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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있을지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이여.

열려라 에바다 2024. 8. 9. 11:02
화 있을지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이여.
 
천향추천 0조회 1324.08.08 18:03댓글 0
 
본문은 예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화를 선언하는 내용이다.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사회적인 위치와 삶을
제자들의 위치와 삶과 대비하여 화를 선언하신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이다(마23:2).
그들은 모세의 권위로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들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율법 통치를 대행하는 다윗왕국의 관헌들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화를 선언하신다.
이는 예수 자신을 거절함으로 아버지의 뜻을 대적하기 때문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일곱 번에 걸쳐서 화를 선언하신다(마23:13-36).
일곱은 하나님의 완전수이다.
따라서 일곱 번의 화는 완전한 정죄를 의미한다.
예수께서 선언한 일곱 번의 화는 옛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의 완결이다(마23:35-36).
일곱 번의 화에 대한 구조는 2+2+2+1의 평행법이다.
이는 확실한 증거를 강조하는 방식이다.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직무에 의한 탐욕과 세상의 명예,
풍요를 숭배하는 경건하지 못함과 불법으로 가득한 외식을 두 번씩 언급하여 화를 확증하신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탐욕과 경건하지 못함, 불법으로 가득한 외식은
율법에 부착함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이는 율법이 육체를 상관하는 육체의 예법이기 때문이다(히7:16, 9:10).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한 화에 대한 결론은 마지막 화이다(마23:35-36).
일곱 번째 화는 그들은 선지자를 죽인 조상들의 후손이며
조상들의 심판 분량을 채우는 뱀과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내용이다(마23:29-36).
따라서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
그들은 예수를 거절하고 대적함으로 선지자들을 거역한 조상들의 죄를 완성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 아들을 거절한 죄는 조상들의 죄를 완성하여 영원한 심판이 선언된다.
본문은 율법 아래의 관헌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화 선언이다.
따라서 본문은 우리에게 직접 적용하는 것은 합당하지가 않다.


마태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임을 강조한다.
이는 예루살렘으로부터 고난과 핍박이 주어지더라도,
믿음에 굳게 서서 천국의 서기관으로 봉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모세의 제자이다.
그들은 모세의 권위를 따라 율법을 가르치는 율법 선생이며,
여호와의 율법 통치를 대리하는 구약의 하나님 나라 관헌들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유대 백성들에게 그들의 말을 들으나
그들이 예수를 거절하고 대적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말한다(마23:3).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가 되지 말라는 말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사람들에게 율법의 짐을 지우는 자들이다(마23:4).
그들은 율법 선생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율법의 높은 위치와 자리를 점하는 크고 먼저 된 자이다.
구약의 하나님 나라 관헌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잔치와 회당의 상석에 앉으며(마23:6),
시장에서는 사람들로부터 문안을 받으며 랍비라고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한다(마23:7).
그들은 차는 경문과 옷술을 크게 한다(마23:5).
이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함이다.
이것은 율법은 사람에게 판단을 받기 때문이다.
이처럼 율법은 육체를 상관하는 육체의 예법이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도 이스라엘의 외적인 행동만으로 의로운 여부를 판단하신다.
그러므로 구약은 이스라엘이 온전히 새롭게 된 시대가 아니다.
따라서 천국의 서기관인 제자들은 이전의 삶처럼 율법을 따르면 안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높아지려고 해서도 안된다.
선생이나 지도자라고 칭함을 받으려고 하면 안된다.
여기에서 언급한 선생과 아버지와 지도자는 같은 의미이다.
같은 의미의 말을 세 번이나 연속으로 반복함은 강조법이다.
이처럼 종말의 천국 질서는 율법의 질서와 다르다.
율법 나라인 다윗왕국의 통치질서와 다르다는 말이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직접 경영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국 왕 아래에서 천국 백성들은 모두가 하나가 된 형제이다(마23:8-10).
천국의 질서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질서이다(마23:11-12).
율법 아래처럼 큰 자가 작은 자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질서가 아니라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질서이다(마23:11-12).
이는 천국 왕께서 자기 백성의 제물이 되심으로 확정하신 질서이다.
따라서 천국 백성들은 섬김과 봉사를 통해서 천국 왕의 나라와 영광에 참여한다.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화를 선언하신다(마23:13).
이는 천국 문을 닫아서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따르는 백성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마23:13).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율법 선생들이다.
따라서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많은 백성이 있다.
그런데 그들은 천국 왕을 거절한다.
천국 왕에게 나아와서 믿고 따름이 천국에 들어가는 일이다.
그런데 그들은 천국 왕을 거절하고 대적함으로 따르는 백성들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마23:13).
그래서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화를 선언하신다(마23:13).
이는 육체를 상관하는 육체의 예법만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율법에 부착한 삶은 겉을 의식하고 꾸미게 된다.
이는 여호와께서 율법을 행함을 따라 의로운 여부를 판단하시기 때문이다.
마음의 어떠함과 상태와는 상관이 없다.
이처럼 구약은 아직 속사람까지 새로게 하신 때가 아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의 관헌들의 악하고 음란함은,
그들이 예수 자신을 거절하는 악하고 음란함은
백성들까지 지옥의 자식이 되게 한다고 하신다(마23:15).
그래서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가리켜서 소경이 된 인도자라고 말씀하신다(마23:16).
이는 여호와께서 사람으로 오셨으나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그들은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가?
그들의 눈이 상하여 온몸이 어둡기 때문이다(마6:21-23).
그들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함은 눈과 마음이 하나님이 아니라
율법 아래의 명예와 풍요를 누림에 맞춰졌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과 마음은 사회적인 지위와 명예, 부족함이 없는 삶에 맞춰져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키라고 말하며(마23:16),
제단에 위의 제물로 맹세하면 지킬 것이라고 한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마23:18).
이처럼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눈과 마음은 하나님을 떠나서
율법 아래에서 주어진 지위와 율법의 복을 누리는 일에 맞춰져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의 눈은 상하고 온몸은 어두워서 하나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자들의 화를 선언하신다(마23:15).
이는 율법 아래의 관헌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한 화이다.
예수께서는 십일조를 예로 들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외식에 대한 화를 선언하신다(마23:23-24).
예수께서 언급하신 십일조 내용은 십일조를 주장하는 자의 보루이다.
이 구절은 한국교회가 주장하고 시행하는 십일조 근거 구절이다.
모세율법(구약성경)은 십일조를 행할 것을 명한다(레27:30-34, 말3:7-12).
모세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일조를 행할 것을 명한다.
이는 가나안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한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위한 것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을 위함은 성전제사를 위함이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없다면 성전제사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십일조를 드리려면 두 가지의 전제조건이 요구된다.
첫째로 할례를 행하는 것이다.
할례는 남자의 생식기 표피를 베어서 여호와 언약에 참여하는 표식이다.
할례는 여호와의 백성이라는 표식이다.
십일조를 드리려면 반드시 할례를 행해야 한다.
구약성경(모세율법)은 할례를 행하지 않은 부정한 자는
여호와 성전에 나아갈 수 없으며
십일조를 드려서 여호와를 섬길 수도 없다고 말한다.
할례를 행하지 않은 무할례자는 여호와 앞에서 부정하기 때문이다.
모세율법(구약성경)이 무할례자도 십일조를 드릴 수 있다고 말하는가?
두 번째는 십일조는 반드시 가나안땅에서 생산된 소산물로 드려야 한다.
이는 구약에서는 가나안땅만이 거룩한 땅이며
가나안땅에서 생산된 소산물만이 여호와 앞에서 거룩하기 때문이다.
모세율법(구약성경)대로 말하자면 한반도는 여호와 앞에서 부정한 이방 땅이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생산된 소산물이나
한반도에서 유통되는 한국 은행권은 여호와 앞에서 부정하다.
그래서 예수 당시에도 성전에는 환전상들이 있었다(마21:12).
이는 이방 땅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디아스포라) 예루살렘에 와서 여호와께 제사하고
성전을 보수할 때 사용하는 성전세를 부정한 이방 돈으로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전 뜰에는 이방 화폐를 유대 화폐로 바꿔주는 환전상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십일조를 가르치려면 구약성경이 말하는 대로 제대로 가르치고 행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할례는 폐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할례와 십일조 가운데서 무엇이 중한가?
당연히 할례가 중하다.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여호와의 백성이 되지 못하고
여호와께 제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일조는 할례를 행한 여호와 백성에게 명하신 의무이다.
그런데 왜 중한 할례를 폐하였다고 하면서 십일조는 강조하는가?
이처럼 사사로운 뜻과 목적을 위하여 성경 구절을 취사 선택하여 가르친다면
악랄한 신천지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여기에서 언급된 박하와 회향과 근채는 가나안땅에서 생산된 소산물이다(마23:23).


예수 당시는 율법 통치와 그리스도의 통치가 공존하는 과도기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문둥병자를 고치신 후에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신다(마8:1-4).
이처럼 공생애 동안에 나타나서 시행된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는 그리스도 구속으로 보편화가 된다.
모든 백성과 세상 가운데 종말의 보편적인 하나님 통치질서로 확정되어서 시행된다.
그래서 마태는 율법 아래에 있는 유대인들과 만백성들에게
예수께 나아와서 그를 믿고 따르라고 권면한다.
모세율법은 옛 언약의 법이다.
이는 옛 언약 당사자인 이스라엘이 이행해야 할 합의 사항이다.
그런데 율법은 육체만을 상관하는 육체의 예법이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물과 피로 이스라엘의 겉만을 씻어서 대하신다.
따라서 구약은 이스라엘을 온전히 새롭게 하신 때가 아니다.
이스라엘의 속까지 새롭게 빚으셨던 때가 아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도다”
라고 말씀하신다(마23:25-28).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잔과 대접으로 말씀하신다.
율법을 부착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겉은 깨끗하다.
이는 육체를 상관하는 육체의 예법을 따라 겉을 씻었기 때문이다.
물과 짐승의 피를 뿌려서 겉을 씻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의 육체를 물로 씻고 짐승의 피를 뿌린다고 해서 속사람까지 새롭게 되겠는가?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고서는 결코 속사람까지 새롭게 되지 못한다.
율법은 잔과 그릇은 불을 지나가게 하면 정결하게 된다고 말한다.
사체에 닿은 부정한 잔과 대접이 불을 지나간다고 해서 부정함이 없어지겠는가?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불을 지나간 대접과 그릇은 깨끗하다고 하신다.
이처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육체와
그들이 소유한 그릇과 잔의 겉만을 씻으셔서 정결하게 하셨다.
그러나 모세율법은 이스라엘의 속사람까지 새롭게 하지 못한다.
율법으로는 결코 죄를 온전히 없이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사체나 문둥병자에게 접촉하여 부정하게 되면,
반복적으로 물로 씻고 피를 뿌려야 한다. 아무리 물과 피를 뿌릴지라도
이스라엘의 속사람까지 새롭게 하지 못한다.
그래서 종말에 하나님께서는 율법 아래에 아들을 보내신다(갈4:4).
이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함이다(갈4:5).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예수께서는 율법의 요구를 따라 십자가에서 죽으신다.
율법은 죽은 자에게 더는 죽음을 요구하지 못한다.
제자들은 예수께 나아와서 그를 믿고 따름으로 그에게 속하게 된다.
예수께 나아와서 믿고 따르는 자는 예수에게 속한 백성이다.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이다.
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한 자에게 죽음을 요구하지 못한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는데 어찌 죄와 사망이 상관하겠는가?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하게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고 말씀하신다(마23:26).
이 말씀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예수 자신에게 나아오라는 권면이다.
예수에게 나아와서 그를 믿고 따를 때만이 속사람까지 새롭게 되기 때문이다.
율법 아래에 머무는 한 속사람까지 새롭게 되지 못한다.
속사람이 새롭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아들(자녀)로 세워진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사이의 죄로 인한 휘장이 사라지게 된다는 말이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들 안에 그들은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된다.
예수께서 화를 선언하심은 예수 자신을 거절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거절과 대적은 예전부터 이루어진 일이다.
예전에 여호와께서는 많은 선지자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를 거절하고 대적하였다(마23:29-30).
따라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예수를 거절함은 단회적인 일이 아니다.
이는 조상 때부터 이루어진 연속적인 일이다(마23:31-34).
그래서 예수께서는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죽은 사가랴의 피까지 그들에게 돌아가리라고 정죄하신다(마23:35).
이러한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한 화 선언은(마23:1-36)
예루살렘의 심판 선언으로 종결된다(마23:37-39).
이에 대하여 마가복음에서 언급하는 내용이 없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예수의 선교와 고난 문맥에서
예루살렘에 대한 사랑과 심판을 선언하신다(눅13:31-45).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이스라엘 지도자에 대한 일곱 번의 화를 선언하신 후에(마23:13-36)
예루살렘 멸망이 선지자를 거역한 이스라엘 죄로 인한 종말의 심판임을 강조한다(마23:37-39).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선언된 화는 우리의 본이다.
그들의 눈과 마음은 여호와에게서 떠나
율법 아래의 지위로 인한 명예, 부족함이 없는 삶의 유지에 맞춰져 있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이 그들의 눈을 상하게 하여 온몸이 어둡게 하였다.
그 결과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여 종말의 심판을 자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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