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편 23절-28절: 너로 저희를 심히 치고 그 피에 네 발을 잠그게 하며 네 개의 혀로 네 원수에게서 제 분깃을 얻게 하리라 하시도다 하나님이여 저희가 주의 행차하심을 보았으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성소에 행차하시는 것이라 소고 치는 동녀 중에 가객은 앞서고 악사는 뒤따르나이다 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너희여 대회 중에서 하나님 곧 주를 송축할찌어다 거기는 저희 주관자 작은 베냐민과 유다의 방백과 그 무리와 스불론의 방백과 납달리의 방백이 있도다 네 하나님이 네 힘을 명하셨도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히 하소서.
23절: ‘너로 저희를 심히 치고 그 피에 네 발을 잠그게 하며 네 개의 혀로 네 원수에게서 제 분깃을 얻게 하리라 하시도다.’ ‘너로’ 라고 하는 것은 다윗을 보고 하는 말인데, 다윗만 아니라 지금의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이다.
역사적 교훈적으로 보면 주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골리앗을 심판케 했고, 사방의 원수들을 공격케 했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진리성도를 통해 악인들을 심판한 거다. 하나님의 이런 심판을 보면 선지자의 예언대로 아합과 이세벨이 들개의 밥이 되기도 했고, 이방 앗수르로 하여금 죄를 짓는 북조 이스라엘을 삼키게도 했고, 죄에서 떠나지 못하는 남조유다가 바벨론에게 정복을 당하게도 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는 진리 인격화, 진리의 성품화로 만들어져야 하는데 자기가 잘났다고 콧대를 세우고 교만을 부리다가는 하나님의 분노를 사서 심판을 당하고 만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다.
그러면 이런 심판을 받은 자들이 이스라엘 민족이냐, 이방민족이냐?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만을 떨다가 이방의 손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을 당한 거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아무리 지위가 높을지라도 철두철미하게 감찰을 하셔서 약속의 땅으로 못 들어갈 것은 반드시 심판을 하신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자기 속에 심판 받을 요소가 없는지 스스로를 잘 살펴야 한다.
24절: ‘하나님이여, 저희가 주의 행차하심을 보았으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성소에 행차하시는 것이라.’ 본 절의 말씀은 다윗이 법궤를 오벳에돔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장면을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다윗은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진리통치를 했고, 사방의 악인들을 정복했다.
이런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면서 법궤로 통한 하나님의 신정통치가 좋아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진리로 다스림이 되는 것이 좋아서, 그 정치가 기쁘고 좋아서 법궤 앞에서 춤을 추었다. 그리고 악사와 소고를 치는 소녀들은 법궤의 뒤를 따르고, 이것을 쳐다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가 예루살렘에 안치되는 것을 기뻐했다. 일반백성들은 법궤가 다시 돌아와서 예루살렘에 안치되는 것이 좋아서 춤을 추고 노래를 한 거지만 다윗의 신앙사상은 법궤를 옮기는 것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행차하시고 예루살렘에 좌정하시는 구원역사로 보고 기뻐했다.
자기 집에 나쁜 놈들이 자꾸 찾아온다면 무슨 행차로 보이느냐? 목사님이 자기 집에 행차를 하면 어떤 면으로 보이느냐? 목사님이 ‘아무 날 몇 시에 누구 집사님 집에서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라고 할 때 ‘그 날 약속 된 게 있으니 다른 날로 옮기든지 아니면 취소해 주십시오’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냐? 혹시 자기 집에 대통령이 찾아온다고 하면 ‘그 날 직장에 나가야 하니 다른 날 오십시오’ 라고 대답을 하면 대통령이 그 날에 맞춰서 오겠느냐? 우리는 ‘신앙에 있어서 무엇이 주격이냐?’ 하는 게 있는 거다. 우리 인간은 항상 자기가 주격이고, 하나님은 자기의 소유격으로 된 일이 많다. 이걸 바꿔야 한다.
목사의 입장에서 교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고 진리중심의 생활, 즉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하는 것을 본다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지? 이게 아닌 높은 자리를 자랑하고, 인간을 타락적으로 높인다면, 인간을 타락적으로 높인다는 것은 인간의 기분을 맞춰준다는 거다. 이걸 본다면 기분이 좋겠느냐?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높이는 곳으로 행차하신다. 그런 집으로, 그런 교회로, 그런 사람에게로 행차하신다. 그리고 진리통치, 신정통치를 원하는 자는 주를 찬양하며 그 뒤를 따른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 중에 이것은 안 보이고, 싫고 세상을 높이고 인간을 자랑하는 곳으로 따라가는 자들이 많다. 우주만물을 통치하시는 그 분께서 그런 곳으로 행차하시겠느냐?
하나님의 진리통치를 받으면 사람이 바로 서기 때문에 사람이 지혜자가 되고, 영특하게 되고, 우주만물을 다스리는 게 나온다. 그러나 사람이 물질위주로 살게 되면 이 면이 다 죽어버린다. 말하자면 사람이 인격 면에서 자꾸 죽어 들어간다. 물질적 혜택은 순간이요 잠깐이다. 영원히 가지 않는다. 세상을 자꾸 먹으면 세상적으로 배가 불러진다. 그러나 머리통은 텅 비었다. 이런 사람을 어디에 쓰겠느냐? 이건 허수아비다.
허수아비는 새들이 밭이나 논에 앉지 못하게 하려고 세워놓은 거다. 그런데 요즘 새들이 무섭다고 도망을 가느냐, 허수아비의 머리 위나 어깨 위에 앉아서 노느냐? 새들이 허수아비의 머리나 어깨에 앉아서 똥을 싸버린다. 이런 걸 보고 일반 이치적으로도 깨닫고 자기의 인격적 상태도 봐라.
사람은 자기 체면을 구기면 마음이 엄청나게 상한다. 정신적으로 자기 마음이 짓밟히면 상당히 자극이 된다. 이런 걸 겪으면서 신앙 면에서도 자기의 정신적 마음을 봐라. 이 면으로는 둔하고 육적인 면만 강하다면 육의 사람이요, 옛사람 부패성적으로 사는 거다. 우리에게는 아직까지 이런 요소가 많다. 고쳐나가야 한다.
25절-26절: ‘소고 치는 동녀 중에 가객은 앞서고 악사는 뒤따르나이다. 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너희여, 대회 중에서 하나님 곧 주를 송축할찌어다.’ 이스라엘의 근원이 어디서 나왔느냐? 야곱에서 나왔는데, 야곱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다. 야곱은 고집쟁이인데, 야곱의 이 고집은 자기는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면 살지 못한다고 하는 고집이다. 우리에게도 이 고집이 있어야 한다.
이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는데,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라는 뜻으로, 두 가지 의미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이룰구원 차원에서 긍정적인 면으로 보면 하나님의 다스림, 즉 진리통치를 받으면 축복의 사람으로 자꾸 올라간다는 의미가 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기는 받는데 맨날 몽둥이로, 야단으로 통치가 되는 것이 있는데, 이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만 있을 뿐 이룰구원은 없다.
그러니까 ‘너 맛 좀 봐야 되겠다’ 하는 식으로 ‘너를 다스릴 것이다’ 하는 다스림이 있고, 진리통치로 너를 다스릴 것이다’ 하는 다스림이 있다. 진리통치로 다스린다는 것은 긍정적이고 의사적이고 순종적이지만, 전쟁으로 환난으로 흉년으로 다스린다고 하면 이 사람은 죽으면 천국은 가겠지만 살아생전에 고통으로 고통으로 일관하는 것밖에 없다. 이러면 사나 마나다.
이스라엘에서 열두 지파가 나왔고, 이 열두 지파는 열두 사도의 신앙과 함께 천국백성의 그림자로 보여주는 건데, 이는 이미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 계획 설계된 대로 역사가 진행되는 거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모두 영적 이스라엘이요, 영적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에 한 사람이 되는 거다.
영적 이스라엘은 자신을 다스리는 주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아야 하고, 열두 사도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아야 하고, 신앙의 조상들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의 신앙을 떠난 자로 살지 말고, 이스라엘의 신앙을 떠난 자로 놀지 말고, 자기 백성과 함께 있고, 자기 백성과 함께 살고, 자기 백성과 함께 일을 하고, 진리통치를 따라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며 약속의 땅으로 올라가야 한다. 이렇게 사는 것이 과거적으로 이스라엘이었고, 현재적으로 영적 이스라엘이다.
영적 이스라엘이 행여나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서 이방의 포로가 되어 노예로 살면 되겠느냐? 이러면 자유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그 일생이 억울하고 원통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우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면에서 늘 진리통치권 안에서 생활을 하고, 이런 친구를 사귀고, 이런 가정을 가지고, 이런 일터에서 일을 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사고방식이 항상 잘 먹고 잘 사는 세상 쪽으로 머리를 쓰게 되면 이 사람은 자꾸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돼버린다. 마음이 하나님을 떠난 상태가 되면 교회에 나오는 것도 뜸해지고, ‘지난주에 왜 교회에 나오지 않았느냐?’ 라고 하면 ‘바빠서. 시간이 없어서’ 이렇게 된다. 이건 하나님의 손에 빠지는 거다.
모든 식물은 햇빛을 받아야 자라는 거지 햇빛을 등지면 그 식물은 고사가 된다. 진리이치는 일반이치와 무관하지 않다. 믿는 우리는 일반이치를 보면서 진리이치를 깨닫고 어찌하든 머리를 써서 자기의 마음이 진리통치, 하나님의 말씀통치가 있는 곳으로 향해야 만이 신앙이 자라는 거지 머리로만 알고 있다거나 깨달은 진리이치를 일반적으로 써먹지 않으면 말만 많고 엄청나게 껄끄러운 사람이 된다. 이건 교만자다. 얻어맞아야 한다. 몰라서 얻어맞는 것도 있지만 알면서도 그런다면 스스로 자인할 때까지 얻어맞아야 한다.
그런데 사람이 잘못된 쪽으로 꼬부라지면 은박지를 한 번 쭈그리면 아무리 펼치려고 해도 제대로 펴지지 않듯이 그 마음이 도무지 펴지지를 않는다. 깨끗한 것일수록, 맑은 것일수록 한 번 상처가 나면 지워지지 않더라. 안경을 함부로 해서 렌즈에 한 번 상처가 나면 이 안경을 쓸 때마다 영 신경이 쓰이고 앞도 잘 안 보인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진리통치 신정통치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소원이다. 사람이 신정통치 진리통치를 받으면 자기가 성장이 된다. 하나님을 닮아간다. 생각도, 성품도, 소원 목적도 하나님을 닮아간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은 이런 사람이 나타나기를 바란다. 왜냐? 이런 사람에게 쓰임을 받기 위해서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쓰임 받는 것을 찬송을 하고 기뻐한다. 만물의 이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모든 만물이 자기로부터 쓰임받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게 참 사람이다.
이 세상이라고 하는 곳은 마귀운동도 있고, 성령님의 운동도 있다. 자기가 진리통치 신정통치를 받으면 하나님의 도덕성을 닮아가고 하나님의 능력성을 닮아간다. 이것이 성령님의 운동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면 어찌 노래가 안 나오겠으며 어찌 춤이 안 나오겠느냐? 그러면 마귀의 백성은 누구의 통치를 원하느냐? 마귀통치, 세상통치, 물질통치를 원한다.
‘소고 치는 동녀 중에 가객은 앞서고 악사는 뒤따르나이다. 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너희여, 대회 중에서 하나님 곧 주를 송축할찌어다.’ 주 하나님의 행차에 법궤와 함께 기쁨으로 올라가지 않는 자가 있다면 이스라엘이냐, 이스라엘이 아니냐? 이스라엘이 아니다. 이방민족이거나 이스라엘이면서 이방을 쫓는 자들이다. 이스라엘은 마음이 법궤와 같이 하니 몸도 같이 간다. 이러면 속에서 기쁨이 넘치니 노래도 나오고 춤도 나온다. 그러나 이방민족은 졸음만 오게 되어있고, 듣기 싫으면 도망을 가는 거다.
그런데 법궤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마음이 기뻐서 춤을 추는 다윗을 아니 꼽게 쳐다보는 자가 누구냐? 다윗의 아내 미갈이다. 하나님께서 이방정신을 가진 자임에도 다윗의 아내라고 해서 내버려 두느냐? 미갈은 죽을 때까지 불임으로 살았다.
27절: ‘거기는 저희 주관자 작은 베냐민과 유다의 방백과 그 무리와 스불론의 방백과 납달리의 방백이 있도다.’ 하나님께서 성소로 행차하시는 그곳에 어떤 자들이 있었느냐? 저희 주관자 작은 베냐민과, 유다의 방백과 무리들, 그리고 스블론 방백과 납달리의 방백들이 같이 했다. 지역적으로 베냐민과 유다는 남쪽 경계선의 지파이고, 납달리는 북쪽 경계선의 지파다.
다른 지파들은 다 빠지고 이 네 지파만 참석했다고 말하는 이유가 뭐냐? 이 자리에 참석한 이들은 다 주관자들이요 통치자들이요 고관들이니 신앙실력을 말해주는 거다. 죄를 이기는 정복자들, 선과 악을 판단해서 잘 다스리는 자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주관자들 통치자들이다. 이스라엘 안에는 통치자가 있고, 방백이 있고, 백성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실력에는 질서가 있구나. 이스라엘 안에는 깨달음의 실력이 있고, 실력에 따라 수종 듦이 나오는 것이니 이게 질서다.
이스라엘의 무리를 다스리는 방백들은 하나님의 진리통치가 백성들에게까지 막힘없이 내려가게 해야 한다. 누구든지 이걸 가로막으면 안 된다. 개인적으로도 행여나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를 말로나 행동으로 가로막는 짓을 하면 안 된다. 교회적으로 보면 물론 주님이 교회를 만드셨지만 인간 편에서 보면 각 교회마다 그 교회의 설립자들이 있는데, 이들과 함께 그 교회에서 어려움을 같이 하면서 신앙이 변질되지 않고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하던 무리들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다 기억하신다.
교회 안에는 교회가 고아처럼 과부처럼 되어서 어려울 때 진리가 환난을 받도록 내버려 두고 도망을 가버렸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의 형편이 나아지면 다시 돌아오는 사람이 있다. 어찌되었던 목사님의 세계에서나 교인들의 세계에서 교회의 어려움을 피해서 왔다 갔다 하게 되면 결국은 왕따를 당하게 된다.
어떤 식으로 해서 교회에 나왔던 바로 깨닫고 하나님의 진리통치를 받으면서 과거적으로 잘못된 것은 다 바로 잡고 다시 올라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사건, 어느 환경에서건 자기의 속이 드러나게 되어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드러내서 처치할 것은 처치해 버린다. 그런데 교회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받아서 진리통치가 제대로 안 되면 성도들은 하나님의 성품이 안 입혀지니, 이렇게 되면 그 교회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진리의 사람이 되어서 자기로 인해 자기가 사는 모든 생활반경에 은혜롭게 주님의 은복이 미쳐야 한다. 이를 위해 예수 믿는 사람은 마음이 넓어야 되겠고, 성격도 무난해야 되겠고, 사귐성 붙임성도 있어야 되겠고, 나눌 줄도 알아야 되겠고, 어려운 사람을 생각할 줄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믿는 내가 들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게 한 것은 없는지 늘 살펴야 한다. 행동 면에서, 말하는 면에서, 시간을 지키는 면에서 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은 없는가?
진리말씀에 늘 정신을 쓰는 사람은 교회에 나오는 것도 아무리 먼 곳에 살아도 어찌하든 일찍 나오려고 한다. 이건 좋은 현상이다. 그런데 매 주일마다 예배시간에 1분이나 5분씩 늦는 사람이 있다. 어째 그러냐? 이게 버릇화 되면 고질병이 된다. 보통 문제가 아니다. 아닌 말로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몇 시까지 천국의 문을 닫는다’ 라고 했는데 집에서 뭘 하느라고 꾸물거리다가 열심히 달려왔음에도 천국 문 앞에까지 1분이나 5분 정도 늦게 도착을 해서 이미 천국 문을 닫아버렸다면 어떻게 할 거냐?
먼저 믿은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일에 수종 듦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배운 보람이고, 깨달은 보람이고, 모든 면에 지도자적 성정이다. 많이 알면 생활 면에 많이 풀어먹는 것이 지도자가 되는 길이다. 지도자가 되려면, 우두머리가 되려면 높고자 하는 자는 섬기라고 했듯이 지도자는 그냥 올라가는 게 아니다. 훈련 연단이 없이 어떻게 올라가느냐? 교회 안에서도 훈련 연단을 받고, 인격 면에서도 훈련 연단을 받고, 활동 면에서도 훈련 연단을 받고, 인인관계성에서도 훈련 연단을 받으면서 주님의 인격화로 만들어지면 얼마나 좋으냐? 이게 없으면 사람들 틈에 못 산다.
무리에서 방백으로, 방백에서 왕으로 올라가야 한다. 모든 사고방식의 질적 차원, 성질적 차원, 도덕성의 차원이 주님을 따라 올라가면 사람이 고상해진다. 올라간다는 것을 꼭 교회의 어떤 직분만 생각지 말아라. 굳이 직분으로 생각을 한다면 자기가 신앙실력이 없을 때 직분을 받았느냐? 그렇다면 그 직분을 바로 감당함으로써 그 직분에 합당한 사람으로 올라가야 한다. 이러려면 더 겸손해지고 더 수종 듦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 틈에서 수종 듦이 없으면 어디를 가든지 이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귀중한 실력을 자기가 자기에게 막지 말고,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써먹는 아름다운 신행을 스스로가 막지 말아라. 교회 안에서는 허물이 없는 거다. 자타가 은혜를 받는 데 다 써먹어야 한다. 이 은혜를 막는 자는 하나님의 대적자이다.
28절: ‘네 하나님이 네 힘을 명하셨도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히 하소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을 명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힘이 무엇이냐? 육에 속한 힘이냐, 영에 속한 힘이냐? 육에 속한 힘은 이방인들에게도 있다. 그러나 영에 속한 힘은 이방인들에게는 없고 오직 영적 이스라엘에게만 있다. 이 힘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힘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성령의 힘이 있고, 죄를 정복하는 힘이 있고, 영능의 실력의 힘이 있다. 이스라엘 방백들 속에는 이런 힘들이 있다. 그래서 아닌 말로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하나님의 힘을 가진 지도자요 인도자이니 구역예배를 인도할 수 있는 힘이라도 있어야 한다. 우리는 법궤를 중심하여 가나안을 향한 이스라엘의 진행을 위하여, 주님의 일이 잘 되게 하기 위하여 힘을 다해야 한다. 이게 복된 백성들이다.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히 하소서.’ 곧 우리의 이룰구원을 위한 역사를 말하는 거다.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히 하소서’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의심이 들어서 스스로 다짐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이룰구원의 역사를 체험하고 기쁘고 즐거워서 외치는 소리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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