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를 감사로
염려를 감사로 마6:25-34, 빌4:4-7
J. C. 페니 (J. C. Penney)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사업을 시작했지만 실패하고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빚쟁이들에게 시달리고 재정난을 겪으면서 걱정과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건강이 악화되면서 페니는 패틀크릭 병원에 격리 수용되었습니다. 어느 날 지치고 낙심한 그에게 찬송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소리 나는 곳을 찾아갔더니 기도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뒷자리에 앉았는데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찬송은 그의 마음속에 가득 찬 염려를 몰아내었고 확신을 주었습니다. 페니는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지쳤습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 후에 그는 고백하기를 “나는 무한히 어두운 공간에서 찬란한 태양 빛으로 옮겨지는 느낌이었으며 마음속의 무거운 짐이 옮겨져 그 방을 나올 때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건강을 회복하고 용기를 내어 사업을 시작한 결과 성공하였으며 미국의 백화점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염려를 이긴 것입니다. 어려운 때 추석 명절을 앞두고 염려 많은 현실에서 두 본문을 중심으로 “염려 대신 감사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주님께서 염려하지 말라하십니다.
본문 마6:25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하셨습니다. 여기 ‘염려’에 해당하는 헬라원어는 ‘메림나오’이고, 영어 성경에는 ‘Worry’라고 번역했습니다. ‘Worry’의 어원에는 ‘물어뜯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물어뜯기면 상체기가 생기고 치명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염려합니다. 목숨에 대한 염려, 의복에 대한 염려, 음식에 대한 염려, 물질에 대한 염려, 생활에 대한 염려, 세상일에 대한 염려, 미래에 대한 염려 등 계속 염려하며 삽니다.
유명한 기독교 영성운동가 ‘헨리 나우웬’은 ‘염려한다.’는 것은 “아직 내 앞에 오지도 아니한 시간과 장소를 무언가로 가득 채우려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염려’란 마음에 ‘혹시’로 가득 찬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암에 걸리지 않을까’, ‘혹시 자동차 사고가 나지 않을까’, ‘혹시 실직하지 않을까’, ‘혹시, 자식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찌하나’, 하는 등의 아직도 오지 아니한 것에 대해 마음에 가득 채우는 것’이 염려라는 말입니다. 마음에 염려가 생기면 불안해지고, 두려워지고, 조급해지고, 의심이 많아지고, 우울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고통과 문제는 이 같은 쓸데없는 염려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물론 염려가 유익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근심과 염려입니다. 고후11:28에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우리는 전도를 위해 염려하고,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해 염려해야 하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를 염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로부터의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지지 않도록 염려해야 합니다. 딤전3:7에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죄 가운데 빠질까, 내가 한 말 때문에 혹시 성도를 실족케 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한 행동 때문에 불신자가 구원받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염려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해야 합니다. 히3:12에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하라.” 여기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이 염려해야 할 것들은 영적인 일을 위해서입니다. 교회를 위하고, 성도들을 위해서 염려하고, 나와 다른 사람이 믿음에서 떨어질까 염려하고, 특히 불신자들의 영혼구원을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염려하고 근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근심은 유익이 없습니다. 본문 27절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여기의 ‘키’로 번역된 ‘헬리키아’는 ‘생명’ 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네가 염려한다고 한 자의 거리를 갈 수 있는 시간이라도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느냐” 라는 의미입니다. 건강에 대해 염려한다고 생명을 연장할 수 있습니까? 염려한다고 상황이 바뀌지 않고, 염려한들 소용이 없는데 어찌 염려하느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염려해서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염려로 인해 건강만 상하고, 마음만 아플 뿐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 말씀대로 무익한 근심을 버리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소유하고 사시기를 소망합니다.
2.염려 대신 감사로 아뢰는 성도가 됩시다.
본문 빌4:6-7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우리는 문제가 생겼을 때 염려하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감사로 아뢰어야 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부어 주십니다. 그리할 때 우리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넘치고 확신이 생겨납니다.
현실을 바라보면 암담하고 희망이 없어 보일지라도 우리가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이 되고, 믿음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앗수르의 침공을 받은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해결해 주셨습니다. 아람 군대가 밤중에 엘리사가 거하는 도단 성을 포위했을 때, 사환 게하시가 적군들이 성을 에워싼 것을 보고 두려움 가운데 엘리사에게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라고 절규할 때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며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두른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가지면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7-19) 바울의 기도처럼 우리는 “주여, 저에게 믿음을 더하셔서 마음눈을 밝히시어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하여주옵소서.” 라고 구해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지 못한 열 명의 정탐꾼과 그들의 말을 듣고 함께 절망한 백성들처럼 되어서는 믿음의 실패자가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가진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대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고귀한 특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언제라도 나아갈 수 있는 이 특권을 묻어두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3-14)고 하셨습니다. 사람에게 무엇을 자꾸 요구하면 싫어하고 요구하는 것도 염치가 없어 미안해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많이 구할수록 기뻐하시고, 구하여 응답을 받을수록 하나님 아버지께서 더 많은 영광을 받으시니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까? 기도에 응답이 없다고 낙심하지 말고 인내로 응답의 때를 기다리다 보면 적절한 때에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 모두 염려 대신 감사로 아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성도에게는 감사할만한 은혜가 감싸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여러 모양으로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바로 알고 믿을 때 세상 염려에서 해방 될 수 있습니다. 그 은혜는,
먼저 에벤에셀의 은혜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목숨이 유지되고 있는 것과 지금도 건강한 몸으로 이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해 주신 에벤에셀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앙의 사람들은 재물을 하나님처럼 믿고 의지하며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재물을 섬기는 세상 사람들처럼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좇아간다면 잘못된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본문에서 주님은 공중 나는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입히시는데, ;너희는 이것들 보다 더 귀하지 아니하느냐‘고, 미물들도 이처럼 돌보시는데 하물며 너희들을 돌보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며 염려에 사로잡혀 사는 자들을 나무라십니다. 염려하지 말고 염려 대신 감사할 일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성도로 사시기 바랍니다.
다음에 임마누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고아처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임마누엘로 같이 하시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시고 돌보아주십니다. 그런대도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염려는 반비례합니다. 믿음이 깊어지면 염려는 달아납니다. 그러나 믿음이 얕아지면 염려는 깊어져 염려에 사로잡혀 살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믿음과 감사는 정비례합니다. 믿음이 커지면 감사도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적어지면 감사도 적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염려하는 자들을 향해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책망조로 말씀 하신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은혜가 지금도 여러분을 감싸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호와이레의 은혜입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우리를 돌보아주셨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지금 현재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어 돌보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은 미래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홀로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권세를 가지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앞날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내일 일을 염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불안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우리를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염려대신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하며 감사 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1세기 초대교회의 문서들을 살펴보면 그리스도인들의 이름 앞에 ‘티테디오스’(Titedios)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베드로도 티테디오스 베드로, 바울도 티테디오스 바울, 요한도 티테디오스 요한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티테디오스’ 란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 이란 뜻이 있습니다. 초대교인들이 이름 앞에 티테디오스를 붙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염려에서 해방된 자라는 것을 세상에 증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이름 앞에도 ‘티테디오스’ 를 붙이시기 바랍니다. ‘티테디오스’ 즉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모름지기 성도는 염려를 버려야 합니다. 아무 소용이 없는 염려를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감사함으로 기도하며 물리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가 감싸고 있음을 믿고 감사하는 자로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염려 대신 감사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주님께서 염려하지 말라하십니다.
◇.염려 대신 감사로 아뢰는 성도가 됩시다.
◇.성도에게는 감사할만한 은혜가 감싸고 있습니다. 아멘.
<2024. 09. 12. 호현낙선>
J. C. 페니 (J. C. Penney)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사업을 시작했지만 실패하고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빚쟁이들에게 시달리고 재정난을 겪으면서 걱정과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건강이 악화되면서 페니는 패틀크릭 병원에 격리 수용되었습니다. 어느 날 지치고 낙심한 그에게 찬송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소리 나는 곳을 찾아갔더니 기도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뒷자리에 앉았는데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찬송은 그의 마음속에 가득 찬 염려를 몰아내었고 확신을 주었습니다. 페니는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지쳤습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 후에 그는 고백하기를 “나는 무한히 어두운 공간에서 찬란한 태양 빛으로 옮겨지는 느낌이었으며 마음속의 무거운 짐이 옮겨져 그 방을 나올 때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건강을 회복하고 용기를 내어 사업을 시작한 결과 성공하였으며 미국의 백화점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염려를 이긴 것입니다. 어려운 때 추석 명절을 앞두고 염려 많은 현실에서 두 본문을 중심으로 “염려 대신 감사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주님께서 염려하지 말라하십니다.
본문 마6:25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하셨습니다. 여기 ‘염려’에 해당하는 헬라원어는 ‘메림나오’이고, 영어 성경에는 ‘Worry’라고 번역했습니다. ‘Worry’의 어원에는 ‘물어뜯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물어뜯기면 상체기가 생기고 치명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염려합니다. 목숨에 대한 염려, 의복에 대한 염려, 음식에 대한 염려, 물질에 대한 염려, 생활에 대한 염려, 세상일에 대한 염려, 미래에 대한 염려 등 계속 염려하며 삽니다.
유명한 기독교 영성운동가 ‘헨리 나우웬’은 ‘염려한다.’는 것은 “아직 내 앞에 오지도 아니한 시간과 장소를 무언가로 가득 채우려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염려’란 마음에 ‘혹시’로 가득 찬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암에 걸리지 않을까’, ‘혹시 자동차 사고가 나지 않을까’, ‘혹시 실직하지 않을까’, ‘혹시, 자식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찌하나’, 하는 등의 아직도 오지 아니한 것에 대해 마음에 가득 채우는 것’이 염려라는 말입니다. 마음에 염려가 생기면 불안해지고, 두려워지고, 조급해지고, 의심이 많아지고, 우울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고통과 문제는 이 같은 쓸데없는 염려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물론 염려가 유익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근심과 염려입니다. 고후11:28에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우리는 전도를 위해 염려하고,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해 염려해야 하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를 염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로부터의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지지 않도록 염려해야 합니다. 딤전3:7에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죄 가운데 빠질까, 내가 한 말 때문에 혹시 성도를 실족케 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한 행동 때문에 불신자가 구원받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염려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해야 합니다. 히3:12에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하라.” 여기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이 염려해야 할 것들은 영적인 일을 위해서입니다. 교회를 위하고, 성도들을 위해서 염려하고, 나와 다른 사람이 믿음에서 떨어질까 염려하고, 특히 불신자들의 영혼구원을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염려하고 근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근심은 유익이 없습니다. 본문 27절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여기의 ‘키’로 번역된 ‘헬리키아’는 ‘생명’ 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네가 염려한다고 한 자의 거리를 갈 수 있는 시간이라도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느냐” 라는 의미입니다. 건강에 대해 염려한다고 생명을 연장할 수 있습니까? 염려한다고 상황이 바뀌지 않고, 염려한들 소용이 없는데 어찌 염려하느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염려해서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염려로 인해 건강만 상하고, 마음만 아플 뿐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 말씀대로 무익한 근심을 버리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소유하고 사시기를 소망합니다.
2.염려 대신 감사로 아뢰는 성도가 됩시다.
본문 빌4:6-7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우리는 문제가 생겼을 때 염려하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감사로 아뢰어야 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부어 주십니다. 그리할 때 우리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넘치고 확신이 생겨납니다.
현실을 바라보면 암담하고 희망이 없어 보일지라도 우리가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이 되고, 믿음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앗수르의 침공을 받은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해결해 주셨습니다. 아람 군대가 밤중에 엘리사가 거하는 도단 성을 포위했을 때, 사환 게하시가 적군들이 성을 에워싼 것을 보고 두려움 가운데 엘리사에게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라고 절규할 때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며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두른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가지면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7-19) 바울의 기도처럼 우리는 “주여, 저에게 믿음을 더하셔서 마음눈을 밝히시어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하여주옵소서.” 라고 구해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지 못한 열 명의 정탐꾼과 그들의 말을 듣고 함께 절망한 백성들처럼 되어서는 믿음의 실패자가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가진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대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고귀한 특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언제라도 나아갈 수 있는 이 특권을 묻어두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3-14)고 하셨습니다. 사람에게 무엇을 자꾸 요구하면 싫어하고 요구하는 것도 염치가 없어 미안해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많이 구할수록 기뻐하시고, 구하여 응답을 받을수록 하나님 아버지께서 더 많은 영광을 받으시니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까? 기도에 응답이 없다고 낙심하지 말고 인내로 응답의 때를 기다리다 보면 적절한 때에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 모두 염려 대신 감사로 아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성도에게는 감사할만한 은혜가 감싸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여러 모양으로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바로 알고 믿을 때 세상 염려에서 해방 될 수 있습니다. 그 은혜는,
먼저 에벤에셀의 은혜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목숨이 유지되고 있는 것과 지금도 건강한 몸으로 이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해 주신 에벤에셀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앙의 사람들은 재물을 하나님처럼 믿고 의지하며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재물을 섬기는 세상 사람들처럼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좇아간다면 잘못된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본문에서 주님은 공중 나는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입히시는데, ;너희는 이것들 보다 더 귀하지 아니하느냐‘고, 미물들도 이처럼 돌보시는데 하물며 너희들을 돌보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며 염려에 사로잡혀 사는 자들을 나무라십니다. 염려하지 말고 염려 대신 감사할 일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성도로 사시기 바랍니다.
다음에 임마누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고아처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임마누엘로 같이 하시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시고 돌보아주십니다. 그런대도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염려는 반비례합니다. 믿음이 깊어지면 염려는 달아납니다. 그러나 믿음이 얕아지면 염려는 깊어져 염려에 사로잡혀 살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믿음과 감사는 정비례합니다. 믿음이 커지면 감사도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적어지면 감사도 적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염려하는 자들을 향해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책망조로 말씀 하신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은혜가 지금도 여러분을 감싸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호와이레의 은혜입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우리를 돌보아주셨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지금 현재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어 돌보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은 미래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홀로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권세를 가지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앞날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내일 일을 염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불안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우리를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염려대신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하며 감사 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1세기 초대교회의 문서들을 살펴보면 그리스도인들의 이름 앞에 ‘티테디오스’(Titedios)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베드로도 티테디오스 베드로, 바울도 티테디오스 바울, 요한도 티테디오스 요한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티테디오스’ 란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 이란 뜻이 있습니다. 초대교인들이 이름 앞에 티테디오스를 붙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염려에서 해방된 자라는 것을 세상에 증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이름 앞에도 ‘티테디오스’ 를 붙이시기 바랍니다. ‘티테디오스’ 즉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모름지기 성도는 염려를 버려야 합니다. 아무 소용이 없는 염려를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감사함으로 기도하며 물리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가 감싸고 있음을 믿고 감사하는 자로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염려 대신 감사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주님께서 염려하지 말라하십니다.
◇.염려 대신 감사로 아뢰는 성도가 됩시다.
◇.성도에게는 감사할만한 은혜가 감싸고 있습니다. 아멘.
<2024. 09. 12. 호현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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