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스크랩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살아가요 = 누가복음8;42-48(251123)

열려라 에바다 2025. 11. 21. 11:47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살아가요 = 누가복음8;42-48(251123)

한상원목사추천 0조회 3625.11.20 07:33댓글

 


PW : 믿음              BIW : 붙잡으라               AG : 성도
TS : 믿음이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보혈과 복음을 믿음으로 붙잡고 살아가는 것이다.


결혼한 이유

하루는 남편이 TV를 보다가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남편 : 당신 결혼하기 전에 선을 20번도 더 봤다며?
아내 : (심드렁하게) 그랬지.
남편 : (득의에 찬 미소를 띠며) 당신이 그 많은 남자들 중에서 나를 선택한 이유가 뭐야?
나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
아내 : (남편을 째려보며) 그거야,  20명 중 나와 결혼하기를 원했던 사람은 당신뿐이었으니까!
부부는 하나님께서 맺어주는 것입니다.
이유야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맺어주지 않으면 부부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맺어주셨기 때문에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행복하게 살면서 주님의 교회를 잘 섬기라고 부부로 맺어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라고 가정을 세워주셨습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예수그리스도의 향기가 가득 넘치는 가정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P4.


오늘 본문에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일어나는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혈루증은 여인이 불규칙으로 출혈하는 질병이다.
여인은 성장하고 성인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월경하면서 자연스럽게 출현한다.
여인이 월경하는 것는 여인으로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자연적인 생리현상이다.
여인은 주기적으로 월경하면서 자연스럽게 출혈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규칙적으로 월경하여 출혈하는 것도 부정한 상태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혈루증은 규칙적으로 출혈하는 현상이 아니라 불규칙적으로 출현하는 현상이다.
혈루증은 시도때도 없이 출혈하는 질병이다.
시도때도 출혈하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도 통제가 어렵다.
여인이 규칙적으로 월경 때에 출혈하는 것도 부정한 상태이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아랫도리에 피가 묻은 모습을 보이는 것 자체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규칙적으로 출혈할 때도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부정한 상태가 되는데, 불규칙적으로 시도 때도 없이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면 얼마나 힘들게 생활해야 하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12년 동안을 그렇게 살았다고 소개하고 있다.
여성이라면 누구보다도 조신하고 누구보다도 예쁘고 아름답게 보이면서 살고 싶은데, 누구에게라도 숨겨야 하는 혈루증을 앓고 있으면서 살아야 하는 여인으로서 얼마나 힘들고 어렵게 살았을까 생각하면 그 마음을 아련하게 느낄 수 있다.
1년도 아니고 12년을 이렇게 살았다고 하면 가족이나 친구들, 동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감도 사라지고 자존감도 사라지고 살고 싶은 마음도 사라지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질병은 마구마구 자랑해야 주변에서 같이 기도도 해 주고 치료 받을 수 있는 방법도 찾을 수 있다고 하는데, 혈루증은 어느 누구에게도 자랑은커녕 꽁꽁 숨기고 싶은 질병이다.


하나님께서는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가고 계실까?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어떻게 대하고 계시는가?
혈루증 여인의 모습을 보면서 신앙인들은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할까?


D4.


 예수님 가까이에 다가가도록 감동을 주시는 하나님.


마가복음에 보면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마가복음 5:27에서 예수의 소문을 듣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 여인에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소문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
소문을 듣기는 하는데 어떤 소문을 듣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다.
소문을 듣기는 하는데, 도움이 되는 소문이 있는가 하면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불신과 의심을 초래하는 소문들도 많기 때문이다.
가짜 뉴스가 여론을 조장하는 시대에는 더욱더 불신과 의심을 초래하는 소문들이 많다.
하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소문이 되어 찾아가시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하여 좋은 소문을 들도록 해 주신 하나님은 여인에게 그럼,...한번 예수님을 찾아가야지, 12년 동안 지긋지긋한 병을 고쳐보려고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찾아보았지만 차도가 있기는커녕 더 힘들어졌잖아. 지금까지는 돈만 허비하고 더 힘들었는데,... 이번에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만나보자.’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감동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인에게 예수님을 찾아가서 예수님에게로 다가가도록 감동을 주신다.
만약에 이 여인에게 혈루증이라는 질고가 없었다면 과연 예수님을 찾아 나가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을까?
물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지만, 자신에게 질고가 없었다면 구태여 예수님을 찾아가야지 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꼭 질고가 있어야만 예수님을 찾아오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 여인의 경우는 자신에게 질고가 없었다면 예수님을 찾아가야지 하는 마음이나 생각이 없었을 가능성이 더 많다.
그런가 하면 설령 자신에게 질고가 있었더라도 얼마든지 약을 구해 먹거나 유능한 의사에게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면 과연 예수님을 찾아가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을까?
이 여인은 12년 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해 봤지만, 차도가 있기는커녕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은 더 이상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들려오는 소문을 따라서 예수님을 찾아가야지 하는 마음과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여인은 자신에게는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들려오는 소문을 따라서 예수님을 찾아가기로 결단하고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이다.


신앙인들 앞에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문제덩어리가 있다면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사실이다.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면 도무지 하나님을 찾아가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하려고 커다란 문제덩어리를 세워놓고 떡하니 버티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들 앞에 커다란 문제덩어리,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 봐야 꿈쩍도 하지 않는 문제 덩어리들이 세워져 있다면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여인은 물어 물어서 예수님이 계신다는 곳으로 찾아왔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어디론가 급하게 가고 계시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다.
도무지 예수님을 만나 뵐 수가 없을 정도이다.
여인은 너무 많은 인파들 때문에 어떻게 할까? 돌아갈까? 내가 예수님을 만난다고 한들 어떤 일이 일어나기나 하겠나? 하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들면서 갈등하고 고민한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여인에게 무리들 속으로 파고 들어가라고 감동을 주신다.
여인은 많은 무리들 속으로 예수님 가까이로 다가가야 한다고,...
여기서 포기하고 돌아간다면 다시는 이렇게 좋은 기회는 오지 않는다고,...
여인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감동으로 무리들 속을 파고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추진하라고 감동을 주시기도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추진하는 데도 많은 방해 요소들이 있을 수 있다고 알려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방해 요소들 때문에 뒤로 물러서거나 포기해서도 안 된다고 감동을 주신다.
그러면서 계속 방해 요소들을 헤치면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감동을 주신다.
방해 요소들이 있을지라도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갈 때 무언가가 새롭게 와닿게 된다.
방해 요소들 때문에 포기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방해 요소들이 있더라도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만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겉옷 가에 손을 대라고 감동을 주시는 하나님.


마태복음8;20에서는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인은 예수님의 겉옷을 만진 것이다.
겉옷을 만졌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입으셨던 외투나 잠바와 같은 옷을 만졌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겉옷이란 찌찌트(tsitsit)라는 옷단술을 의미한다.
탈릿(tallit)이라고도 부르기도 하고, 기도숄(prayer shawl)이라고도 한다.
정통 유대인들이 머리를 비롯하여 온 몸을 감싸서 토라를 낭독하거나 기도할 때 쓰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찌찌트로 자신의 머리와 온몸을 감쌈으로 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찌찌트를 쓴 사람을 보면서 내 백성이구나.”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찌찌트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은 누구든지 꼭 해야만 하는 것이다.
결혼하는 신부가 자기 신랑에게 신혼 예물로 반드시 해 주는 선물이 찌찌트이다.
또한 인생을 마감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후에 죽어서 관 위에 올려놓는 것이 찌찌트이다.
찌찌트에는 죄 사함과 순결과 정결을 의미하는 하얀색 천에 네 모퉁이에 4개의 줄로 되어 있는 술이 달려 있다.
4개의 줄로 만들어진 것을 옷 단술이라고 부른다.
4줄 중에 한 줄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청색으로 되어 있다.
4개의 줄을 매는 방법에 따라서 옷단 술은 유대인들이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613개의 계명을 의미한다.
겉옷으로 머리를 비롯하여 온몸을 감싸는 행위는 하나님께서 토라, 곧 모세5경을 통해서 반드시 지키라고 말씀하신 613개의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살겠습니다. 라는 신앙고백과 같다.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은 최대한 예수님 가까이로 다가가서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지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 여인은 예수님의 겉옷에 붙어있는 옷단술을 만지는 것일까?
어떤 이유로 이 여인은 예수님의 찌찌트를 만지는 것일까?
마태복음9:21에서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라고 기록한다.
마가복음5:28에도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라고 기록한다.

어떻게 이 여인은 12년 동안 온갖 방법을 다 써봐도 고치지 못한 자신의 질병이 예수님의 겉옷 가, 옷단술을 만지면 깨끗하게 치료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 당시에 속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유능한 분의 겉옷에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그래서 유능한 분의 겉옷가를 만지기만 해도 유능한 분이 가진 능력이 자기에게로 옮겨온다는 속설이 있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하늘로 올라갈 때, 엘리야의 겉옷을 가진 엘리사에게 갑절의 능력이 임했던 것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유능하신 분의 겉옷에는 신비한 능력이 있어서 그분의 겉옷만 만져도 그분에게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옮겨진다고 믿는 믿음이 있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신비로운 능력들이 쉴 사이 없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속설이 있었는데 성령 하나님께서 여인에게 무리들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예수님의 겉옷가를 살짝 만지고 빠져나오려는 마음을 감동으로 주시는 것이다.
여인에게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예수님의 겉옷에 손만 대어도 예수님이 가지고 계시는 능력이 자신에게 옮겨져서 12년 동안 지긋지긋했던 혈루증이 근원까지 깨끗하게 고침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도록 감동을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로 나아가서 예수님의 겉옷 가라도 손을 대려고 하는 열망, 열정, 믿음이 비로소 살리는 능력, 치유받는 능력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는 욕구가 살아나야 하는 것이다.
반드시 예수님을 만나야지 하는 열망이 살아날 때,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해진다.
자신에게 있는 실제적인 문제가 크면 클수록, 더 크면 클수록 자신의 나약함, 무능함, 무익함을 깨닫게 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아 나서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나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고 인식하게 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믿음은 마음으로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지키고 순종하여 실천하여 행함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캄캄한 방에 들어갈 때 전등 스위치만 올려면 등불이 켜진다는 것을 머리로 너무나 잘 안다.
모든 것들이 다 갖추어져 있음을 이미 다 알고 있다.
그런데도 캄캄한 방에 들어가서 스위치를 올려야 하는 돼. 스위치를 올려야 하는 돼. 누가 스위치 올려줘야 하는데, 아무도 올려주지 않네.’하기만 하고 있으면 캄캄한 방에 등불은 켜지지 않는다.
하지만 스위치를 올리는 순간 어둠은 사라지고 환하게 밝아진다.
스위치를 올리는 것이 순종이요 실천이요 행함이다.
믿음의 행위라는 자기 스스로 전기 스위치를 올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믿음의 행위는 무더운 방에 에어컨 스위치를 올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믿음의 행위는 차가운 방에 보일러 스위치를 올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절대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쉬어도 너무 쉬운 일이다.
쉬어도 너무 쉬운 일인데도 어렵다고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다.
어렵다고 생각만 하고 있으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 자락을 붙잡아야 하는데,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지기만 하면 되는데,...
하면서 계속 그대로 있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만져야 하는 것이다. 손을 대어야 하는 것이다. 스위치를 올려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행위이고, 믿음의 행위가 있어야 무슨 일이든 일어나는 것이다.


 여인의 실체를 밝히시는 예수님.


이런 믿음이 생긴 여인은 어떻게 하든 예수님의 겉옷을 만지기 위해서 무리들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하든 상관없이 막무가내로 예수님을 향하여 돌진하는 것이다.
예수님 근처까지 파고 들어간 여인은 예수님의 겉옷을 살짝 만지는 데 성공한다.
그러자 자기 자신에게 어떤 느낌같은 것이 확하고 다가온다.
그래. 내 몸에 변화가 일어났어. 이제 혈루증이 깨끗하게 나았어.”라는 느낌이 확하고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인은 뒤로 물러서려고 한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 가시던 걸음을 멈추어 서신다.
가시던 걸음을 멈추어 서신 예수님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라고 물으신다.
아무 것도 모르는 베드로는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라고 대답한다.
베드로의 대답에는 아랑곳하지도 않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라고 재차 물으신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여인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계셨을까?
예수님은 여인의 존재를 모르지 않는다.
이미 예수님은 여인의 존재를 알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이미 여인의 존재를 알고 계셨다면 그냥 모르는 척하면서 지나가도 되었을텐데 왜 굳이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하시는 것일까?


여인은 더 이상 자신을 숨길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47절에서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인은 자신의 저지른 행위를 고백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고생하며 살았던 여인이 자신의 겉옷 가를 만짐으로 혈루 근원이 말끔히 사라진 모습을 제자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하시는 것이다.
특히 지금 급하게 가고 있는 발걸음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기 위해서 가고 있는 것이다.
여인은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으면서 죽을 고생을 했던 여인이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이제 12살에 되지 않았다.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했던 여인에게서 12살 난 딸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하는 아버지에게 무언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여인의 정체를 밝히려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야이로와 제자들과 많은 무리들에게 여인의 정체를 밝힘으로 예수님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시청각의 모습으로 보여줌으로써 야이로에게 실제적인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신앙인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하고 계실까?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더욱더 강력하고 확신하는 믿음을 키워주고 싶어하시는 것일까?
예수님은 신앙인들에게 머리에만 맴돌고 있는 믿음, 입으로만 하는 믿음이 아니라 실제 삶의 현장에서 온 몸으로 드러날 수 있는 믿음의 실체를 가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머리로 인식한 믿음이라면 가슴으로도, 온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자신의 딸로 인정해 주시고 구원을 선포하시는 예수님


여인은 자신이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이라고 고백한다.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은 부정한 사람이다.
여인은 자신이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는 부정한 여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부정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부딪치면 그 사람들도 부정하게 된다.
부정이란 개념은 유대인들은 가장 싫어하는 개념이다.
유대인들은 정결이란 개념을 삶의 최우선적인 개념으로 살아가는 민족이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들과 무리들과 더 나아가서는 회당장 야이로까지 이 여인으로 인하여 부정하게 되는 상황이다.
이 여인이 예수님 가까이까지 가려고 헤치면서 부딪친 모든 사람들은 부정하게 된다.
어쩌면 이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을 만졌기 때문에 예수님조차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무리들이 한순간에 부정하게 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자신이 부정하게 된 사람들은 이 여인을 그냥 봐줄 수가 없는 것이다.
돌로 쳐 죽여도 시원찮게 된 것이다.


겉옷은 그 사람의 신분을 상징하기도 한다.
겉옷으로 감싸 사람의 신분은 그 사람을 감싸고 있는 겉옷에 달려 있다.
그래서 겉옷은 자기 가족들 외에 다른 사람들은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되는 금지된 물품이 있다.
가족은 그 사람의 겉옷을 만져도 되지만, 다른 사람은 어느 누구라도 겉옷을 만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오늘날에야 긴 수염을 기른 사람이 흔하지 않지만, 전에는 수염의 모습에 따라서 신분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사극에서 보면 왕수염, 대감수염, 양반수염, 장군수염의 아주 약간씩 다르게 묘사한다.
그런가하면 하층민들의 수염도 가지각색이다.
왕의 수염을 누가 만질 수 있는가?
왕의 부인이나 아들딸이나 손주는 얼마든지 왕의 수염을 만질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왕의 수염을 만졌다고 가정한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될까?
그 사람은 당장 참수형을 당하게 될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처럼 유대 사회에서도 겉옷은 가족들은 만질 수 있지만, 타인은 겉옷을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을 만진 것이다.
지금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을 만지려고 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부정한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주변 사람의 분노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여기저기서 씩씩거리면서 이 여인을 향하여 돌로 쳐 죽일 태세인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48절에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라고 선포하시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겉옷을 만져서는 안 되지만, 가족은 만질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향하여 내 딸이라고 선포하시는 것이다.
가족들은 겉옷을 얼마든지 만질 수 있다.
여인은 예수님의 딸이라는 신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겉옷을 만져도 아무런 이상이 없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돌로 여인을 치려고 하던 무리들에게 여인을 향하여 어떤 일도 할 수 없도록 방어막, 방패막을 쳐 준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선포해 주시는 것이다.
여인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혈루증을 깨끗하게 치유받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정체에 대하여 이미 알고 계셨지만, 여인에게 확신하는 믿음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딸로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구원의 확신을 선포해 주시기 위하여 여인의 정체를 확인하려고 하시는 것이다.
이제는 육신의 질고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딸이요 백성이라고 선언해 주시는 것이다.
여인은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
여인은 가장 위대하고 큰 축복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누구 앞에서도 당당한 하나님의 귀한 딸이라는 신분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여인에게 자신의 딸이라고 선언해 주시는 예수님은 모든 신앙인들을 향해서도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딸이라고 선언해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신앙고백하는 모든 신앙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선포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은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요 자녀요 백성이라는 신분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아버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신앙고백하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 스스로 자기 이름을 부르면서 ”000.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000, 나는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의 딸이야.“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모든 신앙인들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아들이요 딸이요 백성이라는 신분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여인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수치와 모멸감으로 당하면서 살아야만 했던 여인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모멸감이나 수치나 멸시를 당하면서 살지 않아도 된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주인공이 된 것이다.
누구든지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랑과 은혜와 축복의 주인공이 된다.


L4 & B4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인하여 온갖 고생하면서 살았던 여인, 너무 수치스럽고 부끄러워서 누구에게도 고백하지 못하던 여인, 막역하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여인이 성령 하나님께서 감동시켜 주시는 은혜를 따라서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따라가서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짐으로 지긋지긋했던 12년 동안의 질고에서 완전히 해방을 받고 자유인이 되고, 하나님의 딸이라는 인정을 받게 되었다면, 신앙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온갖 질병과 문제 덩어리 속에 살아가고 있는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권세를 힘입으려고 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신앙인들은 무엇을 붙잡고 만지면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만지면서 살아야 한다.


죄인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오직 한 길밖에 없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외에는 다른 길은 없다.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흘리시는 보혈의 피로 모든 죄가 사함을 받고 죄인에서 의인으로, 사탄의 백성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뀐 것이다.
죄인에서 의인이 되는 길, 사탄의 백성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마귀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뀔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붙드는 길 외에 절대로 다른 길은 없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신앙인이 되었기 때문에 신앙인은 자나 깨나 무엇을 하든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만을 믿음으로 붙들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의식적으로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만지면서 예수님을 깊이깊이깊이 묵상하면서 예수님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면서 사는 것이다.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가라도 만지면 12년 동안 지긋지긋했던 혈루증에서 치유받고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믿고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졌을 때 그의 혈루증 근원이 완전히 치유함을 입은 것 같은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신앙인들이 받아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붙들고 만지면서 살아야 한다.


신앙인들이 살아갈 수 있는 지침서, 나침판, 등대가 되어줄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유명한 강사들의 강의나 이론이나 사상이 아니다.
신앙인들이 살아갈 수 있는 지침서, 등대, 나침판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다.
성경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직접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세상의 수 많은 사상가들, 철학가들, 학자들, 강사들, 이론가들이 기록한 것들은 세상의 인본주의에 의해서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인본주의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다.
설령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마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꾸며놓아도 절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마귀도 예수님을 시험할 때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험해 온다.
인본주의는 전폭적으로 삼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대적하는 무리들이 내세운 사상이다.
인본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기록한 것들은 마귀, 사탄, 어둠의 세력들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존재인 것처럼 착각하면서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신앙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성경만을 붙잡아야 하고, 그 말씀을 만지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말씀만을 붙잡고 만지면서 사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지키고 순종하고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이 진정한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이다.
유명한 목사님이나 신앙인들이 저술한 책이나 설교원고도 좋은 것이지만, 그것들보다 더 우선되는 것은 성경 그 자체를 붙들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세상의 그 어떤 신학, 설교, 저술보다도 중요한 것은 불변하는 성경이다.
신학도 설교도 저술도 죄인인 사람들의 생각과 사상과 의식 체계가 삽입되어지는 산물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절대적인 불변의 산물이 될 수 없다.
목사인 저의 설교나 가르침도 얼마든지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뼈대를 형성하는 성경만을 최고의 지침서, 나침반, 등대로 믿고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 성경 그 자체를 최우선으로 붙들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감동시켜 주시는 음성을 붙잡고 만지면서 살아야 한다.


한때 한국교회에 일명 유명하다는(?) 부흥사들, 예언가들이 예언한다는 것이 대단한 것처럼 여겨졌던 시절이 있었다.
입신(入信)해야 한다고, 입신하지 않고 믿음 생활하는 것은 가짜나 다름없다고 떠벌러던 때가 유행처럼 번졌던 시절이 있었다.
유명한(?) 이들이 안수하면 뒤로 벌렁벌렁 넘어지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던 시절이 있었다.
뒤로 넘어지지 않아도 되는데 일부러 넘어지는 척했던 시절도 있었다.
아직도 이런 류에 빠져서 능력있는 능력자처럼 행세하는 이들이 있다면 정말로 회개해야 하고, 성경 말씀을 제대로 깨달아야 한다.
이른바 이들이 말하는 입신(入神)이란 무당들이 귀신에게 접신하는 행위, 입신하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무당들은 자기가 섬기는 신이 입신하지 않으면 절대로 굿을 하지 못한다.
무당들은 자기들이 모시는 신이 입신하여 들어와야만 굿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입신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입신은 바로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신앙인의 영으로 들어오는 것을 입신이라 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12:3에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성령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구주라고, 메시야라고, 구세주라고 고백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어느 누구라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주라고, 구세주라고, 메시야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영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도록 감동을 주셨기 때문에 주님이라고, 구세주라고, 메시야라고, 죄 사함 받았다고 고백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성령 하나님께서 죄인의 영에 들어와서 감동을 주셔서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고 고백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믿음으로 고백하여 하나님의 자녀, 백성, 아들 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죄인이 의인으로 거듭나서 중생하는 것이다.
신앙인들, 성도들에는 성령 하나님께서 입신하여 들어오셔서 임재하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거주하시는 성전(聖殿)이라고 말씀하신다.
신앙인들은 항상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시는 성전 된 삶을 사는 것이다.
성전이 된 신앙인들은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시기 때문에 언제나 성령 하나님께서 감동주시는 음성을 귀담아듣고 그 음성에 믿음으로 붙잡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으면서 고통 가운데 살았던 여인은 예수님에 대하여 들려오는 소문을 붙잡아서 예수님 앞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고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성전 된 신앙인들은 성령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을 귀담아듣고 그 음성을 믿음으로 붙잡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아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신앙인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