
한국교회에는 비성경적인 ‘귀신론’ 문제가 아직도 시끄럽습니다.
병에 걸리면 전부 귀신 탓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암 귀신, 디스크 귀신, 결핵 귀신 등 그 병에 걸린 사람이 죽으면 그 질병 귀신이 공중에 떠다니다가 또 다른 사람에게 붙는가는 식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모든 질병이 귀신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독감 귀신, 재채기 귀신, 심지어 떨국질 귀신이 있다고 주장하는 교단이 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3. 고난을 극복하려면…
1) “먼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아이가 친구들과 다투다가 지게 되면 아빠를 부릅니다. 도움을 청하는 것이죠.
고난 중에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오면 놀라거나 당황하지 마십시오.
믿음의 선배들도 숱한 고난을 겪었습니다. 혼자가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4:12~13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어려움이 닥칠 때 제일 먼저 할 일은 기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직접 통하는 전화선과 같습니다.
한 번도 통화중이거나 고장 난 적이 없습니다.
야고보서 5:13을 보면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무기는 돈이나 힘이 아닙니다.
원래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가장 놀라운 영적 무기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6을 보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자에게는 멀리 보는 눈을 조시기 때문에 전에는 안 보이던 해결의 방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일들이라도 주님은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2) “ 피할 길을 찾게 하시거나 피할 길이 없는 경우에는 이기게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0:13을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시게 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은 일종의 유혹이거나 또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의미합니다.
이런 시험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런 걱정이나 갈등도 없는 곳은 공동묘지 밖에는 없습니다.
그 외에는 모두 문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당하는 시험은 주님의 도우심으로 넉넉히 이길 수 있거나 혹은 감당키 어려운 경우에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내십니다.
이 피할 길은 두 가지 경우에서 잘 보입니다.
무릎을 꿇어서 낮아질 때와 눈에 눈물이 맺히면 그 반사로 잘 보입니다.
많이 힘들 때 무릎을 꿇고 통곡해보십시오.
어떻게 하나님께서 비상구를 주시는지를 경험해보십시오.

어릴 적, 가까운 동네 산에 자주 올라갔습니다.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칡을 캐기 위해서 상당히 높은 데까지 올라갔는데 갑자기 날씨가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사방이 어두워지더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면서 안개가 끼었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아 겁이 났습니다. 그때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산에서 길을 잃어버리면 시냇물이 흐르는 곳으로 내려가든지 아니면 무조건 산꼭대기로 올라가면 길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저는 무조건 산 위쪽으로 올라갔습니다.
한참을 올라가다 보니 저의 산 정상에 가까워졌고 산 아래의 길이 보였습니다.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습니다. 신앙의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리지 말고 위를 보십시오.

3) “인내하면서 통과하십시오.”
어떤 시련과 고난은 어쩔 수 없이 참고 견뎌야만 합니다.
나라 경제가 파산상태에 이르러 살림살이가 궁핍해졌다면 어쩔 수 없이 함께 견뎌야 할 일입니다.
한국이 ‘IMF'라는 경제 위기를 맞아 사람이 실직하고 빈손으로 거리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한 개인의 잘못도 아니고 사회 전반적으로 나타난 것이므로 절망하지 말고 이겨내야 합니다.
암을 치료받기 위해서 화학요법을 받는 이는 고통스러워도 잘 견뎌야 합니다.
그 어둡고 힘든 터널을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통과하면 질병에서 자유로워지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건강을 유지하려고 땀을 흘리며 걷고 달리는 운동을 합니다.
허약한 몸을 보신하려고 쓰디쓴 한약을 먹습니다.
모두 견디고 지나가면 감사할 일들입니다.
고난이 왔다고 엄살부리지 말고 의연하게 버텨 내십시오.

4) “적절한 도움을 구하십시오.”
갑자기 몸이 많이 아픕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병원에 안 가고 기도원으로 가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병원으로 갑니까? 어느 것이 맞는 답일까요? 믿음이 있으니 약을 거부해도 됩니까?
약사와 의사도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입니다. 좋은 의사를 찾아가십시오.
질병은 의사의 도움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대의학도 도움을 거절하고 그저 기도만 하는 것이 바른 신앙은 아닙니다.
공부하는 문제라면 유능한 교수의 조언을 받는 것이 필요하고, 법적인 고통이 있으면 그런 분야에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법과 지식이 없어서 고생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앙적인 문제가 있으면 목사와 상담하고 기도의 지원을 받으십시오.
고난을 혼자 짊어지지 말고 지혜로운 도움을 받으십시오.

5) “소망을 가지십시오.”
두 명의 암 전문의가 같은 질병을 가진 두 명의 암환자에게 같은 종류의 치료약을, 같은 분량으로, 같은 투약기간을 가지고 치료했는데, 한 사람의 경우에는 치료효과가 22%에 불과했고, 다른 경우에는 치료효과가 74%가 되었습니다.
“자네는 나와 치료법이 똑같은데 어째서 자네 환자의 치료 효과는 나보다 세 배 이상 높은가?”
그러자 다른 의사가 대답을 했습니다. “난 한 가지 요법을 더 섰네. 그건 희망이라는 요법이지. 환자로 하여금 완쾌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게 하면 치료 효과가 크게 달리진다네.”
세상에는 헛된 소망이 있습니다.
위대한 정치가가 되는 것, 이것을 자신의 소망으로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정치가가 된 후에는 또 무슨 소망이 생깁니까?
위대한 과학자가 되는 것, 좋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위대한 과학자가 된 후에는 소망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까?
그런 것을 궁극적인 소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을 향해 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입니다.
훌륭한 예술가나 과학자나 지도자가 되어도 죽으면 다 허사입니다.
죽은 너머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결코 무너지지 않는 산 소망의 기초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그를 믿는 자들도 다시 살 것이라고 성경에서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죽음조차도 절망이 아닙니다.
그 너머에 더욱 놀라운 영생의 길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진리입니다.
천국과 영생을 가설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오늘은 궂은 비가 쏟아져도 시커먼 구름 너머로 한 가닥 햇살을 바라보십시오.
비가 오는 날에는 태양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태양은 여전히 있습니다.
잠시 구름에 가려진 것 뿐입니다.
검은 구름 너머에 있는 빛을 보는 것, 그것이 믿음이고 소망인 것입니다.

3. 고난 속의 유익
고난을 받으면 짓눌리고 깨지고 자신을 못살게 굴어서 죽어 가는 사람도 가끔 있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고난은 약이 됩니다.


첫째, 고난은 정신을 차리도록 깨우치고 근신하게 합니다.
왜 문둥병이 다른 병에 비해서 더 무섭습니까?
무엇보다도 문둥병에 걸리면 감각이 무뎌지다가 아예 감각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것을 반져도 뜨겁지 않고, 피가 나도 아프지 않습니다.
아픔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복이 됩니다.
고난이 오면 우리는 비로소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만사가 자기 마음대로 될 줄로 착각하고 교만하다가 갑작스럽게 고난이 닥치면 그제서야 연약한 자신을 바랍니다.
“공돈은 거저 나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생긴 돈은 다 빠져 나갑니다.
어느 가난한 청년이 도박으로 상당한 액수의 돈을 땄습니다.
돈을 별면 어느 곳에 쓰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돈이 들어오니 어쩔 줄 모르고 낭비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허비했다는 것입니다.
돈이 귀한 줄 모르게 되니 물처럼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수고하여 번 돈은 그렇게 쓰지 않습니다.
고난이 와야 무릎을 꿇고 기도하게 됩니다.
고난은 우리의 삶을 깨워 주는 자명종과 같습니다.

둘째, 고난으로 강하고 온전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친구의 오렌지 밭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 해는 비가 오지 않아서 많은 오렌지가 바싹 바르고 거의 죽어갔지만 그 친구의 밭에 있는 오렌지 나무는 열매가 풍성했습니다. 이 사람이 친구에게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오렌지 나무가 조금 어렸을 때 일부러 말라 죽지 않을 만큼 물을 주었더니 뿌리가 물을 찾아 땅속 깊이 퍼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상당히 자란 후에는 가뭄이 와도 깊은 곳에서 물기를 빨아올리므로 싱싱하게 자란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나무를 강하게 한 것입니다.
무서운 고난의 터널을 통과한 욥은 욥기 23:10에서 고난의 의미를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불순물이 많이 섞인 금을 어떻게 순금으로 만듭니까? 불에 넣고 여러 번 제련을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흙그릇에 넣고 밑에 불을 땝니다.
한두 번 끓이게 되면 찌꺼기가 다 떠오릅니다. 그것을 건져낸 후 다시 끓입니다.
같은 작업을 일곱 번까지 반복하면 결국 모든 불순물이 빠지고 얼굴이 비칠 정도로 거울 같이 맑은 순금이 된다고 합니다.
여러 번 불에 통과하게 하니까 아주 미세한 티끌가지 걸러져 순수한 금만 남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는 것이 기쁨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고난이라는 불을 통과하면서 우리의 나쁜 습관과 불신과 교만이 말끔히 정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주님 앞에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7을 보면 “너�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엇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강한 군인은 따뜻한 실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비바람이 치는 거친 산과 들판의 훈련장에서 만들어집니다.
고난은 우리를 강하게 하고 온전하게 해 줍니다.
로마서 5:3~4을 보면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불 앎이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 불같은 성격이 다듬어져 인내를 배우며 인격이 단련됩니다.
그래서 고난을 ‘가장된 축복’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셋째,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배웁니다.
경제가 악화되면서 어떤 사람은 직장을 잃었습니다.
살던 집도 빼앗겼는데 그 충격으로 아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는 더 잃어버릴 것도 없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교회 옆을 지나는데 한 석공이 커다란 돌을 망치로 대려서 작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는데 좋은 돌을 그렇게 작게 만듭니까?”
일꾼은 교회 꼭대기를 가리키면서 “저기 보이는 작은 틈에 맞게 잘라내는 것이죠.”
그 순간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 꼭 맞게 하려고 너를 깎고 있는 것이란다.”
고난이 우리의 모난 곳을 깎아내기도 하고 비뚤어진 것을 고쳐주기도 합니다.
시편 119:67, 71을 보면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휼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

넷째, 고난은 더 큰 은혜를 경험하게 합니다.
전쟁이 나면 제일 먼저 탐지하는 사람을 보내고, 두 번째는 제일 훈련을 많이 받은 해병대를 보냅니다.
제일 치열한 전쟁터에는 제일 강한 사람을 보냅니다.
하나님의 깊은 은혜의 바다에는 강한 사람을 집어 넣습니다.
큰 고난이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경험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동일하게 발견되는 한 가지 공동점이 ‘고난’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모세와 여호수아, 야곱과 요셉, 다윗과 엘리야와 엘리사, 수많은 선지자들, 그리고 신약에 나오는 믿음의 선배들을 보십시오.
어느 누구도 편안하고 안일한 길을 가면서 이대한 믿음의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시편 66:11~12을 보면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허리와 머리에 무거운 집을 짓누르는 것을 경험하고 불과 물을 통과해야 하지만, 후에는 더 넓고 풍성한 곳으로 인도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붙잡으면 고난을 이기는 힘이 생깁니다.

다섯째,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베다니 동네에 살던 나사로란 청년은 갑작스런 병에 걸려 며칠 고생하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의 누이들은 당황하며 슬퍼하는데 예수님은 전혀 다르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4을 보면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사로는 앓다가 죽어서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소망이 끊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장사를 지내고 며칠 후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 마르다는 섭섭한 마음으로 “예수님이 미리 오셨다면 우리 오빠가 살았을 텐데, 이제는 너무 늦으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어서 이미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리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셨습니다.
만일 나사로가 조금 아플 때 주님이 오셔서 고치셨다면 z\그런 큰 감사의 마음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죽어서 냄새가 날 정도로 절망적인 상태에서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그들의 기쁨이 더 컸던 것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예수님께서 지체하신 것은 실수나 무성의가 아니라 그들에게 더 깊은 믿음을 갖게 하시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더 크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계곡이 깊을수록 산이 더 높은 것처럼 고난이 깊을수록 기쁨이 큰 것입니다.
고난의 기쁨이 쉽게 끝나지 않아도 견뎌내십시오.
고난을 잘 이기어 나가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어려움이 다 없어져야 고난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더 큰 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일 때 끝이 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고난을 이겨내기를 바랍니다.
의로운 집사 스데반의 순교는 유대교의 지도자인 사울이 바울로 바뀌는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의 순교는 한 사람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변화 받은 사울을 통하여 이스라엘과 로마와 세상이 변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땅에 심겨진 한 알의 밀알이었습니다.

작가 밀턴은 시력을 잃은 후에 유명한 <실락원>, <복락원>을 썼고, 헨델은 전신맙를 당한 후에 “메시야”를 작곡했습니다.
베토벤은 청력을 잃은 후에 더욱 위대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화가 렘브란트도 아내를 잃은 후에 명작을 그렸습니다.
슬픔이 사람을 새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삶의 어두운 면만 보지 말고 밝은 면을 보는 것을 연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선 언어의 표현부터 고치십시오.
‘안 된다, 못 한다. 집어치우자. 죽겠다.“는 말은 더 이상 하지 마십시오.
“해 보자, 할 수 있다, 길이 있을 것이다.”라는 말로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우울하게 사는 사람은 짜증이 많고 실제로 삶이 어둡습니다.
찬송을 많이 듣고 많이 부르고 유머를 배우십시오.
미소 짓는 것도 연습하면 습관이 됩니다.
고난이 없는 삶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힘들지만 고난이라는 장애물을 기회로 삼아 더 높이 올라가고 삶의 깊은 교훈을 깨닫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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