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프로테스탄트의 뜻?

열려라 에바다 2024. 9. 28. 10:38

프로테스탄트의 뜻?            

마르틴 루터가 활동하던 당시 독일 황제는 카를 5세였다. 프랑스의 프랑소와 1세(Francis Ⅰ)와 스페인의 카를5세(Karl Ⅴ)가 신성로마 황제의 자리를 놓고 대결하다가, 1519년 카를 5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16세 때 스페인의 왕이 되었고, 불과 19세에 신성로마제국 즉, 독일 황제의 자리에 등극한 인물이었다. 그가 황제가 되었을 때 독일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으로 거대한 역사의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는 때였다. 그는 혁신과 개혁의 시대를 이끌고 나갈 만한 역사적 통찰력이나 정치적 리더십이 없어 루터 지지파와 가톨릭교회 지지파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다가 황제의 자리에 대한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퇴위했다. 그 후 수도원에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하다가 생애를 마친 불운한 인물이었다. 

 

카를 5세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곧 보름스에서 제국회의를 소집하고, 1521년에 종교 개혁의 기치를 들었던 루터를 범죄자로 규정, 법적 보호를 박탈하는 칙령을 선포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독일 내 루터의 지지 세력은 늘어만 갔고, 독일의 많은 제후들은 강력한 루터의 지지자가 되었다.

 

원래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카를 5세에게는 이러한 독일 내 문제만이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긴박한 현안들이 많았다. 항상 숙적 관계에 있던 프랑스 문제, 유럽의 문턱까지 밀고 들어오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 가톨릭 교황청의 무거운 압력 등 모든 일들이 부담스럽고 골치 아픈 문제들이었다.

 

1526년 카를 5세는 하이델베르크 근처 고도(古都) 스파이에르(Speyer)에서 제국회의를 소집했다. 당시 대외적인 모든 상황은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위협은 잠을 설치게 했고, 교황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의 압박 또한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제는 독일 내 루터를 지지하는 제후들의 협력과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그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루터의 교회 개혁에 관한 입장은 제후들의 판단과 재량에 맡겼다. 루터 지지파 제후들은 황제의 결정을 그들의 영지에서 ‘루터파 교회’를 세울 수 있다는 것으로 확대 해석했다. 그들은 마침내 승리했다고 생각했고,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루터 지지파 제후들이 승리에 도취하기에는 너무 일렀다. 이로부터 3년이 지난 후 1529년 스파이에르에서 다시 제국회의가 열렸다. 이때는 대외적 상황이 많이 호전되었고 황제는 긴박한 상황은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유약했던 황제는 이러한 상황 변화와 가톨릭측의 압력에 못 이겨 3년 전의 결정을 번복해버리고 말았다. 즉 보름스 칙령을 부활시키고 친가톨릭교회 정책으로 선회한 것이다. 

 

이러한 돌변 상황에 루터 지지파 제후들은 침묵할 수 없었다. 이들은 일치단결해서 황제에게 거세게 항의했다. 

이때부터 루터 지지파들은 ‘항의하는 자’들이라고 알려졌고 그런 뜻으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로 불리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말은 루터 지지파들 뿐 아니라 가톨릭교회와 대비된 개신교 전체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루터 지지파들로 구성된 ‘슈말칼텐 동맹’은 독일 내에서 황제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이들의 단합된 힘에 손을 들고 만 황제는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Peace of Augsburg)를 통해 “제후의 영지 내에서는 제후의 종교를 따른다”는 데 합의했다. 이때부터 루터를 지지하는 제후들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루터파 교회를 세울 수 있게 됐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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