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W : 믿음 BIW : 생각의 틀을 바꾸라 AG : 성도
TS : 믿음이란 지금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것이다.
마누라 음식 간 보기
어느 부부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아내는 새로운 음식을 만들 때마다 남편에게 가져와 한 숟갈 내밀며 간을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음, 마침 맞구먼, 맛있네!”라고 하는 것이 남편이 유일하게 해줄 수 있는 해답입니다.
때로는 좀 간간하기도 하고 좀 싱겁기도 할 때가 없지 않아 있지요.
그래서 만일 “좀 간간한 것 같은데”라고 하면 아내는 한 입 먹어보고 나서, “뭣이 간간허요? 밥에다 자시면 딱 쓰것구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좀 삼삼헌디” 라고 하면 또 아내가 한 입 먹어보고 나서, “짜면 건강에 해롭다요. 싱겁게 드시시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비로소 아내가 음식 간을 맞춰달라고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음식하는 것을 알아봐 달라는 신호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약간 싱거우면 어떻고, 약간 짜면 어떻습니까?
싱거우면 싱거운 대로, 짜면 짠 대로 조금씩 먹으면 됩니다.
그것 때문에 부부싸움 할 일이 아닙니다.
사랑은 서로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서로서로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서로 사랑으로 맞추어 가면서 행복하게 사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좀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좀 넉넉하면 넉넉한 대로 서로서로 아끼고 이해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P4
프랑스의 조각가 오귀스트 로뎅(Auguste Rodin)이라는 사람이 조각한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조각상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조한 피조물들 중에서 생각할 수 있는 존재는 사람이 유일하다고 한다면 너무 하는 것일까?
동식물들도 나름대로 생각(?)이라는 것을 한다고 주장한다면 다른 할 말이 없지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만들어준 존재는 사람이 유일하기 때문에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생각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있었던 것이 있다면 무엇이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삼위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어떻게 창조해 나갈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생각이 먼저 있었다는 사실이다.
창조주 삼위 하나님께서 먼저 생각으로 피조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어떤 순서로 창조해 나갈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플랜, 계획, 생각, 마음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그 계획과 생각과 마음을 따라서 차례차례로 천지 만물을 창조해 나가신 것이다.
그만큼 생각이라는 추상명사가 주는 의미가 강하다는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살면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사람이란 존재는 마땅히 생각이라는 프레임, 틀, 테두리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생각이라는 틀, 테두리, 프레임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시는 것일까?
신앙인들은 어떤 종류의 생각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생각의 프레임은 어떤 것일까?
D4.
① 비유로 말씀하시는 예수님.
31-32절에서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에 살던 사람들의 세태를 비유라는 방법을 사용하여 설명하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이 모여서 결혼식 놀이와 장례식 놀이하는 모습을 사용하여 그 당시 사람들의 세태를 고발하는 것이다.
피리를 불면서 춤을 추는 것은 결혼식의 한 장면이다.
유대인들은 결혼식은 대체로 회당에서 진행한다.
회당에 하나님의 성전을 상징하는 후파(chuppah)’를 세워놓고 랍비의 주례로 신랑 신부가 혼인한다.
혼인식에는 반드시 양각나팔을 불면서 시작하고, 반드시 신랑 신부를 비롯하여 혼인식에 참여하는 모든 축하객들이 다함께 춤을 추면서 결혼식을 진행한다.
그런가 하면 장례식은 장례가 발생하면 1일장으로 진행하는데, 반드시 헌화하는 사람들과 유가족들을 대신하여 울어주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장례식을 진행할 수 있다.
아이들이 곡하면서 놀고 있는 모습은 장례식 장면의 한 모습이다.
유대인들의 결혼식에는 반드시 모든 하객들이 춤을 추면서 축하해 주는 것이다.
장례식은 슬픔을 당한 유가족들을 대신하여 대신 울어주는 사람들이 울면서 장례식을 당한 유가족들을 위로해 주면서 장례를 진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양각 나팔이나 피리를 불면서 결혼식에 흥을 돋우려 해도 누가 동조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말씀이다.
아무리 대신 울어주는 사람들이 통곡하면서 장례식을 진행하려고 해도 함께 해 주는 사람들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이 이처럼 결혼식 놀이, 장례식 놀이를 하면서 사람들이 함께 동참해 주기를 바랬는데도 아무도 동참해 주지도 않고 움직여주지도 않는 모습들이 지금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태라고 꼬집는 것이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듯이 사람이란 존재는 세상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다.
사회라는 세상 속에서 사람과 사람들이 서로 부딪치고 서로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야 하는데, 홀로 무인도에 갇혀 사는 사람들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다고 책망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라도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에 대하여 깨닫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아무리 어른들이라도 어린아이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어야 하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② 자기들이 짜놓은 프레임에 갇혀 있는 이들을 향해서 책망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33-34절에서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라고 비난한다고 말씀하신다.
세례 요한은 사해 바다 근처에 있는 쿰란이란 지역에서 유대인공동체를 만들어서 살았다.
쿰란 공동체에서는 철저하게 모세5경인 토라를 낭독하고 배우고 지키면서 살았다.
유대인공동체에서는 철저하게 금욕하고 금식하면서 오직 하나님께서 보내주실 메시야만을 학수고대하며 살았다.
세례 요한을 비롯한 유대공동체에서는 이렇게 철저하게 토라를 중심으로 살았더니 “저들은 귀신에 들려서 저렇게 사는 거야. 어떻게 정상적인 사람이 토라만을 지키고 금욕하고 금식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거야. 틀림없이 귀신에 걸렸기 때문에 저렇게 사는거야.”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그런데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처럼 금식하지도 않고 금욕하지도 않고 613개의 율법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것처럼 살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제자들과 무리들은 식탐이 강하고 포도주를 비롯한 온갖 술을 마시는 술주정뱅이들이고, 세상에서 죄인으로 취급하는 세리들, 죄인들, 못된 깡패들, 한량들과 함께 어울리며 돌아다니는 친구들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이들은 세례요한도 자기들의 뜻에 따라주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무리들도 자신들의 뜻에 따라주지 않기 때문에 세례 요한을 따르는 무리들도 공격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무리들을 싸잡아 공격하고 비난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체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 Everything이 자유로우신 분이다.
율법은 억압하고 판단하고 심판하고 정죄하지만, 예수님은 율법에도 자유, 죽음에도 자유, 죄에서도 자유, 마귀 사탄에게서도 자유, 음식에도 자유하고 모든 것들에서 자유하신 분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 자유를 비난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려고 한다.
군산에 계시는 어느 목사가 은퇴를 앞두고 같은 지역에 있는 목사님들에게 필요한 책이 있으면 가져가라고 했다고 한다.
그 목사는 성공적인 목회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지역에서는 비교적 성공적인 목회를 했다고 인정받고, 각 기독교 기관장까지 지낸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주변에 있는 목사님들이 그 목사의 서재를 방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목사라는 사람의 서재 벽에는 커다란 초상화가 세 개 결려 있었다고 한다.
그 세 개의 초상화는 중국의 시진핑, 북한의 김정은, 그리고 패륜아 문재인의 초상화였다고 한다.
세 사람 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 공산주의 사상에 빠진 사람, 독재자들이지 않나.
이처럼 좌파 사상에 빠지면 목사도 가짜 목사가 되는 것이다.
한 번 주입된 사상은 좀처럼 안 바뀐다.
우리나라 자유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는 세상이 짜놓은 프레임, 좌파 세력들이 짜놓은 온갖 프레임, 틀에 의하여 움직이고 있다.
북한의 김일성3부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주체사상에 동조하는 더불어민주당, 조국신당, 진보당, 정의당, 민노총, 전교조, 전농들과 같은 좌파 세력들의 모습들과 너무나 똑같은 현상이다.
자신들의 뜻에 따라주지 않으면 탄핵하고, 고소 고발하고 온갖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고 있는 모습은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쩌면 베트남이 공산화 될 때의 모습과 너무 흡사하다.
홍콩이 중국에 예속될 때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한 모습이다.
1948년8월15일에 대한민국이 건국 될 때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한 모습이다.
1950년6월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때에 너무나 흡사한 모습이다.
그때는 남한사회에서도 공산주의사상이 너무나 폭넓게 퍼져 있었던 시절이다.
김일성이가 군대를 이끌고 내려오기만 하면 곧 적화통일이 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던 시절이다.
그 때에 일어났던 현상이 오늘날에도 똑같은 현상들로 일어나고 있다.
국회를 비롯한 정치계, 언론, 학계, 공권력, 심지어는 군대까지 좌파들의 세상이 되어 있는 형극이다.
온 나라가 친북, 친중, 친러 세력들로 꽉꽉 들어차 있는 형극이다.
친북, 친중, 친러정책을 펼치지 않았다고, 친일친미정책을 수행한다고 대통령을 내란죄로 몰아서 탄핵하여 정권을 빼앗아 갔다.
이런 세력들이야말로 진짜 반란을 일으킨 역적들이고, 내란죄로 심판해야 할 대상들이지 않나.
대통령 탄핵에 찬송표를 던진 국회의원들, 헌법 재판관들은 어떤 모습으로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과 징계를 받을 것이라 확신한다.
지금 자유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남한을 중심으로 자유대한민국이 건국되었을 때의 상황이나 6.25한국전쟁의 시기와 너무나 흡사한 모습이지만, 그때도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서 어린 학생들까지 학도병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에 참전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지켜냈듯이, 오늘날의 위기 속에서도 자유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신앙인들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을 지켜내리라 믿는다.
우리 한민족은 위기에 강한 민족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 위기를 극복하고 새롭게 하나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 확신한다.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 신앙인들이 불철주야(不撤晝夜) 기도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엘샤다이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자유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지켜내리라 믿는다.
오늘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을 비난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뜻에 맞지 않으면 배척하는 이율배반적인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정해놓은 고정관념, 자신들의 정해놓은 프레임, 자신들이 정해놓은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 고정관념, 틀, 프레임에 갇혀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무리들이다.
이들은 꽉 짜여진 메뉴얼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고집불통, 로봇같은 무리들이다.
이들은 변화하려는 생각, 무언가 발전하려는 마음, 무언가 성장하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옛날 것이 합당한 것이고, 불변하는 것이고, 완전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이들이다.
이들에게서 변화라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
이들에게서는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고 창작하고 바꾸려고 하는 의지가 없다.
열왕기하의 말씀을 보면 북이스라엘의 예후, 요아스를 비롯하여 몇몇 왕들 중에 가나안의 고질적인 우상인 바알상과 아세라 상을 훼파하는 왕들이 있었다.
열왕기하에서는 바알과 아세라 상들을 훼파하기는 했지만,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못했다고 기록한다.
솔로몬 왕이 죽은 이후에 여로보암이 북이스라엘을 건국하면서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3대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남유다의 예루살렘 성전으로 건너가는 길을 차단하기 위하여 벧엘과 단에 금신상을 세운 일들, 유월절을 비롯한 3대 절기의 날짜를 바꾼 일들, 아론의 후손이 아닌 다른 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운 일들, 레위 지파 사람이 아니라 일반 지파 사람들에게 성전의 일을 맡기는 일들과 같은 것들이다.
이와 같은 모습 때문에 북이스라엘은 BC 720년에 앗수르 족속에 의해서 처참하게 멸망당하고 만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개혁교회이다.
개혁교회는 끊임없이 개혁하는 교회이다.
1517년 독일의 마르틴 루터에 의해서 일어난 한 번의 종교개혁으로 모든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고 완성하여 끝난 것이 아니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은 시작점에 불과하다.
시작이 완성은 아니다.
개혁을 시작했으면 개혁의 완성을 향하여 끝없이 달려가야 하는 것이다.
언제까지 달려가야 할까?
주님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개혁의 액셀을 밟으면서 달려가야 하는 것이다.
‘다시 구름 타고 오마.’라고 약속하신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개혁의 드라이브는 절대로 멈춰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삼위 하나님의 권능과 권세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끊임없이 개혁이라는 액셀을 밟으면서 앞으로 앞으로 전진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무언가 개혁을 하려고 하면 빈틈없이 완전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표준 삼아서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행위, 죄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쫓아내고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정해주신 표준에 합당하도록 개혁을 추진해야 하는 것이다.
개혁을 추진하려고 하면 지금까지 갖고 있던 고정관념, 프레임, 틀을 훌훌 벗어던져야 한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이나 프레임이나 틀을 깨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은혜와 능력과 구원을 받을 길이 열리지 않는다.
병아리가 되려고 하면 알을 깨고 나와야 하듯이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구원과 능력과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으려고 하면 지금까지 꽁꽁 싸매고 있던 옛날 생각, 고정관념, 틀, 프레임을 깨고 나와야만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③ 자녀들에게서 지혜를 배우라고 촉구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35절에서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앞날이 창창한 자녀들의 의식 세계는 무언가를 바꾸고 변화시키고 성장하고 새로운 세계를 활짝 열어가기를 원한다.
하늘 아버지께서 주시는 지혜는 바로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을 찾아서 지금의 상황과 처지에서 변화하고 성장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변화하지 않는다면, 성장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세계를 갈망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발전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는 낙후하고 나락으로 떨어져서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신앙인은 계속 변화하고 발전하고 성장하고 성숙해져야 가야만 한다.
계속 계속 계속 계속 계속 변화하고 발전하고 성장하고 성숙해 나가는 모습이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의지요 창조 세계를 펼쳐 나가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지혜라는 것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펼쳐 놓으신 창조의 세계를 현재 세대와 미래 세대에게로 함께 열어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지혜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창조세계를 미래의 세대,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와 친국에로 다함께 달려가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신앙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창조세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지혜의 세계에게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L4 & B4
그러면 지금까지 갖고 있던 고정관념이나 프레임이나 틀을 깨고 나와서 하나님의 영적인 구원의 세계로,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의 세계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지혜의 세계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내 생각에는...’이란 의식, 프레임, 틀, 테두리를 벗어야 한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아람의 나아만 장군이 악성피부병에 걸려서 고생고생하게 된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나아만 장군은 많은 예물을 가지고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온다.
엘리사 선지자는 나아만 장군에게 사람을 보내서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라는 말을 전한다.
그러자 나아만 장군은 버럭 화를 내면서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라고 화를 내면서 돌아가려고 한다.
나아만 장군이란 사람은 ”내 생각에는...“이라고 하면서 엘리사 선지자의 말에 분노하면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이때 나아만 장군을 호위하던 부하 장수가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라고 충언하면서 나아만 장군의 마음을 진정시킨다.
나아만 장군은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엘리사가 보낸 사람이 전하는 말대로 요단 강에 들어가서 일곱 번 몸을 잠그었을 때 그의 살이 마치 어린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고 기록한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나아만 장군이 앓고 있는 악성피부병을 고쳐주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나아만 장군이 ”내 생각에는...“이라는 고정관념, 틀, 프레임,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여전히 악성피부병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이라는 고정관념, 의식, 틀, 테두리, 프레임을 깨고 벗어나서 하나님의 사람이 전해준 말대로 있을 때, 지금까지 지긋지긋하던 악성피부병에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 어린아이의 피부처럼 보드랍고 탄탄하고 깨끗한 피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내 생각에는...’이라는 틀을 잘못 사용하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
열왕기하6장에 보면 아람국과 이스라엘이 전쟁이 일어난다.
아람국에서는 매번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패배들 당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때문이라고 확신하고는 엘리사 선지자가 머물고 있는 도단성을 포위한다.
도단성을 몇 겹으로 포위했지만, 하나님께서 아람 군사들의 눈을 어둡게 하심으로 도리어 아람 군사들이 생포당하는 꼴이 되고 만다.
생포한 아람 군사들을 이끌고 사마리아성까지 왔을 때, 북이스라엘의 여호람 왕은 엘리사 선지자에게 아람 군사들을 어떻게 처리하기를 원하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엘리사 선지자는 열왕기하 6;22절에서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들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려보내소서.”라고 하면서 선대해 줄 것을 요청한다.
여호람은 아람 군사들에게 많은 음식으로 대접하고는 아람국으로 돌려보낸다.
그러자 잠시동안은 아람국이 이스라엘을 침략하지 않는 좋은 결과가 생기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침략하지 않았던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아람국으로 돌아간 군사들은 더욱더 강한 군사력으로 무장하고 이스라엘을 다시 침략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마리아성을 포위하여 사마리아성을 고립시키는 참혹한 상태까지 된다.
사마리아성에서는 백성들이 먹을 양식을 구할 길이 없는 처지가 되고 만다.
결국은 자식을 잡아먹어야 하는 참혹한 처지가 되고 만다.
만약에 엘리사 선지자가 도단성에서 생포한 아람 군사들을 곧바로 몰살시키는 형벌을 내렸다면 몇 년 후에 사마리아 성이 포위당하는 참혹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엘리사 선지자의 잘못된 판단으로 저질러진 실수로 인하여 나라가 큰 위기에 봉착하는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엘리사 선지자가 베풀어준 선행(?)으로 인하여 잘 대접받고 돌아간 아람 군사들이 잠시동안은 이스라엘을 침략하지 않아서 일시적인 평화가 찾아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동안에 이루어진 가짜 평화일 뿐이었다.
아람국이 더 강력한 군사력으로 조직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것에 불과한 것이다.
엘리사 선지자의 잘못된 생각과 판단과 결정으로 인하여 나라에 큰 위기와 고통이 몰아치는 것이다.
이처럼 ‘내 생각에는...’이라는 테두리에 갇혀 버리면 잘 될 수 있는 것도 잘 안될 수 있다.
나아만 장군이 ‘내 생각에는...’이라는 테두리에 갇혀 있었다면 그는 악성피부병을 고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이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났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평생 자신을 따라다니면서 고통스럽게 하던 악성피부병에서 치유함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엘리사 선지자가 자신의 생각이라는 테두리에 갇혀서 잘못된 결정을 하면서 나라와 민족에 큰 위기와 고통스러운 처지로 몰아간 것이다.
이처럼 지도자는 ‘내 생각에는...’이라는 테두리에 갇혀 버리면 그 지도자가 속한 기관, 단체, 나라와 민족, 교회, 회사가 큰 위기에 봉착할 수 있는 위험이 뒤따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 자신의 마음, 자신의 판단, 자신의 의지가 가장 위대하고 뛰어난 줄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사람이란 존재가 아무리 뛰어난 학식과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새발의 피,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내 생각이라는 틀, 내 생각에는...이라는 테두리, 내 생각이라는 고정관념, 내 생각에는... 이라는 감옥에 더 이상 갇혀 있지 말고 미련없이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로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다.
삼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판단이라는 기준을 따라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살면서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넘치도록 받을 수 있는 신앙인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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