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호만barnabak추천 3조회 11924.05.17 19:21댓글 2
떠나감의 유익과 은혜
요한복음16:5-15
구약 에스겔서는 에스겔 선지자가 바벨론의 포로생활 속에서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48장에 이르는 장문의 대선지서입니다.
이 방대한 선지서의 내용을 간단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내용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핵심적인 상징이 하나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서 떠나는 상징입니다.
에스겔이 환상가운데 예루살렘으로 인도되었을 때 그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아울러 선지자는 성전에서 이교도의 가증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그들이 여기서 크게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8:6)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을 떠나시기로 하신 하나님은 지성소의 그룹을 떠나 성전 문지방에 이르게 됩니다.(9:3)
그 다음으로 성전 문지방에서 성전 동문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10:18-19)
그 후에 하나님의 영광은 예루살렘으로부터 그 성읍의 동편에 있는 산 위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 성전의 멸망을 슬프게 바라보고 있는데서 그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11:22-23)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가는 것은 이스라엘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전을 떠나게 되었고 성전을 떠나는 것은 곧 이스라엘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남으로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망하고 포로로 잡혀갑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성전에 다시 오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었습니다.(43:1-5)
이런 면에서 하나님이 떠나신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안타깝고 비극적이고 저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다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다락방 강화’ 중 일부인데요, 다락방 강화는 주님이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곧 떠날 것을 말씀합니다.
주님이 떠나신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일련의 내용들을 포함하는 말씀입니다.
구원의 역사를 다 이루시고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로 다시 돌아가신다는 말씀입니다.
어째든 주님이 제자들을 떠나신다는 것은 주님 한 분만을 믿고 따르며 의지했던 제자들에게 결코 유쾌한 말씀이 될 수 없었습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주님 없는 삶은 사실 아무런 희망도 유익도 비전도 꿈도 없는 절망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님은 내가 너희를 떠나가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떠나가는 것이 유익이라는 말을 당시의 제자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충격적인 말씀이었을 겁니다.
실제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무덤에 장사되었을 때 제자들은 완전히 절망하고 낙심하였습니다.
머물고 있던 집의 문을 잠그고 자신들에게 닥칠 위험을 생각하며 두려움 속에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엠마오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던 제자들의 말은 그들이 얼마나 낙심하고 절망하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가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지만 ‘대제사장과 관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너희를 떠나가는 것이 유익하다는 떠나감의 유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내가 가면 나 말고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주시는 것이 왜 더 유익하겠습니까?
오늘 성령강림주일에 우리는 주님께서 떠나가시는 것이 왜 유익한가?
주님께서 보내시는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시는 것이 왜 유익한지를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1.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으로 존재하시는 ‘또 다른 보혜사’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 중 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알고 믿는 대로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 세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 세분은 영광과 존귀와 능력이라는 면에서 일체, 하나가 되십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제2격이 되신 성자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다 이루시고 하나님의 나라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가 떠나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주님이 떠나가시면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성령 하나님을 주님은 ‘또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십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도와주는 자, 변호사, 상담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요,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신다는 말은 주님이 이미 보혜사였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보혜사였습니다.
병든 자를 고침으로 도와주셨고, 문제 있는 자의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도와주셨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도와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사람들을 도와주신 일은 사복음서에 넘치도록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 역할을 주님이 보내주실 성령님도 똑같이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신다는 말입니다.
성령님은 보혜사이십니다.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를 변호하시고 우리를 대변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보혜사라는 면에서 주님과 성령님과 차이가 있는 것은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고 성령 하나님은 영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는 말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은 정말 하나님이 아니시면 하실 수 없는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런 기적도 그 자리에 모인 오천 명에게만 해당이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을 때 그 기적의 역사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없던 많은 배고픈 자들은 배를 채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으셨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며 능력을 베푸시고 인간을 도와주십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고넬료라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 기도할 때 성령께서 사람을 욥바에 보내 베드로를 청하여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욥바에 있는 베드로에게도 나타나셔서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올 터인데 의심하지 말고 그들을 따라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은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에게도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욥바에 있는 베드로에게도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이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내가 떠나가고 성령께서 오시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2. 성령님은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분명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셨고 아울러 이 세상에 계시는 기간도 분명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육신을 가지신 분이 무한정 계실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에 비해 성령님은 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영이신 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실 뿐 아니라 기간에도 제약을 받지 않으십니다.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이시고 우리를 도와주시는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를 변호해주시고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것도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니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영접한 자들에게는 성령님이 이미 임재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시고 기도하시고 교제하시면서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러분 속에 성령님이 계신 것을 확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느 미국 간호사가 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침 8시 30분쯤 되었을까? 80 대의 노신사가 엄지손가락을 꿰맨 실밥을 제거하기 위해 병원을 방문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9시에 약속이 있어서 매우 바쁘다고 하며 간호사를 다그칩니다.
의사가 해야 할 일이었지만 아직 출근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고 환자분이 자꾸 재촉해서 자신이 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데 이 환자분이 이렇게 재촉하는 이유가 요양원에 있는 아내와 아침 식사를 해야 하기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부인이 늦게 오면 화를 내서 그렇게 재촉하냐? 고 물으니까 그 분의 대답은 아내는 치매라서 그런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자기를 알아보지 못한지가 벌써 5년이나 지났다고 합니다.
"부인이 선생님을 알아보시지 못하는데도 매일 아침마다 요양원에 가신단 말입니까?"
그러자 노신사는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잡고 말했다.
"그녀는 나를 몰라보지만, 난 아직 그녀를 알아본다오."
노신사가 치료를 받고 병원을 떠난 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애써 참아야 했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로 치매 걸린 아내와 같은 모습은 아닌지요?
성령님은 이미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와 늘 동행하고 계시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오래도록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도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아가도록 기다리고, 성령님과 교제하고 동행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모습과는 상관없이 변함없이 끝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발견하고 느끼고 깨달아서 성령님과 교제하고 성령님과 더욱 친근한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애쓰고 노력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 충만입니다.
3,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일을 본문은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①하나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자세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그저 간단하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성령께서 그렇게 책망하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고전12:3)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여 구원받는 것, 죄를 회개하고 의로운 자로 인침을 받는 것,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이 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우리는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②또 하나는, 우리를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13절 말씀을 보면,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진리의 영이십니다.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을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그렇다고 어떤 다른 진리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를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14절, 15절)
그러기에 성령 충만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의 진리를 잘 깨닫게 되고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기만 하면 우리는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심을 받고 모든 일에 승리하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한국 기독교 초창기 신학교에서 있었던 일화라고 합니다.
어떤 한 신학생이 다른 과목은 다 공부해서 시험을 볼 수 있지만, 성령론은 공부해서 시험 볼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주일 동안 금식하고 철야하고 기도하며 성령 충만 받은 다음에 시험을 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령론 시험지를 받아보니 도저히 문제를 풀 수가 없었습니다.
이 학생이 하나님께 기도한 후 마음에 번쩍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이렇게 답을 썼습니다.
‘성령님은 다 아십니다. 끝.’
서양 선교사 교수님이 이 답을 받아들고 역시 고민에 빠졌습니다.
‘하나님 이런 때는 어떻게 채점해야 되겠습니까?’ 기도하니까 갑자기 영감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기가 막힌 채점을 했는데 ‘성령님은 100점 학생은 빵점’
여러분, 성령님은 언제나 100점 만점입니다.
그 성령님을 의지하고 그 성령님과 교제하며 살아가면 우리의 삶도 100점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님을 외면하고 성령님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거역하고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살아가면 그 삶은 빵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님이 여러분 가운데 계심을 믿고 그 성령님과 교제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아 모든 진리가운데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이되시기를 기원합니다.
(2024.0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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