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W : 믿음 BIW : 나아가라 AG : 성도
TS : 믿음이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예배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신 곳
어느 목사님께서 밤늦게까지 설교를 준비하시다가 서재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마침 꿈을 꾸게 되었는데, 주일 예배 모습이었습니다.
예배 시간에 이상한 사람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안내하는 집사님에 의해서 자리에 앉은 그의 모습은 아주 신중하게 보였습니다.
목사님께서 설교하는데 마치 그 사람을 향해서 설교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목사님은 예배가 끝나는 대로 그를 만나봐야겠다 하면서 예배를 끝까지 인도했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그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안내 집사님에게 ‘혹시 그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안내 집사님은 “목사님! 그분 모르세요. 예수님이십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한탄했습니다.
아니 그분이 예수님이시라니, 하필이면 설교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날에 오셨단 말인가.
그러자 안내 집사님은 “목사님, 염려하지 마세요. 예수님께서 가시면서 다음 주일 예배에도 꼭 오시겠다고 하셨어요.”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에 목사님은 잠이 깨었습니다.
그리고 크게 깨달았습니다.
“내가 매번 설교할 때마다 우리 주님께서 예배에 참석하셔서 나의 설교를 들으신다.”
그날 이후로 목사님의 설교는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모든 예배 때에 행해지는 설교를 주님께서 다 듣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설교하니까 교회가 은혜를 받고 감동을 입으면서 큰 부흥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우리 예수님은 지금 우리들 앞에 와 계십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들이 앉아있는 자리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앉아 계십니다.
지금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들 앞에 와서 앉아 계신다는 믿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을 활짝 열어주시고 은혜와 사랑과 능력과 축복으로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있다는 믿음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신앙인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P4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나와서 제사를 올려드리는 민족으로 세우기 위해서이다.
성경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께 제사를 올려드리는 말씀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제사는 어느 누구라도 예외일 수 없다.
물론 제사는 제사장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다.
레위인들은 제사장들이 제사를 올려드릴 수 있도록 협력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일반 이스라엘 백성들은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올려드리는 제사에 동참하는 일을 감당하는 백성들이다.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올려드리는 제사에 동참하면 대표성의 원리에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 제사를 올려드린 것으로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신앙인들은 마땅히 삼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와 기도의 자리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신앙인들은 예배와 기도의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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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율법을 지키게 하시는 하나님.
레위기 12:2-4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여인이 임신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곧 월경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여덟째 날에는 그 아이의 포피를 벨 것이요, 그 여인은 아직도 삼십삼 일을 지내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여인이 아들을 낳았을 경우에는 7일 동안 부정하고, 8일째에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33일 후에 번제와 속죄제를 드림으로 정결케 된다고 말씀하신다.
레위기 12:5에는 ”여자를 낳으면 그는 두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월경할 때와 같을 것이며 산혈이 깨끗하게 됨은 육십육 일을 지내야 하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딸을 낳았을 경우에는 아들에 비하여 곱의 날짜로 14일 동안 부정하고 66일이 지나야 정결케 된다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이 정결하냐 부정하냐 하는 것에 굉장한 반응을 보이는 민족이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되면 하나님의 성전으로 올라갈 수 있고, 부정하면 절대로 성전에 올라가지 못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살아가는 삶의 가치는 정결케 되어 하나님의 성전으로 올라가는 것을 최고의 명예요 가치로 여기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스라엘 여인은 아들을 낳으면 40일이 지나야 성전으로 올라가서 정결을 위한 제사를 올려드릴 수 있다.
이스라엘 여인은 딸을 낳으면 80일이 지나야 성전으로 올라가서 정결을 위한 제사를 올려드릴 수 있다.
이스라엘 여인은 정해진 날이 지나면 성전으로 올라와서 제물을 드리면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
레위기 12:6-8절에 보면 ”아들이나 딸이나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면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 년 된 어린 양을 가져가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회막 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그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아들이나 딸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라고 말씀하신다.
번제를 위하여 1년 된 어린 양 한 마리와 비둘기 새끼 한 마리를 가지고 와서 속죄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어린 양을 구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여인에 대하여 8절에서 ”그 여인이 어린 양을 바치기에 힘이 미치지 못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비둘기 두 마리를 가지고 와서 한 마리는 번제를 드리고, 다른 한 마리는 속죄제를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마리아는 베들레헴 허름한 나귀간에서 아기 예수님을 낳고 7일 동안은 부정한 시기가 된다.
8일째 되는 날에는 아들 예수님에게 할례를 행해준다.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낳고 40일이 되는 날에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남편 요셉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간다.
마리아는 첫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1년 된 양 한 마리와 비둘기 새끼 한 마리를 가지고 올라와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마리아는 양을 준비하지 못하고 비둘기 2마리를 가지고 올라와서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요셉과 마리아는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았었다는 반증이 되는 것이다.
요셉은 아기 예수님에게 할례를 행해줌으로써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해 주어야 하는 율법을 지키면서 아버지의 삶을 살아간다.
마리아는 두 마리의 비둘기로 번제와 속죄제를 드림으로 어머니로서 해야 할 율법을 지키면서 어머니의 삶을 살아간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율법, 계명, 율례, 규례, 제도를 잘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면 마리아가 첫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번제를 드리기 위해서 1년 된 양 한 마리를 준비해야 하는데, 양을 준비하지 못하고 비둘기를 준비했을까?
번제를 위하여 양 대신에 비둘기를 준비했다고 기록하는 것은 요셉과 마리아가 경제적으로 넉넉한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요셉과 마리아는 경제적으로 양을 구입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삶을 살았다는 의미이다.
그 당시에 나사렛이란 동네는 대체적으로 부유한 이들이 사는 동네가 아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가난한 이들이 살고 있는 빈민촌, 달동네와 같은 지역이다.
요셉과 마리아가 양을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을 만큼 부유한 사람들이었다면 당연히 1년 된 양 한 마리를 구입하여 번제를 드렸을 것이다.
요셉과 마리아는 빈민촌에서 가난하게 살았어도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반드시 율법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번제를 위하여 어린 양을 준비하지 못하고 비둘기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속죄제를 위하여 비둘기를 준비한다.
그러면 왜 속죄제를 위하여 비둘기 한 마리를 준비하는 것일까?
비둘기는 가난한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제물이기도 하지만, 비둘기는 정결하고 거룩하고 순결한 새로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새이다.
순결을 의미하는 새가 비둘기이기 때문에 자식을 낳은 여인은 속죄제를 위하여 비둘기로 제물을 삼아서 속죄제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곧 여인이 낳아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아들이나 딸은 다른 남자를 통해서 낳은 자식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신랑을 통해서 낳은 아들과 딸입니다.라고 하면서 여인의 순결을 고백하는 제물이 되는 것이다.
만약에 이스라엘 여인이 남편이 아니라 다른 남자와 간음함으로 인하여 낳은 자식이라면 하나님께 제사를 올려드릴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요셉이나 마리아나 아기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우신 율법의 언약을 철저하게 지켜나가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율법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이기 때문에 삼위 하나님께서 세우신 율법의 언약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하늘 보좌에 계실 때, 율법을 제정하신 분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5:17-18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라고 말씀하신다.
비록 지금은 마리아의 태를 통하여 지구촌이라는 세상에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났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이요 여전히 주님이시라는 것이다.
아기의 몸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신성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주님이라는 주체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아기의 몸일지라도 예수님은 일반인 아이와는 달리 하나님의 아들이요 창조주요 온 세상을 주관하고 다스리시는 주관자요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요 생명의 말씀을 주신 분이라는 사실은 아무런 변함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삼위 하나님의 한 분으로서 하늘 보좌에 계실 때, 율법을 제장하신 분이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제정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킴으로서 하나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완성케 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율법, 규례, 제도, 규율을 제정하신 분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지켜나가시는데 반하여, 오늘날의 법을 제정하고 개정한다는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이 발의하고 제정하고 개정한 법마저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을 가장 잘 알고 잘 지켜야 할 국회의원들이 법을 가장 잘 지키지 않고, 범법자들, 범죄자들이 국회에 들어가서 국민들을 위한다고 떠벌리면서 순전히 자기의 욕망을 챙기고, 자신의 범죄를 도피하는 장소로 전락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작자들을 국회의원으로 뽑아준 유권자들이 회개해야만 할 일들이다.
신앙인들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킴으로서 자신의 정체성, 자존감을 세워나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시하고 지키지 않는다면 자신은 신앙인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속한 정당이 이러니까 저리니까, 자신의 목구멍에 밥을 넣어주는 곳이 이러니까 저리니까 하면서 정당이나 자신이 속한 단체를 방패막이로 삼지 말아야 한다.
신앙인들이 가장 먼저에서 마지막 끝까지 고수해야 하는 것은 삼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이라는 정체성, 자존감이다.
자신이 삼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이라는 정체성, 자존감은 어떤 처지, 어떤 환경, 어떤 여건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고, 바꿀 수도 없고, 없앨 수도 없는 것이다.
자신이 신앙인이라는 정체성, 자존감을 내려놓는 순간,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신앙인이라는 정체성, 자존감을 포기하는 순간, 더 이상 신앙인이라고 포장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느 어느 교회의 목사요 장로요 권사요 집사라고 포장하면서 진짜로 신앙인의 정체성과 자존감으로 살아가는 진짜 신앙인들을 더 이상 욕 먹이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신앙인들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 율법, 규례, 율례, 제도를 제대로 순종하며 살아가야 할 사명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② 시므온의 격려를 받게 하시는 하나님.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등장하고 있다.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몇 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시는 말씀이나, 29절에서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라고 하시는 말씀을 보면 어느 정도 연세가 드신 분인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예루살렘 성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메시야를 보내주신다는 예언의 언약을 기억하면서 하루하루의 삶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어서 속히 메시야가 찾아오시기를 갈망하면서 메시야가 오실 날을 기대하며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25-27에서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사모하면서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성령이 시므온 위에 계신다고 소개하고 있다.
성령께서는 시므온에게 주의 그리스도를 만나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하늘의 뜻까지 알려준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성령의 감동하심에 이끌려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는 데,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안고 성전으로 들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므온은 어느 깜찍한 새댁이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성전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는데, 성령께서 시므온에게 ‘저 아이가 바로 주 그리스도이시다.’라고 감동을 주시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을 입은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아기를 안아보자.’라고 한다.
아기를 품에 안은 시므온은 너무나 벅찬 감동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성령의 뜨거운 감동을 입으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찬송하기 시작한다.
시므온은 29-32절에서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라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린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의 부모에게 성령 하나님께서 감동 주시는 말씀으로 축복하면서 34-35절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선포한다.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라고 하면서 아기 예수님을 축복한다.
③ 안나 여 선지자의 위로를 받게 하시는 하나님.
36-38절에서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안나라는 여인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다.
안나라는 여인은 혼인하여 7년 동안 결혼 생활하고, 과부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난 것 같다.
과부로 살면서 84세가 되었다고 한다.
과부가 되어 성전에서 살면서 여 선지자로 살았다고 소개하고 있다.
어쩌면 안나는 평생 성전에서 기도하면서 살았던 할머니이다.
84세이기 때문에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게 될 나이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을 나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떠나지 않고 성전에서 기도하면서 사는 것이다.
안나 할머니는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아보았을까?
성경에서는 안나 할머니가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았다는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안나 할머니도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격려하고 위로하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여인의 뜰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기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주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38절에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라고 기록하는 말씀이다.
“안나(Anna)”라는 이름은 구약시대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Hannah)라는 이름과 같다.
신약성경을 기록한 헬라어로는 “안나”가 되고, 구약성경을 기록한 히브리어로는 “한나”가 되는 것이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여인에게 다른 별명을 붙인다면 기도의 어머니, 기도의 여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처럼, 안나 할머니도 기도의 어머니, 기도의 할머니, 기도의 여인이라는 별명, 닉네임으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시므온이라는 사람도, 안나라는 사람도 성전을 중심으로 살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실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사모하며 살아온 것이다.
시므온과 안나는 성전에서 끝없이 기도하면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매일매일 성전을 떠나지 않고 성전에서 기도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아기 예수님으로 태어나신 이스라엘의 메시야,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이다.
누가 장차 왕으로 태어난 아기를 안아볼 수 있겠는가?
아기의 부모, 형제 자매, 할아버지, 할머니와 보모 정도가 왕으로 태어난 아기를 안아볼 수 있지 않겠는가?
온 인류의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자신의 품에 안아볼 수 있는 축복을 누가 받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시므온와 안나는 온 세상의 왕으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아보는 축복을 받은 것이다.
시므온과 안나는 하나님의 성전을 떠나지 않고, 성전에서 제사드릴 때마다 기도하는 자리를 지키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였기 때문에 인류의 구원자, 메시야,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품에 안는 축복을 입는 것이다.
그렇듯이 신앙인들이 나아가야 할 자리는 삼위 하나님께서 좌정하고 계시는 성전이요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교회당이다.
구약시대에는 성전 지성소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계시지만, 신약시대, 오늘의 교회시대에는 교회당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계시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인들이 날마다 날마다 매일매일 찾아가야 할 곳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교회당이요, 교회당에서 예배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이라면, 어느 누구나 교회당에 나와서 예배를 올려드리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서, 직장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떠나서, 잘 배우고 못 배우고를 떠나서, 직분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어떤 일을 하든, 어떤 사람이든, 남자든 여자든, 어린아이든, 할아버지 할머니든, 청년이든 장년이든 어느 누구라도 주님의 몸된 교회로 나와서 예배하며 기도할 수 있다.
안나 여선지자가 84세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성전으로 나와서 기도할 때, 메시야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은혜와 축복을 받은 것처럼, 신앙인들이 예배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면 성령 하나님께서 찾아와서 임재하시고 만나주시고 은혜와 사랑과 축복으로 덧입혀 주신다.
④ 나사렛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
39절에서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우구스투수 로마 초대 황제의 명령으로 인하여 나사렛을 떠나 베들레헴 성으로 와서 호적을 정리하고, 아들 예수님을 낳게 된다.
요셉과 마리아는 8일이 되어 할례를 행하면서 “예수(Jesus)”라는 이름, 성령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름을 붙여준다.
예수님을 낳은 지 40일 되던 날에 두 마리의 비둘기를 가지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와서 번제와 속죄제를 드린다.
그러면서 시므온와 안나를 만나고, 여러 사람들을 만난다.
그런 후에 요셉과 마리아가 살고 있는 나사렛이란 동네로 돌아가서 살았다고 기록하는 것이다.
이 말씀에 마태복음의 말씀과 약간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 2장에 의하면 예수님은 베들레헴성에서 태어나시고 동방에서 찾아온 점성술사들, 점쟁이들을 만나게 된다.
동방에서 찾아온 박사들, 곧 점성술사들, 별을 보면서 점을 치는 점쟁이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라는 세 가지 예물을 드렸다고 한다.
그런 후에 점성술사들은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갔다고 한다.
마태복음 2:13에 의하면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라고 하시는 성령의 말씀을 듣고 애굽으로 내려가셨다. 라고 한다.
마태복음 2:20-23절에서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헤롯 대제가 언제 죽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일 수 있다.
요세푸스(Titus Flavius Josephus, 37~100)라는 역사가에 의하면 헤롯 대제는 BC 4년 봄에 너무나 고통스럽게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헤롯 대제가 요세푸스가 기록한 대로 BC 4년 봄에 죽었다면 헤롯은 죽기 전에 이스라엘에 있는 2세 이하의 아이들을 죽이라고 하는 유아 살해 명령을 내리게 된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적어도 BC 5년이나 6년에 태어나셨을 것이라 추산할 수 있다.
그래도 전통적으로 예수님은 BC 4년에 태어나신 것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논란을 일으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언제 나사렛이란 동네로 돌아갔을까?
아마도 마리아가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와서 번제와 속죄제를 드린 후에 곧바로 나사렛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 성에 더 머물다가 성령께서 급하게 헤롯 대제가 아기들을 죽이려고 하니 애굽으로 내려가라는 말씀을 듣게 된다.
이들은 급하게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BC 4년 봄에 헤롯 대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사렛이란 동네로 돌아갔을 것이다.
예수님은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 요셉과 마리아의 양육을 받으면서 자라나게 된다.
요셉과 마리아는 많은 자녀를 더 낳게 되면서 여러 형제, 자매의 큰형으로, 큰오빠로 성장하면서 유년기, 청소년기, 청년기를 보냈을 것이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까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여러 형제, 누이들의 형제로 사는 것이다.
L4 & B4
시므온과 안나 여 선지자는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의 자리로 올라간다.
두 분 다 연세가 만만찮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두 사람은 제사장이 아니기 때문에 번제단으로는 올라가지 못한다.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는 여인의 뜰과 이스라엘의 뜰이 따로 있었다.
본래 솔로몬의 성전에는 없었던 공간인데, 헤롯 대제가 제2성전을 리모델링하여 헤롯성전을 건축하면서 성전의 웅장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뜰과 여인의 뜰을 추가해서 건축한 것이다.
여인의 뜰을 지나서 이스라엘의 뜰로 들어가게 되고, 이스라엘의 뜰을 지나서 제사를 드릴 수 있는 번제단의 뜰로 올라갈 수 있다.
번제단의 뜰에는 오직 제사장들만 올라갈 수 있다.
번제단의 뜰에는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이라 하더라도 올라갈 수 없다.
안나는 여인의 뜰에서,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뜰에서 지내면서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번제는 매일 두 번 드리게 되는데, 첫 번째 번제는 새벽 시간에 동쪽에서 태양이 솟아나는 일출의 모습을 보면서 아침 번제를 드린다.
두 번째 번제는 오후 3시경에 저녁 번제를 드린다.
다른 제사 곧 소제, 속죄제, 속건제는 번제와 함께 제사를 올려드린다.
아마도 시므온과 안나 여 선지자는 저녁 번제 시간에 아기 예수님을 안고 제사를 드리러 온 요셉과 마리아를 만나지 않았을까 싶다.
어쩌든 시므온과 안나는 매일매일 성전으로 출근하여 제사를 올려드릴 때마다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삶을 살아간 하나님의 사람들, 신앙인들이다.
그럴 때에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하심으로 이스라엘의 메시야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만나고 품에 안고, 찬양하고 성전에 올라온 모든 사람들에게 아기 예수님,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선포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귀한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된 것이다.
그러기에 신앙인들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을 쉬지 말아야 한다.
언제 어떻게 어디에서 성령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셔서 은혜와 사랑과 능력과 축복을 베풀어주실지는 아무도 모른다.
시므온과 안나는 쉬지 않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갔을 뿐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서 기도의 자리를 지킨 것밖에 없다.
기도의 자리를 놓치지 않고 지키고 있을 때, 성령 하나님께서 요셉과 마리아의 발걸음을 인도하여 만나도록 역사하시는 것이다.
신앙인들은 기도 쉬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런 응답도, 감동도 없더라. 이젠 기도를 쉬련다. 이제는 기도를 쉬면서 생각을 잘해 보련다. 하면서 기도를 쉬고 있는 그 시간에 성령 하나님께서 불현 듯 찾아오셔서 신앙인들을 찾을 수도 있다.
성령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쉬지 않고 기도하고 있나 하면서 신앙인들을 찾아보았는데, 신앙인들이 그 예배의 자리에 없다면, 성령 하나님께서 얼마나 낙심하고 슬퍼하시겠는가.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언제든지 기도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아무런 것들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아무런 변화도 없고, 은혜도 없다고 낙심하면서 기도의 자리를 떠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
신앙인들은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신앙인들이 낙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굳건하게 기도의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시므온과 안나 여 선지자를 만나주신 것처럼, 우리 신앙인들도 언젠가 하나님께서 계산하고 그 시간에 우리 신앙인들을 찾아오시고 만나주실 것이다.
시므온과 안나 여 선지자도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다.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 해야 할 사명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연세가 아무리 많아도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다.
나이가 많으면 이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자책하며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니다.
물론 젊은 사람들처럼 활기차게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는 섬기지는 못할 수도 있다.
주님의 사역은 젊은 사람들에게 위임시키더라도, 기도하는 일만큼은 누구에게도 빼앗겨서는 안 되는 일이다.
특히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 속에 있는 자유대한민국을 위하여 기도 쉬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일, 선교사님, 목사님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 교회의 여러 가지 사역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 사업과 생업터전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 자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은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기도는 앉아서도 할 수 있고, 누워서도 할 수 있고, 설거지하면서도 할 수 있고, 청소하면서도 할 수 있고, 걸으면서도 할 수 있고, 뛰면서 할 수 있다.
기도는 무슨 일을 하면서라도 동시에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기에 신앙인들은 기도 줄을 놓지 말고, 끝까지 붙들고 가야 한다.
신앙인들은 끊임없이 기도 줄을 붙잡고 기도해야만 정신 줄을 놓지 않고, 치매도 걸리지 않고 이겨낼 수 있다.
2025년에는 기도 줄을 끝까지 붙잡고 예배의 자리로, 기도의 자리로 올라가서 신앙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은혜와 축복과 사랑이 넘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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