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나는 보배를 모신 질그릇입니다.(고후4:5-12)

열려라 에바다 2024. 6. 5. 08:48

나는 주님을 모신 질그릇입니다.
고린도후서 4:5-12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어린 나귀를 타고 가십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길거리에 깔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옷을 까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호산나,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 외치면서 예수님을 맞이하는 그들의 모습은 왕의 행차 못지않은 대대적인 환영이었습니다.
그때, 하나의 가정입니다만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을 태운 나귀가 자기에게 그러는 줄 알았다면 얼마나 큰 오해입니까?
나를 보고 사람들이 저렇게 환호를 하고 호산나를 외치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대대적인 환영을 하는구나. 나는 얼마나 대단한 짐승인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얼마나 정신 나간 나귀이겠습니까?
나귀는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받는 환호를 자신 때문에 받는 환호로 생각하고 자신이 대단한 존재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계에 어디를 가든지 인기가 있고 능력을 나타내고 많은 사람의 부러움을 사는 유명한 인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누가 유명해지고 존경을 받는다면 그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많은 능력을 행하고 치유를 베풀어 인기가 있다면 그것도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없었다면 그들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자랑해야 하고 자기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증거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는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풀어보면 사도 바울을 비롯한 성도들은 질그릇이라는 말입니다.
질그릇이라는 말은 별 가치가 없는 흔한 존재요 아울러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존재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별 볼일 없는 존재로서 인간은 질그릇과 같다는 말에 누가 아니라고 이의를 걸 수 있겠습니까?
최근에 과학기술을 발달시킨 인간을 생각하며 인간이 대단한 존재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럼에도 인간은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고 많이 살아야 100년 정도 살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질그릇에 보배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배라는 말은 다른 말로 예수님을 말하기도 하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 구원의 복음을 말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보배라는 말입니다.
질그릇과 같은 존재인데 예수라는 보배를 갖고 있는 질그릇이라는 것입니다.
그릇의 가치는 그릇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무리 금 그릇이라고 해도 오물을 담고 있으면 오물통이 되고 아무리 질그릇 같아도 거기에 보배를 담고 있으면 보배함이 됩니다.


예수님의 비유가운데 밭에 감취인 보화를 찾는 비유가 있습니다.
전쟁 통에 자신의 보화를 감출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장소는 자기만 아는 땅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 보화를 숨길 때 가장 안전한 그릇이 질그릇이었습니다.
철기 같은 것도 땅속에 오래 있으면 부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흙으로 만든 항아리는 압력만 받지 않으면 오래 동안 보화를 보관할 수 있는 최적의 그릇이었습니다.
우리는 질그릇 같은 연약한 존재이지만 보배를 갖고 있는 질그릇입니다.
보배를 갖고 있기에 우리는 가장 행복한 질그릇이며 가치 있는 질그릇이며 어떤 형편에서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질그릇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질그릇 같은 우리를 부러워아니하지만 우리도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약한 질그릇 같은 존재이지만 우리 안에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배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배를 담은 질그릇’, 성도들의 모습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비유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이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고자하는 내용이 무엇일까요?


1. 먼저, 성도들이 받은 축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6절을 보면,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을 빛의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1 17절에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 장로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을 빛들의 아버지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은 선물을 주시되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빛들의 아버지십니다.
그 좋으신 빛들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고 그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의 진리를 완성하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대속을 통하여 완성하신 구원의 복음을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비추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빛의 자녀가 되었고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기록한 사도 바울이 이런 빛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했던 자요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서 죽이고 감옥에 가두고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하는 데에 가장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울이 예수를 믿고 싶었던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아니 예수를 믿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습니다.
강한 심판을 받아야 적절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울이 믿지 않으면 안 되도록 강한 빛을 비추어주셨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햇빛보다 더 밝고 강한 빛을 내려 쪼이니까 아무리 완악한 바울도 믿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고꾸라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예수를 배척하고 반대하고 예수자만 나와도 치를 떨던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받으면 다 회개하고 고꾸라지고 예수를 믿게 되는 줄로 압니다.
이것이 질그릇 같은 저와 여러분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우리는 사실 이런 은혜를 받고 이런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어둠의 일을 행하면서 어둠의 세력에 굴복하여 살았던 어둠의 자녀였습니다. 그 자격 없음을 표현한 말이 바로 질그릇이라는 말입니다.
질그릇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만들었다는데서 연유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만드시고 인간이 범죄 하였을 때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흙으로 만들어지고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별 볼일 없는 존재,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질그릇 같은 우리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복음의 빛을 비추시므로 구원을 받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질그릇 같은 존재였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빛의 자녀가 되었고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은혜이며 축복입니다.


2. 두 번째로, 성도들이 가져야 할 사명을 보여줍니다.


5절을 보면,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최근에 로또 당첨금이 너무 적으니 그 금액을 올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등 당첨금을 받아도 아파트 한 채를 살 수가 없으니(서울의 경우)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도록 금액을 올려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로또 1등에 당첨된 사람은 그 표정을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냉정하고 표시를 안 나게 하려고 해도 그 기쁘고 즐거운 표정을 감출수가 없다는 거예요.
1등 로또 복권을 갖고 있어도 이렇게 표시가 나는데 여러분,
죄에서 구원하시고 영원한 사망에서 건지시고 영광이 가득 찬 하나님의 나라에 인도함을 받는 예수님을 모셨다면 어찌 그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이 표시가 나지 않겠습니까?
그 보배를 어떻게 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많은 오해를 받고 배척을 받고 무시를 받고 있습니다.
1 6개월 동안 전도하여 세운 교회였지만 이상한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면서 바울을 그렇게 배척하게 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예수님의 부름을 받지 못했기에 사도가 아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한 사람들의 추천서가 없다.’
온다고 했다가 오지 않는, 약속한 것을 지키지 못하는 변덕스러운 사람이다.’
이런 저런 모함을 받으면서 바울은 자신이 1 6개월 동안 고생하면서 개척하고 예수님을 알게 했던 그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정도가 되면 정나미가 떨어지고 인간에 대한 절망과 배신감 때문에 고린도교회에 대한 관심을 끊고 싶지 않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에게 무슨 애정이 있다고 편지를 보내고 사정을 하고 이해를 구하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너희말대로 내가 그렇게 부족하고 변덕이 있고 결함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나를 바라보지 말고 내 안에 있는,
내가 너희에게 전하려고 했던 그 보배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나의 부족함 때문에 예수님을 거절하면 안 된다.’
흠이 있다면 그것은 내 잘못이고 내 부족함이지만 그러나 내 안에 있는, 내가 전하고 있는 예수는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그 예수님은 나에게도 보배지만 너희에게도 보배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보배이기 때문에 가족이나 이웃이나 친구들에게도 보배이십니다.
그 보배를 모시고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는 이웃에게도 그 보배이신 주님을 전해야 합니다.
내 보배가 따로 있고 다른 사람의 보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의 보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보배이시고 홀로 한 분이신 구원자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보배를 모신 자의 사명입니다.


3. 세 번째로 성도들이 가져야 할 자세를 보여줍니다.


5절 하 반절을 보면,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나의 보배이시며 우리 모두의 보배이신 예수님을 전할 때 우리가 종의 자세로 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종은 주인이 아닙니다.
종이 주인의 행세를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못된 종입니다.
종은 주인을 드러내고 주인을 나타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사사기에 보면 기드온이 미디안의 큰 군대와 싸울 때에 그가 준비한 전쟁무기는 나팔과 항아리와 횃불이었습니다.
그것도 300명에 불과한 소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밤중에 몰래 미디안의 진영에 들어가 나팔을 불고 큰 소리를 외칩니다.
그리고 횃불을 감춘 항아리를 깨자 사방에 밝아지면서 미디안은 혼비백산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횃불이 빛을 발하고 빛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항아리가 깨져야 합니다.
항아리가 깨지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빛은 발할 수 없습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이 빛을 발하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도 질그릇 같은 우리가 깨어져야 합니다.
종이 되어야 하고 낮아져야 하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그럴 때 우리 안에 보배가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바꿔 말씀드려서 우리가 교만하면 우리 안에 있는 보배가 제대로 드러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숨겨져야 하고 우리는 깨어져야 하고 우리는 낮아져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안의 보화가 빛을 발하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앞에서 우리는 너희의 종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그릇을 깨트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죽음을 짊어지고 사망이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선교사들이 자신의 질그릇을 깨트렸을 때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되고 보배인 예수님이 증거 되었습니다.
슈바이처는 쌓은 학문과 지식과 학위가 아깝다고 생각할 정도였지만 그것을 다 포기하고 아프리카로 들어가 평생을 섬기며 전도하였습니다.


우리는 보잘 것 없는 질그릇 같은 존재입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질그릇이라도 귀한 것을 담으면 귀해집니다.
우리는 쉽게 깨지는 질그릇 같은 존재들이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배를 담은 그릇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이며 축복인지 모릅니다.
이 은혜를 깨닫는 자는 이 보배를 내 속에 감추어둘 수 없고 이 보배를 증거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가 어떤 분이시고 예수가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증거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깨어져야 하고 낮아져야 하고 겸손해야 하고 종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보배를 담은 질그릇의 정체성을 확인하시고 사명을 감당하시며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4.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