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스크랩 하나의 혀는 하나의 말을 해야 합니다.(약3:1-12)

열려라 에바다 2024. 9. 14. 11:39
하나의 혀는 하나의 말을 해야 합니다.(약3:1-12)
 
권호만barnabak추천 1조회 8524.09.13 10:34댓글 1
 
 
하나의 혀는 하나의 말을 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3:1-12


어떤 돈 많은 부자가 침례를 받기 위해 물속에 들어갔습니다.
갑자기 목사님에게 침례를 잠깐 중지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깜빡하고 지갑을 갖고 들어왔으니 그것을 빼 놓을 수 있게 시간을 달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그 말을 무시하고 그대로 진행하면서 한 마디 합니다.
당신 뿐 아니라 당신 지갑도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부자이면서도 헌금을 하지 못하는 것을 빗댄 말입니다.
지갑이 세례를 받아야 하듯이 우리 몸에도 세례를 받아야 할 아주 중요한 지체가 있습니다. 바로 혀요 입입니다.
야고보 장로는 그 이유를 분명하게 언급합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10)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질서는 하나에서 하나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샘이 물을 낼 때 단물을 내면 그 샘은 계속 단물을 내고 쓴 물을 내면 계속 쓴 물을 내게 됩니다.
단물을 냈다가 쓴물을 내고 쓴물을 내다가 단물을 내는 경우는 없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언제나 무화과 열매를 맺지 포도와 같은 다른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포도나무는 포도열매를 맺지 포도나무에서 다른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입은 하나의 입이지만 그 입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소리를 내는가 하면 이웃을 저주하는 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나는 모습입니다.


주일날 교회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은혜롭게 예배를 드리고 집에 갔습니다.
가서 보니 아들이 그때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자고 있습니다.
화가 나서 이 놈아 빨리 일어나지 못해. 저 놈은 뭐가 되려고 저렇게 게으른지 몰라.’ 소리를 칩니다.
제가 조금 부드럽게 고쳐서 말을 했습니다. 더 심한 말을 할 수도 있어요.
자식에게 뿐 아니라 남편이나 아내에게도 해서는 안 될 말을 할 때가 많습니다.
찬송하던 입은 어느덧 사라지고 같은 입에서 저주하는 말이 나옵니다.
구역예배를 드릴 때 흔히 실수하는 것이 예배를 은혜롭게 잘 드립니다.
예배를 마치고 준비한 다과를 나누면서 대화를 하는데 자칫 다른 교우들을 비판하는 말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비판이 함께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혀가 갖고 있는 문제요 잘못입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만 주신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물가운데 말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사람뿐입니다.
물론 다른 동물들도 서로 의사소통하는 수단이 있지만 그것은 사람의 언어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인간의 언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만의 특권입니다.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라고 한다면 이 특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올바르게 사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과 대화하는데 사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펼쳐 나가는데 사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웃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위로하는데 사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찬송하고 높이는데 사용하는 것이 인간에게만 허락하신 말의 축복을 잘 사용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실에서는 이 축복된 입이 잘못 사용되고 있고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야고보는 주님의 동생으로 야고보 장로로 불러지는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하고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를 이어서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으로 교회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낙타무릎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일에 힘썼다고 합니다.
그런 야고보장로가 흩어져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쓴 것이 야고보서인데요,
이 야고보서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구원받은 자의 올바른 삶, 행함이 있는 삶을 강조하는데요,
야고보 장로가 볼 때 성도들의 문제가 말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믿는 자들의 큰 문제 중에 하나가 말에 있습니다만 당시에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에 실수가 없어야 한다. 말을 하되 이중적인 말을 해서는 안 된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같이 나오면 안 된다고 성도들을 교훈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1. 야고보 장로는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2절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했습니다.
인간 중에 온전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면에서 다 실수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정말 온전한 사람,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 전도를 많이 하고 봉사를 많이 하고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일까요?
이런 것도 다 귀중하지만 야고보 장로가 볼 때는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 말에 실수가 적은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말에 실수를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제일 어렵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그 어려운 일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갖춘 자라는 말입니다.


언어는 사람의 마음이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12:34-35) 하셨습니다.
말에 실수가 없으려면 말에 훈련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마음에 선한 것을 쌓아야 합니다.
선한 것을 쌓을 때 선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는 말은 말만 조심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면에서 올바로 살아갈 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온전한 사람이라는 말은 정확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한 인격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말에 실수가 없어야 합니다. 말을 잘 해야 합니다.


2.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말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야고보 장로는 말의 중요성을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하고 있는데요,
타는 말에 물리는 재갈, 큰 배를 움직이는 작은 키, 많은 나무를 태우는 작은 불로 비유합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가 작은 것입니다. 혀도 지체 중에서 아주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것이 끼치는 영향력은 엄청납니다.
힘센 말을 제어하는 역할을 하고, 큰 배를 자기 뜻대로 움직이고, 많은 나무를 태우는 일을 합니다.
어떤 역할은 긍정적이고 좋은 일이지만 삼림을 태우는 것은 아주 부정적인 큰일입니다.
긍정적이 되었든 부정적이 되었던 작은 것이 큰일을 하는 것은 분명한데 우리의 혀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옛 속담에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이와 같은 의미입니다.


미국의 존스 홉킨스 대학병원의 벤 카슨 의사는 신의 손이라는 별명을 가진 외과 의사였습니다.
그는 모든 의사들이 포기한 4살짜리 아이의 악성 뇌종양을 수술해서 살렸고,
세계 최초로 머리와 몸이 붙은 샴쌍둥이를 분리하는데 성공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의사입니다.
그러나 그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습니다.
빈민가에서 태어나 8살 때 부모님이 이혼한 후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집 주변을 배회하며 불량배들과 어울려 싸움을 일삼고 생활했습니다.
학교에서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했고 성적은 늘 꼴찌를 했습니다.
이처럼 힘들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은 그에게 오늘의 당신을 만들어 준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그는 두말하지 않고 나의 어머니 쇼냐 카슨 덕분입니다.
어머니는 내가 늘 꼴찌를 하면서 흑인이라고 따돌림을 당할 때에도 , 너는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봐라. 노력만 하면 너라고 해서 못 할리 있느냐?’ ”고 하며 아들에게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격려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말 한 마디가 세계적인 외과의사 벤 카슨을 만들었습니다.


말 한마디가 온 산을 태우는 것과 같은 엄청난 불행을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말 한 마디가 수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고 큰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혀는 분명 우리 지체 중에서 아주 작은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 영향력은 어느 것 못지않게 큰 줄로 압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혀는 긍정적이고 선하고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말을 해야 합니다.
불행을 가져다주고 피해를 가져다주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노력은 한 입에서 좋은 영향력을 가져다주는 말을 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두 가지가 다 나오는 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3. 그러면 어떻게 생명을 살리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입이 되겠습니까?


1) 먼저는, 신앙적인 말을 하는 입이 되어야 합니다.


야고보 장로는 한 입에서 어떻게 찬송과 저주가 나올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성도의 입에서는 저주는 사라지고 찬송이 나와야 합니다.
신앙적인 말이라고 하면 먼저, 하나님께 대화하는 기도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창조물중에 유일하게 말을 하는 존재가 우리 사람들입니다.
많은 피조물중에 우리에게만 말을 할 수 있는 축복을 주신 것은 하나님과 대화를 하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대화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기뻐하십니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신앙적으로 말을 잘 하는 사람이고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말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들으시고 축복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기도로 대화하는 것이 자녀 된 우리 성도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두 번째로 신앙적인 말은 전도의 말입니다.
전도의 말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말입니다.
이 전도의 말을 하지 않으면 입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에게 말을 주셨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높이는 말입니다.
찬송은 곡조 있는 기도이며 곡조 있는 대화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언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먼저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은 우리의 언어생활에서도 해당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과 대화할 때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2) 두 번째로, 쓴 물을 내지 않고 단물을 내는 입술이 되어야 합니다.


야고보 장로는 어떻게 한 샘에서 단물과 쓴물이 나올 수 있겠느냐? 반문합니다.
쓴물이 나오는 입이 되지 말고 단물이 나오는 입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민수기 14 28절에서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광야에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자를 그 말대로 대해주시고 감사하고 믿음의 말을 하는 자는 그 말대로 대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믿음의 말을 했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불평하고 원망했던 백성들은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말이 어떤 말이냐에 따라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힘을 주기도 하고 힘을 빼기도 하고, 희망을 갖게 하기도 하고 절망하게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긍정적인 말, 격려하고 힘을 주는 말, 살리는 말, 용기를 주는 축복의 말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단물입니다.
그런 말을 자신에게 먼저 하십시오.
절대 자신에게 부정적인 말을 하여 부정적인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할 뿐 아니라 자녀들에게 이웃들에게 교우들에게 어려운 형편에 처한 사람들에게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말 한마디가 한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용기를 줄 수 있습니다. 그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희망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3) 세 번째로, 말을 훈련하는 것으로 여러분의 언어생활을 갈고 닦을 수 있기 바랍니다.


혀는 길들일 수 없다는 말은 정말 맞습니다.
평소에 잘하다가도 기분이 나쁘면 엉뚱한 말을 할 수 있고 술에 취하면 엉뚱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혀를 길들이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길들일 수 없기 때문에 더 부단히 길들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한 입에서 두 가지 말을 하는 여러분의 혀를 한 가지만 말할 수 있는 혀로 길들이시기 바랍니다.
부정적이고 비난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혀를 긍정적이고 칭찬하고 감사하고 축복하는 말을 하도록 훈련하시기 바랍니다.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실수가 많으면 말을 하지 않는 침묵의 훈련을 통하여 길들이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과 대화하는 삶을 훈련하시기 바랍니다.
길들일 수 없는 것이 혀지만 그러나 길들이고 훈련하고 노력할 때 올바른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말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축복받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2024.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