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예배에 대하여
1. 고대 교회와 예배의 질서에 대하여
니케아 이전 고대 교회는 환영받지 못한 종교였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드러내기 힘든 환경이었다. 당시의 여러 가지 정황들을 오늘날과 비교해가며 살펴보면 더 유익이 있을 것이다.
(1) 예배처소 :
2세기 말까지는 대부분 개인 집이나 광야, 순교자 묘지, 카타콤 토굴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탄압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 통상적으로 신전이 가지는 이교적 형상들이나 장식들에 대한 거부감도 한 몫 했다. 장소에 대한 제한도 없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디든 편리하다고 생각되면 그곳에 모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하나님은 이교의 신과 달라서 공간에 갇히는 법이 없고 어디든 비가시적으로 임하시기 때문이다”라고 변호했다. 예배처소는 특별한 장식이 없고 설교단과 성찬용 탁자만 있을 뿐 다른 장식이나 기물들이 없는 소박한 형태였다. 그러다가 3세기 중반 평화의 시기를 맞아 교인수가 증가하고 교회건축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더불어 기독교는 웅장한 교회당을 세우게 된다.
(2) 주일에 대하여 :
교회 역사적으로 보면 유대인의 안식일에서 주일로 변화된 계기들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존재한다. 사도시대부터 주일에 예배로 모였음을 확실하다. 이후의 기록들에도 여러 교부들에 의해서 주간의 첫날로서 ‘주일’은 교회 내에 준수되도록 가르쳐졌다. 다만 당시 교우들 중 다수는 이교도 주인을 섬기는 노예들이었는데 이들이 정해진 날에 매번 참여하기 어려웠던 만큼 이 날에 대한 강제성은 그다지 엄하지 않았다. 또한 율법주의적 배경의 유대교 안식일과 주일의 구별성을 강조했던 터툴리안과 같은 교구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주일에 세속적 행위들을 금했다. 예컨대 연극이나 유흥을 즐기는 행위에 대해 단호했고 새벽부터 기도와 찬송과 성찬으로 보내도록 가르쳤다.
(3) 공예배에 대하여 :
기독교 예배에 대한 최초의 세속사적 기록은 109년 로마 관리에 의해 주일 예배 순서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140년경 유스티누스의 변증서에 기술되었다. “일요일에 한 자리에 모여 시간이 허락하는 한 복음서와 구약성경을 낭독한다. 사회자가 설교를 하고 끝나면 모두 공동 기도를 드린다. 그후 떡과 포도주에 대한 기도와 감사로서 성찬을 집행한다. 예배에 참석하지 못한 교인들에게는 집사들이 전달한다. 그 후 자유로운 의사로 헌금하여 고아와 과부들 가난한 자와 옥에 갇힌 자 나그네를 보살핀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배시에 성경낭독과 설교, 기도, 찬송 등이 포함되었다. 특히 찬송은 유대인들의 회당 모임에서 사용되었던 시편송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시편송에 대한 고대교회의 전통은 종교개혁가들에 의해서 공예배를 위한 영감된 찬송으로 다시 재현되었다.
* 오늘날 교회에서 사용하는 공예배시에 사용되는 찬송가들 중에 과연 공예배 찬송가로 적절한가? 하는 논란의 소지가 많다.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4) 공예배 참석 내규의 핵심은 세례와 성찬이었다.
누가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가에 따라서 예비자들, 정회원으로 구분되었다. 니케아 이전 시기는 ‘비밀 내규’(the secret discipline)로 불리며 이교들과의 혼합의 위험에서 교회의 거룩을 지키려는 노력이 있었다. 초기에는 성찬과 함께 애찬(love feast)도 있었다. 2세기 초에 성찬은 아침에 애찬은 저녁에 시행했다. 그러나 교회가 성장하고 부패한 사례들이 생기면서 점차 애찬은 중단되었고 4세기에는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따라서 애찬은 초기에만 존재했던 일종의 가족 잔치였다.
(5) 세례에 대한 규칙에도 여러 형태의 기록들이 있다.
어떤 기록에는 “흐르는 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만약 흐르는 물을 구할 수 없으면 다른 물로, 차가운 물이 없다면 따뜻한 물로 주라. 둘 다 없다면 머리에 세 번 물을 부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연합시키라” 초기에는 침수가 일반적이었다. 목회자가 기도하고 남녀 집사들이 보조하여 세 번의 침수로 삼위일체를 상징하기도 했다. 물이 없는 경우에는 물을 붓거나 뿌리기도 했다. 이런 경우는 ‘병상세례’(clinical)라고 불렀다. 어떤 규정에는 병상세례를 받은 자는 성직에 임명받지 못한다고 못 박았다. 이렇게 아직 정리되지 않은 규정들은 때로는 과도하게 엄격했거나 지나치게 의식적으로 흐르기도 했다. 예컨대 세례 받는 자가 그리스도의 군사가 된다는 의미로 이마와 가슴에 십자가 성호를 긋는 행위, 천국의 자녀가 되었다는 표시로 우유와 꿀(소금)을 주며, 머리에 기름을 붓고 촛불을 들게 하고 흰옷을 입히는 행위들이 있었다.
(6) 교리문답 교육은 세례 예비 제도로서 초기 교회에 대단히 중요한 제도였다.
이 유례는 사도시대로 올라간다. 눅 1:4, 행 18:25에서 데오빌로와 아볼로는 세례 전에 교리 교육을 받았다. 교회에 가입하고자 하는 자는 세례 받기 전에 교리문답 교육을 받아야 했다. 이 역할을 대게 장로들과 집사들이 맡았다. 이 교육은 첫째는 교회의 성결을 위한 것이었고 둘째는 세상과 교회를 잇는 다리였다. 왜냐하면 초신자들이나 예비자들로 하여금 교회에 가입하기 전에 미리 기독교 교리를 문답의 형태로 쉽게 접근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 기간은 2년, 3년으로 고정되었으나 상황에 따라 단축될 수 있었다.
니케아 이전의 고대 교회는 초기의 순수성이 남아있으나 충분히 정리되지 않은 규범들이나 질서가 혼재되어 있다. 때로는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도 있고 더 공고히 형성되는 것도 있었다. 이 시기의 기록들이 충분히 소개되지 않고 있다. 또 그에 따라 어떤 기준으로 선별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중요한 주제다. 분명히 소중한 교회의 유산이지만 무엇을 우리 교회의 전통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 기독교회가 간직하고 유지해 온 큰 틀에서 살피되 언제나 성경 말씀을 토대로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이 필요하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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