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의 신학적의미
공진수 목사(온누리 교회)
1. 성탄절의 신학적 의미
성탄절의 신학은 예수가 그리스도시요 주님이라는 이해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놀라움이다. 크리스마스 기간을 통해 치루어지는 모든 의식과 예배는 그의 생애와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과 연관되어야 한다. 즉 성육신은 부활신비의 축이며 부활절 주기와 연결선 상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크리스마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류에게 절망에서 소망을, 어두움에서 광명을, 신음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함을 가져다주는 날이며, 현대 사회에 하나님의 궁극적 샬롬(God's final Shalom)인 공의와 평화, 의로움과 화해를 필요로 하며, 기대하게 한다.
먼저, 성육신 사건은 무엇보다도 구원의 사건이다. 성서의 중심적 주제는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다. 성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계에 찾아 오신 사건 곧 성육신의 사건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심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고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신성과 참 인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많은 논쟁을 벌였다. 주후 451년에 있었던 칼케돈 회의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임을 선언함으로써 복잡한 신학적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 아니었더라면 인간은 그에 의한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예수는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었다는 주장은 고대 교회에서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여졌으며, 이는 성경의 주장에 합당한 결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참 하나님이 참 인간 안에서 나타난 성육신의 사건은 기독교 신앙의 구원론에 확고한 기초를 마련해주게 된다.
다음으로,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 이해에 있어서 결정적 단서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하나님 이해의 차원을 가진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과 목적에 대해서 결정적인 내용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결정적인 모습이 나타나는 곳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말씀하셨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본체의 형성'(히 1:3)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기초할 때 하나님의 성품은 예수 그리스도 같은 분이다. 성육신 사건을 통해서 볼 때 우리가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본성은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리의 하나님이 그저 개념이나 원리로서 존재하는 타자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격으로 오시는 분임을 말한다. 둘째, 하나님의 존재가 인격적이기에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행동하시는 분이시다. 즉, 하나님의 존재는 피조물을 향한 구체적 행위(찾아오시는 행위)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또, 크리스마스는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희생적 사건이 일어난 날이다. 온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사건을 축하하고 기뻐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있다. 인간이 알지도 못하고, 기대하지도 않았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성육신을 통한 인류 구원 계획을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하신 것이다.
그러나 반면 이 크리스마스 사건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매우 고통스러운 사건이다. 실제 크리스마스 사건은 하나님의 아픔의 시작을 의미하는 사건이다. 이 사건이 아픔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고마움이 될 수 없는 사건이다. 우리가 당해야 할 고통을 하나님이 대신 지셨기에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고통의 사건이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 지극히 낮은 자리까지 내려오시기까지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사건은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담고 있는 사건이다.
마지막으로 성탄은 역사의 방향을 완전히 전화시키는 사건이다. 멸망 받을 인간이 절망 속에서 살고 흑암 중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 역사 속에 뛰어내리신 사건은 그 멸망의 역사의 맥을 끊고 이제희망의 세계를 열어주고 방향을 바꾸어 광명의 세계로 문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류 역사의 기원이 바뀌어 주님의 연대(Anno Dominie)가 되었다.
2. 크리스마스 절기의 예배들
크리스마스를 중심으로 하여 몇 개의 중요한 작은 경축일들이 집결되어 있다. 곧 순교자 스데반 기념일(Stephen the first martyr, 12월 26일), 사도이며 복음서 기자인 성 요한 기념일(John the Apostle and Evangelist of Christ, 12월27일), 영아 기념절(the children whom Herod slew in Bethlehem, 12월28일), 크리스마스 후 제 8일은 예수의 할례일(Christmas Octave, 1월1일)이다. 많은 루터교 예배의식에서 이중 처음 두 경축일은 둘째와 셋째 크리스마스일로 대치되었으며 할례일은 일반적인 경축일인 신년으로 대치되었다. 그러나 근년에 유럽과 미국에서는 루터교 예배의식이 옛날부터 역사적으로 지켜지던 그리스도교 의식을 회복시켰다.
5세기까지 크리스마스에 로마에서 예배가 한 번 밖에 없었다. 로마 가톨릭의 전통에 따르면 모든 사제들은 크리스마스에 3번의 미사를 반드시 드리게 되어있었는데, 자정미사(Missa in nocte), 새벽미사(Missa inaurora), 그리고 오전 미사(Missa in die) 등이 그것이다. 그 의미는 첫째는 아버지에게서 아들의 영원한 탄생의 기념, 둘째는 세상에서 그의 성육신과 탄생 기념이며, 셋째는 은총에 의하여 우리의 마음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그의 탄생의 기념이다.
첫째 예배는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인 헬런(Helen)이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말구유의 일부를 모셨다고 하는 성 마리아 대성당에서 밤중에 행해진다. "오로라 미사"(Aurora Mass)"라고 불리는 둘째 예배는 성 아나스타시아 성당에서 미명에 행해진다. 이것은 특벽 기도문, 묵송, 성만찬 분배 이후의 기도문에서 성 아나스타시아(St. Anastasia)를 기념한다. 이러한 성소 교회 예배와 기념식은 4세기 이전에 12월 15일이 성 아나스타시아 기념일이었음을 말해준다고 학자들은 믿는다. 셋째 예배는 성 마리아 대성당에서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행해진다.
1) 첫째 예배
모든 특정 예식문은 로마교회의 것과 동일하며 옛날에 된 것이다. 디도서 2장에 있는 서간문은 주님의 첫째와 둘째 강림에 대한 생각을 결합시키고 있다. 누가복음 2장에 있는 복음서는 출생에 대한 이야기이며 특히 밤중 예배에 적합하다. 이것은 매 주일 예배 처음에 불리우는 대예배 찬송인 '영광의 송가'(Gloria in excelsis)가 주는 감명이다. 특별히 기도문은 고대 겔라시우스 예전서의 것으로 "참 빛"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 크리스마스가 대치한 태양신에 대한 로마 이교 축제를 회상시켜준다.
2) 둘째 예배
크리스마스의 마지막 예배는 서술적인 것이 적고 신학적인 것이 많다. 특정 예식문은 다 전통적인 셋째 예배를 위한 것이며, 교독문은 성육의 신학적 의의를 전달해 준다.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품격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것이다. 복음서인 요한 1:1-14은 소위 "마지막 복음서"로서 로마교회에서 실제로 축제마다 예배 마지막에 읽힌다. 이 복음서가 크리스마스 날에 사용되던 때에는 크리스마스가 교회력의 시작이었다. "이 절기는 복음서 초두에 있는 '태초에'라는 말로 늘 감명을 주었다.
3. 크리스마스 설교
크리스마스에 관한 설교는 크리스마스 전날, 크리스마스 당일, 크리스마스 지난 후 첫 주일 그리고 주현절에 행해지게 된다. 이 때 설교자는 말씀선포 이상의 것을 고려해야 하는데, 크리스마스가 전통적으로 가족 중심으로 모여 선물을 나누는 날이기 때문이다. 먼저, 설교자는 크리스마스가 얼마나 세속화되었으며 상업화되었는지 인식해야 한다.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분(giver)이심을 잊어서는 안된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모방하여 가족과 이웃간에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주는 행위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는 받는 자(receivers)들이고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잊어서는 안된다. 받는 존재는 약하며, 종속적인 존재이다. 우리 모두는 연약하며 우리 자신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한다. 비록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말씀이 우리가 준행해야 할 말씀이기도 하지만, 우리자신들은 어느새 주는 데 익숙하여 하나님의 거대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 크리스마스 후 주일은 일반적으로 교회력과 세속달력과 상충됨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설교자는 년말과 새해에 대한 말씀과 크리스마스의 예전적 관점에 대한 방향을 선택함에 있어 혼란과 갈등을 겪을 수 있다. 설교자는 이 두 부분을 효과적으로 조화시키는 설교를 준비해야 한다.
셋째, 크리스마스 전야 및 크리스마스 당일에 관계된 본문들은 탄생에 대한 설화체로 되어있다.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에 대한 선포가 내재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놀라움과 감사가 함축되어 있다. 설교는 성금요일(Good Friday)의 서곡이라 할 수 있는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명확한 선포가 되어야 한다.
넷째, 설교자는 크리스마스와 관계된 부수절기(sub-season)들과 크리스마스를 구별해 주어야한다. 대림절은 대림절 나름대로의, 주현절은 주현절 나름대로의 신학적 의의와 내용을 가진다. 설교자는 이를 회중에게 교육하며 이를 크리스마스와 구분하는 교육적 접근을 시도해야 한다. 다섯째, 동방박사에 대한 말씀은 세계 선교 및 교회의 보편성 관점에서 선포될 수 있다. 동방박사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구약의 아브라함에게 이미 말씀하신 모든 인류에 대한 구원의 언약을 성취하시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설교자는 교회 안에서 드리는 주일 아침의 예배를 넘어서 교회의 광야 같은 삶에 대한 강조를 할 필요가 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교황들이 매년 크리스마스 때에 보편적인 관심사에 대해 전세계를 향해 연설하는 것이 통례가 되었다. 이와 같은 연례적인 연설이 바로 교황의 크리스마스 메시지다. 현재의 크리스마스 메시지는 전 교회사를 통해 교황들에 의해 이어져 내려온 예수강탄 설교(Nativity sermon)가 발전된 것이다.
이러한 정통은 초기의 기독교에서부터 시작된 것인데, 당시 크리스마스가 되면 로마의 성직자들이 모두 모여 교황에게 인사를 하곤 하였다. 이 때 성직자들의 인사에 답하여 교황은 크리스마스 축제에 알맞는 몇 마디의 말을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단순한 형태가 점차 발전되어 교황의 가장 중요한 연례적인 설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현대에 와서, 교황의 크리스마스 메시지는 교황의 설교로서 가지는 고매함을 잃음이 없이 원래 가졌던 답례로서의 성격을 회복하였다. 교황 피우스 12세(1939-58)의 재임기간 중, 교황의 크리스마스 메시지는 오늘날 보는 것과 같은 세계적인 관심과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피우스 12세의 메시지들은 심오한 내용을 담은 것들로서 근본적인 세계문제들에 대한 시기 적절한 논평들이었다.
그 메시지들에는 전쟁과 평화, 민주주의, 인간의 권리, 세계질서의 토대, 진리와 정의에 연관하여 본 크리스찬의 임무, 영적인 중생의 필요성, 기술과 진정한 인류의 진보와의 관계 등의 주제가 포함되어 있다. 이 메시지들은 아직도 신학적으로 추기경단에 대한 교황의 답례라는 성격을 유지하고 있지만 명백히 전 인류를 향해 의도된 것임에 틀림없다. 어떤 때는 "모든 사람들에게"라고 명백하게 밝히기도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라디오를 통해 방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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