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69:19-21)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69편 19절-21절: 주께서 나의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내 대적이 다 주의 앞에 있나이다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19절: ‘주께서 나의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내 대적이 다 주의 앞에 있나이다.’ 오전 시간에 말했듯이 세상에는, 첫째는 바른 신앙으로 천국을 소원 목적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있고, 두 번째는 예수를 믿지만 세상을 소원 목적하는 속화된 기독교인이 있고, 세 번째는 예수를 안 믿고 세상을 소원 목적하며 사는 불신자가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하나님--> 인간--> 물질세상’의 순서로 살라고 하셨다. 인간 나보고 ‘물질세상을 다스려라. 통치하라. 지배하라’고 하셨다. 만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릴 존재는 하나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만물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다스리라는 것은 ‘인간 너는 나를 닮아가라’ 이 말이다. 인간이 이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된다. 이렇게 살아갈 때 행복하고 기쁘고 즐겁고, 이 정신 사상으로 하는 것마다 모두가 영생이다. 다른 말로 하면 모두가 구원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두 번째의 거짓된 신앙은 예수는 믿지만 세상을 소원 목적하고 구하기 때문에 이런 게 없다.
성경에서 ‘복’이라고 할 때는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은 세상을 많이 가지는 것을 복되다고 한다. 세상 것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결국은 불에 탄다. 그런데 거짓 신앙, 거짓 교회, 거짓 목사는 세상 것을 구하게 한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세상 것을 구하게 되면 그 정신 사상이 세상을 닮아간다. 세상욕심이 가득해진다.
처음에 말한 첫 번째의 신앙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으로 가득해지고, 이게 신의 사람이다. 이 사람의 마음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그러나 두 번째 사람의 마음에는 물질이 들어있다. 그러니까 거짓 것이 들어있는 거고, 욕심이 들어있고, 시기 질투가 들어있다. 세 번째 사람은 두 번째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것이 다 들어있다.
두 번째의 사람과 세 번째의 사람이 첫 번째로 들어오면 마음 속에 들어있는 것이 하나님의 것으로 바뀐다. 사람은 자기 속의 것을 첫 번째 것으로 바꿔야 마음이 편하고,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고, 지혜가 생기고, 지식이 있고, 영리하고, 똑똑하고, 꼬리가 안 되고 머리가 된다. 그러나 두 번째와 세 번째로 살면 세상 것을, 물질을 많이 가져야 세상에서 제일이고 머리라고 한다. 하지만 세상 것은 다 불에 타는 거고, 죽을 때 천국에 가지고 가지 못한다. 사람이 죽을 때 왜 입을 딱 벌리고 죽는 거냐? 죽을 때까지 세상 것을 다 못 먹었다는 거다.
사람이 세 번째로 살게 되면 자기 속에 세상 것만 가득 들어있고 세상 것을 구하게 되니 이 사람은 말을 할 적마다 ‘돈 돈’ 하게 되고, 물질을 많이 가지는 것으로 사람을 가치판단 평가를 하고, 사람을 껍데기, 외모 모양을 보고 판단을 한다. 두 번째로 사는 사람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이름을 불러서 세상 것을 갖다달라고 한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정신 사상은 하나님을 자기 종으로 삼고 있는 거다. 이런 사람은 순서적으로 보면 인간 자기가 세상 물질 아래로 들어가 있는 거다.
믿는 사람이 말하는 것을 보면, 기도하는 것을 보면, 설교하는 것을 보면 세상을 자기의 머리로 삼고 사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세상을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고 사는 것은 타락이다. 저주 받은 인간이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인간들의 소원 목적이 이렇게 되어버렸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이름으로 세상 것을 구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정신과 소원 목적이 안 바꿔진 거다. 여전히 세상을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고 사는 거다. 이 사람은 성경을 들고 교회는 다니지만 정신 사상이 타락이 된 거다. 세상사람들은 술 퍼먹고 길거리에서 자는 것을 타락이라고 하는 거지만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와 세 번째로 사는 것을 타락이라고 하신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으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한다면 사람이 안 바뀐 거고, 타락이다.
두 번째의 거짓 교인에게는 하나님의 형벌이 들어가 있다. 이런 사람은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세 번째의 사람처럼 본능적으로 살고 즉흥적으로 산다. 이건 짐승과 다름이 없다. 사람이라면 정신을 바로 가져야 하는데 짐승처럼 본능의 성격 성질을 가지고 사니 편할 날이 없다. 자기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서 산다.
첫 번째의 사람은 내적으로 튼튼하고 모든 사고방식이 건전하다. 그러나 두 번째의 사람은 허풍이 많다. 세 번째로 사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람은 늘 ‘내가 제일이다’ 라고 하며 산다. 자기가 세상 것을 많이 가진 것으로 제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첫 번째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제일이라고 한다. 첫 번째의 사람은 하나님 자랑이고,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사람은 세상자랑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다운 생각을 하는 것이며, 어느 게 참 신앙이겠느냐?
두 번째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첫 번째의 신앙에 들어가지 못한다. 무슨 말이냐? 중생된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건데, 두 번째의 신앙의 교회에서는 중생한 영이 먹을 수 있는 하나님의 진리말씀은 없고 ‘예수 믿으면 병 낫고,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부자 되고,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되고’ 맨 이런 말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닮을 수 없다. 예수를 믿는다면 그 속이 하나님을 닮고 사고방식이 하나님을 닮아야 만이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라는 명령이 수행이 되는 건데 두 번째의 신앙에서는 이 명령수행이 안 된다.
첫 번째 사람도 밥을 먹고, 두 번째 사람도 밥을 먹고, 세 번째 사람도 밥을 먹는다. 예수님도 밥을 먹었다. 그러면 첫 번째 사람은 왜 밥을 먹는 거고, 두 번째 사람은 왜 밥을 먹는 거냐? 사람이 왜 밥을 먹는 거냐? 살기 위해 먹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 짐승은 살기 위해 먹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 인간 자기는 살기 위해 먹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 예수 믿는 사람은 왜 밥을 먹는 거냐?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를 잘 믿기 위해 밥을 먹는다.
예수님께서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셨다. 사람은 일하기 싫으면 안 먹어야 한다. 사람은 먹으니 일을 하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먹었느냐? 그렇다면 예수 잘 믿는 일을 해야 한다. 두 번째의 사람과 세 번째의 사람도 일을 잘 하려고 먹는다. 그러면 우리교회 교인들은 왜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거냐? 하나님의 일을 잘 하려고 먹는 거다.
세상사람들은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는 거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신앙의 원칙을 알아야 한다. 사람에 대한 원칙을 알아야 한다. 안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에 죽는다. 성경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말이 아니다.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보는 종교적인 책과 같은 게 아니다. 하나님의 의사요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니 성경을 해석할 때도 하나님의 의사와 뜻을 찾아야 한다. 이게 성경해석이고, 그 뜻을 내가 가지는 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거다. 자기가 영특해지는 거다.
예수 믿는 자기는 밥 먹고 일을 하고 살면서 무엇에 대해 염려 걱정 근심을 하고 있느냐? 사람은 먹고 마시고 일을 하면서 만들어져야 한다. 먹고 마시느냐? 사람이 자라야 한다. 먹고 마시는데도 사람이 자라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는 거다. 예수 믿으면서 사람이 바로 만들어져야 존귀히 여김을 받는다. 잠:에 금은보화보다 뭘 취하라? 무엇이 자기를 존귀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는지 알아야 한다.
20절: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다윗이 어떤 정신과 마음의 입장에서 이 기도를 하는 거냐? 어떤 마음의 감화성을 가지고 기도를 하느냐에 따라 질이 전혀 달라지고,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기도와, 안 들어주시는 기도로 나누어진다. 그래서 이 기도를 하는 다윗의 정신 사상을 알고 자기도 다윗과 같은 기도를 하면 응답을 받는 거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의 신에 감동이 된 기도다.
본문을 보니 성도다윗의 걱정 근심이 대단히 크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을 자와 안위를 받을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말이 다윗 자기를 보고 하는 말이냐, 남보고 하는 말이냐? 남이다.
부모는 자식 걱정을 한다. 자식은 철이 들어야 부모 걱정을 한다. 그런데 문제는 부모가 자식 걱정을 할 때 이 걱정을 신앙정신을 가지고 보면 세상에서 부자가 되려면 공부를 잘 해야 하는데 자식이 공부를 못하기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다면 부모가 바로 된 걱정이냐, 부모 자신부터 비뚤어진 거냐? 부모 자신부터 비뚤어져 있다. 어디에 비뚤어진 거냐? 세상 법에 비뚤어져 있느냐, 하나님 법에 비뚤어져 있느냐? 하나님의 법이다. 그러니 부모는 이것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다윗이 첫 번째 사람의 입장에서 두 번째의 사람들을 볼 때 이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받을 자가 없음에 걱정이 되겠느냐, 안 되겠느냐? 걱정이 된다. 사실 두 번째의 사람들도 하나님의 긍휼을 받고 사랑을 받을 존재들인데도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살고 있으니 다윗으로서는 불쌍하고 처절하고, ‘저렇게 살다가는 꼼짝없이 짐승처럼 죽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그들을 걱정하는 거다.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는 동안에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처럼 성품이 닮아져서 천국에 올라가서 영원히 살 존재요, 그리고 이 일 후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 불에 태워버리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사실을 모른 채 세상을 소원 목적하며 살고 있다면 첫 번째의 신앙으로 사는 사람으로서는 이들이 걱정이 되고 불쌍한 거다. 자기의 부모형제가 이런 자리에 있으면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 세상이 끝나기 전에, 자기 일생이 끝나기 전에 첫 번째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값진 거다. 보배 같은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런 일을 하는 일꾼들을 바라신다. 세상사람들이 바라는 것과는 다르다.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 받을 자가 없고 하나님으로부터 안위를 받을 자가 없음에 다윗이 염려 걱정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인데, 이 이스라엘 백성이 세상에 속화되어 버렸고, 인본주의, 육본주의, 인간 조작배기 사랑의 신앙이 되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 염려 걱정을 하는 거다.
이런 면으로 볼 때 교회 인도자들은 두 번째의 신앙자들을 하나님 앞에 악한 자로 알아야 하고, 이들이 하나님의 집을 헐어버린다는 것을 알고 이들을 하나님의 성품을 입도록 지도하고 인도해야 되겠는데, 예수님께서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향해 ‘너희들은 전도한다고 사람을 끌어 모아서 배나 더 지옥자식으로 만들어 놓는다’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날 교회들이 성도들을 세상을 소원 목적하게 하고 있으니 이것은 사람을 배나 더 지옥자식으로 만드는 일을 하는 거다. 하나님의 집을 헐고 있다는 것은 거짓 교회들이 성도들에게 세상 것을 주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멍텅구리로 만든다는 거다. 우리는 이런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저렇게 되면 안 될 텐데’ 라고 하며 근심할 줄 알아야 한다.
21절: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이런 말씀을 했다. 그런데 다윗이 십자가에 매달린 일이 있느냐? 안 매달렸는데도 이 말을 하고 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선재적 그리스도로 계실 때 당신보다 먼저 태어난 다윗이 이 말을 한 것이 너무나도 좋은 말이라서 기억을 하고 있다가 다윗보다 나중에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매달릴 때 이 말을 써먹은 거냐?
다윗의 입으로부터 나온 이 말이 누구의 말이냐? 예수님께서 선재적 그리스도로 계실 때 다윗을 감동 감화시켜서 다윗의 입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신 거다. 그래서 이 말씀을 보는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다윗이 한 말을 했다고만 생각할 게 아니라 진리성도 다윗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심령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우리 역시도 그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인간은 자기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 두 번째의 사람은 환경이 와서 지배를 하고, 돈이 와서 지배를 하고, 권력이 와서 지배를 한다. 세 번째의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첫 번째의 사람은 자기를 잘 다스린다. 예수님은 ‘나에게 오는 자의 짐을 가볍게 하겠다’ 라고 하셨는데 두 번째의 사람은 하나님을 불러서 세상의 짐을 자꾸 자기 머리 위에 올려달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성도를 가볍게 만들어 주려고 짐을 내리라고 하시는데 두 번째의 사람은 짐을 자꾸 자기 머리에 이려고 한다.
두 번째의 사람이 지고 있는 짐을 자기 발아래 내려놓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지고 있는 짐을 내려야 하겠느냐, 인간을 올려야 하겠느냐? 사람의 수준을 올려야 한다. 깨달음의 수준을 올려야 한다. 지식의 수준을 올려야 한다. 사람은 못 깨달으면 그 사람 자체가 두 번째로 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두 번째의 사람과 세 번째의 사람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해도 자기 짐을 지고 살게 된다. 우리는 사람의 정신 면을 보는 이치를 알아야 한다. 무당이나 신들린 사람들은 전부가 세 번째의 정신으로 살고 있다. 예수를 믿으면서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도 세 번째의 정신이 들어있다.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쓸개 맛은 지독히 쓰다. 그런데 저희가 이 쓸개를 식물로 준다고 한다. 어떤 저희냐? 훼방꾼들이다. 세상 속화된 채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자들이다. 두 번째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세 번째의 소원 목적이 그대로 들어있는데, 그렇다면 이 두 번째의 사람들이 첫 번째 쪽과 손을 잡기 쉽겠느냐, 세 번째 쪽과 손을 잡기 쉽겠느냐? 세 번째 사람과 손을 잡기 쉽다.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기겠느냐? 두 번째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서 세 번째 사람과 합세를 해서 예수를 죽이게 된다. 항상 그렇다. 세 번째 사람들은 예수를 바로 믿는 사람들을 핍박을 하지 못한다. 바로 믿는 사람을 핍박할 때는 항상 두 번째 사람의 주도 하에 세 번째 사람을 동원해서 핍박을 한다. 그러면 세 번째 사람들이 왜 두 번째 사람들에게 동원이 되는 거냐? 세 번째의 사람들 속에는 두 번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 사상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정신적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이치를 알아야 한다.
쓸개를 식물로 준다는 것은 아침 점심 저녁 끼니 때마다 먹인다는 뜻이다. 즉 쓰디 쓴 고초를 날마다 겪게 한다는 거다. 이런 예를 보면 내 입장에서는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을 첫 번째의 사람으로 가르치고 있는데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이 이질적인 다른 곳에 가서 두 번째 사람들과 손잡고 충성봉사를 하고, 자기 집을 팔아서 헌금을 하고, 끼고 있던 금가락지를 빼서 헌금을 한다면 이건 누구의 노력에 쓴 맛을 보게 하는 거냐? 부모가 공부를 잘 하라고 자식에게 훌륭한 선생을 붙여서 과외를 시켰더니 이 자식이 부모를 배반하고 나쁜 놈들과 논다면 이것은 부모의 정신과 마음에 쓴 고초를 먹이는 거다.
예수님께서 3년 동안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특별히 가룟유다에게 그렇게 돈 욕심을 버리라고 가르쳤는데도 결국은 돈을 받고 스승을 팔아먹을 때 예수님의 마음이 어땠을까? 우리가 볼 때 가룟유다를 칭찬할만하냐, 괘씸하냐? 이처럼 세속화된 인본주의 육본주의의 신앙자들이 신실한 종들의 수고를 헛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이는 쓸개를 먹이는 것과 같은 거다. 정신세계에서 이런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게 인격의 세계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늘나라 천국복음을 땅의 복음으로, 썩어질 것으로 뒤집어 버리니 예수님은 하늘의 것으로 또 뒤집어야 했다. 신실한 종들이 성도들에게 하늘의 것을 넣어놓으니 거짓 종들이 와서 그걸 뒤집어서 세상 것을 넣어놓게 되면 신실한 종들의 수고가 헛되게 된다. 노력을 한 보람이 없다. 이게 쓸개를 먹이는 거다.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은 거짓 종들이 세상으로 뒤집어 놓은 것을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또 다시 천국으로 돌려놓는 일을 해야 한다. 또 하고 또 해야 한다. 그러니 입 안이 쓰다. 목사의 입장에서 맨날 설교를 하지만 교인들이 하나도 안 만들어지고 있으면 입 안이 쓰다.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목말랐을 때 초를 마시면 시원해지느냐? 시원해지기는커녕 속이 탄다. 사람에게 쓸개를 먹이고 식초를 먹이면 그 속이 어떨까? 맛도 고약하지만 이런 것을 받는 사람의 인격적 정신적 느낌이 어떻겠느냐? 또한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놓고 쓸개를 먹이고 초를 먹이는 것은 ‘시다. 어떻다’ 이게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의인을 이렇게 대우하는 악한 자들의 마음상태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큰 사고로 많은 사람이 죽기도 하는데, 천하를 다 주고도 사람의 목숨과 바꿀 것이 있느냐? 사람의 목숨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거다. 그런데 일터에서 사고로 죽는 사람들을 볼 때 일하는 장소나 환경을 보면 보상금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일을 시키는 사람의 마음이 보인다.
예수님께서 악한 자들로부터 고난을 받을 때 이 고난을 당하는 예수님의 마음이 있듯이 진리성도 다윗도 악한 자들로부터 고통을 받을 때의 마음이 있는 거다. 우리 역시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이요 자녀들이라면 다윗과 같은, 예수님과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거다.
주님의 종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 속화된 인본주의 세상주의 육본주의에 달라붙어서 그 일이 더 잘 되게 수종들고 충성봉사하고 있지 않느냐? 두 번째에 속해서 충성하지 않느냐? 예수님 당시에 제자들이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노라고 장담을 하더니 한 제자가 은 삼십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자 다른 제자들은 모두 도망을 가 버렸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주님을 버리고 다 도망을 가 버렸다. 참으로 속이 타고 입 안이 쓰디 쓴 장면이다.
실지로 누가 예수님에게 쓸개즙을 먹인 것은 아니지만 그 사건을 겪는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그렇다는 것을 먹는 맛으로 표현을 하는 거다. 예수님께서 직접 이 말씀을 안 했지만 우리는 그 느낌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어린아이가 몸이 아파서 끙끙 앓으면서 열이 펄펄 나면 어머니는 그 아이의 아픔을 느낌으로 느끼는 것처럼 사람은 마음적으로 다른 사람의 언행심사를 보고 느낌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이 있는 거다.
유대인들은 모세 때부터 예수님 출생 때까지 약 2천 년 동안 자신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가 왔지만 죽여 버렸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라고 밤낮으로 제자들을 가르쳐 놓았더니 한 제자는 돈을 더 사랑해서 스승을 팔아버렸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가 고난을 받으니 다른 제자들은 자기 죽을까봐 다 도망을 가버렸으니 예수님은 입 안이 쓸 수밖에 없구나.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19절: ‘주께서 나의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내 대적이 다 주의 앞에 있나이다.’ 오전 시간에 말했듯이 세상에는, 첫째는 바른 신앙으로 천국을 소원 목적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있고, 두 번째는 예수를 믿지만 세상을 소원 목적하는 속화된 기독교인이 있고, 세 번째는 예수를 안 믿고 세상을 소원 목적하며 사는 불신자가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하나님--> 인간--> 물질세상’의 순서로 살라고 하셨다. 인간 나보고 ‘물질세상을 다스려라. 통치하라. 지배하라’고 하셨다. 만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릴 존재는 하나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만물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다스리라는 것은 ‘인간 너는 나를 닮아가라’ 이 말이다. 인간이 이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된다. 이렇게 살아갈 때 행복하고 기쁘고 즐겁고, 이 정신 사상으로 하는 것마다 모두가 영생이다. 다른 말로 하면 모두가 구원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두 번째의 거짓된 신앙은 예수는 믿지만 세상을 소원 목적하고 구하기 때문에 이런 게 없다.
성경에서 ‘복’이라고 할 때는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은 세상을 많이 가지는 것을 복되다고 한다. 세상 것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결국은 불에 탄다. 그런데 거짓 신앙, 거짓 교회, 거짓 목사는 세상 것을 구하게 한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세상 것을 구하게 되면 그 정신 사상이 세상을 닮아간다. 세상욕심이 가득해진다.
처음에 말한 첫 번째의 신앙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으로 가득해지고, 이게 신의 사람이다. 이 사람의 마음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그러나 두 번째 사람의 마음에는 물질이 들어있다. 그러니까 거짓 것이 들어있는 거고, 욕심이 들어있고, 시기 질투가 들어있다. 세 번째 사람은 두 번째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것이 다 들어있다.
두 번째의 사람과 세 번째의 사람이 첫 번째로 들어오면 마음 속에 들어있는 것이 하나님의 것으로 바뀐다. 사람은 자기 속의 것을 첫 번째 것으로 바꿔야 마음이 편하고,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고, 지혜가 생기고, 지식이 있고, 영리하고, 똑똑하고, 꼬리가 안 되고 머리가 된다. 그러나 두 번째와 세 번째로 살면 세상 것을, 물질을 많이 가져야 세상에서 제일이고 머리라고 한다. 하지만 세상 것은 다 불에 타는 거고, 죽을 때 천국에 가지고 가지 못한다. 사람이 죽을 때 왜 입을 딱 벌리고 죽는 거냐? 죽을 때까지 세상 것을 다 못 먹었다는 거다.
사람이 세 번째로 살게 되면 자기 속에 세상 것만 가득 들어있고 세상 것을 구하게 되니 이 사람은 말을 할 적마다 ‘돈 돈’ 하게 되고, 물질을 많이 가지는 것으로 사람을 가치판단 평가를 하고, 사람을 껍데기, 외모 모양을 보고 판단을 한다. 두 번째로 사는 사람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이름을 불러서 세상 것을 갖다달라고 한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정신 사상은 하나님을 자기 종으로 삼고 있는 거다. 이런 사람은 순서적으로 보면 인간 자기가 세상 물질 아래로 들어가 있는 거다.
믿는 사람이 말하는 것을 보면, 기도하는 것을 보면, 설교하는 것을 보면 세상을 자기의 머리로 삼고 사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세상을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고 사는 것은 타락이다. 저주 받은 인간이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인간들의 소원 목적이 이렇게 되어버렸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이름으로 세상 것을 구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정신과 소원 목적이 안 바꿔진 거다. 여전히 세상을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고 사는 거다. 이 사람은 성경을 들고 교회는 다니지만 정신 사상이 타락이 된 거다. 세상사람들은 술 퍼먹고 길거리에서 자는 것을 타락이라고 하는 거지만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와 세 번째로 사는 것을 타락이라고 하신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으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한다면 사람이 안 바뀐 거고, 타락이다.
두 번째의 거짓 교인에게는 하나님의 형벌이 들어가 있다. 이런 사람은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세 번째의 사람처럼 본능적으로 살고 즉흥적으로 산다. 이건 짐승과 다름이 없다. 사람이라면 정신을 바로 가져야 하는데 짐승처럼 본능의 성격 성질을 가지고 사니 편할 날이 없다. 자기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서 산다.
첫 번째의 사람은 내적으로 튼튼하고 모든 사고방식이 건전하다. 그러나 두 번째의 사람은 허풍이 많다. 세 번째로 사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람은 늘 ‘내가 제일이다’ 라고 하며 산다. 자기가 세상 것을 많이 가진 것으로 제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첫 번째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제일이라고 한다. 첫 번째의 사람은 하나님 자랑이고,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사람은 세상자랑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다운 생각을 하는 것이며, 어느 게 참 신앙이겠느냐?
두 번째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첫 번째의 신앙에 들어가지 못한다. 무슨 말이냐? 중생된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건데, 두 번째의 신앙의 교회에서는 중생한 영이 먹을 수 있는 하나님의 진리말씀은 없고 ‘예수 믿으면 병 낫고,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부자 되고,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되고’ 맨 이런 말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닮을 수 없다. 예수를 믿는다면 그 속이 하나님을 닮고 사고방식이 하나님을 닮아야 만이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라는 명령이 수행이 되는 건데 두 번째의 신앙에서는 이 명령수행이 안 된다.
첫 번째 사람도 밥을 먹고, 두 번째 사람도 밥을 먹고, 세 번째 사람도 밥을 먹는다. 예수님도 밥을 먹었다. 그러면 첫 번째 사람은 왜 밥을 먹는 거고, 두 번째 사람은 왜 밥을 먹는 거냐? 사람이 왜 밥을 먹는 거냐? 살기 위해 먹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 짐승은 살기 위해 먹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 인간 자기는 살기 위해 먹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 예수 믿는 사람은 왜 밥을 먹는 거냐?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를 잘 믿기 위해 밥을 먹는다.
예수님께서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셨다. 사람은 일하기 싫으면 안 먹어야 한다. 사람은 먹으니 일을 하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먹었느냐? 그렇다면 예수 잘 믿는 일을 해야 한다. 두 번째의 사람과 세 번째의 사람도 일을 잘 하려고 먹는다. 그러면 우리교회 교인들은 왜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거냐? 하나님의 일을 잘 하려고 먹는 거다.
세상사람들은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는 거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신앙의 원칙을 알아야 한다. 사람에 대한 원칙을 알아야 한다. 안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에 죽는다. 성경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말이 아니다.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보는 종교적인 책과 같은 게 아니다. 하나님의 의사요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니 성경을 해석할 때도 하나님의 의사와 뜻을 찾아야 한다. 이게 성경해석이고, 그 뜻을 내가 가지는 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거다. 자기가 영특해지는 거다.
예수 믿는 자기는 밥 먹고 일을 하고 살면서 무엇에 대해 염려 걱정 근심을 하고 있느냐? 사람은 먹고 마시고 일을 하면서 만들어져야 한다. 먹고 마시느냐? 사람이 자라야 한다. 먹고 마시는데도 사람이 자라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는 거다. 예수 믿으면서 사람이 바로 만들어져야 존귀히 여김을 받는다. 잠:에 금은보화보다 뭘 취하라? 무엇이 자기를 존귀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는지 알아야 한다.
20절: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다윗이 어떤 정신과 마음의 입장에서 이 기도를 하는 거냐? 어떤 마음의 감화성을 가지고 기도를 하느냐에 따라 질이 전혀 달라지고,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기도와, 안 들어주시는 기도로 나누어진다. 그래서 이 기도를 하는 다윗의 정신 사상을 알고 자기도 다윗과 같은 기도를 하면 응답을 받는 거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의 신에 감동이 된 기도다.
본문을 보니 성도다윗의 걱정 근심이 대단히 크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을 자와 안위를 받을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말이 다윗 자기를 보고 하는 말이냐, 남보고 하는 말이냐? 남이다.
부모는 자식 걱정을 한다. 자식은 철이 들어야 부모 걱정을 한다. 그런데 문제는 부모가 자식 걱정을 할 때 이 걱정을 신앙정신을 가지고 보면 세상에서 부자가 되려면 공부를 잘 해야 하는데 자식이 공부를 못하기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다면 부모가 바로 된 걱정이냐, 부모 자신부터 비뚤어진 거냐? 부모 자신부터 비뚤어져 있다. 어디에 비뚤어진 거냐? 세상 법에 비뚤어져 있느냐, 하나님 법에 비뚤어져 있느냐? 하나님의 법이다. 그러니 부모는 이것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다윗이 첫 번째 사람의 입장에서 두 번째의 사람들을 볼 때 이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받을 자가 없음에 걱정이 되겠느냐, 안 되겠느냐? 걱정이 된다. 사실 두 번째의 사람들도 하나님의 긍휼을 받고 사랑을 받을 존재들인데도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살고 있으니 다윗으로서는 불쌍하고 처절하고, ‘저렇게 살다가는 꼼짝없이 짐승처럼 죽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그들을 걱정하는 거다.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는 동안에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처럼 성품이 닮아져서 천국에 올라가서 영원히 살 존재요, 그리고 이 일 후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 불에 태워버리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사실을 모른 채 세상을 소원 목적하며 살고 있다면 첫 번째의 신앙으로 사는 사람으로서는 이들이 걱정이 되고 불쌍한 거다. 자기의 부모형제가 이런 자리에 있으면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 세상이 끝나기 전에, 자기 일생이 끝나기 전에 첫 번째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값진 거다. 보배 같은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런 일을 하는 일꾼들을 바라신다. 세상사람들이 바라는 것과는 다르다.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 받을 자가 없고 하나님으로부터 안위를 받을 자가 없음에 다윗이 염려 걱정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인데, 이 이스라엘 백성이 세상에 속화되어 버렸고, 인본주의, 육본주의, 인간 조작배기 사랑의 신앙이 되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 염려 걱정을 하는 거다.
이런 면으로 볼 때 교회 인도자들은 두 번째의 신앙자들을 하나님 앞에 악한 자로 알아야 하고, 이들이 하나님의 집을 헐어버린다는 것을 알고 이들을 하나님의 성품을 입도록 지도하고 인도해야 되겠는데, 예수님께서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향해 ‘너희들은 전도한다고 사람을 끌어 모아서 배나 더 지옥자식으로 만들어 놓는다’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날 교회들이 성도들을 세상을 소원 목적하게 하고 있으니 이것은 사람을 배나 더 지옥자식으로 만드는 일을 하는 거다. 하나님의 집을 헐고 있다는 것은 거짓 교회들이 성도들에게 세상 것을 주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멍텅구리로 만든다는 거다. 우리는 이런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저렇게 되면 안 될 텐데’ 라고 하며 근심할 줄 알아야 한다.
21절: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이런 말씀을 했다. 그런데 다윗이 십자가에 매달린 일이 있느냐? 안 매달렸는데도 이 말을 하고 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선재적 그리스도로 계실 때 당신보다 먼저 태어난 다윗이 이 말을 한 것이 너무나도 좋은 말이라서 기억을 하고 있다가 다윗보다 나중에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매달릴 때 이 말을 써먹은 거냐?
다윗의 입으로부터 나온 이 말이 누구의 말이냐? 예수님께서 선재적 그리스도로 계실 때 다윗을 감동 감화시켜서 다윗의 입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신 거다. 그래서 이 말씀을 보는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다윗이 한 말을 했다고만 생각할 게 아니라 진리성도 다윗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심령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우리 역시도 그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인간은 자기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 두 번째의 사람은 환경이 와서 지배를 하고, 돈이 와서 지배를 하고, 권력이 와서 지배를 한다. 세 번째의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첫 번째의 사람은 자기를 잘 다스린다. 예수님은 ‘나에게 오는 자의 짐을 가볍게 하겠다’ 라고 하셨는데 두 번째의 사람은 하나님을 불러서 세상의 짐을 자꾸 자기 머리 위에 올려달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성도를 가볍게 만들어 주려고 짐을 내리라고 하시는데 두 번째의 사람은 짐을 자꾸 자기 머리에 이려고 한다.
두 번째의 사람이 지고 있는 짐을 자기 발아래 내려놓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지고 있는 짐을 내려야 하겠느냐, 인간을 올려야 하겠느냐? 사람의 수준을 올려야 한다. 깨달음의 수준을 올려야 한다. 지식의 수준을 올려야 한다. 사람은 못 깨달으면 그 사람 자체가 두 번째로 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두 번째의 사람과 세 번째의 사람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해도 자기 짐을 지고 살게 된다. 우리는 사람의 정신 면을 보는 이치를 알아야 한다. 무당이나 신들린 사람들은 전부가 세 번째의 정신으로 살고 있다. 예수를 믿으면서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도 세 번째의 정신이 들어있다.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쓸개 맛은 지독히 쓰다. 그런데 저희가 이 쓸개를 식물로 준다고 한다. 어떤 저희냐? 훼방꾼들이다. 세상 속화된 채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자들이다. 두 번째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세 번째의 소원 목적이 그대로 들어있는데, 그렇다면 이 두 번째의 사람들이 첫 번째 쪽과 손을 잡기 쉽겠느냐, 세 번째 쪽과 손을 잡기 쉽겠느냐? 세 번째 사람과 손을 잡기 쉽다.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기겠느냐? 두 번째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서 세 번째 사람과 합세를 해서 예수를 죽이게 된다. 항상 그렇다. 세 번째 사람들은 예수를 바로 믿는 사람들을 핍박을 하지 못한다. 바로 믿는 사람을 핍박할 때는 항상 두 번째 사람의 주도 하에 세 번째 사람을 동원해서 핍박을 한다. 그러면 세 번째 사람들이 왜 두 번째 사람들에게 동원이 되는 거냐? 세 번째의 사람들 속에는 두 번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 사상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정신적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이치를 알아야 한다.
쓸개를 식물로 준다는 것은 아침 점심 저녁 끼니 때마다 먹인다는 뜻이다. 즉 쓰디 쓴 고초를 날마다 겪게 한다는 거다. 이런 예를 보면 내 입장에서는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을 첫 번째의 사람으로 가르치고 있는데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이 이질적인 다른 곳에 가서 두 번째 사람들과 손잡고 충성봉사를 하고, 자기 집을 팔아서 헌금을 하고, 끼고 있던 금가락지를 빼서 헌금을 한다면 이건 누구의 노력에 쓴 맛을 보게 하는 거냐? 부모가 공부를 잘 하라고 자식에게 훌륭한 선생을 붙여서 과외를 시켰더니 이 자식이 부모를 배반하고 나쁜 놈들과 논다면 이것은 부모의 정신과 마음에 쓴 고초를 먹이는 거다.
예수님께서 3년 동안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특별히 가룟유다에게 그렇게 돈 욕심을 버리라고 가르쳤는데도 결국은 돈을 받고 스승을 팔아먹을 때 예수님의 마음이 어땠을까? 우리가 볼 때 가룟유다를 칭찬할만하냐, 괘씸하냐? 이처럼 세속화된 인본주의 육본주의의 신앙자들이 신실한 종들의 수고를 헛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이는 쓸개를 먹이는 것과 같은 거다. 정신세계에서 이런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게 인격의 세계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늘나라 천국복음을 땅의 복음으로, 썩어질 것으로 뒤집어 버리니 예수님은 하늘의 것으로 또 뒤집어야 했다. 신실한 종들이 성도들에게 하늘의 것을 넣어놓으니 거짓 종들이 와서 그걸 뒤집어서 세상 것을 넣어놓게 되면 신실한 종들의 수고가 헛되게 된다. 노력을 한 보람이 없다. 이게 쓸개를 먹이는 거다.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은 거짓 종들이 세상으로 뒤집어 놓은 것을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또 다시 천국으로 돌려놓는 일을 해야 한다. 또 하고 또 해야 한다. 그러니 입 안이 쓰다. 목사의 입장에서 맨날 설교를 하지만 교인들이 하나도 안 만들어지고 있으면 입 안이 쓰다.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목말랐을 때 초를 마시면 시원해지느냐? 시원해지기는커녕 속이 탄다. 사람에게 쓸개를 먹이고 식초를 먹이면 그 속이 어떨까? 맛도 고약하지만 이런 것을 받는 사람의 인격적 정신적 느낌이 어떻겠느냐? 또한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놓고 쓸개를 먹이고 초를 먹이는 것은 ‘시다. 어떻다’ 이게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의인을 이렇게 대우하는 악한 자들의 마음상태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큰 사고로 많은 사람이 죽기도 하는데, 천하를 다 주고도 사람의 목숨과 바꿀 것이 있느냐? 사람의 목숨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거다. 그런데 일터에서 사고로 죽는 사람들을 볼 때 일하는 장소나 환경을 보면 보상금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일을 시키는 사람의 마음이 보인다.
예수님께서 악한 자들로부터 고난을 받을 때 이 고난을 당하는 예수님의 마음이 있듯이 진리성도 다윗도 악한 자들로부터 고통을 받을 때의 마음이 있는 거다. 우리 역시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이요 자녀들이라면 다윗과 같은, 예수님과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거다.
주님의 종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 속화된 인본주의 세상주의 육본주의에 달라붙어서 그 일이 더 잘 되게 수종들고 충성봉사하고 있지 않느냐? 두 번째에 속해서 충성하지 않느냐? 예수님 당시에 제자들이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노라고 장담을 하더니 한 제자가 은 삼십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자 다른 제자들은 모두 도망을 가 버렸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주님을 버리고 다 도망을 가 버렸다. 참으로 속이 타고 입 안이 쓰디 쓴 장면이다.
실지로 누가 예수님에게 쓸개즙을 먹인 것은 아니지만 그 사건을 겪는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그렇다는 것을 먹는 맛으로 표현을 하는 거다. 예수님께서 직접 이 말씀을 안 했지만 우리는 그 느낌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어린아이가 몸이 아파서 끙끙 앓으면서 열이 펄펄 나면 어머니는 그 아이의 아픔을 느낌으로 느끼는 것처럼 사람은 마음적으로 다른 사람의 언행심사를 보고 느낌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이 있는 거다.
유대인들은 모세 때부터 예수님 출생 때까지 약 2천 년 동안 자신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가 왔지만 죽여 버렸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라고 밤낮으로 제자들을 가르쳐 놓았더니 한 제자는 돈을 더 사랑해서 스승을 팔아버렸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가 고난을 받으니 다른 제자들은 자기 죽을까봐 다 도망을 가버렸으니 예수님은 입 안이 쓸 수밖에 없구나.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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