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 및 성경 공부

창세기와 메소포타미아 연구

열려라 에바다 2024. 7. 3. 14:12

창세기와 메소포타미아 연구

인류문명의 최초 발상지 메소포타미아

 

메소포타미아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는 그리스어로 ‘강들 사이에’라는 뜻이며, 좁은 의미로는 아랍어로 ‘알-자지라(섬)’라 불리는 두 강 사이의 삼각 지대이지만 문명권의 관점에서 북서쪽의 해발 3000-5000미터 높이의 자그로스(Zagros) 산맥과 남서쪽의 아라비아 광야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메소포타미아는 여러 강과 하천들이 끊임없는 범람하며 실어 온 기름진 퇴적토로 이루어진 경작지가 있어서 기본적인 농사가 가능했다. 하지만 연중 강수량이 150-200밀리미터 정도로 매우 적기 때문에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의 강물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이용하느냐가 농사의 성패를 좌우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자연적 악조건들을 극복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을 통하여 비로소 이 곳에서 고등 문명이 발생하게 되었다고도 평가할 수 있다. 또한 메소포타미아는 북부의 고산지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퇴적토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목재나 석재, 기타 지하자원이 전혀 생산되지 않는 곳이다. 따라서 일찍부터 자그로스 산악 지대와의 무역을 통하여 필요한 나무와 돌 그리고 구리나 주석 같은 금속들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메소포타미아는 북쪽의 앗시리아와 남쪽의 바빌로니아 문명권으로 양분되는데 이 중에서도 바빌로니아 문명권에서 좀 더 활발하게 도시들과 왕국들이 형성되고 발전하였다. 서기전 3000-2000년경 바빌로니아 문명권은 남부의 수메르 왕국과 북부의 아카드 왕국으로 구분되었다. 메소포타미아를 독립된 하나의 문명으로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유프라테스


(Euphrates))유프라테스는 아카드어의 푸라투(purattu), 히브리어의 프랏트(???), 그리고 고 페르시아어의 우프라투(Ufratu)에서 유래된 그리스식 이름이다. 전체 길이 2700킬로미터에 달하는 유프라테스는 오늘날 터키에 위치한 아르메니아 고원지대에서 발원하며 상류에서부터 지역에 따라 터키 지역을 흐르는 상 유프라테스(Upper Euphrates), 시리아 지역을 흐르는 중 유프라테스(Middle Euphrates), 그리고 오늘날 이라크 지역에 위치한 하 유프라테스(Lower Euphrates) 등으로 구분된다. 상 유프라테스의 원류는 두 군데로서 동쪽의 무랏트 수유(Murat Suyu) 하천과 서쪽의 카라 수(Kara Su) 하천이다. 중 유프라테스는 하란 지역에서 흘러오는 발릭크(Balikh)와 카부르(Khabur) 등의 지류와 합쳐진다. 하 유프라테스 지역에는 예로부터 수 많은 운하들이 발달했고 티그리스와 만나는 하류 지역은 늪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유프라테스 강변에는 메소포타미아의 중요한 도시들이 발달했다. 시리아 지역의 카르케미쉬(Karkemish)와 마리(Mari)를 비롯하여, 하류 지역에는 태양신 숭배의 중심지 시파르(Sippar), 수메르의 제 1왕조의 도읍지였던 키쉬(Kish), 폭풍우 신 엔릴(Enlil)의 도시인 니푸르(Nippur), 길가메쉬 서사시의 지우수드라(우트나피슈팀)가 방주를 만들었던 슈루팍(Shurupak), 길가메쉬의 고향인 에렉크(Erech), 그리고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알려진 우르(Ur) 등의 도시들이 자리잡고 있다.  

 

티그리스


(Tigris)티그리스 강은 원래 수메르어(Sumerian)로는 이디그나(idigna), 아카드어로는 이디글랏트(idiglat/idignat)로 불렸으며 이로부터 히브리어의 히데켈(????)이 유래되었다. 그리스어의 티그리스(Τιγρι?)는 고 페르시아어의 티그라(Tigra)에서 유래되었다. 전체 길이가 2030 킬로미터에 달하는 이 강은 유프라테스와 마찬가지로 터키 동부의 아르메니아 고원지대로부터 발원하며 하자르 걸르(Hazar Golu) 호수에서부터 흘러나온다. 티그리스 강은 하류로 내려가면서 북동쪽의 자그로스(Zagros) 산맥에서부터 흘러 내려오는 대 자브(Greater Zab), 소 자브(Lesser Zab), 디얄라(Diyala) 등의 지류들이 차례로 합쳐진다. 특히 중 티그리스 지역은 전통적인 앗시리아 문명권을 형성하였고 그 강변에는 앗슈르(Ashur), 니느베(Nineveh), 칼라(Kala) 등의 도시들이 발달했다. 


베로소스(Berossos)의 바빌로니아학(Babyloniaca)


 서기전 340년경 바벨론에서 태어난 후 에게해의 코스(Cos) 섬에 정착한 베로소스는 모두 세 권으로 된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를 편찬하였다. 하지만 베로소스의 원본은 유실되었고 단지 오늘날 남아 있는 부분은 서기전 1세기 알렉산더 폴리히스토르(Alexander Polyhistor)의 저서에 인용된 것과 서기 4세기 초 유세비우스에 의해 재인용된 것뿐이다. 베로소스의 바빌로니아학은 요세푸스에 의해 인용된 마네토(Manetho)의 이집트학(Aegyptiaca)과 비교될 만큼 아마도 천지 창조에서부터 페르시아 시대까지의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으리라 추정된다. 제 1권은 창조 신화들을 다루고 있는데 반인반어의 존재인 오아네스(Oannes)가 바벨론 강변에 도착하여 여전히 야생 짐승들의 생활을 하던 인간들의 조상이 되었음을 다루고 있다. 제 2권은 천지 창조 때부터 나보폴라사르(서기전 747-734) 시대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특히 대홍수 이전의 왕명단은 수메르의 왕명단과 비교될 정도로 신빙성이 있다. 제 3권은 나보폴라사르 시대(서기전 747-734)부터 자신의 시대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앗시리아학(Assyriology)


 엄밀한 의미로 앗시리아학은 티그리스 강 유역에 발달했던 앗시리아 문명을 다루는 학문이지만 오늘날 메소포타미아 전체의 지리, 언어, 역사, 고고학, 종교 등을 다루는 총체적인 학문을 일컫게 되었다. 특히 이 용어는 최초의 이 지역 탐사가 주로 앗시리아의 옛 수도인 니느웨, 니므루드, 코르사바드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특히 니느웨의 앗슈르바니팔 도서관에서 많은 양의 토판 문서들이 발견되어 본격적인 메소포타미아의 문헌 연구가 시작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오늘날 앗시리아학은 이란학(Iranology), 힛타이트학(Hittitology) 둥과 함께 고대 근동학의 한 분야로서 바빌로니아, 앗시리아의 모든 분야들을 다루며, 특히 메소포타미아 초기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은 수메르학(Sumerology)으로 독립하여 다루기도 한다.  


베히스툰(Behistun) 비문과 쐐기문자의 해독


 원래 쐐기문자(cuneiform)라는 용어는 1700년경 영국의 토마스 하이드(Thomas Hyde)에 의해 처음으로 명명되었고 1802년 독일의 그로테펜트(G.F. Grotefend)는 베히스툰 비문 중에서 고 페르시아어의 왕명단을 참조로 처음으로 쐐기문자의 해독을 시도하였다. 메소포타미아의 로제타 석비라 불리는 베히스툰 비문은 동쪽의 메데 지역에서 메소포타미아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베히스툰에 있는 절벽의 70미터 높이에 새겨진 비문이다.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1세는 서기전 520년경부터 자신의 업적을 엘람어(Elamite), 바빌로니아어(Babylonian), 그리고 고 페르시아어(Old Persian) 등의 세 가지 문자로 기록했다. 영국의 롤린슨(H.C. Rawlinson)은 동인도 회사의 장교로서 1833년 페르시아 지역의 쿠르디스탄에 배치받은 후 베히스툰 비문을 해독하려고 노력했다. 1837년 베히스툰 비문의 탁본을 뜨는데 성공한 그는 1846년 런던의 왕립 아시아학회에서 그 복사본과 번역본을 발표했다. 1857년 크림 전쟁이 끝난 직후 영국의 왕립 아시아학회는 앗슈르에서 출토된 서기전 1400년경 기록된 티글랏-필레세르의 연대기가 나오는 토판문서의 탁본을 유럽의 대표적인 네 명의 언어학자들에게 맡겨 그 내용의 해독을 의뢰하였으며 이 네명의 학자들 - 롤린슨(Henry Creswicke Rawlinson), 힝크스(Edward Hinks), 탈봇트(William Henry Fox Talbot), 오페르트(Jules Oppert) -의 해석은 모두가 일치한 것으로 나타나면서 본격적인 쐐기문자 연구가 시작되었다. 


보타(Paul Emile Botta: 1802-1870)의 코르사바드(Khorsabad) 발굴

모술의 프랑스 영사였던 보타는 1842년 티그리스 강 건너편의 니느웨라 여겨지는 쿠윤직(Kuyunjik) 발굴에서 이렇다 할만한 유물들이 나오지 않자 주민들의 소문을 듣고 유물들이 많이 나온다는 코르사바드를 1843년 봄부터 발굴하기 시작하였다. 코르사바드는 아카드어로는 ‘두르-샤류킨(Dur-Sharrukin)’, 즉 ‘사르곤의 요새’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1844년까지 진행된 이 발굴에서 보타는 사르곤 2세의 궁전을 발견했다.  


레이야드(Austen Henry Layard: 1817-1894)의 니므루드(Nimrud) 발굴 레이야드는 1839년 7월 10일 런던을 출발하여 인도로 가는 도중에 육로로 유럽 대륙과 소아시아 그리고 시리아-팔레스타인 등을 여행하면서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 탐사를 이루고자 하였다. 1840년 4월 10일 모술(Mosul)에 도착하여 티그리스 강 건너편의 니느웨라고 알려진 쿠윤직(Kuyunjik)을 탐사하였다. 1842년 7월 10일 콘스탄티노플의 영국 대사관에서 그간의 여행과 탐사의 능력을 인정받아 대사의 비서로 1845년까지 3년 동안 일하면서 모닝 포스트, 모닝 크로니클, 몰타 타임즈 등의 해외 통신원으로 활동하였다. 레이야드는 27살인 1845년 11월 8일부터 니므루드 발굴을 시작하였다.  


죠지 스밋트(George Smith: 1840-1876)와 홍수 이야기(1872)

죠지 스밋트는 원래 지폐 조판공이었지만 독학으로 메소포타미아에 관한 연구를 한 끝에 26세에는 쐐기문자에 관한 해설책을 펴낼 만큼 이 분야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28세인 1868년부터 대영 박물관의 이집트-앗시리아부(部)에서 조수로 취직하여 박물관 수장고에 있던 토판문서들을 정리하며 읽던 중 홍수에 관한 내용을 확인했다. 1872년 12월 3일 영국 런던의 성서고고학회 세미나에서 대영 박물관의 죠지 스밋트(George Smith)는 앗시리아판 노아의 홍수에 관한 토판문서의 내용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이 토판문서들은 1840년대 이후로 레이야드와 라쌈이 니느웨의 앗슈르바니팔 도서관 발굴에서 출토된 것들로서 대영 박물관의 수장고에 보관중이었다.

 

하지만 이 길가메쉬 서사시는 창세기의 노아와 필적할 만한 신의 선택자인 우트나피슈팀의 이야기 도중에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홍수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당시 영국은 빅토리아 왕조시대로서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이야기는 보수 기독교적 분위기에서 구약성서의 신빙성을 증명할 증거로 여겨지면서 영국의 국민적인 관심이 들끓었다. 당시 영국의 최대 일간지인 런던의 데일리 텔레그라프(Daily Telegraph)지는 홍수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을 찾는데 1,000기니아(guinea)의 포상금을 내걸었다. 당연히 스밋트는 이 모험을 자처하고 나섰으며 수천 킬로미터를 여행한 끝에 티스리스 강변의 모술에 도착하여 고대의 니느웨로 여겨지는 쿠윤직 언덕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이 작업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고 스밋트는 384개의 토판 문서들을 가지고 귀국했다. 이 중에는 물론 잃어버린 홍수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도 포함되어 있었다. 

 

셈족의 등장과 메소포타미아의 통일

셈족(Semitic, Semitisch)’이라는 용어는 1871년 독일의 쉘쪄(Scholzer)가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셈족은 시대별로 다음과 같이 발전하였다. 서기전 4000년 이후: 메소포타미아의 아카드 민족, 서기전 3000년 이후: 메소포타미아, 가나안의 서부 셈어족, 서기전 1200년 이후: 메소포타미아, 가나안의 아람 민족, 이스라엘 민족, 서기전 200년 이후: 나바테야 민족, 아랍 민족, 유대 민족, 서기 600년 이후: 무슬림 아랍 민족, 유대 민족 

 

셈족의 지리적 고향은 어디인가?

오늘날 셈족의 후예인 모슬렘 아랍 민족은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를 비롯한 북부 아프리카 등 광활한 지역에 살고 있다. 서기전 1 만년 경에 발생했던 농업혁명은 북부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등지의 야산지대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자연히 이 주인공들이 셈족의 직접적인 조상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면 농업혁명 이후 그 장본인들이 계속해서 메소포타미아의 주인공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시대에 들어와서 셈족은 시리아 광야를 고향으로 하는 아모리 족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시리아 광야, 또는 북부 아라비아 광야를 셈족의 지리적 고향으로 보고 있다. 광활한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서기전 1200년경 낙타가 본격적으로 유목민들의 교통 수단으로 사용되기 시작하기 이전에는 소규모 이상의 정착 활동은 불가능한 불모지였다. 따라서 셈족의 중심지는 광야와 산지가 만나는 시리아 광야나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이었다고 볼 수 있다.  


1) 도시국가(City State) 시대 (서기전 4000-3000)메소포타미아에서 도시들은 남쪽의 수메르 지역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서기전 4000 년경부터 이 곳에서는 우룩(Uruk), 라가쉬(Lagash), 우르(Ur), 니푸르(Nippur), 슈루팍(Shuruppak), 키쉬(Kish) 등의 도시들이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2) 왕국(Kingdom)시대 (서기전 3000-2000)이 시대에 들어와서는 여러 도시국가들이 가장 강력한 도시를 중심으로 동맹을 맺어 일종의 왕국을 형성했으며, 대표적으로 남쪽의 수메르 왕국과 북쪽의 아카드 왕국으로 분류된다. 
3) 제국(Empire)시대 (서기전 2000-330)서기전 2000 년경부터 메소포타미아의 세력권은 좀 더 북쪽으로 확장되었고, 서기전 1800 년경부터는 하무라비왕이 바빌론 도시를 중심으로 바빌로니아 제국을 건설하였고, 북쪽의 티그리스강 유역에서는 샴시-아다드(Shamshi-adad)왕이 앗수르 도시를 중심으로 앗시리아 제국을 형성하였다. 이 두 세력이 함께 경쟁하며 발전하다가 서기전 1100 년경부터는 앗시리아의 세력이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통치하기에 이르렀으며, 서기전 612년에는 신 바빌로니아(Neo-Babylonia)가 그 통치권을 이어받았다. 서기전 539년부터는 이란지역의 페르시아가 이 지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으며, 서기전 330년경 마케도니아 출신의 알렉산더가 페르시아 제국을 점령함으로써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창조설화와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

 

 메소포타미아의 창조에 관한 신화는 아카드어로 기록된 에누마 엘리쉬로서 지금까지 니느웨(Nineveh), 앗슈르(Ashur), 키쉬(Kish), 술탄 테페(Sultan Tepe) 등에서 발견됐다. 이들의 기록연대는 서기전 900-200년까지로 다양하며 신화 자체는 7개의 토판으로 구성되어 있고 모두 1100줄에 달한다. 이 신화의 제목인 ‘에누마 엘리쉬’는 첫 두 단어로서 ‘높이서 --할때’ ‘When on high’라는 뜻이며 신들의 태어나는 태초의 시간적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정하고 있다. ‘저 높은 곳의 하늘이 명명되기 이전에 저 낮은 곳의 땅이 이름 불려지기 이전에’ 

제 1세대: 압수(Apsu): 민물         <---> 바닷물: 티아맛(Tiamat)제 2세대: 라크무(Lakhmu): 진흙 <---> 갯벌: 라카무(Lakhamu)제 3세대: 안샤르(Anshar): 구름  <---> 안개: 키샤르(Kishar):제 4세대: 아누(Anu)제 5세대: 누디무드(Nudimmud)=에아(Ea) <---> 담키나(Damkinna)제 6세대: 마르둑(Marduk)= 앗수르


제 1-3 세대의 신들은 각각 쌍을 이루면서 자연현상을 대표하는데 이것은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의 늪지대를 연상시킨다. 압수(Apsu)는 젊은 신들의 소란함 때문에 편안히 쉴 수가 없어서 그들을 없애버릴 계획을 세웠고 이를 알아차린 에아(Ea)가 압수를 결박하여 죽여버렸다. 이 때부터 압수는 에아의 전통적인 거처가 되었다. 이야기는 남편의 죽음을 복수하려는 티아맛 진영과 이에 대항하는 에아의 아들 마르둑과의 전투로 전개된다. 티아맛은 킹구, 후부르와 함께 그녀가 만든 11 괴물들을 동원하였고 마르둑은 활, 곤봉, 번개, 화염, 그물, 폭풍으로 무장했다. 마르둑은 우선 폭풍으로 티아맛을 제압한 다음 활을 쏘아 죽였고 그녀의 시체와 킹구의 피로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였다. (1) 하늘과 땅, (2) 하늘의 성좌: 매달 3개의 성단(constellation): 36 성좌, (3) 달과 태양, (4)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티아맛의 눈물, (5) 인간: 킹구의 피 
에누마 엘리쉬의 정치적, 종교적 의의


 에누마 엘리쉬는 전형적인 바빌로니아의 문학 작품이다. 이것의 집필 의도는 마르둑(Marduk) 신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며 자연과 인간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는 부수적인 것이었다. 서기전 1750 년경 함무라비가 바빌론을 새 왕국의 수도로 삼으면서 수메르 시대부터 미미한 존재였던 마르둑이 출세하기 시작하였고, 서기전 1120년경 느부갓네살 1세가 신년축제를 통하여 마르둑을 최고의 신으로 격상시켰다. 에누마 엘리쉬는 신년축제(아키투 축제) 제 4일에 마르둑 신상 앞에서 낭독되었다. 앗슈르에서 발견된 에누마 엘리쉬에서는 마르둑 대신에 앗수르가 들어가 있다. 바벨론의 마르둑교(Mardukism)는 도시, 신전, 신상, 그리고 제의문인 에누마 엘리쉬까지 갖춤으로써 메소포타미아 역사상 최고로 발전된 종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창세기 10장의 민족들의 계보(Table of Nations)
 고대 이스라엘이 생각했던 민족들의 기원은 창세기 10장의 자료에서는 대홍수 이후 살아남은 노아의 세 아들들로부터 유래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계보에 의하면 셈, 함, 야벳의 아들들은 모두 70여명에 이르며 이들은 각각 지리적으로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지로 퍼져나간 것으로 구분 지을 수 있지만, 실제 계보에 등장하는 모든 민족들이 반드시 이 기준에 부합되는 것은 아니다. 역대기상 1:1-26에 나타난 민족들의 계보는 아담에서 비롯되는 일련의 선적인 족보(genealogy)로 나열되어 있다. 창세기 10장을 참조한 역대기의 자료에서도 민족들의 열거는 야벳(14민족)으로부터 시작하여, 함(31민족), 셈(27민족)으로 이어진다.

<국민일보 2001.02.09 김 성 교수 (협성대·성서고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