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말씀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

열려라 에바다 2024. 11. 6. 15:32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      


글쓴이/봉민근


복음은 생명이다.
복음만이 살길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복음을 위해서다.
교회의 가장 큰 가치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에 있다.
복음이 아닌 것에 힘을 낭비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복음이 이끌고 가야 한다.

복음이 역사하는 교회가 진짜 교회다.
복음을 전하지 않는 교회는 사탄의 교회요 거짓 교회다.
복음을 설교하지 않는 설교자의 입은 마귀의 입이다.

웅장한 교회, 사람이 많이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으로 승부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지 않는 교회는
목적을 잃은 타락한 교회다.

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지 않는 자는 심판이 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인이라 말하지 말아야 한다.
천국 복음을 전하지 않는 교회는 빈껍데기요 영적인 쓰레기통이다.

피의 복음을 전해야 그리스도인이요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다.
예수를 말하지 않는 자는 결코 예수쟁이가 아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면 하나님 앞에서 모른다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
심령을 찌르는 진짜 복음을 전해야 한다.

피의 복음이 생명을 살린다.
예수외에는 다른 복음이 없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했다.

복음은 우리의 소망이요 자랑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복음을 위해 부름 받은 자다.
복음 전파는 믿는 자가 부득불 해야 할 일임을 명심하고 명심해야 한다.자료/ⓒ창골산 봉서방

속임수와 거짓말        

 

사탄은 항상 물고기가 자주 다니는 곳에 그물을 치고,

새들이 자주 가는 곳에 덫을 놓는다.

만약 당신이 일평생을 올곧게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단 한 잔의 술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갈 수도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탄은 위선적인 거짓말들로 당신을 시험할 수 있다.

반드시 당신의 적이 와서 당신을 공격하거나

중상모략할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

오히려 예상치 못한 당신의 친구가 그렇게 할 수도 있다.

 

- 찰스 스펄전의 [승리가 보장된 싸움] 중에서

 

우리는 너무 많은 속임수와 거짓말에 이용당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정직성에서 멀어지고,

진실함과 담을 쌓게 만듭니다.

그것으로 인해 우리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조차

모르게 만듭니다.

인간은 사람을 속이면 모든 것이 순탄하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오늘도 달콤한 유혹으로 우리를 속입니다.

그래서 분별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인양 착각합니다.

승리의 습관    

 

자신을 정복하는 습관은 승리의 습관이다.

그것은 모든 능력을 강하게 만든다.

강력한 자제력을 길러라.

이 힘이 습관이 되면

처음에는 눈에 잘 안 보이는 실과 같지만

그 행동을 반복할 때마다 한 가닥씩 더해지면서

마침내 굵은 밧줄이 되어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할 것이다.

 

- 정영진의 [사람이 따르는 리더, 행복을 부르는 리더] 중에서

 

우리는 습관에 따라 다른 삶을 삽니다.

신앙도 좋은 습관이 있어야

건강한 믿음이 가능합니다.

내 습관이 모여 삶이 됩니다.

습관이 좋은 사람은

아무도 이길 수 없습니다.

습관이 모여서 인생을 만들어 갑니다.

예수님도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 습관이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다시 십자가     

 

우리가 그분을 거절할 때,

그분은 우리에게 눈물로 대답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아프게 할 때,

그분은 피를 흘려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죽일 때,

그분은 죽음으로써 우리를 대속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땅에 묻을 때

그분은 부활로 다시 일어서십니다. -찰스 스펄전-

 

1. 그분은 죽기 위해 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그분은 시험당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3. 그분은 배신당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의 신실함을 알 수 있습니다.

 

4. 그분은 붙잡혀 묶이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속박에서 풀려날 수 있습니다.

 

5. 그분은 홀로 재판정에 사셨습니다.

그래서 내게는 변론자가 있습니다.

 

6. 그분은 상처 입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치유받을 수 있습니다.

 

7. 그분은 조롱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위엄과 즐거움을 알 수 있습니다.

 

8. 그분은 정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진리가 나를 자유하게 할 수 있습니다.

 

9. 그분은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께 찬양의 면류관을 드립니다.

1

0. 그분은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심판을 면할 수 있습니다.

 

11. 그분은 강도들과 함께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랑의 넓이를 알 수 있습니다.

 

12. 그분은 목마르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생수를 마실 수 있습니다.

 

13. 그분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믿음의 행보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14. 그분은 죽임 당한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의 희생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을 수 있습니다.

 

15. 그분은 아버지에게 버림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결코 거절당하지 않습니다.

 

16. 그분은 연약함으로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영광의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17. 그분은 피 흘리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눈처럼 희어질 수 있습니다.

 

18. 그분은 심장을 찔리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마음은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19. 그분은 죽어 무덤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래서 무덤은 나를 가둘 수 없습니다.

 

20.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21. 그분은 상처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좇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397년 지난 주후 420년까지. 놀랍게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형상화한 미술품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걸 아셨나요? 아마 1세기 크리스찬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것은 역사에 기록된 사건이 아니라 그들에게 실재하는 공포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실제로 자신들의 친구나 가족 중에 십자가에 달려 희생된 아픔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1. 그분은 죽기 위해 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으니라”(신 21:23).

 

“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눅 2:35). 시므온이 나지막한 속삭임처럼 던진 한 마디는 예수님이 겪게 될 일들을 알리는 전주곡이었습니다.

신약에서 십자가 사건은 한정된 표현으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저희가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막 15:24, 마27:35, 눅 23:33, 요1 9:18)라는 식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은 그 숫자도 많을 뿐 아니라 표현도 다양합니다.

 

▣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사 53:3)

 

▣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나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 41:19).

 

▣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슥 11:12).

 

▣ 불의한 증인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힐문하며(시 35:11).

 

▣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 나는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시 22:7).

 

▣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사 50:6).

 

▣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 이니라(사 53:12).

 

▣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시 22:18).

 

▣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시 69:21).

 

▣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시 109:4).

 

▣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시 34:20).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있도다(사 53:9).

다윗 왕과 이사야 선지자가 그에 관한 중요한 메시지를 7백년 내지, 1천 년 앞선 시점에서 예언한 모든 것이 또한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시편 22편을 읽어 보십시오1절은 버림받음, 7-8은 수치, 9-10절은 회고, 19-20절은 소망, 23절은 찬양입니다.

다윗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참예했다는 보다 많은 증거들이 시편 69편에 나타나 있습니다(1-2, 19-21).

 

예수님의 유년시절의 연약함과 그분의 삶의 평범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사 53:2).

이사야는 성령의 능력을 입어 예수님이 이 땅에서 겪으실 일들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사 53:3).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장엄함이 우울하지만 아름답습니다(사 53:4-5).

 

크리스마스에 태어난 죄없는 아기 예수가 왜 질고를 지고, 고난을 당하고, 찔리고, 상하고,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으셔야 하는지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 오직 이 불공평한 맞교환에 의해서만 그분이 우리 죄의 대가를 지불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오직 이 고통에 의해서만 그분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오직 이 상처에 의해서만 그분이 우리에게 나음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같이 이사야도 그분의 영혼이 고난받은 후에 생명의 빛을 보게 될 것을 바라 보았습니다(사 53:11).

예수님은 죽기 위해 나셨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새생명을 얻을 수 있을테니까요.

 

2. 그분은 시험당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마 26:38).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마귀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굳게 잡으셨습니다. 어떤 쾌락도, 권세도, 개인의 영달도 그분에게서 인류 구원의 사명을 떼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또 다른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분의 삶의 목적을 향한 공격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을 십자가 죽음에서 구해주시기를 세 번이나 간절히 구하셨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시옵소서(막 14:36).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고뇌”의 시간이었습니다. 고뇌란 격렬한 싸움을 의미합니다. 그분은 씨름하고, 엄청난 부당함에 몸부림치셨으며, 숨쉴 때마다 고통 가운데 괴로워하셨습니다.

누가는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의 힘을 도왔다고 말합니다(눅22:43).

 

또한 예수님은 고통스러운 번민 때문에 육체적으로 으깨어져, 피를 땀처럼 흘리셨습니다. 일종의 혈한증인데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모세 혈관이 팽창하다 터져서 땀샘을 통해 피가 배출되는 현상으로 보는 겁니다(히

2:18, 4:15).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의 기도는 인간적인 갈망을 안고 싸우십니다. 고통을 피하고 싶은 갈망, 목숨을 부지하고 싶은 갈망, 죽음을 이기고 싶은 갈망입니다. 예수님의 육신과 감정은 깊은 어둠 속에서 홀로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만일 할만하시거든(마 26:39).

 

예수님은 이 싸음을 이길 능력을 어디서 찾으실까요?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시험은 우리 자신, 즉 우리의 권리와 소욕과 필요에 대해서는 “예”라고 하고 하나님께는 “아니오”라고 하고 싶은 갈망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불순종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고통스러운 순종을 택하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예 또는 아니오 두 가지만 있을 따름입니다.

예수님은 혼자서 고독한 싸움을 벌이셨지만 우리가 시험을 당하는 그 때 그 자리에 계십니다(히 2:18). 예수님은 우리에게 순종할 수 있는 의지 뿐만 아니라 시험을 이길 능력을 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피흘리기까디 죄와 대항해야 합니다(히 12:4).

 

3. 그분은 배신당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의 신실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있느니라”(마 26:46).

그분이 밤새워 기도하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 곁을 지키기 보다 따로 떨어져 졸았습니다. 베드로는 신의를 버린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가롯 유다는 입맞춤으로 배신을 확인시켰습니다(마 26:47-50).

 

마지막 만찬 때에 귀한 손님들이 앉는 예수님의 오른편 자리에 요한이 앉았던 반면에, 유다는 예수님의 왼편에 앉았습니다. 그 자리는 당시에 친밀한 벗에게 주는 자리로 인식되어 있었습니다.

나의 신뢰하는 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 41:9).

 

가롯 유다는 돈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마 26:15). 그리고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가롯 유다의 슬픈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을 거절하는 모든 이들을 향한 경고가 될 수 있습니다.

거절은 혼란으로, 배신으로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의 친구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고의는 아니었다고 해도 예수님에 대한 그의 배신은 더 가슴이 아픕니다. 베드로는 처음부터 믿음의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가장 먼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인정했던 제자입니다. 믿음으로 요둉치는 바다 위를 걸았습니다.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눅 22:33)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려 왔을 때 칼을 빼 휘둘렀던 이도 베드로였습니다(요18:10).

 

그러던 그에게 두려움과 의심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혀 끌려 가시자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따라갑니다. 무리들 틈에 숨어서 주님을 모른다는 표정입니다.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사슬에 묶에 반대편에 계시던 예수님이 고개를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십니다. 그분의 온화한 표정이 베드로의 마음을 부서뜨립니다. 베드로는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어 통곡하며 밖으로 뛰쳐나갑니다(눅 22:61).

 

다행스럽게도 베드로의 이야기는 자살로 끝나지 않습니다. 부활절 아침 예수님의 무덤에 달려갔습니다(눅 24:12). 도마에게 보이신 다락방에도 그가 있습니다(요 20:26).

그러나 변덕스러운 베드로는 신실하신 주님과 개인적인 만남을 가져야 했습니다. 베드로가 다른 여섯 명의 제자들과 고향으로 돌아가 고기를 잡던 때 일어납니다. 실제로 그날 두 번째 잡힌 건 고기가 아니라 베드로입니다. 다시 베드로는 예수님의 초대를 새롭게 받습니다. 주님의 용서와 감싸주심으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가록 유다는 용서를 거절하고 절망에 빠져 죽음을 택했습니다. 베드로는 은혜와 생명을 선택했습니다.

 

4. 그분은 붙잡혀 묶이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속박에서 풀려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막 14:46).

예수님을 잡으러 온 병사들은 로마군단 소속이었고, 숫자도 200명에 가까웠습니다. 그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성전의 하속들도 함께 왔습니다. 그들 모두가 몽둥이와 검으로 무장을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 겁니다. 내가 사로잡힌 것은 그래야 너희들이 자유로와질 수 있기 때문이다.

 

5. 그분은 홀로 재판정에 서셨습니다.

그래서 내게는 변론자가 있습니다.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눅 23:1).

무리가 붙잡하신 예수님은 급하게 소직된 유대인 지도자들의 공회 앞으로 끌려 갑니다. 산헤드린의 대제사장 가야바가 재판을 주관합니다(요 18:24).

 

그분을 적대시하던 종교지도자들이 원하는 것은 예수님이 스스로를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유대인의 율법에 따라 사형에 처해지는 이단적 발언이기 때문입니다(눅2 2:71).

다음 단계는 로마의 통치자, 본디오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보내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궁에 들어감으로써 자신들이 부정해질 것을 염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빌라도가 그들에게로 나아옵니다. 유대인들은 궁전 계단에 예수님을 세워 놓고 고소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님에게서 죄 될 내용을 찾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빌라도는 이 사건을 헤롯 왕에게 가져가 보라고 말합니다.

헤롯은 예수님에게서 이적을 바라고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눅 23:8).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자 헤롯과 그의 병사들은 예수님을 업신여기며 희롱합니다. 왕차럼 보이게 하려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다시 보내버립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운명을 결정지어야 할 처지에 놓이고 말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재판을 진행시킬 정식 권한이 있던 사람은 사법권을 가진 총독뿐이었습니다. 성경 곳곳에서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발견하지 못햇다는 내용을 기록합니다. 심지어 빌라도의 아내인 클라우디아 프로 큘라 역시 예수님에 대한 꿈을 꾸고 나서 남편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고 합니다.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마 27:19).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은 변화를 겪고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주전 30년과 주후 14년 사이, 옥타비아누스가 다스리던 기간에 로마 공화국은 제국으로 변모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질서 아래에서 다양한 부류를 구성하고 있던 지도자들은 권력을 쟁탈하고 지키기 위해 서로 싸움을 벌어야 했습니다.

빌라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유력한 상원이었던 루시우스 아우렐리우스 세자누스를 등에 업고 통치권을 하사받은 처지였습니다. 당시 세자누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뒤를 이은 황제 티베리우스의 집정관으로서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자누스는 유대인에 대한 유별난 증오심을 가진 인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사실상 주후 19년에 세자누스는 티베리우스를 설득해 모든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좇아내기 까지 했습니다. 빌라도 역시 팔레스킨 지역민들을 공개적으로 경멸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수도시설을 설치하기 위해 성전 금고에서 돈을 빼냈고, 그것 때문에 예루살렘에 소요가 일어났습니다.

 

또 다른 사건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빌라도가 성전 바깥에 군사깃발을 세워두도록 했습니다. 이 상징적인 깃발에는 대새는 황제의 상반신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군사 훈련 중에는 향을 피웠습니다. 당연히 유대인들은 그것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성전 가까이에 그것들을 배치한 결과 가이사랴 지역내 원형 경기장에서 유대인 폭도와 로마인들간에 충돌이 빚어졌습니다. 이 사건에서 빌라도는 한 발 물러섰고 군사깃발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려야 했습니다.

 

빌라도는 그밖에도 이교들이 제사 때 사용하는 막대기인 리터스와 국자의 일종인 심플럼이 새겨진 주화를 발행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하기 위해 궁정 계단에 나서기 직전에 그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잇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후 31년 빌라도의 우원자였던 새나누스가 거짓말쟁이로 몰린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추방해야 한다는 그의 고소가 근거없는 주장이라는 것이 판명났습니다. 그해 10월 18일 황제 티베리우스는 세자누스를 처형했습니다. 그런 후에 유대인들을 향항 모든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세자누스가 임명한 사람들의 관직도 취소하는 명을 내렸습니다. 빌라도는 자신도 그 조치에서 예외가 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한 재판을 맡았을 때 자신이 계속해서 권력을 잡으려던 티베리우스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입증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군중 중에 누군가가 예수를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다“(요 19:12)는 표현은 빌라도가 정치적으로 위기상황에 몰려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예수님을 옹호하려는 입장을 포기하고 맙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을 잔인하게 대한 책임으로 주후 37년에 관직을 박탈당하고 말았습니다. 내려오는 전승에 의하면 그의 아내는 신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6. 그분은 상처 입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치유받을 수 있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니라"(요 19:1.

마태와 마가는 이 장면 후에 바로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주니라(마 27:26, 막 15:15)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채찍에 맞으시는 장면은 구약에도 예언되어 있습니다(시 38:7, 사 50:6)

 

7. 그분은 조롱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위엄과 즐거움을 알 수 있습니다.

 

8. 그분은 정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진리가 나를 자유하게 할 수 있습니다.

 

9. 그분은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께 찬양의 면류관을 드립니다.

10. 그분은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심판을 면할 수 있습니다.

 

11. 그분은 강도들과 함께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랑의 넓이를 알 수 있습니다.

 

12. 그분은 목마르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생수를 마실 수 있습니다.

 

13. 그분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믿음의 행보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14. 그분은 죽임 당한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의 희생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을 수 있습니다.

 

15. 그분은 아버지에게 버림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결코 거절당하지 않습니다.

 

16. 그분은 연약함으로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영광의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17. 그분은 피 흘리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눈처럼 희어질 수 있습니다.

 

18. 그분은 심장을 찔리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마음은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19. 그분은 죽어 무덤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래서 무덤은 나를 가둘 수 없습니다.

 

20.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21. 그분은 상처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좇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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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하는 사랑  (0) 2024.10.26
나이 들어 가면서의 생각  (0) 2024.10.12
성도는 기도로 만들어진다  (0) 2024.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