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스크랩 좀 더 많이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봐요 = 누가복음7;36-50(250928)

열려라 에바다 2025. 9. 27. 16:46
좀 더 많이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봐요 = 누가복음7;36-50(250928)
 
한상원목사추천 1조회 5525.09.25 07:12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PW : 믿음              BIW : 더 많이 사랑하라               AG : 성도
TS : 믿음이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면서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이다.

아버지를 팝니다
어느 날 신문 광고에 아버지를 판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 광고에 아버지는 지금 노령이고 몸이 편치 않아서 일금 십만 원이면 아버지를 팔겠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광고를 보고 혀를 차면서, “세상이 말세다. 말세야.”라고 소리치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 늙은 할아버지를 누가 사겠냐?’고 하면서 쑥덕거리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 광고를 본 한 젊은 부부가 새벽같이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대문 앞에서 몸매를 가다듬은 부부는 심호흡을 머금고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넓은 정원에서 꽃밭에 물을 주고 있던 한 할아버지가 대문을 열고서는 어떻게 왔냐? 라고 물었습니다.
부부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신문 광고를 보고 달려왔다고 말씀을 드리자, 할아버지가 웃음을 지으며 집안으로 안내를 했습니다.
그 집은 아주 부잣집이었습니다.
아버지를 파시겠다는 광고를 보고 왔습니다.”
젊은 부부는 또박또박 뚜렷하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할아버지는 빙긋 웃음을 지으시더니 내가 잘 아는 할아버지인데, 그 할아버지 몸이 좋지 않아요. 그런 할아버지를 왜 사려고?”
젊은 부부는 모두가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고아처럼 살다가 결혼했기 때문에 부모 없는 서러움이 늘 가슴에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아프거나 집안이 어렵지 않은 가정이라면 누가 아버지를 팔겠다고 광고를 내겠느냐고, 비록 넉넉하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지만 작은 가운데서도 아기자기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 부부에게도 아버지를 모실수 있는 기회가 왔다 싶어서 달려왔다고 하였습니다.
이들 부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돈을 달라고 했습니다.
젊은 부부는 정성스럽게 가지런히 담은 흰 봉투 하나를 할아버지에게 내어놓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돈 봉투를 받아 들고 나서 그 할아버지도 정리할 것이 있어서 그러니 일주일 후에 다시 이곳을 오라고 하였습니다.
일주일 후 젊은 부부는 다시금 그 집을 찾아갔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할아버지가 반갑게 맞이하면서 어서 오게나. 나의 아들과 며느리야 하시면서 사실 내가 너희에게 팔렸으니 응당 내가 너희들을 따라가야 하겠지만, 너희가 이 집으로 식구를 데려오너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양자를 데려오면 얼마든지 데려올 수 있겠지만, 요즈음 젊은이들이 돈만 알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서 이해가 되었습니다.
젊은 부부는 저희에게 아버지로 팔렸으면 저희를 따라가셔야지요.
비록 저희들은 넉넉하게 살지는 않지만, 그곳에는 사랑이 있답니다.”라고 고집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진정 흐뭇한 마음으로, “너희는 참으로 착한 사람들이다. 너희가 부모를 섬기러 왔으니 진정 내 아들이다. 그러하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곧 너희 것이며 너희는 나로 인해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운 마음 때문에 복을 불러들인 것이다.”라고 하시고는 기뻐하시며 자식들의 절을 받았다고 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사러 오셨습니다.
이제는 기꺼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고백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세계로 들어가서 영원한 삶을, 영생의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P4
4복음서에 보면 여인들이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4복음서를 잘 분석해 보면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사건이 총 3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26;6-13에 기록한다.
마가복음14;3-9에 기록한다.
누가복음7;36-50에 기록한다.
요한복음11;2에 기록한다.
요한복음12;1-8에도 기록한다.
4복음서에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모습을 기록한 사건들 중에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요한복음12장에 기록한 사건은 동일한 사건이다.
동일한 사건을 마태의 시각으로, 마가의 시각으로, 요한의 시각으로 약간씩 다르게 기록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누가복음에 기록한 사건과 요한복음11;2에 기록한 사건은 동일한 사건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른 사건이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에서 기록한 사건은 갈릴리지방에서 있었던 사건이고, 요한복음11장에 기록한 사건은 유대 땅 베다니에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에서는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는다.
반면에 요한복음11장에서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라고 기록하면서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누가복음 기록과 요한복음11장에 기록한 사건이 동일한 사건이라고 가정한다면 유대땅 베다니에 살고 있는 마리아가 갈릴리지방까지 건너와서 죄를 범한 여인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석연찮아 보인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초대한 주인과 향유를 부은 여인이 서로 잘 알고 있는 사이임을 알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누가복음에 기록한 사건과 요한복음11장에서 마리아가 향유를 부었다는 사건은 별개의 사건, 전혀 다른 사건임을 알 수 있다.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가 요한복음11장에 이어서 12장에도 향유를 붓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는 두 번에 걸쳐서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음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11장에서는 아주 간단하게 마리아가 향유를 부었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고, 요한복음12장에서는 좀 더 구체적인 상황들을 묘사하면서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 누가복음 7장 본문에 등장하는 향유를 붓는 사건은 어떤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일까?
이 사건을 통해서 신앙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어 하시는 것일까?

D4.
 바리새인의 초대에 응하시는 예수님.
36절에서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원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야로,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는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촌 동네 출신으로 하찮은 촌놈 수준으로 여긴다.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나사렛 촌놈인데 어쩌다가 랍비가 되었다고 인정하는 수준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은 그래도 예수님에 대하여 조금은 열려 있는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기에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라는 제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초대에 얼마든지 거절할 수도 있는데, 거절하지 않으시고 응해 주신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자신에 대하여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수님은 바리새인들이나 다른 유대인들이나 다 똑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할 대상으로 여겨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바리새인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으시고 바리새인의 집으로 찾아가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사람의 이름은 시몬이라고 40절에서 기록하고 있다.

신앙인들은 누구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고 있는가?
누군가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고 있다면 왜 그 사람을 초대하고 있는가?
사업하기 좋은 파트너이기 때문에, 이성 교제하기 위해서, 향긋한 커피 한잔 마시기 위해서, 적당하게 시간 때울 수 있어서, 신앙 상담하기 위해서,...
자기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어떤 이유가 되었든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면 어떤 마음가짐으로 초대하고 있을까?
오늘 바리새인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고 있을까?

초대를 받으신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집으로 갈 때 무엇을 가지고 가셨을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으로 가셔서 무엇을 하셨을까?
가만히 앉아서 바리새인의 집에서 챙겨주는 음식만 주섬주섬 잡수시고 계셨을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바리새인의 집으로 갈 때, 빈손으로 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누구를 만나든, 어디를 가든 항상 무언가를 가지고 가시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영원한 생명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생명을 전하는 생생한 복음의 소식을 가지고 가신다.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항상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 나라를 전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야이신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가실 하늘 아버지의 거룩한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메시야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앙인들이 누군가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면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할까?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빈 손으로 덜렁덜렁 가도 되는 것일까?
신앙인들은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아서 그 집을 방문한다고 하면 절대로 빈 손으로 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무언가라도 가지고 가야 한다.
하다 못해서 계란 한 판이라도 사서 들고 가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구원의 복음을 들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축복의 메시지를 들고 가서 초대해 준 그 집에 마음껏 말씀을 선포하고 축복을 빌어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인에게서 향유를 부음 받는 예수님.
예수님과 제자들이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하는 중에 이름도 모르는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사건이 발생한다.
37-38절에서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여인은 죄를 지은 여자라고 소개한다.
이 여인이 구체적으로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여인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유대인의 관점에서, 바리새인의 관점에서 볼 때 범해서는 안 되는 죄를 지은 여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바리새인의 관점에서 볼 때, 지은 죄라고 한다면 아마도 유대인들이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613개의 율법, 계명들, 장로들의 전통에서 가르치는 잡다한 규칙들 중에서 지키지 못한 것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쩌튼 성경에서는 이 여인이 어떤 죄를 범했는지는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게 어떤 죄를 지은 여인인지는 알 수 없다.
이 여인은 어떤 죄를 범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죄로 인하여 동네 사람들에게 온갖 손가락질을 당하고, 멸시와 조롱과 핍박을 받으면서 살았을 것이다.
여인은 자기 혼자서 말없이 통곡하면서 지냈을 것이다.
여인은 자신이 바리새인의 집에 찾아가면 틀림없이 집주인이 싫어하고 비난할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여인은 향유 옥합을 들고 와서 울면서 예수님의 발에 떨어지는 눈물을 자신의 머리카락을 풀어서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입을 맞추면서 향유를 붓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집주인은 이렇게 말한다.
39절에서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라고 생각하면서 중얼거리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 집주인은 이미 그 여인이 어떤 여인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집주인은 이 여인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지 않았다면 이 여인이 죄인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집주인이 이 여인이 죄인의 삶을 사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은 이 여인은 동네에서 이미 소문이 자자하게 난 여인이었을 것이다.
갈릴리지방에 이미 소문이 쫙 나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이 여인은 온전한 여인으로 인정받으면서 살아갈 수 없는 여인이라는 증거이다.
아마도 이 여인은 예수님을 멀리서 사모하면서 예수님을 따라다닌 여인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으로 들어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가장 귀하게 여기던 향유 옥합을 가지고 바리새인의 집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아마도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도 이 여인이 어떤 여인인지를 이미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여인이 하는 행동을 묵묵히 지켜보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애타게 여인이 자신의 발에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풀어서 눈물을 닦고 입을 맞추면서 향유를 붓고 있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시고 이 여인의 가슴에 응어리진 한 맺인 마음을 어루만져주시면서 위로해 주시는 것이다.

사실 고고고고고대사회에서 향유는 구하기도 어렵고 값도 너무나 비싸서 일반인들은 소유하기에도 너무나 부담스러운 물건이다.
이렇게 귀한 향유 옥합을 여인은 예수님께 기꺼이 내어드리는 것이다.
이 여인은 먼발치에서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많은 위로를 얻었지만, 쉽게 예수님 앞으로도 나서지도 못했던 여인이다.
여인은 바리새인의 집에 예수님께서 들어가시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쳐다보다가 급히 자신의 집으로 가서 그동안 애지중지하게 아끼던 향유 옥합을 가지고 바리새인의 집으로 찾아와서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것이다.
아주 귀하고 값비싼 향유이지만 여인은 자신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향유 옥합을 예수님께 부어드리는 것이다.
이 여인은 자신의 모든 것, 자신의 생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향유 옥합을 예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앙인들은 예수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
예수님은 신앙인들을 죄와 죽음과 심판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온 몸을 기꺼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서 내어주신 분이다.
한 방울의 물도, 피도 남기지 않고 다 내어주신 분이다.
신앙인들은 예수님 때문에 영생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신앙인들은 예수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
신앙인들도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와 희생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온 몸으로, 온 영으로, 온전한 뜻과 의지와 계획으로 돌려드려야 하지 않을까?
이런 마음을 물질에 담아서 십일조헌금과 감사헌금, 선교헌금을 비롯한 각종 목적헌금을 올려드리는 것이다.
예수님을 위하여 시간을 드리고, 재능을 드리고, 은사를 드리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것이다.
헌금을 드리는 것이나 자신이 가진 시간, 재능, 은사를 드리는 것은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향하여 올려드리는 사랑의 고백이다.

 사랑의 깊이를 설명하시는 예수님.
집주인은 여인이 향유를 붓는 여인을 묵묵히 지켜보고 계시는 예수님을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라고 생각하는 모습을 보면서 집주인의 이름을 부르면서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집주인은 선생님 말씀하소서.”라고 하면서 말씀하시라고 한다.
예수님은 집주인과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빚진 자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41-42절에서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라고 물으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빚을 지면서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될 수만 있다면, 가능하다면 아무런 빚도 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오죽 삶이 어려우면 빚을 지고 살았겠는가?
어떤 이들은 빚도 능력이라고 항변하는 이들이 있곤 한다.
아무리 그런다치더라도 빚을지지 않고 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다.
예수님시대, 로마시대에 1데나리온의 값어치는 장정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그러기 때문에 500데나리온은 우리식으로 말하면 5000만원 정도의 금액이라 할 수 있다.
50데나리온은 우리식으로 500만원 정도 되는 금액이라 할 수 있다.
500만원을 탕감받는 것도 너무나 황송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500만원보다 10배가 되는 5000만원을 탕감받았다면 얼마나 더 황송스러운 일이겠는가?
500만원 탕감받은 사람보다 5000만원 탕감받은 사람이 더 기뻐하고 감격스러워하는 것이다.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라고 예수님의 질문을 받는 집주인은 당연하다는 듯이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라고 대답한다.
집주인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네 판단이 옳다.”라고 말씀하면서 향유를 붓는 여인에 대하여 말씀하기 시작한다.
예수님은 44-47절에서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이 울면서 자신의 발에 입 맞추고 향유까지 붓는 것은 그 만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너무나 많이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사람이란 존재는 적게 받으면 적게 받은 만큼 적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고, 많이 받으면 많이 받은 만큼 많이 사랑을 표현하려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마음가짐이다.
집주인 바리새인도 예수님과 제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쉽지 않은 어려운 일을 집주인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동 문화에서는 손님을 초대한 집주인은 손님들을 위해서 손과 발을 씻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요 문화이다.
먼지가 많은 지역이기 때문에 밖에 있으면 흙먼지가 많이 묻어서 더럽게 마련이다.
손님을 초대하면 기본적으로 따뜻하고 깨끗하고 정결한 물을 준비해서 손과 발을 씻을 수 있도록 배려해 드려야 하는 것이다.
음식을 먹기 위해서라도 손을 씻어야 하는 것이다.
주인은 최대한 손님을 잘 모시려고 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인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바리새인 집주인은 예수님을 비롯한 제자들에게 전혀 주인으로서의 예의를 지키지 않았던 것 같다.
또한 땀 냄새가 역할 정도로 많이 나기 때문에 올리브유를 발라서 역한 냄새를 중화시켜 주어야 한다.
유럽이나 중동 지역에서 향수 산업이 발달한 이유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서는 잘 나지 않는 냄새, 중동 사람들, 유럽 사람들의 몸에서 나는 특유한 냄새 때문이라고 한다.
유럽인들, 중동인들은 흔히 사람들에게서 나는 암내라는 역한 냄새가 많이 난다고 한다.
사람들의 몸에서 나는 특유한 암내라는 냄새가 많이 나기도 하고, 역한 땀 냄새를 없애주기 위해서 향수를 많이 바르기 때문에 향수 산업이 발달했다고 한다.
예수님 시대에는 향수 사업이 발달한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올리브유를 발라서 냄새를 중화시켜 주었던 시절이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보면 바리새인 집주인은 그 흔한 올리브유도 예수님을 비롯한 제자들에게 발라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지역에는 올리브나무가 천지에 널려 있다.
성지순례 여행으로 예루살렘을 갔을 때, 올리브나무가 가로수로 되어 있고, 그 가로수에서 올리브 열매가 떨어져서 온 거리에 온통 올리브 천지인 것을 본 기억이 있다.
그만큼 이스라엘 땅에는 올리브 열매나 기름은 아주 흔한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인 집주인은 역한 냄새를 중화시키기 위해서 너무나 흔한 올리브기름도 발라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바리새인 집주인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서 한번 식사 대접해 드리는 것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여인이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는 모습을 보면서 몹시도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다.
바리새인 집주인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대하는 태도와 여인이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가 극면하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어쩌면 하늘과 땅의 차이, 북극과 남극의 차이라고 할 정도라는 말씀이다.

 죄 사함을 선포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여인을 향하여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선포하신다.
이 여인은 어떤 죄를 지은 여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여인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그 동안 동네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남몰래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는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이적들을 보면서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사모했던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그 여인을 향하여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선포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으로부터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선포를 들은 여인은 이제는 떳떳하게, 당당하게, 수치스럽지 않게, 명예롭게 그 동네에서 한 사람의 여인으로서, 한 사람의 인격체로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여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죄 사함을 받으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전에는 어떤 죄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죄 때문에 망설이고 주저주저하고 뒷걸음쳤지만, 이제는 어느 누구 앞에서라도 당당하고 담대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 것이다.
죄 사함을 받으면 하나님의 귀한 딸로서 인정받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죄인들의 죄를 사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정결한 사람으로, 거룩한 사람으로 세워주기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여 오신 것이다.
신앙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으로 어떤 죄라도 다 용서함을 받은 의인이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눈꼽만큼의 죄도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시는 예수님.
아울러 예수님은 여인을 향하여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라고 선포해 주신다.
예수님은 여인이 자신을 찾아와서 한 모든 행위는 여인의 믿음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여인이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너무나 간절했기에 뭇 사람들에게서 멸시 천대 핍박 조롱받으면서도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신이 가장 아끼는 향유를 부어드림으로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했다는 말씀이다.
신앙인은 시도때도 없이 예수님을 향하여 신앙고백하며 살아야 한다.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신앙을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고결하고 아름다은 믿음의 행위이다.
믿음의 고백으로 구원을 선포받는 삶이 매일매일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믿음의 고백은 예수님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그 정도가 차이 난다고 할 수 있다.
사랑으로 고백하는 믿음이 예수님에게서 구원을 선포받는 여인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라고 선포하시는 말씀이 오늘 우리 신앙인들과 가족들에게 선포해 주시는 말씀이 되어야 한다.

L4 & B4
그렇다면 신앙인들은 어떤 사랑으로 예수님을 사랑해야 할끼?
사랑을 정의하는 헬라어에 사랑이란 표현에는 4종류가 있다.
 에르스(Eros)사랑으로 남녀간의 사랑, 애정을 말한다.
 필레아(Pileo)사랑으로 친구와의 우정, 우애(友愛), 형제애(兄弟愛)같은 사랑이다.
 스토르게(Storge)사랑으로 부모가 자녀에게 베풀어주는 사랑, 가족애를 말한다.
에르스적인 사랑, 필레오적인 사랑, 스토르게같은 사랑은 서로 조건이 맞추어지면서 맺어지는 사랑, 조건적인 사랑이다.
 아가페(Agape)사랑으로 전폭적인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한다.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풀어주는 사랑을 아가페적인 사랑이라고 말한다.
아가페적인 사랑은 오직 하나님만이 베풀어줄 수 있는 절재적인 사랑, 전폭적인 사랑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죽었다가 다시 깨어난다 해도 아가페적인 사랑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은 무한한 분이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랑이 많은 사람, 사랑이 철철 넘치는 사람이라 인정받을지라도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죄인이고 악인이고 피조물이고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사랑을 가진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적인 사랑을 할 수 없다.
무조건적인 사랑, 전폭적인 사랑, 아가페 사랑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만이 인간에게 베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이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 해도 절대적으로 아가페적인 사랑을 할 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에는 남녀간의 성적인 사랑, 애정의 사랑이라는 에로스적인 사랑이 아니다.
정서적인 사랑, 우정, 우애, 형제, 가족애와 같은 필레오적인 사랑, 스토르게같은 사랑을 할 수 있다.
필레오 사랑과 스토르게 사랑을 승화시켜서 아가페적인 사랑의 모습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져 가야 하는 것이 신앙인의 참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붙어있다. 함께 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서로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서로 함께하지도 않고 붙어있지도 않으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척, 가면을 쓴 가짜 사랑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 성장하고 성숙해지면서 성화되어가는 사랑을 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집에서 죄인으로 취급당하고 있는 여인이 향유 옥합을 가지고 와서 울면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입을 맞추면서 향유를 부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많은 사랑을 받았음을 확신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얼마만큼의 사랑을 받으면 많은 사랑을 받았노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일까?
얼마나 많이 사랑하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에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은 주님을 향하여 AII-IN하여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좀 억지 주장처럼 보일 수 있지만, 외골수적인 사랑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위하여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세상의 잡다한 신들, 세상의 전통문화, 일월성신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하는 가면을 쓴 가짜 사랑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000하는 척하는 사랑을 원하지 않으신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외골수로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을 향하여 외골수로 사랑하는 모습이 진심을 다하여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다.
진심으로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칭찬하시고 기뻐하시고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베풀어주신다.

 자신의 모든 허물과 죄를 낱낱이 드러내면서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향하여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허물과 죄를 낱낱이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다.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할 수 없는 사람은 절대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죄가 하나도 없는 의인이라고 철통같이 믿는 사람인데,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어떻게 주님이라고 영접할 수 있겠나.
이런 사람에게는 전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이 필요 없는 사람이다.
정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이 필요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이라야 한다.
이것도 성령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고 임재하셔서 감동, 감화를 주셔야만 자기 자신을 예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믿음의 조건은 바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오는 것이다.
회개가 먼저 우선되지 않으면 절대로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낱낱이 고백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자기 자신의 죄를 덮는 은혜임을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이라야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향하여 자신의 나약함, 자신의 못나고 더럽고 추한 모습, 자신의 죄악을 내어놓고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사모하면서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생명, 빼앗겨버린 생명을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보좌를 버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여 오신 분이다.
예수님은 사탄에게 빼앗겨버린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찾아서 회복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사모하면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이란 존재는 언젠가 반드시 이 세상을 하직하고 떠나야 할 유한한 존재이다.
세상을 하직하고 떠날 때, 심판받아서 영원한 형벌의 나라 지옥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받아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신앙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로의 소망, 희망, 꿈과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삼위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신의 죄를 낱낱이 고백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사모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넘치게 받아누릴 수 있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