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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덴스인들의 지도자 비질란티우스

열려라 에바다 2024. 5. 20. 08:11

왈덴스인들의 지도자 비질란티우스

일찍이 초대교회의 믿음과 행위 속에 살금살금 기어들어 와서 복수를 시작한 이교는 단 한순간도 교회에서 완전히 제거된 적이 없다. 또한 이교는 신자들의 믿음이 저하되거나 열성이 식어질 때는 이단이나 부패의 핵심 세력으로 바뀔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었다.

 

비질란티우스(A.D. 364-408)는 이탈리아 북부와 프랑스 남부에 거하던 고결한 왈덴스인들 사이에서 탁월한 초기 지도자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왈덴스인 교회의 첫 번째 최고 지도자로 여긴다. 그의 시대에 이르러 원시 교회에 스며들어온 이교 관습에 대한 저항이 점점 커져서 마침내 혁명적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그 결과로 한 때 성도들에게 전해졌던 믿음을 유지하고자 갈망하는 이탈리아 북부와 프랑스 남서부에 살던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조직체를 이루었다. 

 

오직 성경에 기초된 진리만을 갈구하며 교회에 스며들어오고 있던 신기한 미신적 행위들을 배척하던 사람들은 성경에 근거한 비질란티우스의 명쾌한 가르침에 큰 영향을 받았다. 당시에 아일랜드 교회를 확장하는 중에 있던 아일랜드의 패트릭이 분명 중서부 유럽에서 일어난 이 개혁으로 인해 그 마음에 큰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비질란티우스는 피레네 산맥 근처의 남부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만시오"라 불리던 한 역참의 주인이었다. 당시에 "만시오"는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서 설치되어 있던 여행객들을 위한 정거장이었다. 여행객들에게 말을 바꾸어주는 이곳이 바로 이 개혁자의 어린 시절 집이었다. 그의 집에서 말을 바꾸어 가는 여행객들은 상인들, 사절들, 명사들, 주교들, 일반 여행객들, 제국의 급사들 등이었다. 이 사업은 한창 자라나는 청년에게 산중에 위치한 그의 아버지의 집에 묵던 사람들로부터 모든 화제에 관해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풍부한 기회를 제공하였다.

 

비질란티우스는 양떼를 돌보고, 사냥을 하고, 또는 산골짝 길에서 여행객들을 안내하면서 고독함 중에 그의 키와 지혜가 자라났다. 그는 때로 그리스도인 여행객들과 접촉하는 중에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였다. 그의 집 근처에 유명한 역사학자였던 술피치우스 세베루스의 사유지가 있었다. 그 저명한 저술가는 학자들에게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그가 한 번은 당시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을 자신의 저택으로 초청하였다. 그는 비질란티우스를 고용하여 자기를 돕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아마도 잡일을 시켰겠지만 후에는 그에게 소작료를 받고 소유지를 관리하는 일을 하게 하였다.

 

비질란티우스가 술피치우스 세베루스에게 고용되어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 이 역사학자에게 큰 변화가 생겼다. 그가 서유럽을 휩쓸던 금욕주의와 수도원 제도에 발을 담근 것이다. 비질란티우스는 일찍부터 그의 고용주를 사랑했다. 그는 글 쓰는 일에 많은 수고를 하는 중에서도 배고픈 사람을 먹이고, 가나한 사람에게 의복을 나누어주고, 또한 병든 사람들을 찾아가는 이 사람의 뛰어난 지력에 크게 감복하였다. 

 

수도원 제도와의 투쟁

 

북쪽 멀지 않은 곳에 투르의 주교인 마르틴이 살고 있었다. 이 고위 성직자가 루아르강의 제방 주변에 프랑스에서 최초의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가 자신 스스로에게 강요하고 있는 극단적으로 엄격한 금욕주의는 그의 소위 말하는 기적들에 대한 과장된 보고들과 연결되면서 서유럽에 금욕적 생활에 대한 열정을 불러 일으켰다. 술피치우스 세베루스는 켈트족으로 그의 재정을 담담하고 있던 비질란티우스와 함께 마르틴을 방문하였다. 그 만남은 술피치우스와 비질란티우스 둘 모두에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이 변화는 같은 방향이 아닌 전혀 다른 방향으로의 변화였다. 투르의 주교인 마르틴의 광신적 행위가 술피티우스와 그의 찬란히 빛나는 재능들을 금욕적인 생활도 이끌어 갔다.

 

이것들은 비지란티우스가 직접 보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전해들은 술피치우스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그는 그의 후원자가 투르의 주교를 방문한 것이 그를 더 행복하게 하지도 않고 또한 더 좋아지게 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 온 후에도 마르틴의 잔상이 이 감수성 강한 역사학자에게 출몰하곤 하였다. 

 

그는 그 금욕적인 고위 성직자를 떠올리며 밑에 재만 깔고 오직 베옷만 덮은 상태로 찬 맨 바닥에 누워 잠을 잤고, 심각한 질병에 걸려서도 부드러운 침대나 따스한 옷을 거부하였으며, 또한 그리스도인은 재 위에서 죽어야만 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또한 모든 식도락을 거부하고 몸에 매우 해로운 음식들만 먹었으며, 눈에서 잠을 쫓고 자신을 극단적인 더위와 추위, 배고픔과 목마름에 노출 시킨 상태로 지루한 기도들 드렸다. 술피치우스는 그가 그 같은 금욕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하늘 문이 닫힐 것이라는 믿음을 갖기까지 공상 속에서 자신이 마르무티어에서 보고 들을 바를 계속해서 곰곰이 생각하였다.

 

괴이한 것들에 대한 호감, 곧 불가사의한 이야기들을 곰곰이 생각하는 습관과 금욕 생활을 실천하는 습관이 비질란티우스의 고용인을 꽉 움켜잡고 있었다. 반면에 비질란티우스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단순성이 결여된 한 종교 제도를 보았다. 

 

비질란티우스는 한편으론 허영심 가득한 우쭐함과 영적 자만과 불가사의한 권세에 대한 요구를, 다른 한편으로는 거짓 겸손과 의기소침을 보았다. 이 둘 모두 그리스도의 온전하고도 충분한 희생에 관한 가르침을 훼손시키는 금욕주의라는 잘못된 제도 소산이었다. 이 금욕주의는 또한 투르의 마르틴과 같은 사람들의 고통과 선행에 과도한 가치를 부여하였다. 

 

마르틴은 아마도 결국에 가서는 그 같은 사람들이 연약한 형제의 마음속에서 높임을 받아서 중보자의 자리로 올라가서는 거룩한 예배의 대상 바로 밑에 위치할 것임을 내다보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비질란티우스가 후일에 금욕주의의 오류를 드러내고 성인 숭배의 진행을 억지시키는 노력을 기우린 것이 바로 술피치우스의 집안에서 받은 첫 인상 때문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함께 마르틴을 방문했을 때 벌어지기 시작한 비질란티우스와 술피치우스의 관계가 술피치우스가 비질란티우스를 이탈리아 놀라의 폴리누스에게 보내는 전령으로 고용하면서 더욱 크게 벌어졌다. 이 특출한 사람은 그 전에 이미 "그 속이는 행위들에 자신의 시간을 쓸 수 있는 한 은신처로 떠났다. 이 같은 행위들은 후에 라틴 교회의 특성이 되었으며, 결국에는 복음의 단순성에 치명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이교의 제단에서 기독교의 성당으로 옮겨져 온 종교적 관습들이 한 죽은 성인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의식이라는 이름으로 존귀하게 여김을 받았다. 또한 폴리누스의 조상들이 옛 영웅들에게 기원을 드린 것처럼 그 또한 헤라클레스나 퀴리누스의 이름을 펠릭스로 바꾸어서 동일한 일을 행하였다. 그는 여기에 더하여서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의 이름 외에는 그 어떤 이름도 그의 입술에 올리 수 없을 때에는 한 죽은 순교자에게 도움을 간청하였다." 더 나아가서, 교황 겔라시우스는 5세기에 서방 교회에 이교도의 축제인 루페르칼리아를 추가하기 위하여 "빛의 행렬"과 더불어서 정결 축제를 소개하였다.

 

우리의 단순한 산골 사람이 이탈리아에서 한 수행자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화려한 사당을 보았을 때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복음의 단순성을 대신하기 위해 고안된 행습들에 몰두해 있던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거기에 심취해 있었지만 비질란티우는 하나님의 은혜로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도들의 세대는 지나가고 교부들의 시대가 열렸다.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고전 2:13) 말씀들 보다는 학문과 논증이 복음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일에 사용되었다. 특히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더욱 그러했다.

 

금욕주의와 수도원 제도에 대한 항거

 

금욕주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마치 자기 자신들 스스로의 희생이 없이 그리스도의 대속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것처럼 스스로 자신들에게 끔찍한 고통들을 강요하였다. 그들은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온전하고도 충분한 속죄에 대한 가르침을 손상시켰다. 종교적 행렬들이 형성되고 유물들이 전시되었으며, 또한존귀하게 여김을 받고 있던 금욕주의자의 무덤 앞에 향이 피워졌다.

 

수도원 제도가 금욕주의의 뒤를 바싹 따랐다. 저스틴 마터(A.D. 150)는 그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 초기의 배교자들 중에서 매우 두드러지게 드러난 인물이었다. 그의 제자인 타티안이 그의 뒤를 따랐고, 타티안은 또한 알렉산드리아 교회 학교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클레멘트를 가르쳤다(A.D. 190). 클레멘트는 자신이 이교의 철학과 혼합된 복음을 전수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하지만 독신주의에 대한 칭송을 시작하는 일은 그의 제자인 오리겐에게 넘겨졌다. 오리겐은 스스로 자신을 불구로 만든 사람이었다.

 

수도원 제도는 기독교의 산물이 아니다. 이것은 비기독교적 종교들에서 들어 온 것이다. 기독교 안에서는 이집트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는데, 이는 불교에서 온 것임이 분명하다. 수도사들 중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첫째는 광야에서 어둠침침하며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을 찾아서 그곳에 홀로 거하는 부류였고, 둘째는 수사로서 혼자 살지 않고 수도원이라는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부류였다.교회의 최고 우두머리 외에는 그 어떤 영적 권위에도 복종하기를 거부한 그들은 그 어떤 회중에 의해서도 움직이지 않고 오직 교황권의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기동력이 강한 방대한 수의 군대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저술가들은 셀틱 기독교 시리아 기독교 성서 훈련 학교들도 이와 같은 수도원들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학교들은 이러한 종류의 수도원들이 아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수도원 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성서 훈련 학교의 프로그램과는 다른 프로그램에 의해 생활하였다.성서 훈련 학교 학생들은 평생이 아닌 오직 훈련 기간에만 그곳에서 생활하였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젊은이들이 대학에서 4년간을 보내기 위해 집을 떠나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수도원의 수사들은 때를 따라 겉치레와 부복, 그리고 무릎 꿇는 행위들을 하였다. 이 모든 외형적 행위들은 교회의 제도가 점차로 증대되어 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징후들이었다. 그것들은 또한 로마 교황 교회가 정부와 연합하는 일을 위해 길을 닦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행위들과 신약 기독교의 모습을 벗어난 다른 모든 행위들은 각 지역에 있던 이 새로운 배도에 대항하여 싸우는 일에 지도자들이 될 사람들과 "율법과 증거의 말씀"(사 8:20)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게 될 사람들을 자극하였다. 

 

역사를 통해 반복해서 들여온 이교적인 행습들을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비질란티우스와 같이 성경에서 벗어난 오류들을 벗어버리고 진리를 위해 항거할 것인가?

그 선택은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몫이 될 것이다.

여러분은 마지막 종교개혁자로 다시 일어서지 않겠는가?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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