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스크랩 잡을 수 있는 타이밍에 기회를 잡자! (전도서 3장 2~8, 룩 19:31)

열려라 에바다 2024. 5. 20. 08:04

본전 유지하려다가는 바뀌는 세상 속에서 조금씩 쇠퇴할 수밖에 없고, 성공하기 위해 가만히 앉아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위험”을 영어로 “Risk”라고 하는데, 위험이 있어도 추진할 때 바뀝니다. 위험하다고 가만히 있게 되면 변화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디어는 있는데 돈이 없어서 날개를 펴지 못하였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돈이 있어도 안정적인 삶이 좋으므로 변화를 원하지 아니합니다. 약간의 위험 부담으로 인하여 망설이며 위기가 기회임을 보지 못합니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현재에 안주하려 한다면 그는 이미 늙은 것입니다. 위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바라보면서 성공의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기도하였던 응답의 기회라는 사실을 못 보는 것입니다.

에스더의 죽을 수 있는 위험, 보아즈의 망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죽으면 죽을 것이라는 결단력으로 앞에 다가온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물에 빠져서 살려 달라고 기도하여서 하나님이 보트를 보내 주셨는데, 그 보트 타지 않고 계속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기도할 때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트를 보내 주셨으면 기회를 붙잡고 올라타야 사는 것입니다.

기회의 땅을 다 사야 하는데 기회인 줄 모르고 가진 반조차 처분하면, 기회를 붙잡지 않은 것보다는 괜찮지만 반쪽의 유익만을 얻을 것입니다. 앞에 있는 기회를 알아보고 베팅에 몰방(All in)하여야 합니다.

성공하려면 생각은 깊게 하되 행동은 빠르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머뭇거리다가는 기회가 지나가고 지나간 기회는 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기회를 놓치면 평생 대형상점이 아닌 구멍가게에서 목회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말씀하셨는데, 교회는 왜 자꾸 산으로 가고 단독 건물로 가서 자기끼리 모이려 합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의 빛”이므로 세상 속에서 빛을 밝혀야 합니다. 세상 안으로 들어가 불신자들과의 접촉점을 만들고 빛을 밝혀야 합니다.

 

 

1. 기회는 항상 오지 않고 잡을 수 있는 타이밍이 있습니다.

 

전도서 3장 2~8절에 “낳기에 시간(A time)과 죽기에 시간 심기에 시간과 심긴 것을 잡아끊기에(to uproot) 시간. 죽이기에 시간과 고치기에 시간, 깨뜨리기에 시간과 짓기에 시간. 울기에 시간과 웃기에 시간, 애도하기에 시간과 기뻐 껑충 뛰기에 시간. 돌들을 던지기에 시간과 돌들을 수집하기에(gather) 시간, 끌어안기에(embrace) 시간과 끌어안기로부터 삼갈 시간. 찾기에 시간과 잃기에 시간 지키기에 시간과 던지기에 시간. 찢기에 시간과 꿰매기에 시간 조용히 하기에 시간과 이야기하기에 시간. 사랑하기에 시간과 미워하기에 시간 전쟁의 시간과 평화의 시간이라고 하였습니다.

전도서 3장 2~8절은 “시간”이라는 말이 반복되는 시(詩)입니다.1)

“타이밍”(timing)은 “가장 좋은 순간을 잡아서 동작을 맞추는 일”이며 “최대 효과를 올리기 위한 속도 조절의 일”로 “때맞춤”, “적기”라 합니다. 모든 일에는 “적절한 시기(時期)”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낳기에(born) 시간이 있으며 죽기에 시간이 있습니다. 심기에 시간과 심긴 것을 잡아끊기에 시간이 있습니다(전 3:2).

옛적 때에 좋았던 것이 새로운 시대에는 손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 옛것을 과감히 정리하고 버려야 합니다. 사람 삶에도 잘 심긴 것을 잡아끊어야 할 때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죽이고 고칠 시간이 있고, 깨뜨리고 짓기에 시간이 있습니다(전 3:3). 옛것을 깨뜨리고 새것을 지어야 하는데, 옛것 때문에 새 복을 놓칩니다.

울고 웃기에 시간이 있고, 애도하고 뛰기에 시간이 있습니다(전 3:4).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여야만 합니다.

돌들을 던지기에 시간과 돌들을 수집하기에(gather) 시간, 끌어안을 시간이 있으며 끌어안기로부터 삼갈 시간이 있습니다(전 3:5).

찾고 잃기에 시간이 있고, 지키고 던지기에 시간이 있습니다(전 3:6). 때로는 잃을 각오를 하고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던져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옛것을 계속 붙잡고 있으려 할 때 새로운 복을 붙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기회가 “위기”라는 가면을 쓰고 오기에 많은 사람이 기회를 놓칩니다. 기회가 지나가고서 ‘어, 기회’라고 말해도 그때는 이미 붙잡지 못합니다. 모든 일에는 그것에 적절한 시간이 있는 법입니다.

역대상 12장 23절에 “이들은 군대에 끌어냄을 받은 자의 머리들 수며, 그들이 헤브론 다윗에게 오니 사울의 왕정을 그에 돌리기 위해서라”라고 하였습니다.

역대상 12장 23~37절은 헤브론에 있는 다윗을 찾아온 사람들입니다.2) 헤브론에서 다윗을 지지한 지파 병력 목록입니다.3)

배경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사울입니다. 어느 날 사무엘 예언자가 사울에게 ‘아말렉 민족과 전쟁해서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다 죽이십시오. 동물들도 다 죽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전쟁에 나가서 이겼는데 다 죽이지 않고 아각 왕을 살려두었습니다. 왕이니까 풍채도 좋고 능력도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이기 아까웠던 것입니다. 살려두었다가 이스라엘의 인재로 쓰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울이 동물들도 다 죽이지 않고 약하고 볼품없는 동물들을 죽였는데 건강하고 좋은 동물들은 죽이지 않고 살려두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 살려두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에서 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2번째 왕으로 다윗이라는 소년을 왕으로 준비해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예언자를 보내셔서 다윗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어느날 블레셋이라는 민족이 이스라엘에 쳐들어 왔을 때, 사울이 블레셋과 전쟁하기 위해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에 키가 3m나 되는 거인이 있었는데 그 거인의 이름은 골리앗이었습니다. 골리앗이 1:1로 싸우자고 제안해도 이스라엘에는 골리앗과 싸우려고 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소년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것이라며 돌을 가지고 나가서 던져서 골리앗의 이마에 꽂고 골리앗을 죽였습니다.

그 결과로 다윗이 유명해졌는데 사울이 다윗을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다윗이 헤브론에 있게 되었는데 각 지파에서 사람들이 다윗에게로 모여든 것입니다.

베냐민의 자손들로부터 3,000명이었습니다(대상 12:29).

베냐민의 자손들은 사울의 동족이었어도 다윗에 충성한 것입니다.4)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혈연에 상관없이 다윗에게 온 것입니다.

역대상 12장 32절에 “잇사카르 자손들로부터 그 시간에 이해의 아는 자들 이스라엘이 행할 것을 알기 위해 그들의 우두머리들이 200사람이었고 모든 그들의 형제들이 그들의 입 위에 있었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시간에 이해의 아는 자들”이 개역에 “시세를 알고”라고 번역되었는데 “시세(時勢)”란 말은 “때의 기세”, “때의 형세(形勢)”, “세상의 형편”인데, 지금 세상 형편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력과 통찰력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시간의 세상의 형세를 이해하는 자들이 “시세를 아는” 자들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숫자는 다윗과 함께 꿈을 설계한 사람들의 숫자입니다. 그들이 행한 일이 성경에 기록되어 대대로 전하여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일은 전쟁을 각오한 희생 없이는 절대로 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희생을 각오한 자들이 함께 힘을 모을 때 대업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잃을까 봐 몸 사리는 자는 이 일에 함께하지 못합니다. 다윗과 비전을 함께하고 하나님의 일을 꿈꾸는 자가 함께하는 것입니다.

성공은 이 시간이 어떤 때인지 이해하고 알 수 있는 것에 달렸습니다. 이 시기를 분별하고 통찰력을 가지고 실행하여 나가는 것에 달렸습니다. 지금 실행할 일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희생을 각오하는 것에 달렸습니다. 지금이 어떤 때인지를 바로 알고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성공합니다.

잇사카르 지파는 필요한 순간에 결단과 헌신의 기품을 가진 것입니다. 잇사카르 지파는 희생할 줄 아는 희생정신과 책임감을 가진 지파입니다.

그들이 자신의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였음을 뜻합니다.5) 시세를 알지 못한 사울의 군장 아브네르는 하나님의 대적이 되었습니다.

잇사카르”라는 이름(잇사스카르)은 “포상이 있다”를 뜻합니다. 우리가 시세를 알고 헌신할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리셔서 상주십니다.

모르드카이에 유대인들을 죽음에서 구원할 것이라는 비전은 있었으나 그 비전을 실행할 힘은 모르드카이에 없었고 에스더에게 있은 것입니다.

에스더가 기회를 놓쳤다면 모르드카이의 비전은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유대인들은 모두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에스더 자신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몸 사리고 하지 아니한 결과로 유대인들이 멸망할 때 함께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성경에 “에스더”라는 책이 쓰여 남아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영원히 기억되고 상을 받을 에스더와 보아즈처럼 되어야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무 상을 주지 않으시고 그냥 넘어가는 분이 아니시며, “잇사카르”라는 이름의 뜻처럼 반드시 하나님의 포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포상은 시세를 알고 시대의 필요에 헌신한 자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헌신과 희생을 기리셔서 반드시 상주실 것입니다.

망하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을 주시기 위해 헌신하라고 하시니,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을 것입니다”라는 희생정신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모험을 두려워하고 안정적인 것을 잡고 있으려는 것은 늙은 것입니다. 현재에 안주하여 모험하지 않는다면 변화가 없고 발전이 없는 것입니다.

험함을 무릅쓰는 모험(冒險)에는 위험(危險)의 요소가 있게 마련이나, 위험을 피하려고 안주하는 사람은 모험의 결과인 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고도 현상유지라고 자신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겠으나, 그것은 현상유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복의 반열에서 배제되는 것입니다. 이때를 위해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결국 그것을 가져가십니다.

즈불룬부터 군대의 나가는 자들, 전쟁의 배열하는 자들이 5만 명이고, 가르지 않은 마음(undivided heart) 안에 돕는 자들입니다(대상 12:33).

가르지 않은 마음”이라는 표현은 “마음과 마음이 아님”을 의미하는데 “마음과 마음”이므로 한국어로는 “두 마음을 품는다”로 번역되었습니다. 두 마음으로 분할되지 아니한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낸 것입니다.

성경은 두 마음을 가진 사람은 모든 길들 안에 불안정하다고 말씀하며 저는 주로부터 무엇을 받을 것을 꿈꾸지 말 것을 말씀합니다(약 1:7~8). 사람이 두 마음으로 나누어질 때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받을 것을 꿈꾸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두 마음으로 나뉘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재물에 종으로 섬기지 못하노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선택이 그 사람이 누구를 섬기고 있느냐를 증명합니다(마 6:24).

평소에 하나님을 섬기고 있노라고 말하는 것은 증명이 되지 못합니다. 결정적 순간에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가 어느 쪽을 섬기는지 증명합니다. 하나님과 재물에 마음이 나뉘지 아니한 자들이 다윗 왕국을 세웠습니다.

메시아의 왕국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에 의해 세워져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을 추구하고 시세를 알고 마음이 나뉘지 않은 자들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재물에 나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겨자씨처럼 작게 시작하지만, 이후에는 점점 자라서 나물보다 큰 나무가 되고 모든 새가 그 가지에 깃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왕국을 추구하면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천부께서는 먹고 마시고 입을 것들이 필요한 것을 아십니다(마 6:32). 이런 것을 걱정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왕국을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왕국을 추구하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더하여집니다(마 6:33).

그들은 다윗과 함께 그 꿈을 이루어낸 것입니다! 삶에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을 붙잡기 위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릴 결단의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단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포상이 있습니다.

 

 

2. 주께서 필요를 가지실 때면 기꺼이 빌려드려야 합니다.

 

루카복음 19장 31절에 “그리고 만일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말하는 때 그것의 주께서 필요를 가지시노라라는 것을 너희는 말할 것이나 곧 그가 그것들을 보낼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9장 28~48절은 예루살렘 안에 도착하신 예수님에 관한 것입니다.6)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푸는 것을 어떤 사람이 볼 것이며 그가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을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7) 그러시면서 ‘그것의 주께서 필요를 가지시노라’라고 답할 말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이 필요를 가지게 되나 본문에서 주께서 필요를 가지신 것입니다. 주께서 필요를 가지시면 주께 쓰시도록 내어드리는 일이 복된 일입니다. 주께 내어드린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매우 영광된 일입니다.

나귀 새끼 빌려드려서 나귀가 허리가 휘어 쓸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 빌려드리지 않았으면 나귀는 평생을 짐만 싣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 빌려드렸기 때문에 그 나귀는 주께서 타신 나귀가 되었고 나귀의 주인도 주께서 타신 존귀한 나귀의 주인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속한 어떤 것에 대해 필요를 가지시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놓치지 않아야만 하는 무한한 영광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평범한 인생을 살아가다가 죽는 것입니다.

“주께서 쓰시겠다”라는 말은 모든 것이 주께 속한 것이라는 고백이며, 주께서 바로 이때를 위해 그것을 나에게 맡기셨다는 뜻입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주께 쓰임을 받아야 복되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복된 삶이 될 기회를 놓치게 되면 남은 인생을 후회로 살 것입니다.

‘하나님 물 좀 주십시오 한 병밖에 남지 않았습니다’라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한 병을 펌프에 넣으면 많은 물을 줄게’라고 답하십니다. 그때 ‘안 됩니다. 이것은 내 생명을 위한 남긴 물입니다’라고 대답한다면 그 한 병은 계속 가질 것이어도 콸콸 쏟아지는 물은 얻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가진 물을 부을 때 마중물이 됨으로써 많은 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대답하셨는데도 ‘그것은 안 됩니다’라고 한다면 기도하였던 것에 관한 하나님의 응답을 스스로가 거절하는 것이 됩니다.

주께서 맡기신 것을 주께서 필요를 가지시면 쓰시게 드려야만 합니다. 이것은 없어지는 돈이 아니라 새로운 복의 마중물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을 보이셨는데 그것을 행하여야 내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풍족하신데도 우리를 위해 필요를 가지시며 하나님의 필요를 사람이 채워 드리는 기회는 언제나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사람에게 주셔서 그 사람에게 복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에 쓰임을 받는 것이 복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해 쓰일 때 복이 되고 신성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쓰신다고 할 때 그냥 달라고 아니하시고 복으로 갚으시니,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고 보물을 하늘 안에 쌓는 복된 성도가 다 됩시다! 시세를 알고 잡을 수 있는 타이밍에 기회를 잡는 복된 성도가 다 됩시다!

 

 

 

1) Douglas Sean O'Donnell, 『전도서』, 개혁주의 성경 강해 주석, 황의무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8), 112.

2) Roddy Braun, 『역대상』, WBC 성경주석 (서울: 솔로몬, 2006), 312.

3)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 역대상』 (서울: Exposimentary, 2014), 269.

4) Braun, 『역대상』, WBC 성경주석, 314.

5) Martin J. Selman, 『역대상』, 틴데일 구약주석 시리즈 10, 임요한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7), 207.

6) Joel B. Green, 『NICNT 누가복음』, NICNT 성경주석, 강대훈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20), 856.

7) Darrell L. Bock, 『BECNT 누가복음 2』, BECNT 성경주석, 신지철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7), 881.

 

출처: 생명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백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