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성경이 말하는 고통의 이유 6가지

열려라 에바다 2024. 4. 29. 15:13

성경이 말하는 고통의 이유 6가지

1. 사단의 도전

 

 구약 성경에 나오는 욥은 사단의 도전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된 대표적인 경우이다. 욥기 1장에는 사단이 하늘 총회에 참석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회의에서 사단은 자신이 이 지구를 두루 다녀 보았는데,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 왔나이다.” 욥 1:6,7. 이 때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욥에 대해서 아느냐고 물으시면서, 욥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셨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 1:8

 

그러나 사단은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많은 재물을 축복하셨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서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섬긴다는 것이 사단의 고소였다.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라.” 욥 1:10. 순수한 동기와 양심적인 확신에 의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욥을 번영케 하셨으므로, 욥이 그에 대한 답례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하는 것이라고 사단은 주장하였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축복을 욥에게서 거두시면, 그 즉시로 욥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이 욥에 대한 사단의 고소 내용이었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욥 1:11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명예가 걸고서 사단의 이러한 도전을 받아들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욥의 몸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셨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욥 1:12. 그리하여 즉시로 사단은 욥을 시험하기 위해서 욥에게로 내려갔다.

 

재난이 연속적으로 욥에게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외적들이 쳐들어 와서 소와 나귀를 다 빼앗고 종들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양과 종들을 불살라 버렸다는 종들의 말이 마치기도 전에, “또 한사람이 와서 고하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거친 들에서 대풍이 불어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욥기 1:18,19. 엄청난 재난의 소식을 연속적으로 전달하는 종들의 말을 듣고 서있는 욥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사단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다. 그는 욥의 재산 뿐만 아니라 자녀들을 빼앗아 갔다. 사단은 욥의 입에서 하나님께 대한 저주가 나오길 기대하였다. 그러나 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욥은 “일어나서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기 1:20~22. 사단은 완전히 실패했으며, 욥에 대한 하나님의 신뢰는 증명되었으며, 욥을 의인이라고 선언하셨던 하나님의 명예는 옹호되었다. 욥은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받기 위해서, 또는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욥의 신앙은 순결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단은 포기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욥이 순결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사단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욥기 2:3.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사단은 욥이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욥의 몸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제한하셨기 때문이라고 대꾸하였다.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이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이제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욥기 2:4,5.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사단의 이러한 도전을 받아 들이셨다.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욥기 2:6. 다시 한번 사단은 욥의 몸에 온갖 고통을 주기 위해서 지구로 달려 내려갔다. 인간은 이기적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었다.

 

사단은 욥에게 고문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 2:7. 욥이 “재 가운데에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던 욥의 아내는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저주하였다(욥 2:9). 친구들도 욥을 찾아와서 욥에게 절망적인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욥 4:7,8. 친구들이 욥에게 던졌던 조롱과 비웃음은 그를 정말 참기 어려운 고통 속으로 몰아갔다.

 

욥의 고결한 성품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부인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부인에게 권면하였다.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욥기 2:10. 욥의 입에서 나온 이 한마디의 말에 의해서, 사단은 완전히 패배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단은 더 이상 욥기에 등장하지 않는다. 사단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기 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했던 욥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신뢰하리라 ...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고 훗날 그가 땅에 서실 것임을 내가 앎이라.” 욥기 13:15; 19:25(영어 킹제임스 성경역).

 

욥은 하늘에서 사단이 하나님께 도전했던 사실을 몰랐다. 그는 시련과 고통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 여하에 따라서 하나님 또는 사단이 승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또한 하늘에서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오고간 대화를 들은 모든 천사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사실도 몰랐다. 그가 알았던 것은 아무런 이유없이 재난이 자신에게 닥쳤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서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태도를 나타내었다. 그의 주변에서 일어난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의 빛에 따라서 행동하였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형제자매들이여, 욥의 모본을 따르라. 욥은 자신에게 어떤 죄가 있길래 이러한 재난이 이르러 왔는지를 깊이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당한 재난의 이유와 원인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대 역시 고통의 이유가 그대 자신의 죄나 부족함에 있는지를 깊이 살피라. 만일 어떤 특별한 이유없이 고통이나 재난이 닥쳐왔다고 생각되면, 그대도 욥처럼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신뢰하리라”고 말함으로써, 그대를 향한 사단의 도전을 물리치라.

  

2.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이 임한다.

 

 고통이나 심판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임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던 갈릴리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것을 상기해 보자.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고.” 눅 13:1.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을 보면, 그 당시 빌라도가 수많은 사람들을 성전에서 살해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도중에 성전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일이 그들에게 일어난 것을 보면, 그들은 틀림없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악한 죄인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길, “가라사대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 눅 13:2,3. 계속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하는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 13:4,5. 갈릴리 사람들의 죽음과 실로암 망대에 치어 죽은 사람들은 죄를 범했기 때문에 형벌을 받았다기 보다는,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형벌을 받고 죽었다는 것이 그들의 죽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설명이다.

 

우리는 어떤 죄로 인하여 갈릴리 사람들이 형벌을 받았는지 모른다. 이 이야기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치 않는 자들은 모두 그와 같이 멸망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갈릴리 사람들이 회개치 아니하여 멸망당한 것을 지적하시면서, 만일 우리도 회개치 않으면 그들처럼 멸망당할 것을 경고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그들은 우리보다 더 악한 죄인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형벌을 받았다. 만일 우리가 회개치 아니하면 똑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임할 수 있다. 형벌이 우리의 생애 동안에 임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보다 선하다고 착각하지 말라. 최후의 심판날에는 반드시 회개하지 않은 죄에 대하여 보응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교훈이 실로암 망대에 치어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적용된다. 성전에서 종교적인 행위인 제사를 드리고 있었던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종교를 가지고 있던, 가지고 있지 않던 간에 회개치 않는 자들은 모두 이와 같이 멸망당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대에게 시련과 고통이 있는가? 혹시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라. 그대가 그리스도인이든지 아니든지를 막론하고 회개치 않는 죄에 대해서 그대는 언젠가 그 댓가를 지불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고통이 온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이야기는 고통의 이유에 대한 또 다른 면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이 일화가 주는 교훈은 죄의 문제나 회개가 아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의해서 고통이 올 수 있으며, 고통을 당하고 있는 당사자는 믿음을 통하여 그 고통에서 해방되고 치유될 수 있다는 놀라운 교훈이 담겨져 있다.

 

제자들은 그 사람이 소경이 된 이유를 죄의 문제와 결부시켰다.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그 사람은 자신이나 부모의 죄로 인하여 소경이 된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이 사람이나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대답하셨다(요 9:3).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병든 자에게 어떤 치유의 기적을 베풀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시 위해서 소경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대하여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봉사사업을 시작하실 때, 그 소경이 믿음을 가지고 예수께 나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드디어 그 사람은 믿음을 가지고 예수께 나왔으며, 치유함을 받았다.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서 드러내기 위하여 소경이나 앉은뱅이가 되는 특권(고통)을 받은 불구자들이나 환자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올 때 즉시로 치유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소경이나 절름발이, 그리고 앉은뱅이들에게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치유함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당신이 치유함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이 불구자로 평생을 살다가 죽었다고 해서 “그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이 불구자가 된 진정한 이유를 모르며, 왜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은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시간이 이르기 전에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잘못된 희망을 가지고 서두르면, 실망하게 될 것이다. 조용히, 그리고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대한 가장 강력한 믿음의 행사이다.

  

4. 그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고통이 온다.

 

 바울의 경우는 때때로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고통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바울은 신실한 종이었다.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훌륭하게 쓰임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연약한 인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이룩한 놀라운 사업과 희생에 대하여 스스로 교만해질 수 있는 위험을 보셨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스스로 자신을 높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높여질 위험을 아셨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셨다. 우리는 그 가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매우 바울의 육체를 매우 괴롭혔었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가시를 몸에 가지고 다녀 보았는가? 얼마나 불편하고 고통스러운가? 바울은 세번이나 그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바울의 육체에 그대로 남겨 두는 것이 최선이라고 결론지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만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 가시는 바울의 육체 속에 일평생 동안 남아서 고통을 주었다.

 

바울이 “사단의 사자”라고 불렀던 그 육체의 가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의 구원을 위하여 남겨진 바 되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은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고후 12:7~9.

 

바울은 많은 계시를 받았던 사도이다. 그로 인하여 사도 바울이 자고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도 그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위험이 있었다. 이러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 슬픈 일은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일수록 교만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경우들을 다루시는 법을 아신다.

 

가장 많은 신약 성경을 기록하였고, 제자들과 사도들 중에서 가장 많은 전도 여행을 하였던 위대한 사도 바울의 기도도 응답되지 않았는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기도가 응답되지 못하는 것은 믿음의 부족이라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병을 낫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려도 치유를 얻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이 부족하거나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몰아부치는 것은 매우 비성경적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 병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정말 순수한 믿음이 있다면, 그리고 그대가 진정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한다면, 온 마음을 다하여 그분의 섭리와 계획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바울이 자신의 육체 속에 박혀 있는 가시에 대해서 성경에 기록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고통을 허락하시는지에 관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겸손하게 낮추기 위한 경험이 어떤 것이며, 또한 언제 그러한 경험들이 필요한지를 아신다. 그러한 경험들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 우리는 바울을 생각하면서 “하물며 바울과 같은 사람도 육체의 가시가 필요했는데, 나처럼 연약하고 쉽게 교만해질 수 있는 사람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더욱 필요하지 않겠는가?” 라고 말하도록 하자. 바울과 같은 위대한 그리스도인에게도 육체의 가시가 필요했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육체의 가시에 대해서 불평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고통은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찾아온다. 교만은 우리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준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교만을 치료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주 사용하시는 치료책은 우리의 육체에 가시를 허락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결과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왜냐하면 가시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모른채 불평과 불만의 세월을 보낼 수도 있고, 그분의 뜻에 감사하면서 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당신께서 우리의 몸에 가시를 허락하심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하실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시험을 당할 때에 그 이유를 찾아보아야 한다. 그러나 몇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시련에 대한 만족할만한 대답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육체의 가시가 제거되지 않는 이유를 발견하였지만, 어쩌면 우리는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의 이유를 알 수 없을 수도 있다. 그 때까지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비통함과 슬픔을 이해하시며 동정하시는 그분의 위로를 받음으로써 견디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같은 육체를 취하시고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우리와 동일한 시험과 고통을 경험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위한 중보자가 되실 수 있었다. 시험을 겪었던 사람만이 시험받는 자를 진정으로 위로할 수 있다.

 

그대는 지금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가? 어쩌면 그대는 지금보다 더 겸손하고 온유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기 위하여 고통의 훈련학교에 입학한지도 모른다. 마음을 낮추고 왜 그대에게 이러한 고통이 제거되지 않는지를 기도해 보라.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119:67,71

  

5. 더 나은 봉사를 위해서 고통이 온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그대가 고통과 질병을 가질 수도 있다. 그것은 고통 중에서 가장 거룩하고 가치있는 고통인데, 우리는 그러한 고통을 “대리 고통”(vicarious suffering)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모든 면에 있어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른 종이었다. 그는 다른 제자들보다도 고통에 관하여 더 높고 많은 교훈을 배운 사도이었던 것같다. 다른 제자들은 어려움과 고통을 인내하라고 권면하였지만, 바울은 한걸음 더 나가서 고통의 시간을 즐기라고 말하였다(롬 12:12; 골 1:24). 이러한 면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매우 유사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1

 

예수님의 고통은 대리적인 고통이었다. 그분의 고통은 자신의 유익이나 죄로 인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십자가에서 인내하시고 모욕을 당한 것도 전적으로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그분의 전 생애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러한 분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고통을 받을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고통을 받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렇다.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면서 바로 이 점을 강조하였다.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은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웠노라. 내가 교회 일꾼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골 1:23~29

 

24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받은 괴로움”을 기뻐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라고 말한 바울의 간증을 주목해 보자. 바울은 타인을 위하여 고통을 받았으며, 또한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고난을 육체에 채웠다. 그의 이러한 소원은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 3:10,11. 바울은 “고난에 참예함과 그의 죽으심을 본받”기를 열망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생애의 최고의 목표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고난받다가 죽는 것. 물론, 바울은 고난을 통과하는 자신의 희생이나 공로를 통해서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구세주께서 주신 진리와 함께 고통당하기를 원했으며,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원했다. 그리스도처럼 자신도 대리적인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걸음으로써, 그리스도의 경험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원했던 것이다.

 

고통을 기뻐해야 할 이유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냈던 두번째 편지에서 바울은 자신의 신앙이 고난을 통하여 어떻게 승화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바울의 경험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받은 위로를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어 주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찰 정도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바울의 봉사에 있어서 새로운 장을 열어 주었다. 그는 자신이 고통을 많이 받을수록 시련과 슬픔 중에 있는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준비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예수께서 고난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돕고 어떻게 동정하실줄을 배우셨던 것처럼, 바울 역시 고난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란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 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고후 1:3~7.

 

여기에서 바울은 고통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받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바울은 다른 사람의 위로와 구원을 위해서 고통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받는 고통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고통 중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받고 있는 고통에 마음을 쓰기보다는, 고통을 통하여 자신이 좀더 동정적이고 자비로운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사실로 인하여 감사하였다. 바울은 고통을 통하여 고통받는 자들의 심정을 좀더 정확하게 헤아릴 수 있게 되었으며, 더욱 유능한 전도자가 될 수 있었다.

 

고통은 봉사를 위한 준비 과정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도 고통을 받으셨던 것이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을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 2:18. 예수 그리스도께서 연약한 육체를 쓰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인류를 위한 봉사를 위함이었다.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함에 싸여 있음이니라.” 히 5:2.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과 중보자가 되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히 5:8,9.

 

사람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 투병 생활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병자들의 느낌과 절망을 이해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셨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이다(히 2:18). 예수께서는 가장 많은 고통을 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우리를 가장 효과적으로 위로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분은 고난의 왕이시며, 또한 위로의 왕이시다.

 

바울이 그토록 선망했던 것이 바로 이 경험이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경험하셨던 그 방법 외에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자비롭고 은혜스럽게 도와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그는 고난의 경험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경험을 알게 되기를 소원하였다.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0.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고통 중에서도 즐거워 할 수 있었으며, 남겨진 육체의 가시에 대하여 만족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고통은 특권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빌 1:29,30. 바울은 여기서 고난을 특권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 특권도 받지만, 그분과 그분의 진리를 위하여 고통을 받는 특권도 동시에 받는 것이다. 고통을 이러한 관점에서 보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적다. 만일 그대가 고통을 이러한 관점에서 볼 수 있다면, 그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인하여 당하게 되는 모든 고통 속에서 오히려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아직 인생을 모르는 사람이다.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쉽게 낙심하게 되며,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없고, 위로해 줄 수도 없다. 깍아지른듯한 벼랑의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그와 비슷한 경험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고, 또한 도와줄 수 있다. 그대는 지금 고통 중에 있는가? 그렇다면, 혹시 지금 하나님께서 그대를 더 나은 봉사 위해서 준비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음을 겸손히 낮추고, 그대를 향한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명상해 보라.

  

6. 법을 범한 결과 때문에 고통이 온다.

 

 지금까지 우리는 고통과 질병이 일어나는 다섯가지 이유에 대해서 살펴 보았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러한 이유들은 특별한 경우들이며, 대개, 고통이나 질병은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이나 자연법칙들을 범하는 결과로서 온다. 고통이나 질병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오는 경우는 흔치 않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인간 스스로가 그들의 고통에 대한 원인을 제공한다. 노아 홍수나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 그리고 바로의 군사들이 홍해에서 수장당한 사건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하실 때에는 분명한 목적과 공의 하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 넘칠 때, 멸망이 이르러 온 경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러한 경우는 매우 드물며 대개의 경우 고통의 원인은 인간 스스로에게 있다.

 

그러므로 질병이 발생하면 먼저 자신이 율법과 자연 법칙 중에서 어떤 것을 범했는지를 신중하게 살핀 다음에 잘못된 것들을 회개하거나 개혁해야 한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건전한 상식이자 올바른 신앙 자세이다. 여기서 자연 법칙이란 생명의 법칙을 말하는 것으로서, 복종하면 살고, 범하면 죽게 되는 철칙을 의미한다.

 

율법이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도덕률을 말하며, 자연 법칙이란, 물고기가 물에서 살면 살고, 물 밖으로 뛰어 나오면 죽는 것과 같은 법칙을 말한다. 고압선을 만지면 죽는다는 법칙을 알고 있는 사람이 고의적으로 전깃줄을 만져서 죽었을 경우에, 우리는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려서는 않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독버섯을 먹는다면, 그는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의 댓가를 지불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생명의 법칙은 우리가 그것을 무시할 경우에 반드시 그 댓가를 지불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법칙을 지키면, 그것은 우리를 지켜주는 충실한 종이 되지만, 그것을 어겼을 경우에는 무서운 주인이 된다.

 

자연 법칙을 어겼다고 해서 항상 즉각적인 댓가를 지불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몇 년 후에 그 결과를 받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전혀 그 결과가 없이 사라지는 경우는 단 한번도 없다. 우리가 그것을 어긴 결과를 느끼든지 느끼지 못하든지 간에 그것은 항상 결과를 남긴다. 그러므로 자연 법칙은 그것을 어겼을 경우, 그 결과가 지연될 수는 있어도 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20대에 무엇을 뿌렸다면, 40대 혹은 50대에 가서는 그 결실을 거두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뿌려 놓고서, 그 결과가 생기지 않기를 희망하지만 그러한 희망은 헛된 것이다. 세상이 존재하는 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세워 놓으신 자연 법칙 또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자연 법칙은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에 따라서 변경될 수 있는 것으로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홍해를 갈라놓는 기적을 행사하심으로써, 자연 법칙을 파괴하셨다고 주장한다. 정말 그런가?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세워놓으신 법칙은 결코 파괴하는 분이 아니다. 공기보다 가벼운 물체는 중력에 의해서 공중에 뜰 수 없다는 자연 법칙이 존재한다. 그러나 공기보다 훨씬 무거운 보잉 747 점보 제트기가 하늘을 날지 않는가? 비록 공기보다 무거운 쇠덩어리일지라도 그것에 적당한 크기의 날개를 부착하고 빠른 속력으로 활주로를 달려가면 양력을 받아서, 공중에 날 수 있다는 또 다른 자연 법칙이 존재한다.

 

쇠덩어리는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는 자연 법칙이 존재하지만, 엄청난 무게의 유조선을 조선공학적으로 잘 설계하면 부력을 받아서 바다 위에 뜰 수 있다는 또 다른 자연 법칙이 존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 법칙 안에서 모든 현상을 해석하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인간의 어리석은 꾀 안에 가두어 놓으려고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당신께서 이 우주에 세워 놓으신 자연 법칙 안에서 자유롭게 기적을 행사하실 수 있는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하나님의 율법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율법인 십계명도 결코 변경되거나 폐하여질 수 없는 우주의 법칙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봉사를 가리키면서, 이제는 율법이 폐하여졌으므로 더 이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만, 예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고 지금도 선언하고 계신다(마 5:17,18). 자연 법칙을 범하였을 경우에 고통을 당하거나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율법을 범하였을 경우에는 그에 대한 댓가를 반드시 지불해야 하는데, 성경은 그 댓가를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율법을 범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은 결국에는 지옥의 형별을 받게 되지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그 결과를 받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다섯째 계명을 범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는 용서의 정신이 사라지게 된다. 미움과 원통함이 온 마음과 정신을 지배하게 된다. 그 결과, 혈압이 올라가고, 심장에 무리가 가며, 갑상선에 이상이 생기고, 몸과 마음이 오랜 기간 동안 스트레스를 받게 되어서, 결국에는 각종 질병과 고통이 그대를 찾아오게 된다.

 

하나님께서 불쾌히 여기시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한동안 아무런 형벌이나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먹고, 마시고, 시집 장가간 다음, 그 결과로 인하여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할 때까지 자신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노아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불쾌히 여기시는 아무런 징조도 없이 120년을 지낸 후에 갑자기 홍수가 이르러 왔던 것처럼, 쾌락과 자기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지금 현재는 어떤 특별한 징계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죄악의 잔이 차는 순간, 그들은 스스로 헤어나오기 어려운 고통과 고뇌의 경험을 갖게 된다.

 

비록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율법과 자연 법칙에 불순종할 때에는 그에 해당하는 결과를 받게 된다. 예를 들면, 열심히 일하는 자만이 수확을 거두게 된다는 것은 자연 법칙이다. 그러므로 열심히 일하지 않고 기도만 하면서, 좋은 열매와 결과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도 불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유전법칙에 의거하여 병약한 유전인자를 부모로부터 물려 받을 수 있다. 그들도 사고를 당하고, 불신자들이 걸리는 똑같은 질병에 들어 죽게 된다.

 

그렇다면, 육체적인 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통과 불신자들이 당하는 고통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 질문은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에게 동일한 자연 법칙을 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고통과 불신자의 고통 사이에 눈에 보이는 어떤 차이가 있다면, 각자가 어떤 반응과 태도를 나타내는가에 있지, 결코 하나님께서 그들 각자에게 적용시키는 자연 법칙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세상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의 생애에 다가오는 재난과 고통으로부터 면제될 수는 없지만, 그러한 사건들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는 사람에 따라서 크게 다를 수 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복종함으로 고난을 이겨내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일이라면 어떤 일에서도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을 통하여 고난 속에서도 안정된 마음으로 고난의 끝을 기다릴 수 있으며, 그러한 깊은 영적 체험을 통하여 더욱 더 고결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을 활용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편애를 받는다거나 자연 법칙에 따라서 받게 되는 고통을 경감받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자연 법칙을 적용시키지만, 하나님을 신실하게 신뢰하는 당신의 백성들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영적인 원칙을 적용시키고 계신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당신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적인 법칙에 따라서 그들의 마음에 용기를 주고 견딜 수 있는 힘을 공급하여 주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들에게 아무런 조건없이 베풀어져 있지만, 그분의 치유하시는 능력은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분께 나오기로 선택하는 사람에게만 조건적으로 제공된다.

 

그러므로 고통이나 질병을 가지고 있는가? 먼저, 그대의 양심과 생활 가운데서 어떤 법칙이 범하여지고 있는가를 살펴 보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그대의 죄와 잘못을 지적해 주실 때, 즉시로 회개하고 잘못된 것들을 개혁하라. 그리고 모든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맡겨라. 바로 이것이 그대가 어두운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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