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시69:19)주께서 나의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열려라 에바다 2025. 9. 1. 10:22
(시69:19)주께서 나의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궁극이추천 1조회 3625.08.31 08:44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69편 19절: 주께서 나의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내 대적이 다 주의 앞에 있나이다.


세상에는, 첫째는 바른 신앙으로 천국을 소원 목적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있고, 두 번째는 예수를 믿지만 세상을 소원 목적하는 속화된 기독교인이 있고, 세 번째는 예수를 안 믿고 세상을 소원 목적하며 사는 불신자가 있다.


‘주께서 나의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훼방’의 일반적인 뜻은 헐뜯고 비방하고 방해하는 거다. 그런데 다윗이 ‘나의 훼방’이라고 했는데, 누가 다윗을 헐뜯고 물어뜯는 거냐? 자기를 물어뜯을 때는 옆에 있는 사람이 물어뜯느냐, 멀리 있는 사람이 물어뜯느냐? 옆의 사람이 물어뜯는다. 그렇다면 다윗을 물어뜯는 옆의 사람이란 앞에서 말한 몇 번째의 사람이겠느냐? 두 번째의 사람이다. 세 번째의 전혀 안 믿는 사람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첫 번째의 사람은 ‘네 의사와 네 사고방식은 틀렸으니 바로 깨닫고 하나님의 의사대로 만들어지자’ 라고 한다. 그러나 두 번째의 사람은 예수는 믿지만 그 사고방식은 안 믿는 사람의 소원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인간적인 생각으로 보게 되고, 세상 인간적인 주장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첫 번째의 사람은 성경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는 거고, 두 번째의 사람은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


첫 번째의 사람이 두 번째의 사람을 보고 ‘너는 성경을 잘못 본다’ 라고 말을 하면 두 번째 사람은 ‘너만 제일이냐? 어떻게 예수를 꼭 성경대로만 믿느냐? 그렇게 믿어서 세상을 어떻게 사느냐?’ 라는 식의 반응을 하면서 첫 번째 사람을 자꾸 헐뜯는다. 그러냐? 그런데 나는 나름 성경대로 살고 있는데도 마음 편히 잘 살고 있지 않느냐? 오히려 내 쪽에서 두 번째의 사람들에게 ‘너는 세상을 소원 목적하며 예수를 믿으며 잘 먹고 잘 산다고 하면서 왜 그렇게 마음에 고통이 많으냐? 네 소원대로 잘 먹고 잘 살면 마음이 편해야 할 게 아니냐? 그런데 왜 지옥으로 사느냐? 이걸 어떻게 해석을 할 거냐?’ 라는 말을 한다.


‘수치’가 뭐냐? 부끄러움을 주는 거다. 그러면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무엇을 자기의 수치로 여기느냐? 사람이 옷을 벗고 있으면 수치스럽느냐, 대담해지느냐? 수치스럽다. 왜 그런 거냐? 이게 뭘 의미하는 거냐? 이것을 신앙의 정신세계로 끌고 와서 생각해 봐라. 신앙적인 깨달음의 옷을 많이 입고 있으면 부끄럽지 않지만 깨닫지 못한 것은 옷을 입지 않은 것과 같아서 부끄럽다. 모르면 부끄럽다. 아무리 옷을 잘 입었어도 신앙 면에 깨달음이 없으면 부끄럽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에게 이단자들이 와서 성경구절 대면서 말을 하는데 내가 성경을 모르면 뭐라고 대꾸를 할 거냐? 이러면 얼마나 부끄럽겠느냐? 양심이 증거를 한다. 우리교인들은 진리이치를 못 깨닫는 것이 부끄러운 것인 줄 알아야 한다. 말로 ‘예수를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진리이치를 바로 깨달아서 생활 속에서 말씀을 적용을 하며 연관을 지어나가야 한다. 이게 실력이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도 악한 자들로부터 수치를 당할 수도 있는 건데, 자기가 몰라서 수치를 당할 수도 있고, 아는 데도 상대 쪽에서 무턱대고 일방적으로 수치를 주는 것도 있다. 바로 믿고 나갈 때 이런 일을 당한다면 그들을 잡고 싸우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려라.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역사를 하시나?’ 하고 기다리면 보여주신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신앙실력이 있는 상태에서 기다림이 되어야지 실력이 없으면 속에서 자기 성질이 튀어나오고 만다. 이러면 또 부끄러워진다.


‘능욕’은 뭐냐? 업신여기고 욕보이는 거다. 마치 여자를 강간하듯이 업신여기고 욕보이는 게 능욕이다.


‘주께서 나의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이 말은 성도다윗의 훼방과 수치와 능욕은 곧 주님의 수치와 훼방과 능욕이라는 말이다. 진리성도가 왜 이런 일을 당하는 거냐? 진리 때문에, 구원 때문에 당해야지 자기가 몰라서라거나, 거짓말이나 하고 게을러서 당한다면 이것은 예수님이 당하는 것과는 다른 거다. 자기가 진리말씀으로 자라가는 상태에서 큰 잘못이 없는데도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당할 수 있다. 이 때 ‘내가 잘못한 게 뭐가 있느냐?’ 라고 하며 대립적으로 나가면 안 된다. 이건 이미 지고 들어가는 셈이 된다. 이럴 때일수록 자기가 자기를 잘 다스려야 한다.


본 절에서 다윗이 말하는 수치와 훼방과 능욕이 육적인 개념이냐, 영적인 개념이냐? 다시 말하면 인간 자기의 잘못으로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받는 거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받는 거냐? 이것에 따라 영적인 것이 되기도 하고, 육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자기의 잘못으로 인해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받는다면 이것은 육적인 거냐, 영적인 거냐? 육적인 거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해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받는다면 영적인 차원이다. 그러면 어느 쪽으로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받을 때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느냐? 영적인 차원으로 받을 때다.


그러면 자기가 행동적으로나 활동적으로나 말이나 가치판단 평가적으로 자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해서 육적인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받을 때 기도를 해야 되겠느냐, 기도는 안 하고 남 잡고 싸워야 되겠느냐? 기도를 해야 한다면 무슨 기도를 해야 할까? ‘저 사람이 나를 자꾸 두들겨 팹니다. 하나님, 저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려 주십시오. 눈알이 빠지게 해 주십시오’ 이래야 되겠느냐, 아니면 ‘영적인 차원에서 어리석고 못난 나로 인해 주님의 얼굴에 더러운 칠을 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내가 이렇게 어리석어야 되겠습니까? 나를 가르쳐 주시고, 바로 만들어 주시고, 능력 있는 자로 만들어 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해야 되겠느냐?


후자의 기도를 하게 되면 그 마음이 하나님 앞으로 모아져서 시간만 있으면 하나님의 뜻을 찾느라고 성경을 보게 된다. 자기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하면서 성경을 한 장도 안 본다면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겠느냐? 예수님을 믿으면서 날이 갈수록 철 든 생각이 나와야 하나님께서 어여삐 보신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를 돌아보면서 ‘내가 이렇게 살아야 되겠나?’ 하고 자기를 책하며 바로 살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참 성도는 날마다 신앙으로 전진이다.


성경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영이 중생된 성도들이 성경을 가지고 보는 선과 악이 있고, 믿지 않는 세상사람들이 인간들의 법과 양심을 기준으로 보는 선과 악이 있다. 용어가 같다고 해서 뜻이 같은 게 아니다. 우리는 시편을 보면서 이런 걸 많이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본문을 볼 때도 진리신앙 노선의 참 길을 가는 성도다윗의 입장에서 보는 원수관과, 세상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는 원수관을 구별해야 한다.


이런 것이 구별이 안 되면 거짓 종들이 교회 안에서 성경을 들고 세상의 소원과 목적으로 설교를 할 때 이것이 비진리요 세상에 속한 것인 줄을 모르기 때문에 이 말을 듣는 성도들의 신앙은 다 죽고 만다. 일반화로 돌아간다. 이건 세상 판이지 하나님 뜻에 합당한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적이며 하나님과 의사단일성적인 신앙이 아니다.


맨 앞에서 말한 두 번째의 사람들은 예수이름을 가지고 세상을 가르치는데, 이는 이리가 양의 가죽을 둘러쓰고 교회 안으로 들어온 셈이다. 그리고 첫 번째의 사람과 두 번째의 사람을 겉으로 볼 때는 다 영이 중생된 교회이지만 첫 번째의 사람은 질을 말하지만 두 번째의 사람은 외모 모양을 말을 한다. 그리고 세 번째의 사람은 아예 하나님을 모르니까 성경을 들고 다니지도 않고 성경을 보지도 않는다.


두 번째의 사람은 세 번째의 사람에 비해 예수를 믿는 것만 다를 뿐이지 그 중심은 세 번째 사람과 같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자꾸 ‘크게 크게. 축복 많이 주옵소서. 헌금을 내면 더 많이 주시겠지’ 라는 물질적 소원 목적의 사고방식으로 되어있다. 이건 거짓 교인이다. 그리고 두 번째에서는 세상 복을 많이 받고 종교적 사업과 업적을 크게 이루라고 하는데, 첫 번째에서는 네 중심 사상과 성격과 성질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 성격 성질 소원 목적으로 고치라고 한다. 왜 고쳐야 되는 거냐? 하나님이 계시는 신령천국은 모든 존재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입었다.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된 것만 들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신령천국에 들어갈 자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거다.


두 번째에서는 예수는 믿지만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이 없다. 세 번째의 성격 성질과 같아서 제 마음대로 믿는다. 교회도 가고 싶으면 가고, 말고 싶으면 말고 이런 식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떠돌이 교인이 수없이 많다. 자기 마음에 들면 붙어있고, 뭔가가 틀어지면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그러나 첫 번째에서는 떠돌이 교인이 있을 수 없다. 진리본질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어디로 가겠느냐? 진리를 떠나서 어디로 가겠느냐?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런 신앙의 질을 모른다.


‘내 대적이 다 주의 앞에 있나이다.’ 성도다윗의 원수들이 누구 앞에 있다? 주의 앞에 있다. 그러면 맨 앞에서 말한 첫 번째의 사람으로 살고 있는 다윗으로서 어떤 원수를 말하는 거겠느냐? 두 번째 사람이냐, 세 번째 사람이냐? 첫 번째 사람은 진리본질의 신앙으로 살지만 두 번째는 이질로 사는 거다. 곧 세상적이다. 인본주의다. 육적이다. 마귀적이다. 옛사람 부패성적이다.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세상과 세상 것인데, 이런 것은 아무리 채워도 결국은 끝에 가서는 다 불에 타진다.


세 번째의 사람은 하나님 없이 세상 육적으로 사는 자들이기 때문에 첫 번째의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은 원래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니 그들을 원수로 여길 일은 아니다. 다만 두 번째의 사람은 첫 번째의 사람처럼 살지 않음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첫 번째로 사는 사람을 훼방하고 수치를 주고 능욕을 하기 때문에 첫 번째의 신앙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두 번째의 사람이 원수가 되는 거다.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고, 썩지 않을 생각이 들어있고, 영원히 가는 생각이 들어있고, 영원히 가는 이해타산 평가성이 들어있다. 이게 진리의 성도고, 이게 참 믿음이고, 이게 참 성도고, 이게 참 능력자다. 이런 사람은 죄의 유혹과 미혹을 받지 않고 이긴다. 사망적인 생각, 여러 가지 사망적인 취미나 소원 목적을 이긴다. 죄를 이기는 게 능력이다. 세상사람들은 아무리 대학물을 먹고 학박사라고 해도 죄에 그대로 감염되어 있고, 그 사고방식 자체가 세상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에 죄를 이길 도리가 없다.


진리성도에게 원수 짓을 한다면 두 번째 사람이겠느냐, 세 번째 사람이겠느냐? 두 번째 사람이다. 거짓 교회, 거짓 종, 거짓 교인, 거짓 목사가 첫 번째의 진리성도에게 원수 짓을 한다. 대적을 한다. 외모 외형적으로는 첫 번째나 두 번째를 다 교회라고 한다. 성도가 모이는 곳을 유형교회라고 한다. 그런데 그 안을 들여다보면, 첫 번째는 하나님의 본질이요 하나님과 의사단일로 나가는 참 교회요, 두 번째는 외부 모양 껍데기, 예배의식은 첫 번째 교회와 같거나 더 호화찬란하고 더 거룩한 것 같으나 질적으로 보면 첫 번째에 비해 전부가 이질이다. 세상성이다. 오늘날 이런 이질적인 교회가 큰 덩어리가 되니까 진짜처럼 보이는 것뿐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들어가서 사람을 봐야 한다. 그런데 두 번째에서는 인격이 뭔지를 모른다. 그래서 껍데기만 보고 사람을 단정을 한다. 이런 교회는 성경을 들고 세상을 가져와서 외부 외모 모양이 큰 것을 자꾸 자랑하고, 그런 것을 가지라고 한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본질로 나가는 거고, 두 번째는 이질로 나간다. 첫 번째는 하나님과 의사단일로 나가고, 두 번째는 하나님과 의사단일이 아니라 세상이 들어있다. 하나님과 의사단일로 된 첫 번째는 ‘교회’라고 하지만 하나님과 의사단일이 아닌 두 번째는 교회가 아닌 ‘무리’라고 한다.


교회는 원리 원칙적으로 하나님과 의사단일이어야 한다. 주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주님과 의사단일로 들어가는 것이 원칙이고, 이게 신앙이다. 그런데 이질적인 교회는 하나님과 의사단일이 아니라 제각기 소원 목적이 다르다. 첫 번째에서는 의사단일의 참 복된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거고, 그러니까 사람이 바로 만들어지는 것을 성공이라고 하고, 두 번째에서는 예수이름을 가지고 일 크게, 단체 크게, 큰 것을 성공이라고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사람의 뭘 보시느냐? 만능의 능력자 하나님께서 일을 못해서 두 번째의 사람을 불러서 일을 시키시겠느냐?


주님께서 ‘너희는 나처럼 온전자가 되라’고 말씀을 하셨으니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첫 번째의 길을 가야 하는데, 이 길을 갈지라도 자라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예수 믿는 각 사람마다 빨리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따라오다가 중간에 놀거나 다른 곳을 쳐다보는 사람도 있다. 신앙의 성질이 그렇다. 어찌되었던 빨리 따라오지 못하면 못하는 것만큼 질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빨리 못 만들어진다. 그리고 못 만들어진 것만큼 얻어맞는다.


첫 번째 사람이나 두 번째 사람이 다 같이 예수를 믿지만 서로의 주장성이 다르기 때문에 의사적으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교회 안에서 이 두 사상이 의사성적으로 팽팽하고 싸우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단순히 단체적으로 ‘내 편이냐, 네 편이냐’만 보면서 내 편이 아니면 잘못됐다고 하고 이단시 한다.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사람 중에 어느 쪽을 이단으로 보시느냐? 신앙 질적으로 말하면 두 번째와 세 번째가 다 이단이다. 둘 다 하나님의 본질이 아니라는 말이다.


세상은 언젠가는 다 불에 타버린다. 그러니까 불에 타서 없어질 것을 소원 목적하는 것은 거짓의 사람이다. 세 번째 사람이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두 번째 사람처럼 예수를 믿으면서도 불에 타버릴 세상 것을 소원 목적한다면 이 사람은 세상 것을 아무리 많이 가졌다고 해도 이런 것은 언젠가는 다 불에 타버릴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것을 소원 목적하는 것을 거짓 신앙이라고 한다. 아무리 성경을 들고 말을 해도 불타질 세상 것을 가지라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 되는 거다.


첫 번째는 넓은 길이고, 두 번째는 좁은 길이다. 두 번째의 길로 가게 되면 자기 속을 하나도 안 고친 채 자기 마음대로 예수를 믿을 수 있다. 이렇게 믿게 되면 이 세상에 살면서 사람이 뭐가 되겠느냐? 가정적으로도 뭐가 되겠느냐? 이런 교회나 목사나 자녀나 부모형제들이 볼 게 뭐가 있겠느냐? 사람이 만들어진 구석이 없다. 그러면 첫 번째의 길로 가면서도 사람이 안 만들어진다면 어떻게 되느냐? 두들겨 패서라도 만들어 간다. 그래도 안 만들어지면 결국은 쫓아내 버린다.


첫 번째의 길로 가던 사무엘이 깡패 같은 두 자식을 멀리 쫓아내 버렸는데, 어떻게 보면 아버지가 인정머리가 없다. 그런데 두 번째에는 인정이 많다. 그러나 이런 곳에 있으면 사람이 망해버린다. 인격적 차원에서 쓸모없는 사람이 돼버린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께서도 데려다가 쓸 수가 없다.


짐승들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악해지느냐? 지금의 짐승이나, 십 년 전의 짐승이나, 백 년 전의 짐승의 성격 성질은 그대로다. 짐승들이 반란을 일으키느냐? 짐승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 살고 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과 성격 성질이 문제다. 자기가 잘못해서 자기가 일을 저질러 놓고 남 쪽으로 원망 불평이 들어간다. 이런 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손가락질하며 서로의 것을 뺏으려고 한다. 그러니 얼마나 고통이냐? 왜 이런 거냐? 사람이 바로 안 돼서 그렇다.


사람만 바로 되면 법이 없어도 그 사회는 깨끗하고 바로 돼 나간다. 그러나 세상은 점점 더 악해지기 때문에 세상은 자꾸 법을 만든다. 그러나 아무리 끝 날까지 새로운 법을 만들어도 허점투성이다. 세상에는 절대 완벽한 것이 없다. 우리가 성경의 입장에서 보면 법이 있던 없던 상관없이 사람들이 일반적인 양심이라도 바로 지킨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세상이 된다. 법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사람들이 잘못된 양심을 가지게 되면 판단 평가성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죄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거다.


사람들이 일반적 차원의 도덕성에라도 바로 서 있으면 세상은 사회적으로 건전해진다. 그런데 세상은 돈 앞에서는 양심도 없다. 그러니 점점 더 악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런 걸 보여주는 거냐?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하는 것을 워낙 모르니까 이런 걸 들어서 깨닫게 해 주는 거다. 그런데도 기독교인들이 이걸 모른다.


진리성도 다윗은 진리통치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말씀대로 정직하게 살게 하려고 하는데 세상 인본주의적 악한 신앙을 가진 자들이 이 일을 하지 못하도록 다방면으로 방해공작을 한다. 이게 교회 안의 눈에 안 보이는 싸움이다. 기독교 안의 눈에 안 보이는 이 싸움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교회 안에는 어두움의 권세자들이 언제나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바로 못 믿게 하려고 마음을 빼앗으려고 한다.


‘대적이 다 주의 앞에 있나이다.’ 자기의 대적은 자기 앞에 있는 건데, 본문에 보면 자기의 대적이 다 주의 앞에 있다고 한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다윗은 자기의 대적은 곧 누구의 대적이라는 거냐? 주의 대적이다. 그러니까 진리를 사랑하는 나를 대적하는 것은 누구의 대적이냐? 주님의 대적이요, 또한 주의 대적은 나의 대적이다. 신앙정신 사상 면으로 주님과 나는 질적으로 하나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의사단일성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내 대적이 내 뒤에 있는 게 아니라 주의 앞에 있다고 하는데, 그러면 이들이 누구냐? 이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냐, 안 드리는 사람들이냐?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거짓 교회, 거짓 종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가 질적인 면으로 하나님의 의사단일의 진리본질을 놓고 생각을 하면 틀림이 없다. 성경을 질적으로 보지 않고 글자 그대로 보고 해석을 한다면 ‘내 대적이 다 주의 앞에 있나이다’ 라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을 하게 될까? 자기가 소원 목적하는 세상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으로 말하게 된다.


세상의 일을 크게 하는 것이 주님의 일이라면 만능의 능력자께서 능력이 부족해서 당신의 일을 맡기려고 인간들을 부른 거냐? 일이 목적이라면 부족 투성이인 인간에게 시키는 것보다 당신이 직접 하면 훨씬 더 수월하고 잘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인간들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는 것은 인간에게는 자유성이 있고 심판성이 있으니 인간의 이 자유를 꺾지 않고 깨닫게 해서, 이해를 시켜서, 때로는 매로 때려가면서 당신의 일을 하게 함으로써 인간이 당신의 성품을 닮게 하려는 거다.


이 일에 방해공작을 하는 자들이 다 주의 앞에 있다고 하는데, ‘주의 앞’이라는 것은 예배하는 자리라는 것이고, 성경 보고 찬송을 부르는 자리라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라는 것이고, 교인들 틈에 앉아있다는 것이고, 목사들 틈에 앉아있다는 것이고, 기독교회 안에 있다는 것이고, 직분을 가진 자들 틈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고, 최고의 직분을 가진 자들 틈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고, 직분이 없는 자들 틈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외모 모양이나 명예나 직분을 가지고는 알 수 없는 거고 사람의 속 중심을 보아야 만이 의사적으로 주님과 팽팽하게 대립을 하고 있는 정신 사상을 알 수 있는 거다.


사람의 속 중심을 보는 것은 진리본질을 기준으로 세우고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만드신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 즉 궁극적인 구원을 놓고 인간을 봐야 정확하게 판단을 할 수 있다. 사람의 정신 사상은 일반적인 정신 사상이 있는가 하면, 성령의 눈을 가지고 보는 영적 상태의 정신상태가 있으니 이것을 구별해서 볼 줄 알아야 한다. 세상사람들은 영이 죽어있기 때문에 이런 걸 전혀 못 본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세상 속화된 인본주의적 신앙사상을 가진 자들이 다윗 앞의 대적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또한 주님의 대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교회 교인들의 대적은 누구냐? 집에 가면 맨날 자기를 두들겨 패는 신랑이 자기 대적이냐? 늘 애를 먹이는 자기 자식이 대적이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