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스크랩 예수를 바라보자 (히 12:1-2)

열려라 에바다 2025. 2. 3. 10:50

예수를 바라보자 (히 12:1-2)

옥련지침이추천 0조회 3925.01.31 23:23댓글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이 시간에 “예수를 바라보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해바라기꽃 아시죠? 해를 바라본다고 해바라기라고 한 것입니다. 식물이 동물처럼 유연하지는 않지만 모두 해를 향해 뻗어가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주바라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 주님이 아주 기뻐하시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는데, 주바라기가 되자는 말씀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이 있습니다. 바라봄의 법칙은 바라본 대로 되는 변화의 법칙인데,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마음과 미래와 운명까지도 결정되는 아주 강력한 법칙입니다. 그래서 교육할 때도 좋은 스승 좋은 양서 등 좋은 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악한 것을 바라보면 안 됩니다.


한국정보화 진흥위원회에서 조사한 결과, 종일 모니터를 바라보며 게임 중독에 빠진 청소년이 14만 명인데, 그런 아이들은 성장한 후에도 술, 마약, 도박 중독이나 큰 범죄를 저지를 위험이 높다고 말했습니다. 그것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성공 역시 바라봄이 결과를 좌우합니다.


폴 마이어의 조사에 의하면 성공한 사람 13%와 그렇지 못한 사람 87%와의 두드러진 다른 점은 인생에 목표를 가지고 살았느냐 살지 않았느냐의 차이인데, 성공한 13% 안에서도 얼마나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실천했느냐에 따라 달랐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어떻게 변화할까요?


1.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빌2:5-8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했습니다.


여기 “낮추다”의 헬라어 '타페이노오'는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멸시와 천대와 굴욕을 당하면서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 겸손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모든 일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심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내려놓으신 겸손입니다.


'내가 하나님인데' 이런 생각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에만 전념하셨습니다. ‘내가 누군데 감히’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시험에 듭니다. 하나님께서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기뻐하시는데, 어린이는 내가 누군데 라는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만하지 않습니다. 겸손합니다.


어린이가 무시 받는 사회에서 어린이는 언제나 나중이고, 심부름 도맡아 하고, 좋은 자리 앉지 못하고, 재난이 생기면 어린이의 희생이 가장 큽니다. 그래도 어린이는 기분 나빠하지 않습니다. '나'라는 자아의식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처럼 왕관을 벗어놓고 하나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핍박을 받고 홀대를 받을 때 주를 생각하라 하셨습니다. 주님도 이런 일을 당하셨는데 이것은 나에게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질 때 어떤 핍박도 다 이길 수 있습니다. 고난과 슬픔이 있어도 기뻐하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봄이 중요한 것은 예수를 바라볼 때


2. 예수님처럼 행하게 됩니다.


마5:44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하셨는데, 주님은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에서 자기를 못 박는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 중 하나가 스데반입니다. 행6:15에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스데반의 얼굴에 광채가 난 것은 시34:5에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다” 했듯 주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자기를 못 박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랬기에 스데반은 전도하다가 자기에게 돌로 친 사람들을 향하여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59-60)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눅22:39에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이처럼 기도하신 주님을 생각하면 우리들도 기도하게 됩니다. 밤이 맞도록 기도하실 때도 있었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3년 반 동안 모범을 보이신 것은 제자들이 보고 따라 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이 박해 속에서도 목숨 걸고 기도하다가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주님을 3년 반 동안 바라본 결과입니다. 바라보아야 따라서 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본이 중요합니다. 모본을 따르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본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빌3:17에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봄이 중요한 것은 예수를 바라볼 때


3. 주님의 영광으로 변화됩니다.


고후3:18에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에서 주의 영광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예수님에 관한 말씀으로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모습과 하신 일과 하실 일과 영광이 나타납니다.


성경을 볼 때 예수를 발견하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때 주님이 우리와 온전히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알 수 있고 예수님이 보이고 예수님을 생각하고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 믿고 사랑하게 됩니다. 주님을 얼마나 믿고 사랑하느냐에 따라 변화가 달라집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했어요. 견물생심이란 어떤 것을 실제로 보면 가지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하와가 마귀의 꾐에 넘어가 선악과를 바라보다가 타락했습니다. 마귀가 이러한 바라봄의 법칙을 악용해서 타락의 길을 열었습니다. 이와 반대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회복의 길입니다. 세상 바라보면 타락의 길이요, 주님 바라보면 회복의 길입니다.


남편과 함께 사막에서 살게 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사막의 황량함과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어머니, 저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이 메마른 사막이 싫습니다." 그 편지를 받은 어머니가 답장을 보냈습니다. “두 사람이 감옥의 철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진흙을 보았고 한 사람은 별을 보았단다.”


어머니가 보내주신 글의 의미를 깨달은 그녀는 진흙이 아닌 별을 찾기로 했습니다. 그녀는 사막의 꽃인 선인장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 근처 인디언의 말과 풍습과 전통을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사막에 관한 전문가가 되어 좋은 책을 쓰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바라봄은 위대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1-2)고 말씀합니다. 우리 모두 세상이나 자기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예수님의 마음과 행실을 본받고 그 분이 함께하심의 그 영광이 나타나 스데반처럼 아름다운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