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만나로 만족하는 신앙생활(민11:1-9)

열려라 에바다 2024. 9. 28. 10:03
만나로 만족하는 신앙생활(민11:1-9)
 
권호만barnabak추천 0조회 9524.09.27 12:27댓글 1
 
 
만나로 만족하는 신앙생활
민수기11:4~9


흔히 광야생활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향하여 나아갈 때에 40년간 광야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통하여 가나안땅에 들어갔듯이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고 성도들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광야와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광야생활은 말 그대로 어렵고 힘든, 쉽지 않은 생활입니다.
무엇보다도 말씀대로 살기가 쉽지 않은 삶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의 광야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을 통하여 영적인 교훈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을 반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에는 얼마나 기뻐하고 감사하였습니까?
그런데 광야생활을 오래하다 보니 감격은 사라지고 원망과 불평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인 민수기 11장부터 14장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고 원망하는 일들을 계속해서 보여주는데요,
마지막 14장에 가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이제 믿음으로 들어가면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다, 우리는 그들에 비해 메뚜기같이 보일 정도다.’
지금이라도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는 불신앙과 원망을 늘어놓습니다.
이런 불신앙으로 인하여 넉넉잡아 보름이면 들어갈 가나안 땅을 무려 39년 만에 들어가게 됩니다.
15일이면 끝낼 수 있는 광야생활을 39년 동안 계속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인 민수기 11 1절부터 3절까지는 백성들이 악한 말로 원망하였을 때 여호와의 불이 진영 끝을 사르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일로 인하여 그곳이 다베라 즉 불사름이라고 불려 집니다.
불에 의한 하나님의 진노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4절부터 9절까지는 만나만 먹는 것이 싫증난다 하여 고기를 달라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저희 아이들이 자랄 때 종종 아빠 고기 먹고 싶어요. 고기 사주세요.’ 하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고기가 있으면 잘 먹지만 고기가 없다고 특별히 먹고 싶은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는 거지 고기가 그렇게 먹고 싶을까?’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들은 엄마를 닮아서 저와 취향이 많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입에도 대지 않지만 그 때는 말하지 않고 주면 개고기도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제 생각만 하고 고기를 잘 먹지 않아서 고기를 사달라고 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참 자라나는 아이들인데 왜 고기가 먹고 싶지 않겠습니까?
먹을 것이 지천인데도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한다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한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갈 만 합니다.
먹을 것이 만나밖에 없었던 광야생활에서 다른 것이 왜 생각나지 않겠습니까?


충분히 이해가 될 만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고기를 달랬다는 이유로 큰 진노를 받게 됩니다.
34절에 보면 그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고 했는데 이는 탐욕의 무덤이라는 뜻입니다.
고기가 먹고 싶다는 탐욕을 부리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고기가 먹고 싶다는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바람을 통하여 광야에 있는 메추라기를 몰아 이스라엘 진영으로 보냅니다.
그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하루길 되는 길에 지면 위 두 규빗의 메추라기를 보내셨습니다.
이 메추라기를 보고 고기를 먹고 싶다고 했던 백성들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메추라기를 먹을 뿐 아니라 햇빛에 말려서 다음에 먹을 것을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진노가 임하여 많은 사람이 죽게 됩니다.
왜 고기를 주신 후 백성들을 죽게 하셨을까요?
고기를 달라고 한 것이 그렇게 잘못이었을까요?
여기에는 고기를 달라고 한 것 외에 더 큰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먼저는, 탐욕을 품고 원망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탐욕은 지나치게 탐하는 욕심을 말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함께 살던 다른 인종들이 먼저 품었던 마음인데요,
그들 중에 누군가가 애굽에서 값없이 먹던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생각하면서
그 때는 그런 것들을 마음대로 실컷 먹었지. 그때가 좋았지. 그때가 그립구나.’
그런데 지금은 보기만 해도 지긋지긋한 이 만나밖에 먹을 것이 없지 않는가?’ 불평을 늘어놓습니다.(공동번역)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도 덩달아 맞아. 힘들어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그 때가 좋았어.’ 원망의 대열 속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만나로 만족하지 못하고 탐욕을 품었다는 것입니다.
만나는 광야에서 생명의 양식이었고 하나님의 최고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탐욕을 품었을 때 만나와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애굽 종살이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야고보 장로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15)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악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지나친 욕심, 탐욕을 조심해야 합니다.
탐욕을 품으면 죄도 좋게 보이고 어떤 일도 하게 됩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에 목적을 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가는 나그네입니다.
이 세상은 거쳐 가는 경유지이지이기에 이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겨서 탐욕을 부리면 안 됩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양 이 세상의 것에 목숨을 걸고 그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하나님의 말씀인 만나를 지겨워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구합니다.
이것 말고 이 세상에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 명예도 주시고 물질도 주시고 권세도 주십시오. 우리는 그것이 더 필요합니다.’
그렇게 바라며 구하다가 주시지 않으면 구원해주시고 영원한 나라를 소망으로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스라엘의 아합 왕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긴 악한 왕이기는 했지만 당시 나라는 부강하고 부유했습니다.
이스르엘에 여름 별장도 갖고 있었고 어느 왕보다도 풍성하게 살았습니다.
아합 왕의 여름 별장 옆에 포도원이 있었는데 그것이 갖고 싶었습니다.
그것을 팔던지 아니면 바꾸든지 나에게 달라고 요구합니다.
나봇은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기업이기에 팔수도 없고 대토도 할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결국 나봇을 죽이고 그 포도원을 빼앗게 되는데 이 일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 일국을 다스리는 왕이 그깟 포도원이 뭐가 그리 중요합니까? 포도원이 좋으면 얼마나 좋고 아름다우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그런데 아합은 그 탐욕을 버리지 못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 그 가족이 다 망하는 비극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들이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것들입니까?
지나친 욕심을 조심해야 합니다. 탐욕은 죄를 낳고 죄를 사망을 낳게 됩니다.
가롯 유다는 탐욕을 부리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망하게 됩니다.
우리가 탐욕을 부리지 않아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분명히 공급하여 주시는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둘째는, 애굽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원망을 하고 불평을 해도 해야 할 말이 있고 해서는 안 될 말이 있습니다.
부부싸움을 할 때도 그렇고 자녀들에게 화가 났을 때도 그렇습니다.
부모님에게 왜 나를 낳았습니까?’ 하면 얼마나 대못을 박는 것입니까?
자녀들에게 내가 너를 낳은 것이 최고의 실수였다.’고 한다면 자녀들이 자신감을 갖고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도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을 넘어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내뱉고 말았습니다.
애굽을 그리워하면서 애굽에서 값없이 먹던 여러 가지가 생각난다고 합니다. 그 때가 좋았다고 합니다. 그 때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먹을 것이 만나밖에 없어서 마음이 상했다고 해도 어떻게 애굽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 앞에서
애굽이 더 좋았다고, 애굽이 더 그립다고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애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던 곳이 아닙니까?
아들을 낳으면 나일 강에 집어넣어야 했고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곳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구해달라고 부르짖었던 곳이 아닙니까?
그런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10가지 재앙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셨던 하나님이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와서 광야생활이 힘들다고, 먹을 것이 만나밖에 없다고
그곳에서 살 때가 좋았다.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난다. 그곳이 그립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종살이하면서 강제노동에 시달리면서 다양한 음식을 먹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구원받아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가서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것이 더 좋습니까?
이것은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해서는 안 될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해도 너무 모독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삶이 어렵고 힘들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고 그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가장 행복한 영생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의 것을 충분히 누리지 못한다고 하나님의 구원을 배반하고 원망하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는, 광야에서 베풀어주신 만나의 은혜를 감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6절 말씀을 보면,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합니다.
이들의 표현대로 광야에는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고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과일을 재배할 수도 없는 곳입니다.
그런 광야에서의 삶을 위하여 하나님은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았습니다.
밤에 이슬이 내릴 때에 만나도 함께 내렸습니다.
만나를 거두어서 맷돌에 갈기도 하고 절구에 찢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어먹었습니다.
그 맛은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습니다.
기름 섞은 과자는 맛있는 과자입니다. 광야에서 그런 과자를 먹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된 일입니까?
그 만나를 매일 같이 내려주셨고 장정만 60만 전체로 볼 때는 200만의 사람들을 먹여 살린 것이 만나였습니다.
만나는 광야에서 그들을 살리는 기적의 양식이었고 하나님이 주신 최선이었습니다.
이 만나를 주신 것이 보통 은혜입니까? 놀라운 은혜입니다.
만나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만약 만나도 내려주지 않았다면 그들이 어떻게 살 수 있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를 지금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만나 외에 다른 것이 없다고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구원받은 과거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광야생활을 하는 가운데 200만의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현재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광야생활이 끝나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독립 국가를 이루며 살게 되는 미래의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이런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백성들이 만나밖에 없다고 어떻게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것이 없다고 어떻게 탐욕을 품으며 원망할 수 있습니까?
애굽이 그립다고 애굽이 더 좋았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나는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지켜주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인도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요 보장입니다.
만나로 만족하고 감사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4.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