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편 11절-12절: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저희의 말거리가 되었나이다 성문에 앉은 자가 나를 말하며 취한 무리가 나를 가져 노래하나이다.
11절: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저희의 말거리가 되었나이다.’ 베옷은 사람이 죽었을 때 초상집에서 입는다. 베옷을 입는 것은 슬픔의 상징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육신의 죽음을 보여주시는 거냐? 첫째로 영혼의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두 번째는 ‘너희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하는 이룰구원 면의 죽음, 즉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는 것을 알려준다.
‘구원’이라고 할 때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의 영이 살아나는 기본구원이 있는데, 이 기본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독권으로 되는 거다. 그래서 이걸 선물이라고 한다. 이 기본구원을 얻어야 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신앙이 성장을 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그 다음에 예수를 믿은 후에, 즉 기본구원을 얻은 후에 말씀에 순종함으로 신앙이 성장되어 나가는 이룰구원, 또는 성화구원, 또는 건설구원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 믿는 내가 성령님을 따라 나의 이성과 몸이 유기적으로 움직일 때 인격과 성품이 하나님의 신령한 속성을 닮아가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자라가는 걸 말한다. 어린아이가 세상에 나왔으면 이제는 몸이 자라가고 지혜지식이 자라가야 하듯이 예수를 믿고 영이 중생을 했으면 이제부터는 신앙과 믿음이, 즉 지혜지식이, 선 사랑 거룩 진실의 도덕성이, 그리고 의와 옳음의 능력성이 하나님의 것으로 자라가야 하는 거다.
예수를 믿는다면 일 년이 가고, 십 년이 가고, 해가 갈수록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에 깨달음이 들어가면서 성장이 되어야 하겠는데, 깨달음에 충만성이 되어야 하겠는데, 깨달음에 부요성이 되어야 하겠는데 이것이 없는 기독교인이 많다. 이거 안 된다. 왜 안 되는 거냐? 병이 들었구나. 신앙 믿음이 죽었구나. 한 번 중생한 영은 죽지 않으나 신앙이 자라지 못하고 있으면 성장이 멈췄다는 의미에서 죽은 것과 같으니 이것을 죽었다고 표현을 하는 거다. 성장적인 면에서 죽었다. 진리말씀을 붙잡고 신앙정신과 사상이 성장해야 할 텐데 이게 죽어버렸다 그 말이다. 이렇게 죽게 되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세상정신의 소원 목적을 가지고 그 취미로 사는 상태가 된다. 이러면 교회에 다닐지라도 그 신앙은 죽었다고 보는 거다. 신앙정신 사상 면에서 성장이 안 된다 그 말이다.
사람은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으면 육신이 자라고, 뼈대가 굵어지며 몸이 튼튼해지지만 영양가 없는 음식을 먹으면 반대 현상이 나타난다. 일반 계시적으로 이런 걸 보여주는 것은 영적 차원에 있어서 신앙정신 사상 면에서도, 깨닫는 면에서도 신앙 믿음이 자랄 수 있는 참 양식을 먹어야 함을 깨닫게 하는 거다. 목회자 입장에서 성도들에게 영양가 있는 말씀을 주느냐? 영양가 있는 진리생명의 말씀의 꼴을 주느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주느냐? 안 준다면 못 깨닫는 거고, 성도들의 영은 말라가는 거다.
요셉이 애굽에서 총리로 있을 때 7년 풍년의 시기에 애굽의 곡식 곳간 안에 사는 쥐들이 살이 쪘을까, 말라 죽었을까? 살이 졌을 거다. 이게 누구 덕이냐? 요셉의 덕이다.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자녀요, 진리에 충만한 생명 길을 걷는 요셉이 가는 곳에는 일반 자연만물도 요셉의 덕으로 혜택을 보더라. 그러나 요셉이 없는 이방 불신자들이 사는 곳에는 애굽의 바로 왕이 당했던 것과 같은 하나님의 재앙을 맞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지도자의 가르침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신앙의 원리와 이치를 알아야 한다. 예수를 믿는 것은 여러 종교 중에 하나의 종교를 가지는 게 아니다. 예수 믿는 것을 일반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의 종교로 보지 말아라. 예수를 믿는 것은 사람의 본문이다. 학교에서나 직장 등에서 혹 종교를 물을 때는 기독교라고 말할지라도 정신 사상만큼은 예수를 믿는 것은 인간의 본분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진리성도 다윗은 육신이 아니라 신앙정신 사상이 죽은 것을 놓고 하나님 앞에 슬퍼하고 있다. 왜 그런 거냐? 사람은 육신은 살아서 밥을 먹을지라도 정신 면이 죽으면 멍청이가 되고 만다. 그래서 육신의 불구보다 정신 면에 불구가 되어있다면 큰 문제다. 예수 믿는 면에서도 육신은 멀쩡한데 신앙사상 정신 면에 불구가 되어있다면 큰 문제다. 사리분별이 없고, 사건 환경을 믿음으로 대처하지 못하게 되고, 남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죽게 된다. 이 땅에서 영적인 면이 불구인 채로 천국에 간다면 천국에서 그 상태가 영원히 연속이 되는 거다. 그 귀중성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학교공부도 하고 기술도 배운다. 여기에는 자연적 본능적 이성적으로 먹고 마시려는 것뿐이지 사람의 인격의 성장은 없다. 일반사회에서는 아무리 선하고 의로운 일을 해도 인격의 성장이 없다. 세상공부를 아무리 많이 해도 세상의 모든 공부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선악과 따먹고 타락되고 저주 받은 물질성적 개념과 소원 목적이다. 이런 물질성적인 것은 신령한 하늘나라에 못 들어간다. 이게 들어간다면 하늘나라에 가서도 여전히 먹고 마시는 것을 염려 걱정해야 할 거다.
그런데 거짓된 교회들이, 거짓된 목사들이 성경을 들고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세상에서 만사형통하고, 부귀 명예 영광을 누리는 것을 자랑하고, 가지라고 하고, 예수이름으로 구하라고 한다. 기독교라는 이름을 빙자하여, 예수이름을 빙자하여, 신앙을 빙자하여 세상에 속한 것을 구하라고 한다. 세상적이며, 육적이며, 임시적이며, 옛사람 부패성적인 것, 즉 세상과 세상 것을 가지라고 하는 가르침을 비진리요 마귀적이라고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런 것을 구하는 것은 자기 속에 옛사람이 주격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옛사람이니 새사람이니 하는 게 없고 선악과 따먹은 정신으로 사는 건데, 이걸 신앙의 입장에서 말을 하자면 불신자들은 옛사람으로 사는 거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 속에는 새사람과 옛사람이 있는데, 이는 두 존재를 말함이 아니라 두 성분을 말하는 거다. 새사람은 아버지의 뜻을 구하고 성령의 일을 생각하지만 옛사람은 세상 것에 대한 것, 일에 대한 것, 덩어리 큰 것에 대한 것, 종교 사업적인 것을 구한다. ‘어떻게 하면 종교적 사업을 크게 이룰까?’ 하는 건 옛사람 부패성적인 생각이다.
예수님은 이런 걸 가르치지 않았고 이런 걸 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헤롯이 46년간 리모델링한 성전을 주후 60년경에 로마군인들을 불러서 부숴버렸다. 그런데 마지막 시대의 세상 속화된 거짓 신앙자들은 부서질 것을 구하고 있고 건설하고 있다. 계:에 큰 바벨론 성이 나오는데, 이걸 신앙 사상으로 말하면 큰 음녀인데, 예수 믿으면서 세상을 사랑하고, 예수이름으로 세상의 소원 목적을 구하며 종교적인 업적을 쌓으면서 신앙정조를 팔아먹는 사상을 큰 음녀라고 한다.
예수를 믿는 것은 인격적 결합적으로 주님의 정신 사상 속으로 들어가는 건데 예수이름을 불러서 종교사업 건설을 하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다. 이런 정신으로 예수를 믿게 되면 비진리로 인해 성장성이 죽어버리고, 이는 곧 사단 마귀가 펼쳐놓은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니, 이렇게 되면 비진리적 이질적인 곳에서 열심히 충성봉사를 하다가 신앙은 한 치도 자라지 못한 채 기형적인 신앙이 되어서 결국은 그 신앙으로 죽게 된다.
중생된 영이 들어있고 예수를 바로 믿고자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충성봉사를 많이 할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바로 믿어볼까?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만들어져볼까?’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자기 속에 이런 신앙의 욕구가 있다면 자기 자신이 오늘날까지 어떻게 예수를 믿어 나왔는지 대강은 알 수 있다. 진리의 빛이 들어가면 사망과 생명이 드러나게 되어있고, 참과 거짓이 드러나게 되어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이 신앙 면에서 죽었다면, 다시 말하면 이룰구원을 이루지 못하고 산다면 지옥에 가는 거냐? 그게 아니다. 어떻게 믿던 한 번 영이 중생한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왜 그러냐? 기본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자기의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던 자기의 영이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살아났으면 이 영은 절대로 죽지 않는 하나님의 생명을 입었기 때문에 절대로 다시 죽지 않는다. 다만 성장적인 면에서 자라지 못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되면 예수를 믿으면서도 영능의 실력이 없다. 영적인 기능과 지능 면이 성장이 안 됐기 때문에 멍텅구리다. 그러니 이단자들을 만나면 이길 도리가 없다.
영적인 면의 죽음은 영원히 간다. 이룰구원 차원에서 실력적으로 자라지 못했다면 못 자란 것만큼 죽음 저 너머에 가서도 못 자란 그것이 영원히 가는 거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영능의 실력이 자란 것이, 앞선 것이 천국에서도 영원히 자기의 영광이고, 자기의 축복이 되는 거다. 이런 면으로 볼 때 우리 하나님은 실력위주로 판단을 하심을 알 수 있다.
세상도 보면 실력위주다. 세상의 입장에서는 이게 옳은 거다. 아무리 머리가 좋을지라도 자기 집이 가난해서 대학을 못 다녔다면 직장에서 월급이 적다. 죄악세상은 이런 거다.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기 때문에 불공평하다고 말할 게 아니다. 그래서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노래가 있는 거다. 그러면 우리에게 이런 것을 왜 보여주는 거냐? 신앙 면에서도 성장을 하라는 거다.
‘내가 저희의 말거리가 되었나이다.’ 다윗의 심정을 모르는 악한 자들은 자신들의 영적 신앙상태를 모른 채 하나님 앞에 의인의 신행(信行)을 말거리로 삼더라. 장난거리로 삼더라. 세상 속화된 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상태를 모른 채 바른 말을 하는 의인들의 험담을 하고 깎아내리는 일을 한다. 이런 자들은 세상 육에 대한 것, 세상생활에 대한 것을 두둔하는 말을 한다. 무슨 뜻이냐? ‘네가 예수를 어떻게 믿었기에 아직까지 부자가 안 됐느냐? 네가 예수를 어떻게 믿었기에 하나님의 축복을 못 받아서 교회가 찌그러졌느냐?’ 이런 말을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면 이건 예수를 깎아내리는 말이 되는 거다. 왜 그러냐? 이들의 말대로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에 앞서서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기도를 했는데도 그 응답이 안 와서 죽었으니까 이것을 표면적으로 보면 예수는 믿음이 없어서 죽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 삼아서 그것을 신앙시 하면서 그 위주로 신앙을 몰고 나가게 되면 예수님에게 욕을 하는 셈이 되는 거다. 오늘날 이런 식의 신앙으로 나가는 사람이 한 두 명이냐?
예수 믿으면서 왜 하나님을 인간 자기 위치로 끄집어 내리느냐? 왜 설교로 하나님을 자기 차원으로 끄집어 내리느냐? 왜 신앙 사상적으로 하나님을 땅으로 끄집어 내리느냐? 네가 이 죄를 아느냐? 하나님을 인간 네 차원으로 끄집어 내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사를 인간 자기의 사고방식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말씀 속에서 그 분의 마음을 보지 못하고 ‘먹고 마시고, 부자 되고, 응답 되고, 크게 되고’ 이런 것을 해 주는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하나님을 땅으로, 인간 자기 차원으로 끄집어 내리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과 세상 것을 이뤄달라고 예수를 부른다면 이는 예수님과 의사적 대립성이요 예수에게 욕을 하는 셈이다.
마:에서 마귀가 예수님에게 천국을 자랑했느냐, 세상 것을 자랑했느냐? 세상 것이다. 그러니까 이치적으로 보면 세상과 세상 것을 구하라고 하는 자들은 마귀의 종이요, 사기꾼이요, 거짓 목자가 분명하다. 그런데도 이 사실을 모른 채 계속 그러고 있다면 너는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도 억지로 못하는 거다.
‘다른 교회는 다 이렇게 하는데 너희 교회는 왜 그렇게 안 하느냐? 다른 교회는 다 12월 31일 날 예배당에 모여서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일 년 내내 지은 죄를 회개하고 새 각오와 새 마음을 다지는데 너희 교회는 왜 그렇게 안 하느냐? 오늘날 다른 교회는 다 축복을 받아서 잘 살고 만사형통되라고 하는데 너희 교회는 왜 그렇게 안 하느냐? 이단이 아니냐?’ 라고 하는 게 하나님을 땅으로 끄집어 내리는 거다.
이단이 뭐냐? 거짓이 뭐냐? 목사님들도 이걸 잘 모른다. 주님과 맞지 않는 것은 그 성질, 그 성격, 그 성분이 하늘나라에 못 들어간다. 따라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자랑하고, 가지라고 하고, 가지려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다 이단이요 거짓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도 이런 요소가 남아있기 때문에 마지막 날에 성도들을 부활을 시키는 거다. 부활이란 하나님을 닮은 것만, 하나님의 속성으로 닮은 것만 가지고 올라가게 하려고 체로 거르는 것과 같은 거다.
성경에 보면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게 하겠다는 말씀이 있다. ‘진리이치를 깨닫는 면에 얼마나 많이 깨달았느냐? 머리냐, 중간쯤이냐, 꼬리의 맨 끝이냐?’ 이게 있는 거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도 오늘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깨달아서 앞서 가는 일에, 주님을 닮는 일에 왜 그렇게 멍텅구리 짓을 할까? 왜 모를까? 왜 무식할까? 왜 이치를 무시할까?
비진리자들이 세상 복을 구하는데, 그러면 세상의 것을 구해서 세상 복을 받은 게 있느냐? 자기들의 말대로라면 자기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세상의 복을 받은 게 없다면 자신들부터 가짜다.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세상의 복을 많이 받았기에 그런 말을 하는 거냐? 그런 말을 한다면 적으나마 한국에서 제일 부자가 된 후에라야 그런 말을 해도 조금은 알아줄 것이 아니겠으며, 또한 세계적으로 제일 갑부가 되어야 나중에 자기가 가진 것이 다 불에 타버릴지라도 그 말이 먹힐 게 아니겠느냐?
성경에서 복이 있다는 것은 먹고 마시는 소유적인 것을 두고 하는 말이냐,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냐?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복되다. 너는 복되다’ 하는 것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참 복은 사람이다. 말씀을 가지고 내적으로 교양과 덕을 쌓는 것이 참 복된 사람이다. 이런 복된 사람이 가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따라 붙는다. 보호를 하신다.
성경에 보니까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여자 중에 너는 복을 받은 자다. 은총을 받은 자다’ 라고 했다. 왜냐? 마리아로 통해서 아기예수가 탄생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 믿음의 이치를 보여준다. 이 마리아가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느냐? 누구만 안고 있느냐? 아기예수를 안고 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안고 있는 게 복이다. 마리아의 이 복을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자랑하고 있다.
‘우리교회에서는 하는데 저 교회는 왜 바자회를 안 하지? 저 교회는 왜 추도식을 안 하지?’ 이런 말들은 진리를 조롱하는 소리다. 예수를 짓밟는 소리요, 주님이 잘못됐다고 하며 주님의 뺨을 치는 짓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말씀을 뒤집는 소리다. 성경은 하늘나라의 것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주고자 하고, 이것이 복이라고 하는데 거짓된 자들은 이것을 세상 것으로 뒤집어 놓는다. 이건 사단 마귀의 수법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이런 종들이 엄청나게 많다. 이런 자들이 주류가 되어버렸다. 단체도 크다.
12절: ‘성문에 앉은 자가 나를 말하며 취한 무리가 나를 가져 노래하나이다.’ ‘성문에 앉은 자들’이란 신분이 높은 상류계급을 말한다. 성문에서는 사회적인 문제나 종교적인 문제를 토론하기도 하고, 재판을 하기도 하고, 여론수렴의 장소이기도 하다. ‘취한 무리’란 신분이 낮은 하류계급을 말한다. 그 날 그 날 목적 없이 먹고 마시며 제 멋대로 사는 자들을 말한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 성문에 앉은 높은 지도자들이나 신분이 낮은 자들이 똑같이 진리성도 다윗을 가지고 놀더라.
다윗은 장난감 같은 새총을 가지고 골리앗을 물리쳤는데, 골리앗이 이 다윗에게 죽기 전에 다윗을 향해 ‘내 주먹 한 방이면 뻗어버린다느니, 장난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자기와 싸우려고 하느냐?’는 등의 말을 한 것은 다윗을 업신여기고 놀림감으로 삼은 거다. 이것은 오늘날 자기를 김다윗이니, 조다윗이니, 박한나라느니, 김한나라느니 하고 개명을 해서 하나님을 놀리고 끄집어 내리는 것과 같은 거다.
자기의 이름이나 자식의 이름을 성경의 신앙의 선조의 이름을 따서 지었느냐? 그렇다면 그 사람의 속이 성경 속의 신앙의 조상과 같은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지은 거냐? 자식의 이름을 신앙의 조상의 이름으로 지었다면 먼저는 부모부터가 자식을 그렇게 기를 수 있는 신앙을 가졌느냐? 부모부터가 그런 신앙이 아니면서 자식의 이름을 성경의 신앙의 선조의 이름을 따서 짓는 것은 그 사고방식이 미신적이다.
사람은 이름이 아니라 성품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사람의 이름을 보는 게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 가룟유다는 ‘여호와를 찬양하다’ 라는 뜻인데, 그의 속을 들여다보면 돈 때문에 예수를 팔아먹는 정신이 들어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으면서도 돈 욕심이 많은 사람은 자기의 이해타산에 의해 반드시 예수를 팔게 되어있고 신앙정조를 팔게 되는 거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이 가룟유다는 돈 욕심 때문에 예수를 팔아먹고 지옥에 갔다고 말을 하면서 자기도 돈에 대한 욕심을 품고 있다면 자기 말대로라면 이 말을 하는 자기도 지옥에 간다는 말이 돼버리고 만다.
믿는 사람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진리이치를 깨달으면서 구별하고 분별하여 바른 지식을 가지고 주님의 거룩성을 닮아가려고 하지는 않고 맨 달라고만 한다면 이런 욕심쟁이가 어디 있느냐? 이건 신앙이 아니라 주님께 데모를 하는 격이고, 정말 막 돼 먹은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활동을 하실 때 유대인들은 모이면 나사렛 예수 얘기다. ‘예수는 나이가 30세 정도밖에 안 된 것 같은데 자기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고 하네’ 라고 말을 하면 이걸 듣는 사람은 ‘저런 고약한 놈이 어디 있느냐?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라고 한다. 또한 ‘헤롯이 46년 동안 지은 성전을 헐면 예수 자기가 3일 만에 다시 짓겠다고 한다. 참 웃기는 사람이다. 정신이 어떻게 된 것 같다’ 라는 등의 말을 한다. 예수님께서 그런 일을 행하실 때는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적인 뜻이 있는 것이니 ‘예수님께서 무슨 뜻으로 그렇게 하시는 거지?’ 라고 하면서 그 속의 뜻을 알려고 해야 하는데 이건 없이 액면 그대로 알아듣고 그런 말들을 하는 거다.
그러면 오늘날 기독자들은 어떠냐? 성경을 액면 그대로 믿으면서 ‘예수님께서 능력을 행하셨으니 나에게도 그 능력을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셨으니 나에게도 병 고치는 능력을 주옵소서’ 라고 하지 않느냐?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렇게 예수님을 따라 하라는 뜻으로 그런 일을 하신 거냐? 성경을 이런 식으로 보는 것은 네가 성경을 본다마는 눈이 감겼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께서 ‘이리 와서 네 눈을 고치자’ 라고 하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교인들처럼 ‘아니요. 나는 눈을 떴습니다’ 라고 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이단들만 엄한 소리를 막 하는 거냐? 오늘날 교회도 거의가 그렇다. 교회에서 ‘평화’니 ‘평안’이니 말은 잘 하는데 일반적인 개념을 가지고 그런 말을 하고 있다. 어떻게 아느냐? 목사들이 거짓된 이방 종교인들과 악수를 하며 같이 놀고 있지 않느냐? 하나님이 돌부처와 같이 앉아서 평화를 논하겠느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의 뜻과, 세상이 말하는 평화의 뜻이 같으냐? 이런 게 뭘 의미하는 거냐? 비인격적인 돌과, 인격자이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앉혀놓고 대화를 하라는 식이다. 오늘날 교회들의 신앙의 사고방식이 이렇게 돼버렸다.
예수님을 믿는 어부는 목사님을 불러서 고기가 잘 잡힐 수 있도록 그물에 안수를 해 달라고 한다. 돼지를 키우는 시골의 믿는 사람은 목사님을 불러서 자기 집 암퇘지에게 안수를 해서 새끼를 많이 낳게 해 달라고 한다. 불도저를 사서 사업을 하려는 집사님은 목사님을 불러서 고장도 안 나고 일거리가 많게 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도록 불도저에 안수를 해 달라고 한다. 이런 게 다 예수님을 가지고 노는 거다.
오늘날 교회의 속화된 지도자들이 예수를 세상 쪽으로 끌고 가서 이방 종교인들과 한 자리에 앉아서 예수이름을 가지고 놀고 있다. ‘예수정신이 어떻다네. 부처의 정신이 어떻다네. 둘 다 똑같이 사랑과 자비와 희생의 분이니 우리도 그걸 본받아서 같이 일을 합시다’ 라고 하는 게 무슨 말이냐? 이건 예수를 가지고 노는 거다. 왜 예수님을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 끄집어 내리느냐?
성경에 고아와 과부들을 도우라고 했는데, 이 말이 교회가 바람을 피워서 낳은 아이들을 데려다 키우라는 거냐? 이런 일을 하는 게 기독교냐? 성경에서 말하는 고아가 뭔지 아느냐? 세상에서 버림받은 고아를 말씀하심은 신앙 사상적으로 뭘 말하는 거냐?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를 어디로 끌고 다니느냐? 정신 사상 면에서 세상이라고 하는 골목으로 끌고 들어가서 ‘아파트 한 채를 달라. 자가용을 한 대 달라’ 라고 공갈 협박을 하고 있는 게 아니냐?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면 밥 안 먹는다’ 라고 하며 금식기도를 하는 게 아니냐?
구약에 보면 성소의 법궤 앞에 회막이 가려져 있고, 이 앞에 금으로 입혀진 향단이 있는데, 아침 저녁으로 제사를 드릴 때 이 향단에 분향을 한다. 그리고 계:에 보면 금대접에 담겨서 올라가는 기도가 있다. 금이란 귀하고, 변질이 없고, 영원한 것을 말한다. 그래서 금대접에 담겨서 올라가는 기도를 값진 기도라고 하는 거다. 금은보화는 아무래도 고급의 그릇에 담는다. 같은 금이라도 고급의 그릇에 담아놓으면 더 귀하게 보인다. 같은 금을 종이로 싸 놓으면 가치가 없이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금이 실질적으로 가치가 없어지는 거냐? 그렇지 않다. 금은 그 자체적으로 가치가 있는 거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아야 한다.
오늘날 세상 속화된 기독교인들이 자기의 말을 안 들어주고, 자기의 기도를 안 들어준다고 예수님을 두들겨 패고 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인간들에게 얻어맞을 일을 했느냐? 기본구원에 대한 감사만 생각해도 온 몸이 입이라도 그 감사를 다 할 수 없다. 이것만 아니라 이룰구원에 있어서 영능의 실력자가 되라고 사건 환경을 동원시키고, 물질을 동원시키고, 사람을 동원시키고, 세상만물을 다 동원시키고 있는데도 이에 대한 감사가 없이 ‘더 큰 것, 더 큰 것’ 하면서 목구멍에 욕심만 가득 차 있고, 똥만 가득 차 있으니 이런 불타질 세상 것을 향단으로 가지고 가서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느냐? 안 된다. 이런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가는 그 자리에서 즉사다.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 올렸다가는 즉사다.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향기로운 제물 외에 다른 불은 못 드린다. 내 속에서 똥냄새가 올라간다면 하나님께서 그걸 받으며 좋다고 하시겠느냐? 이런 기도는 아무리 해도 네 신앙은 죽었다. 상달이 되지 않는다. 상달이 안 된다는 것은 네 신앙 믿음이 성장이 되지 않는다는 거다. 응답이 있는 기도는 성장이 되게 되어있다. 소원을 들어주게 되어있다. 네가 영능의 실려만 가져봐라. 그러면 뭐가 없겠느냐? 반대로 신앙이 크지 못하고 실력도 없다면 하나님께서 뭘 맡기시겠느냐?
목사님 중에도 ‘꼭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나? 일반 도덕적인 죄만 안 짓고 적당히 믿고 살면 되지 어떻게 예수정신만 가지고 세상을 사느냐?’ 라고 말하는 분이 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왜 예수를 믿는 거냐? 자기가 원하는 복을 달라고 믿는 거다. 굉장히 어리석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도 자기 손으로 부지런히 일을 해서 먹고 마시고 사는데 예수 믿는 사람 속에 도둑이 들어있고 게을러서 자기는 아무 것도 안 하면서 안 믿는 사람들이 원하는 세상의 복을 예수님께 자꾸 달라고 한다면 안 믿는 사람들이 이걸 보고 얼마나 욕을 하겠느냐?
목사의 입에서 꼭 말로 ‘예수정신만 가지고는 세상을 못 산다’ 라고 하는 것만 아니라 정신 사상을 가지는 게 맨 세상 것이라면 이 사람의 신앙은 ‘예수정신만 가지고는 세상을 못 산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거다. 이런 사람은 자동적으로 교인들을 인본주의 세상주의 사고방식으로 가르치게 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의 성격이나 성질이 예수님의 지혜지식으로, 예수님 도덕성으로, 예수님의 능력성으로 바꿔지고 채워지는 것이요, 이렇게 되는 것이 영원히 효력이 있는 참 영광이요 자기의 참 실상임에도 오늘날 교회 지도자로부터 평신도까지, 심지어 이방 종교인들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놀고 있다. 예수님이 이런 대접을 받고 있다. 예수님과 같은 신앙사상을 보기 힘들다는 말이다. 마지막 시대일수록 더 그렇다.
우리는 이런 때일수록 자기를 쳐다보면서 자기 속이 얼마나 변질이 되어있고, 예수님의 것이 얼마나 들어있는지? 수 년 수십 년 동안 예수를 믿었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나보다 앞서서 달아나고 있고 성장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을 해 봐야 한다. 자기는 뭘 하느라고 못 자라고 있는 건지? 어디서 뭘 먹고, 뭘 하고 있는지 생각을 해 봐야 한다.
어느 교회이건 성경을 가졌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본질의 교훈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외형적으로 크고 많고 화려할지라도 본질이 아니라면 질적인 면에서 기독교가 아니다. 간판, 명칭, 호칭은 기독교일 런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알아줄 런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네가 누굴 닮았느냐?’ 라며 신앙의 질을 보신다. 안 닮았으면 얻어맞는 거다. 사건이 와서 두들겨 팰 것이고, 믿음이 있다고 하는 내가 어느 장소에서 ‘나는 이런 사람이요’ 라고 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나타내게 하신다.
창세 시대의 하나님은 영원 전에 계셨던 그 하나님이요, 이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역사하고 계신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안 죽었다. 살아계신다. 어디에? 하늘나라에, 또한 내 안에 계신다. 인격적 애정적 결합적으로 내 안에 계신다. 이 분과의 결합은 본질이라야 되는 거지 본질이 아니면 안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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