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수신학(數神學)

열려라 에바다 2024. 6. 22. 13:38

수신학(數神學)

“성경에도 수학의 법칙이 있는가?”

이 주제가 종말론적 표현과 연관이 있기에 여기 글을 쓰기로 합니다.

수신학(theomatics)이라는 학문은 성경에 나오는 숫자나 그리고 숫자와 연관된 어구들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요사이 이단들이 숫자를 사용하는 방법으로 종말론이나 계시록을 설명하는 일이 있어서

여기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의미도 이 글을 쓰는 동기이기도 합니다.

 

우선 성경 구약의 다니엘서 8장 13절에 나오는 ”거룩한 자“란 어구를 히브리어로 살펴보면 “팔모니“인데

이 의미는 [비밀의 숫자](The number of secrets)라는 뜻입니다.

이 의미에서 우리가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숫자가 어느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역대상 23장 29절을 보면 “명하신 규례“라고 하였는데 이는 정한 수효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계시록 13장 17-18절 말씀입니다,

“이 표를 가진 사람, 곧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을 나타내는 숫자로 표가 찍힌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팔거나 사거나 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여기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각이 있는 사람은 그 짐승을 상징하는 숫자를 세어 보십시오. 그 수는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데,

그 수는 육백육십육(666)입니다. ”

 

지혜(소피아)가 있고 지각(누스)이 있는 자는 숫자를 세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혜와 지각이 있는 자는 말씀을 깊이 연구한 자를 의미합니다.

 

게마트리아(gematria)는 미드라쉬 문학이나 탈무드 문학 혹은 카발라 문학에서 숫자로

구약을 해석하는 해석의 한 방법입니다.

 

그리스의 피타고라스 학파도 숫자에 대한 비밀을 많이 취급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 지역이 기하학이 발전한 것에 비하면 바빌로니아와 페니키아는 각기 대수학과 산술학이 발전했습니다.

 

수메르인 아카드인은 60진법을 사용하는데 학자들은 10진법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론합니다. 

함-셈족은 10진법을 주로 사용합니다. 동방 셈어인 히브리어는 아카드어에서 기수와 서수의 용어를 사용합니다.

 

모압 비문자나 실로암의 명문 같은 고고학적 발굴에서 보면 히브리어에서는 기호나 숫자보다 문자로 숫자를 표시합니다.

지금까지의 발굴에서 기호나 숫자는 1에서 보통 3이상을 넘은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렇기에 히브리어 알파벳을 숫자로 대신 사용합니다.

 

히브리어 처음 알파벳 중 알렙에서 테드까지를 1에서 9까지 사용하고, 

10에서 90까지는 요드에서 차데를 이용하여 표시합니다

100에서 400까지는 마지막 4문자 코프에서 타우를 사용하고 500이상은 윗 숫자를 조합하여 일반적으로 표시합니다. 

이렇게 어느 때는 문자가 숫자로 대용되기에 번역에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에서 맛소라 본문과 사마리아 오경 그리고 70인 역이 종종 오기가 된 기록이 있고 잘못 번역된 경우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산문에서는 관용적 표현(창세기 2장2절, 8장 4절 등), 

상징적 표현(이는 보통 예배 의식으로 모세 오경과 예언서에 많이 나타남)과

마지막 수사학적 표현(70이란 숫자와 사람 이름은: 예를 들면 아합의 70아들, 기드온의 70아들,

야곱의 70아들, 노아의 70아들 등)에 이 숫자를 사용합니다.

 

시편의 각 시는 이런 숫자의 표현으로 각 시를 잘 표현했습니다. 간단하게 언급하면.

1은 (신명기 6:4, 레위기 5:5) 단일, 유일 혹은 연합을 의미하고

2는 (창 1:16,호세아 10:2:두 마음은 죄, 창 6:19-20에서 노아 홍수시 짐승 두 마리) 구분을 의미합니다.

3은 승인 이나 허가

4는 (창 2:10의 4개의 강 이름이나 창 1:19의 네째 날에 물질 창조 완료) 창조 수 혹은 세상 수라 합니다.

5는 출 26:1-3,26:37)처럼 은총 구속을 의미(오순절과 희년의 50일과 50년 개념)

6은 인간 수

7은 (창 2:2 이나 창 4:7에 가인을 죽인 자는 7배 벌을 받음) 신적 충만이나 완성

12는 (출 24:4 제단 기둥 12 왕상 18:1 엘리야의 12개 돌 단, 12지파 등 ) 신의 지배를 나타내는 수가 12입니다.

13은 이스마엘이 13세에 할례를 받았고, 솔로몬이 자기 궁궐을 (왕상 7:1) 13년 동안에 건축을 나타내는 의미로 

배교를 의미합니다.

 

올브라이트란 학자는 그의 책

[이스라엘의 다윗 왕조의 연대기]란 책자에서 히브리 왕국의 각 왕들의 연대기가 5의 배수나

5의 배수에서 7을 더하는 표현의 숫자로 나타낸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란 유명한 유대 학자나 유대 고사를 작성한 그 유명한 요세프스는

“성서에 매우 기묘한 철학적 이론이 있다“고 수신학에 대하여 언급했습니다.

 

구약에서 야곱의 꿈에서 본 사다리와 시내산은 그 숫자 값이 같습니다.

그렇기에 학자 중 일부는 야곱의 꿈의 사다리는 시내산의 계시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또한 마태 복음과 누가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에 대한 이야기도 이런 수신학의 각 다른 표현을 나타내어

특별한 세대를 언급하는 말씀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베니 하 엘로힘)은 구약에 7번 나오는데 다니엘서 3장 25절에 나오는 표현을 빼고

일반적으로 나머지 6개는 천사를 의미합니다.

이 베니 하 엘로힘은 히브리 숫자값은 완전수의 표현입니다. (수학에서 완전수란 일정 숫자를 순서대로

합하여 나오는 합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1+2+3=6. 6은 완전수입니다.

위의 베니 하 엘로힘은 1에서 17까지 더한 완전수인 153을 나타냅니다.

 

신약에 들어와 2세기의 교부 이레네우스는 666을 로마 제국으로 해석하였습니다(헬라어 역시 각 알파벳은 숫자와 연관됩니다.)

666을 변형하면 616이 되는데,

이는 네로와 트라얀 황제를 나타냅니다.

히브리어로 네로를 나타내는 말인 네론오메살은 그 숫자값이 666입니다.

 

창세기1장의 표현인 태초의 심연도 역시 666입니다.

교부 중 어거스틴, 그레고리 역시 이 해석 방법을 많이 사용하였고 

오리겐이나 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 of Alexandria)은 

신약에서 예수님이 명하여 그물을 던지니 153마리의 물고기가 잡힌 부분을 위의 해석인

 “하나님의 아들 즉 완전수 값인 153을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주, 주 예수, 여호와 하나님,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란 표현은 

111(이 역시 완전수)의 배수로 표현 됩니다. 이 111은 우리가 흔히 수학에서 사용하는 

마방진(魔方陣, magic square)의 한 표현으로 가로, 세로 대각선을 다 합하면 같은 값이 나옵니다.

 

이에 반하여 용, 시험자, 벨리알, 살해자, 뱀, 사탄, 바알세붑, 귀신은 전부 13의 배수로 표현되는 글자입니다.

 

우리가 7과 12를 신적 충만이나 신의 지배를 나타내는데

이는 기하학에서 도형을 표현하는 처음 시작 3과 4에서 그 의미가 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점 3개와 4개로 삼각형과 사각형을 만듭니다.)

 

3+4=7 (신적 충만)

3x4=12 (신의 지배)

 

이런 수신학의 방법을 동원하여 참 지식을 탐구하려는 카발라 분파와 게마트리아(Gematria), 노타리콘(Notarikon),

테무라(Temoorah)등이 구약을 바르게 해석하려는데 힘을 모았습니다.

 

현재 이단이나 여러 단체에서 특히 성경의 예언서의 숫자 일 부분을 가지고 함부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성서 기자는 숫자보다 세대에 더 큰 의미를 두었습니다.

종말론은  광의적 의미로 [하나님 개입]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는 [하나님의 역사의 개입]으로

카오스(혼란)에서 코스모스(질서)로 바꿔진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질서의 표현]으로 숫자를 잘 조합하여 성경을 해석하려는 방법이 수신학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사실을 몰라도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성령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하면 구원의 완성에 이른다고 성경 기자는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성서 기자들은 각 시대에 그들의 정성스러운 표현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려고 노력 했다는 사실에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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