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이성교제와 결혼관
1. 성도의 결혼관은 곧 성경적 결혼관이란 뜻이요, 이 결혼관을 말씀드림에 앞서 청소년들의 이성교제 생활을 몇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 청년시절은 고사하고, 남녀가 자신의 사춘기시절을 어떻게 보낼 것이냐가 기독교회 생활의 차원에서 참으로 문제가 됩니다. 그 이유는,
1) 사춘기에는 일어나는 본능적 충동이 큰 점과,
2) 현재의 사회제도가 그 문제를 긍정적으로 부추키는 추세에 있어서, 그 시기를 경건하게 보내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본능적 충동은 변함이 없지만, 현사회의 윤리적 퇴폐성은 예전에 비할 때에 훨씬 심각합니다.
예를 들면 옛날에는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하여 서로간의 접근을 경계하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점이요, 오히려 평범한 교제를 권장함으로 이성추구를 갖게 합니다. 게다가, 물량주의의 편만과 남녀의 교제를 부추키는 매스컴의 역할로 크게 노골화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경건의 한계를 벗어나서 불건전한 교제에 떨어지기 쉬운 실정입니다.
3. 이러한 상황에서 청소년기의 이성교제를 어떻게 이루어나갈 것이냐를 연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모든 계층, 청소년들과의 교제를 형제 자매적 관계로 생각해야 합니다.
마 12:50에서, 성도는 가족적 관계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한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한 교회, 즉 한 집의 식구들(딤전 3:15)이라는 관념으로 교제함이 필요하며,
2) 교회에서는 항상 단체적 행사로 시간을 갖고, 단체행사가 끝나면 늦기 전에 헤어질 것이요, 결코 교회 안에서의 종교행사를 이성교제의 기회로 오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3) 교회 안에서 사귄 남녀가 교회 밖에서 만나거나 교제할 때에도 남녀가 개인적으로 만나는 일은 반드시 명분이 있을 때에만 만날 것이요, 그 명분이란 교제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일이어서는 안됩니다. 교제가 목적일 경우에는 그 교제의 상태가 결혼대상 선택을 위한 절차로 비화되었을 때 중매인의 보증 하에 간단히 시행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 이상의 규모없는 교제는 모든 사람이 불건전한 교제로 낙인을 찍거나 오해할 소지가 있는 만큼, 꼭 삼가셔야 합니다.
4) 특히 사춘기의 이성교제는 남녀 개인교제를 피함이 좋고, 이를 피하는 방법으로는 학업에 몰두한다든가, 단체적 이성교제로 한계를 지워 그 이상 넘지 않음이 바람직합니다.
사춘기에 이성교제를 진지하게 하려는 태도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흐리게 할 뿐만 아니라, 이성교제 그 자체로서의 교제도 원만성을 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교육적인 견지에서 깨닫고 절제하는 사람은 건설적 전망이 있으나,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본능적 방향을 따라 행하는 사람은 그 후에도 역시 본능주의로 사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성도는 본능주의로 사는 사람이 아니고, 경건을 위하여 자기를 제어하는 사람임을 아셔야 합니다.
4. 위와 같은 견지에서 청소년들의 교제는 건전한 인정을 사회로부터 받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결혼적령기에 들어서서 배우자를 물색할 때에는 더욱 신중을 기하여야 합니다. 청년들의 결혼관에 대하여는 다음의 몇 말씀을 참고하십시오.
5. 결혼에 임하는 청년들은 결혼으로 받는 3가지의 행복을 알아야 합니다.
1) 결혼생활이 지상에서의 최고의 행복을 안겨줌이 되어야함과,
2) 현실적 결혼생활 자체에서 매일 매일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함과,
3) 결혼생활이 자손의 대대로 이어져야 함을 명심해야 할 것이요,
6. 이러한 행복을 안겨주는 결혼의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음을 깨달아(창 24:12, 잠 31:10, 룻 3:10, 4:13, 14) 신앙적으로 복된 생활을 앞세우고, 은혜를 구하는 기도에 게으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좋은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시니까요(약 1:17).
7. 하나님께서 주시는 현실적인 은혜는 노력없이 주시지 않습니다(마 11:12, 요 11:39, 빌 2:13, 마 7:7, 욥 8:5, 6).
건설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이 이상적인 배우자도 맞이할 수 있습니다.
8. 우선, 자신이 원하는 타입(모든 조건)을 자신의 분수에 맞는 수준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하신 말씀을 순서대로 적용함과 같습니다. 누구에게나 선택권은 있습니다. 비슷한 수준으로 선택함이 이상적이며, 또한 성공율이 많을 것입니다. 희생적인 신앙으로 불구자의 아내나 남편이 되어주는 것도 찬양할 만한 일이지만, 이러한 희귀한 일을 권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러한 박애적, 봉사적 결혼은 당사자 자신의 충동에 의하여 함이 좋습니다. 성도들의 어떤 경우에는 50번 선을 보았다는 말도 흔히 듣는데, 이런 것은 참으로 삼가야 합니다.
성도는 결혼의 대상을 구할 때에 자기 형편보다 더 좋은 대상을 구하려는 욕심을 피해야 합니다. 더 좋은 대상이 청혼을 하여서 맞이하는 경우 외에는 욕심을 부려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결혼이 억지로 성취된다 해도, 생활과정에서 융화하는 일이나 상대방의 수준으로 따라가야 하는 일들이 더욱 고달파져 행복을 저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9. 대체로 결혼절차는,
1) 사전에 간접적 교제로 윤곽을 타진하고,
2) 중매인을 통하여 구체적인 문제를 타진하고,
3) 신앙의 일치, 당사자들간의 합의와 양측부모의 승인이 있으면 이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야 하며,
4) 혼수감 거래에 구애됨이 없이 간단히 약혼식을 하고(결혼 기일이 1개월 정도로 다가왔을 때에는 약혼식을 생략하여도 좋음).
5) 가급적 예배당에서 목사의 주례로 함이 이상적입니다.
10. 사람마다 개성에 따라 배우자를 구하는 표준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제 삼자는 당사자들의 선택을 강요하거나 헐뜯을 필요가 없습니다.따라서 당사자는 자신의 신앙수준을 점검하여 신앙적으로 결혼생활을 감당할 자신이 있는지, 아니면 애정만으로 유지해야 하는 수준인지, 아니면 현실생활에 부합되는 모든 여건이 있어야만 원만하게 살 수 있는지를 판단하여 자신감이 있는 여건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상대방의 연령, 외모, 언어, 교양, 가문, 신앙, 건강, 지식, 물질, 성품 등에서 자신에게 만족을 주는 정도가 많아야 함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여건의 만족한 대상이 속히 나타나지 않을 때에는 지나친 수준을 구한 것을 후회하고 정도를 낮추어야 할 것입니다. 평생을 지루함 없이 살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올 때에 결정한다면 퍽 이상적이겠지요.
11. 결혼을 할 때는
1) 하나님께서 짝지워 주셨다는 점(창 2:24),
2) 연합하였다는 점(창 2:24),
3)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점(마 19:6),
4) 경건한 자손의 배출을 위하여 음행을 피하여야 한다는 점(말 2:15),
5) 서로 돕고(창 2:20),
6) 남편과 아내가 자기의 책임을 잘 이행하여야 한다는 점(엡 5:22~26, 벧전 3:3~6, 고전 7:1~5)을 반드시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