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64:1)하나님이여, 나의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64편 1절.
64편.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1절: 하나님이여 나의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64편,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64편은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쓴 시다. 다윗이 시를 읆었지만 이 속에 우리에게 주시는 신앙도리가 들어있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 수 있는 도리가 들어있다.
1절: ‘하나님이여, 나의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다윗이 무슨 근심이냐? 뒤에 뭐라고 하느냐?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그러니까 생명 때문에 근심을 하면서 기도를 하고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 기도를 하는 건데, 그렇다면 성령에 감동이 되어서 기도를 하는 다윗이 성령에 감동이 안 된 일반 세상사람들처럼 자기의 육신이 어려움에 처해져서 이 육신의 생명을 살려달라고 기도를 하겠느냐?
우리는 여기서 ‘생명’에 대해 생각을 해 봐야 한다. 첫째는 밥 먹고 사는, 코로 숨을 쉬는 육에 속한 생명이 있다. 육에 속한 이 생명은 짐승에게도 있다. 식물에게도 생명이 있는데, 모든 생명이 다 신비롭지만 특별히 식물의 생명은 더 신비롭다. 식물도 사람이나 짐승들처럼 허파가 있어서 숨을 쉬느라고 나뭇잎이 볼록볼록하느냐? 이런 것은 없을지라도 분명히 생명을 가지고 있다. 너무나도 신비롭다.
하나님의 창조물들을 보면 모든 것이 신비롭다. 그래서 일반사람들의 타락된 머리로는 근접을 하지 못한다. 안 믿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고 느끼는 즉흥적인 것만 인정을 하고 알 뿐이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는 못 들어간다. 그러니 사람이 얼마나 타락이 된 것인지 알 수 있다.
일반적인 사람은 자연생명, 즉 육의 생명이 있다. 이 생명은 사람이 건강하던 병이 들었던, 미련하던 지혜롭던, 귀신이 들렸던 안 들렸던 죽기 전까지 기본적으로 다 가지고 있다. 식물인간도 생명을 가지고 있고, 영리하고 똑똑한 사람도 생명을 가지고 있고 미련한 사람도 가지고 있다. 정말 신비롭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 자기를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생명을 만드셨다. 귀신은 생명을 만들 수 없는 거다. 절간의 부처는 생명을 만들 수 없는 거다.
자기가 스스로 숨을 안 쉬고 있으면 살만하냐? 답답해서 못 산다. 폐가 오므라졌다 펴졌다 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는 거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네가 스스로 숨을 안 쉬려고 해 봐라. 네가 고통이고 네가 죽는다.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따라야 자기가 산다.
우리는 자연생명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 자기의 자연생명이 죽게 되면 예수를 믿을 수도 없고, 활동을 할 수도 없고, 공동묘지로 그대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육신의 생명을 함부로 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생명 자체가 중요하고 귀하기 때문에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어서 몸을 튼튼하게 해야 한다. 밥을 며칠 굶으면 자연생명이 편히 쉬어지느냐, 힘이 드느냐? 힘이 든다. 그래서 육신생명이 살아있는 동안에 지혜를 써서 자기의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 줘야 한다. 뿐만 아니라 성장적인 면에서도 몸이 온전하게 자랄 수 있으려면 몸을 건강하게 해 주어야 한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된 영의 생명이 있는데,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영이 죽어있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던 영이 살아났다. 중생이 됐다. 성경 외에 유교나 불교나 이방 신을 믿는 종교에서는 사람이 영과 육의 결합체로 만들어졌다는 것과, 아담 타락 이후로 영이 죽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래서 종교적인 면에서도 가치를 알아야 한다. 기독교와, 다른 모든 이종교는 천지차이로 질이 다른 거다.
절의 중을 누가 만들었느냐? 석가가 만들었느냐? 하나님이 만들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피를 뭉쳐서 어머니 태를 빌려서 하나님께서 만드셨다. 엄마 아빠가 만든 게 아니다. 엄마 아빠가 만드는 것이라면 엄마 아빠가 ‘아들을 만듭시다’ 하면 아들이 나오고, ‘딸을 만듭시다’ 하면 딸이 나와야 하는 건데 왜 엄마 아빠의 마음대로 안 되는 거냐?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영육 결합체로 만들어졌는데, 첫째는 자연생명이 있는데, 이 자연생명은 건강을 돌보는 사람의 생명과, 안 돌보는 사람의 생명이 숨 쉬는 것에서 큰 차이가 난다. 약한 생명이 있고, 건강한 생명이 있다는 말이다.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된 영의 생명이 있는데,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이 영이 있다. 이 영을 ‘중생된 생명’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은 자연생명 하나만 가지고 있고, 예수를 믿는 사람은 자연생명과 영의 생명 두 가지 생명을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된 영의 생명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 속에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서 비록 개떡 같이 예수를 믿는 사람일지라도 이 생명이 다 들어있다. 이게 있어야 죽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거다. 이 생명은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 것이요, 하나님의 생명이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는 게 얼마나 좋으냐? 얼마나 긍지가 있느냐? 이런 인간의 가치를 한 번 생각해 봐라.
중생된 생명은 누가 가지고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다 가지고 있다. 이건 기독교 일반이다. 교회가 이런 정도는 다 알고 있어야 하는데, 이걸 모르면 어떤 말을 하게 되느냐? ‘열심히 믿어라. 그래야 천국에 들어간다’ 라는 말을 하게 된다. 이러면 천국에 들어가려면 허리가 휘도록 충성봉사를 해야 하고 돈을 바치고 해야 된다는 식으로 나가게 된다. 이건 사기다.
성경은 예수 믿는 사람은 영이 중생을 해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죽어도 천국에 간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믿으라는 게 아니다. 학교에 들어갔으면 그날부터 놀아도 되는 거냐? 공부를 못하면 얻어맞기도 하고, 벌도 서고, 화장실 청소를 하는 것처럼 예수 믿는 그날로부터 신앙이 성장을 하지 않으면 얻어맞게 된다. 그래서 예수 믿는 우리는 말씀 깨달음에 성장을 해야 한다. 지식에 성장을 해야 한다. 도덕성에 성장을 해야 한다. 그래서 선의 사람이 되고, 사랑의 사람이 되고, 진실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영이 중생된 성도는 영적 신앙 사상적으로 깨닫고 올라가야 하고, 매사를 영 주격으로 살아야 한다. 이런 사람은 세상만사가 아무리 어려워도, 자기의 육신의 목숨을 죽인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중생된 영의 생명 속에는 영적인 기능과 지능 면이 들어있다. 성도는 말씀을 따라 살면서 이걸 성장시켜야 한다. 이게 참 신비스럽다. 이런 사실을 성경만이 가르쳐 준다.
예수 믿는 사람은 밥 먹고 사는 육신의 생명과, 영적 신앙생명이 있는데, 두 가지 생명 중에 어느 생명이 자기의 주된 생명이냐? 밥 먹는 생명과 중생된 생명이 있는데,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이 두 생명 중에 어느 생명을 자기의 주된 생명으로 삼고 살아야 하느냐? 영의 생명이다. 왜 그래야 하느냐? 영의 생명은 죽음 저 너머 하늘나라에까지 들어가는 생명이고, 밥 먹고 사는 육신의 생명은 육신이 죽을 때 같이 죽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밥 먹고 사는 육신의 생명은 영적 생명에 소유적 활용적 생명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몸과 몸에 달린 육신의 생명은 영의 생명에 이용물 사용물 활용물이다. 이렇게 사는 게 옳은 거고, 참 인간으로 사는 거다. 그렇다면 우리교회 교인들은 자기가 어느 생명에 대해 염려하고 걱정을 하며 살아야 되겠느냐? 영의 생명이다.
육신에 위기가 왔을 때 기도를 한다면 안 믿는 사람은 어느 생명을 살려달라고 기도를 하겠느냐? 육신의 생명이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은 어느 생명을 살려달라고 기도를 하겠느냐? 영의 생명이다. 만일 예수 믿는 사람의 기도가 안 믿는 사람과 똑같다면 믿는다고 하는 가치가 뭐냐? 깨닫는다고 하는 가치가 뭐냐? 다윗은 자기의 육신이 위기에 처해졌을 때 어느 생명을 위해 기도를 하느냐? 영의 생명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몸이 아프다든지, 물에 빠졌다든지, 죽어가는 상태가 된다면 어느 생명을 살려달라고 기도를 해야 되겠느냐? 영의 생명이다.
안 믿는 사람이 물에 빠지면 뭐라고 부르짖느냐? ‘사람 살려라’ 라고 하면서 육신의 생명을 살려달라고 한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도 같이 물에 빠졌다면 살려달라고 안 하느냐? 살려달라고 한다. 그러니까 누가 들을 때는 똑같이 들리겠지만 예수 믿는 사람이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것은 안 믿는 사람의 양심과는 전혀 다른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은 뭘 의식해서 살려달라고 하는 거냐? ‘내가 죽으면 밥을 못 먹으니 살려주십시오’ 라고 하면서 살려달라는 거냐, 아니면 ‘하나님, 내가 영의 성장을 위해 살아야 되겠습니다. 이 생명을 생각하사 나를 달려주십시오’ 라고 하면서 살려달라는 거냐? 후자다. 이렇게 다르다. 이게 성령에 감동된 기도다. 안 믿는 사람과는 천지차이다.
안 믿는 사람들은 고생고생을 하며 살면 빨리 죽고 싶다고 한다. 이것은 뭐가 피곤하고 고달퍼서 그러는 거냐? 육신이다. 그러다가 돈 보따리가 생기면 빨리 죽고 싶다고 하느냐, 이 상태로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하느냐? 후자다. 그러면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몸에 붙어서 나오는 거냐, 영에 붙어서 나오는 거냐? 몸에 붙어서 나오는 거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도 똑같이 그런다면 이 사람은 안 믿는 사람의 정신과 똑같은 거다.
영 주격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오래 살고 싶다고 한다면 왜 오래 살고 싶다는 거냐? 영의 성장자로, 영능의 실력자로 성장을 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어서 오래 살고 싶은 거다. 이런 사람은 ‘지금 저는 성장적인 면에서 성장이 못됐습니다. 앞으로 더 살려주신다면 영적인 면에 더 성장을 시키고 살고 싶습니다’ 라고 기도를 하게 된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서도 영의 생명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반적인 기도를 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사도바울은 빨리 하늘나라에 가고 싶지만 이룰구원을 위해 세상에 더 살고 싶다고 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런 의미를 가지고 오래 살아야 인간이 가치가 있는 거다.
아무 것도 못하고, 아무 것도 안 하고, 말씀 깨달음도 없이 사는 사람이 몸이 아프면 이웃사람들이 의례히 ‘빨리 낳아서 오래 오래 사십시오’ 라고 인사를 한다. 그런데 만일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내려서 내일 모레 하는 사람에게 ‘오래 오래 사십시오’ 라고 말을 한다면 이게 축복으로 들리겠느냐, 저주로 들리겠느냐? 저주로 들린다. 상황에 따라 이렇게 달라지는 거다. 가난한 사람에게 ‘잘 먹고 잘 살아라’ 라고 하면 축복으로 들리겠지만, 잘 사는 사람을 볼 때마다 ‘잘 먹고 잘 살아라. 잘 먹고 잘 살아라’ 라고 한다면 의미가 달라지는 거다. 축복 같은 저주가 있는 거다. 믿는 우리가 어느 쪽을 염려 근심 걱정을 하면서 살려달라고 해야 되겠느냐?
성경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 얻기를 바라신다’고 했는데, 이 말의 의미는, 첫째는 예수 믿어 구원을 얻는 중생, 즉 기본구원을 말하는 거고, 두 번째는 이룰구원 면에서 예수를 믿고서 저질적인 차원에서 고차원으로 올라가는 것도 구원, 낮은 차원에서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는 것도 구원, 예수 믿으면서도 성경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는데 옳은 것으로 깨달음이 올라가는 것도 구원이다. 이렇게 되면 자기의 차원이 자기도 모르게 높이 올라가 있다. 말이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마다 옳은 이치가 나오고, 바른 말이 나오고, 바른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마음이 들어있는 거다. 성경에서는 이런 걸 다 ‘구원’이라고 한다.
64편 전체를 보면 다윗의 기도는, 첫째는 일반사람들처럼 단순히 육신생명, 자연목숨이 살기를 바라는 기도가 아니다. 두 번째는 다윗의 신앙정신 사상의 차원이 육의 생각의 차원이 아니다. 그 증거가 뭐냐? 다윗은 소년 시절에 자기의 육신의 생명을 생각했다면 어떻게 골리앗과 맞섰겠느냐? 그런데 지금은 어른이 되어서 소년 때의 신앙이 없어지고 일반사람들처럼 육의 사람이 되어서 육신을 살려달라고 하는 믿음 없는 기도를 하는 것이겠느냐? 다윗이 육의 기도를 하는데 성령님이 찾아와 감동을 시켜서 이 기도의 시를 쓴 거냐? 64편 서두에 뭐라고 했느냐? ‘영장으로 한 노래.’ 이 말은 ‘성령의 감동으로 한 노래’ 라는 거다.
예수 믿는 우리들이 자꾸 육의 생각을 하게 되면 자꾸 육적으로 나가게 된다. 이러면 사단, 마귀, 거짓 종들에게 이용물이 된다. 사람이 ‘돈 돈’ 하고 있으면 이 사람은 사기꾼에 휘말릴 충분한 요소가 있는 거다. 아무리 가난하게 살지라도 남이 듣는 데서 ‘돈 돈’ 하지 말아라. 그렇지 않아도 세상에 온통 사기꾼들이 판을 치고 있는데 ‘돈 돈’ 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그냥 있겠느냐? ‘공짜다. 싸다. 이자를 많이 준다’고 하면서 돈에 궁한 심리를 이용해서 사기를 치게 된다. 세상은 절대로 공짜가 없다. 그러니 돈에 욕심을 품지 말고 있으면 있는 대로 살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라. 몸이 건강해서 무슨 일이든 하면 하루 밥은 들어오지 않느냐?
세상은 자기만 건강하고 부지런하면 먹고 살 수 있다. 그런데 건강하면서도 게으르다면 굶어죽어도 할 수 없는 거다. 사람이 많은 곳에는 그만큼 일이 많다는 증거다. 예수 믿는 사람은 노동을 하는 데 겁이 없어야 하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과도하게 일을 하다가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거다.
세 번째는 다윗의 사건을 들어서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가 있다. 무슨 말이냐? 우리도 다윗처럼 그런 기도를 하라는 거다. 다윗은 육을 위한 기도가 아니었다. 자기가 도망을 다니느라고 못 먹고 살기 때문에 잘 살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었다.
‘하나님이여, 나의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다윗은 악한 자들 때문에 신경이 곤두 서 있다. 우리는 여기서 악한 것도 분별을 해야 한다. 사람을 해코자 치고받고 하는 악한 자가 있고, 거짓말을 살살 해서 사람의 마음을 뺏어서 상대의 것을 가지고 도망을 가는 악한 자들도 있고, 또 기독교 안에 악한 목사들이 있다. 신앙인 것처럼 하면서 성도들이 스스로 가져오게 해서 다 뺏어간다.
일반적으로 사기꾼에게 걸리면 평생 동안 번 게 다 날아간다. 그러나 사기꾼에게 속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다. 왜냐? 사기꾼에게 속는 사람은 자기 속에도 사기성이 들어있기 때문에 속는 거다. 자기 속에 일확천금이나 공짜를 좋아하는 마음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런 자들에게 속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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