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 처음 기도라는 걸 하게 됐습니다. 기도가 뭔지조차 모르던 제가 식사 자리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두 손을 모았습니다. 배다른 오빠인 윤영기 목사님이 우리 앞에서 우렁찬 목소리로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이상하게 처음 듣는 기도 소리가 쩌렁쩌렁 종소리가 되어 내 귀를 울렸습니다. 종소리는 점점 커져 내 몸 전체를 흔들었습니다.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복희와 항기가 주님의 품 안으로 돌아오게 해주옵소서.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기도 중에 저와 항기 오빠의 이름이 나올 때 ‘아, 이 분이 우리 남매를 위해 기도하고 계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꾸역꾸역 올라왔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이 살아서 내 몸속에 콕콕 박히는 듯했습니다. 기도는 제법 오래 계속됐지만 조금도 지겹지 않았습니다. 기도가 끝나고 식사를 하는 중에도 귓전에 기도 소리가 계속 들렸습니다. 그날 저녁 전주에서 공연을 하는 중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의 소리였다가 이내 종소리가 되어 강하게 울렸습니다. 나중엔 그 소리가 저의 혼과 육신을 때리는 듯했습니다.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게 전주 공연을 마치고 다음날 공연을 위해 대구로 이동하게 됐습니다. 여기서 사건이 터진 겁니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밝혔듯이 고속도로 상에서 대형 교통사고를 내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만난 겁니다. 1976년 2월 27일 이른 아침의 일이었습니다.
대구 공연을 마치고 서울행 새마을호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차창으로 보이는 세상은 예전의 세상과 많이 달랐습니다. 자연은 물론이고 집과 건물, 온갖 것들이 다 아름다웠습니다. 눈물이 나도록 아름다웠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이었습니다. 특히 사람들이 아름다웠습니다. 지금까지 같은 눈으로 보았는데 왜 여태 저런 모습을 보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에 대한 회한이 밀려들었습니다. 제 삶의 어느 것 하나 부끄럽지 않은 게 없었습니다. 전날 그렇게 많이 울었는데도 무슨 눈물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리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서울에 도착하자 갑자기 후라이보이 곽규석 아저씨가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지난해 한국에 나왔을 때 아저씨가 공항까지 나와 성경책을 선물로 주셨던 게 생각난 겁니다. 아저씨를 찾아야 한다는 충동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저기를 다 뒤져도 아저씨의 연락처는 없었습니다. ‘그래, 곧 만나게 되겠지.’ 초조하기는커녕 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밤새 아주 깊은 잠을 잤습니다.
다음날 아침,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직감적으로 ‘곽규석 아저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수화기를 들자마자 아저씨가 밝은 목소리로 “나야!” 하는 겁니다. “서대문 노라노예식장 건너편에 아세아연합신학대학이 있거든. 오늘 오후 1시까지 거기로 와!”
앞뒤 설명도 없이 아저씨는 일방적으로 약속을 정하고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다짜고짜, 막무가내였습니다. ‘무슨 일일까? 도대체 무슨 용무이기에 아저씨가 이렇게 하실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덧 오전 11시가 가까웠습니다. 더 지체할 수 없어 대충 외출 준비를 하곤 아저씨가 말한 곳으로 갔습니다. 학교에 도착하니 약속시간이 한 시간 넘게 남았습니다. 교정 한쪽에서 공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건축자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습니다. 깨끗한 나뭇조각 두 개를 주워 끈으로 묶어 십자가를 만들어 목에 걸어보았습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