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대사를 행하셨사오니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시71:18-19)
궁극이추천 0조회 4026.01.04 09:06댓글
71편 18절-19절: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을 장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주의 의가 또한 지극히 높으시니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대사를 행하셨사오니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
18절: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을 장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이런 기도를 하는 사람이 게으름을 필 수 있을까? 틀림없이 부지런한 사람이다. 주의 힘과, 즉 하나님의 힘과 하나님의 능력을 전하려면 이 면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러면 ‘힘’이 무엇이냐? 무엇이든지 잘 할 수 있는 수단이고, ‘능’은 무엇이든지 잘 해 내는 재능이다.
주는, 하나님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각 종류별로 만드셨고, 또한 동 종류를 수억 억 만 가지로 만드는 능이 있으시고, 또 이것을 섭리 보존 통치하시는 능력이 있다.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것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중에도 사람의 목숨과 직접 관계가 되는 눈에 안 보이는 신비로운 피조물이 얼마든지 있다. 눈에 안 보이는 것일수록 더 귀하고 중요하고, 어떻게 보면 더 위험할 수도 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데, 눈에 보이는 것은 피할 수 있는 시간이 있지만 눈에 안 보이는 것에는 꼼짝없이 당한다.
눈에 안 보이는 것 중에는 물질과학에 속한 것이 있는데, 예수를 믿는 것은 눈에 안 보이는 것 중에서도 더 나아가 죽음 저 너머 세계에까지 자기를 영원히 살리는 것이 들어 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인간보다 더 잘 아신다.
뉴스를 들어보면 물질을 연구하는 박사들이 ‘이 약이 뭐에 좋다’ 라고 했는데 얼마 안 가서 ‘그 약은 무슨 부작용이 있어서 먹으면 안 된다’라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절대가 아니니 세상 것이 자기를 절대적으로 행복하게 해 준다고 믿지 말아라. 아무리 좋은 약을 먹더라도 그 사람의 성격 성질을 못 고친다면 소용이 없다. 성격 성질이 못된 사람은 약으로 병든 몸을 고쳐서 건강하게 되면 더 몹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성경에 모든 병은 마음에서 나온다고 했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마음에 따라 사람의 생명이 길어지기도 하고, 아무리 부자라도 마음에 따라 하루 저녁에 눈이 쑥 들어가고 몸에 병이 오기도 한다. 기독교는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느냐?’ 하는 것을 알게 하는 지식이 들어 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하냐? 이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비교하면 안 된다. 다른 종교는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당신의 온전한 성품을 입혀주시려고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만드셨고, 인간들에게 모든 만물을 동원하신다. 어찌하든 깨닫게 하고 어찌하든 총명한 자로 만들어 주시려고, 어떻게 하든 지혜자로, 어찌하든지 도덕성의 인격자로, 당신처럼 최고의 인격자로 자로 만들어 주시려고 모든 것을 동원하신다.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해가 동원이 되어 넘어가고, 밤이 되면 달이 동원이 된다. 모든 이웃을 다 동원하고, 밤낮을 동원하고, 계절을 동원한다. 이런 게 다 인간 자기를 깨닫게 해 주는 재료다. 이걸 생각해 봐라. 멍청하게 사는 것보다 이런 만물의 이치를 생각하며 산다면 얼마나 영특할까? 얼마나 똑똑할까? 이건 없이 배부르게 먹으면 잠이나 자고, 일을 좀 하라고 하면 못하겠다고 한다면 이런 사람을 어디에 쓰겠느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참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살리는 수단도 쓰시고, 죽이는 수단도 쓰시고, 고통을 주는 수단도 쓰시고, 물질축복을 주는 수단도 쓰시고, 빼앗는 수단도 쓰시고, 때로는 이적과 기사의 수단도 쓰신다. 하나님께서 인간 나를 영특하게 깨닫게 해 주시려고, 참 사람으로 만들어 주려고 이런 것을 동원을 하신다.
학교의 선생은 자기가 배운 것을 학생들에게 전하고, 교회의 인도자들은 교인들에게 말씀의 이치를 깨닫게 한다. 하나님의 늙은 종은 성도들에게 인생을 깨닫게 한다. 인생을 깨달으려면 나이 많은 사람에게 가서 배워라. 그러면 자기가 실패를 하지 않을 수 있는 지식을 미리 습득해서 자기는 실패를 하지 않게 된다. 일반적으로 딸이 시집을 가기 전에 어머니가 딸에게 살림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시집가서 골치 덩어리다.
사람이 어릴 때부터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듣고 깨닫고 진리 자체화로 영능의 실력자로 잘 만들어지면 육신의 나이가 들어갈수록 속사람은 젊은 힘이 솟구친다. 이게 성경에서 말하는 참 젊은이다. ‘육신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사람은 나이 들어갈수록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 정신 면이 청청해져야 한다. 이게 젊은 사람이다. 이게 참 젊은이다. 육신은 젊은데 속이 늙어 터져서 게으르고 쓸모가 없으면 안 된다.
사람이 육신도 늙고 속사람이 된 것도 없다면 나이 먹은 게 아무 가치가 없다. 일반적으로도 나이가 들수록 세상을 살아온 좋은 경험이 있어야지 나쁜 경험만 잔뜩 들어있으면 몹쓸 사람이 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젊어서 예수스승을 버리고, 늙어서도 예수를 버리면 하나님의 지혜지식성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도덕성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능력성적인 면에서 깨닫고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사람이 보고 듣고 깨닫는 면을 버리면 자기의 신세가 어찌 되겠느냐? 아는 면에서, 깨닫는 면에서 성장하지 못하고 자라지 못하면 미련퉁이가 된다.
시간을 낭비한 젊은이, 깨달음을 무시한 젊은이, 세월을 허송한 인간은 늙어지면 결국은 모든 것이 자기가 싫어서 자기 곁을 다 떠난다. 하나님에게도 버림받고, 세상에게도 버림을 받는다. ‘어릴 때부터, 젊어서부터 사람의 바탕이 어떻게 되어 들어가느냐?’에 따라 이런 사람이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는 거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늙어서 이런 사람이 한 사람도 있어서는 안 된다.
19절: ‘하나님이여, 주의 의가 또한 지극히 높으시니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대사를 행하셨사오니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 하나님의 의(옳은 것)는 의 중에 지극히 높다. 선악과 따먹고 저주받은 인간의 의에 비할 수 없다. 주의 의는 질적으로 높고, 근원적으로 높고, 차원적으로 높다. 세상의 의는 땅의 의요, 세상 아래의 의요, 선악과 따먹고 저주받고 타락된 의다. 주님의 의, 하나님의 의는 근원적으로 하늘에서 생산이 된 영원히 가는 것, 영원히 옳은 것, 영원히 높은 것이다. 세상의 의와는 질이 다르고 뿌리가 다르다.
예수님의 의와 예수님의 선과 예수님의 사랑은 석가나 공자의 의와도 근원적 질적으로 다르다. 예수님의 것은 하늘의 것, 석가나 공자의 의는 땅의 것이다. 같지를 않다. 예수님이 땅에서 보통 인생처럼 났다면 다 같은 의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의 말씀이다. 이런 기독교인데, 질적 차원적으로 도가 다른 것인데 어떻게 예수님의 의를 이종교의 의와 같다고 생각을 할 수 있느냐? 같은 것으로 생각을 하면 자기에게 저주가 들어간다.
우리의 속 성품이, 즉 인격과 성품이 하나님을 닮아지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는데, 이 구원을 위해 예정과 계획과 설계와 창조와 섭리와 보존하심과, 그리고 그 결과와 목적이 영원히 옳다. 옳지 않은 게 하나도 없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하셨건 가치판단 평가적으로 영원히 의롭고 선하고 옳다. 그러나 선악과 따먹은 사람들의 옳음은 근원에 있지 않고, 뿌리에 있지 않고, 본질에 있지 않고 활동과 방편에서 찾는다. 어떤 좋은 행동을 해야 만이 ‘의롭다. 선하다’라고 하지 이런 걸 안 하면 좋은 사람인 줄을 모른다.
세상사람들은 ‘의롭다. 선하다. 악하다. 옳다. 아름답다. 추하다’ 하는 판단이 전부는 선악과 따먹은 타락된 인간의 주관성에서 나온 것이다. 영원히 가는 게 아니라 임시성이다. 세상 것은 임시성이요 변질되고 변화되고 썩고 불타진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를 자기 것으로 삼는 사람은 인간 자기가 높아진다. 하나님의 옳음을 가지면 자기가 높아진다. 성경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의가 또한 지극히 높으시니이다.’ 자기가 높은 것을 알면 가지려고 하게 된다. 그러니까 다윗이 본 절을 말하는 것은 자기가 지극히 높은 것을 가졌기 때문이다. 자기가 높아지고 싶으면 누구의 의를 가져야 하느냐? 하나님의 의를 가지면 된다. 이런 사람이 되면 자기가 하나님은 아니로되 하나님처럼 생각이 나오고, 활동이 나오고, 행동이 나오고, 말이 나오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되고, 옳은 것으로 살게 되니 가치 있는 사람이다.
세상사람들은 자기가 높아지기를 원하고 커지기를 원한다. 존귀해지기를 원하지 천해지길 원하지 않는다. 자기가 커지기 위해 큰 사람을 찾아다니고, 귀한 사람을 찾아다니고, 권세와 권력을 가진 사람을 찾아다닌다. 그런가 하면 영원히 존귀해지길 원하는 사람은 주님의 의를, 주님의 옳음을 찾는데, 이 사람이 영원히 존귀하게 될 참 옳은 성도다. 이런 성도는 높아진다. 그러나 세상과 세상 것을 구하고 찾는 교인은 하나님 앞에서 저질이라서 희망이 없는 사람이다.
‘주께서 대사를 행하셨사오니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 주께서 대사를 행하셨는데, 인간 중에 이런 일을 한 자가 있느냐? 주의 이 대사를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세상 마지막에 세상을 불태우고 예수 믿는 자들을 천국에 데리고 올라가시는데, 그 이전에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많이 하면 천국에 올라가서 많은 상을 타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신앙을 사역적인 신앙이라고 하는데, 이런 정도의 깨달음에는 사단 마귀와 거짓 종들이 파놓은 함정이 끼어 있을 수 있다. 무슨 말이냐? 사람이 하나님의 온전으로 만들어지는 이치는 모른 채 종교적인 일을 크게 많이 하는 것을 신앙으로 아는 사역목적의 신앙에서는 깨닫는 면이 둔팅이가 되고, 아무리 예수이름으로 큰일을 이루어 놓았다고 해도 이런 것은 영적이고 신령적으로 영원한 것이 아닌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이니 하나님 앞에 인격적 성품적으로 하나님으로 자체화 되는 것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 날에 다 불에 타버리게 된다.
주님의 의를 아는 차원 높은 신앙이라야 주께서 행하신 대사를 알 수 있다. 창조의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이니 역사의 흐름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성이, 즉 생명 강이 흐르고 있다. 눈에 보이는 역사 속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역사, 사람이 진리진실로 만들어지는 역사가 흐르고 있다. 우리교회는 이 역사의 주인공들이 되어야 한다.
껍데기의 역사는 다른 사람들이 하게 놔두고 우리는 시대 속에 든 예수 그리스도성, 하나님의 성품성,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 강, 진리이치의 말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하는 구원의 말씀을 내가 먹고 그 사람으로 커지고 그 일을 하며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면 마지막 때 변화 부활 시에 영능의 실력자로 나타나게 된다. 능력의 사람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사는 생활 속에서 이런 정신 사상이 들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먹고 마시고 사는 것은 일반사람들과 같을지라도 중심의 정신 사상은 다르다. 하늘의 정신 사상을 가지고 있다. 하늘의 사람이다.
세상만사 역사의 끝마침에, 즉 변화 부활 때 모든 성도들이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진 영원히 죽지 않는 영능의 실력대로 그 실력이 나타나게 되는데, 게으른 사람, 좀 더 부지런한 사람, 좀 더 부지런한 사람이 차등적으로 나타난다. 인격의 세계에서는 차등과 격차가 있는 거다. 이 자리에서도 은혜를 많이 받는 사람이 있고, 졸기만 하는 사람이 있고, 듣기 싫어서 입을 삐쭉이는 사람도 있고, 멍청하게 있다가 가는 사람도 있는데, 이대로 변화 부활이 되면 그대로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현재 자기는 그 날에 어떤 모습으로 나오겠느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세계에 오셔서 성도의 구원을 위한 대사를 분명히 보여주셨다. 첫째는 먼저 나의 영을 중생시켜 주셨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을 다시 살린 것이 중생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예수 믿는 자는 영이 중생이 되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중생이 되었다. 중생된 이 영은 신체가 죽어도 안 죽는다. 하늘나라로 들어간다. 질이 하늘나라의 것과, 하나님의 것과 같기 때문에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거다. 두 번째는 믿는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를 감동 감화 시켜서 깨닫게 해 주셨다. 세 번째는 우리를 더 좋은 부활로 열매를 맺게 하려고 모든 구원도리와 이치를 알려주셨다. 이것이 우리를 위한 큰 대사다. 큰일이다.
이 세상에서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느냐? 어느 왕이, 어느 통치자가, 어느 도통한 사람이, 어떤 종교의 창시자가 이 일을 할 수 있느냐? 아무도 못한다. 오직 주님께서만 이 일을 하실 수 있고, 하셨다. 이 일은 그 효력성이 영원히 가는 대사다. 못난 나를 하나님 당신처럼 만들어 주시는 이 일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느냐? 돈 많이 벌어서 아파트 몇 채 사는 거? 이건 불에 타버린다. 기독자는 참 사람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 신앙 믿음의 가치는 안 보고 ‘누가 돈이 많은가? 누가 사회적 지위가 높은가?’ 이런 것을 보는 것은 사람을 잘못 보는 거다. 물질적인 것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사람을 잘못 보는 거다. 우리는 사람을 보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안 그러면 인간답게 못 산다.
우리를 당신처럼 만들어 주시고자, 참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고자 만물이 다 동원이 됐다. 시간이 동원됐지, 인간이 동원됐지, 목사가 동원됐지, 음식이 동원됐지, 해가 동원됐지, 이 자리에도 건물이 동원이 됐지, 의자가 동원이 됐지, 마이크가 동원이 됐지, 동원이 안 된 게 없다. 심지어 마귀까지 동원이 됐다. 삼위 하나님께서 합동작전으로 사람 만드는 일을 하신다. 이게 큰 대사다.
일 중에 큰일은 사람을 하나님처럼 똑바로 만들어 내는 거다. 이게 일 중에 가장 큰일이고, 가장 가치 있는 일이고, 영원히 가는 일이고, 영원히 상 받는 일이고, 영원히 영광된 일이다. 목사는 이 일을 해야 한다. 교회 인도자는 이 일을 해야 한다. 세상 인간들 중에 어느 유명한 인간이 하늘에까지 상달이 되는 대사를 행하고 간 자가 있느냐? 석가냐? 아니다. 석가도 죽었다. 부활을 못했다. 공자 맹자도 다 무덤 속에 있다. 예수님의 무덤은 텅텅 비었다. 부활 승천을 하셨다.
세상인간들은 무엇을 대사라고 하느냐? 시집장가 가는 것, 아이 낳는 것, 초상 치는 것, ‘어떻게 하면 편히 살다 가느냐?’ 맨 이런 거다. 인간세상은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소원 목적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인간에게 행하시는 주의 큰일을 전해야 한다. 이게 천국복음이다.
우리가 주의 이 큰 대사를 두고 세상적인 교회와 동업을 하겠느냐? 못한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어떻게 ‘예수 믿어 세상에서 부자 되자’라는 교회와 손을 잡겠느냐? 어떻게 이런 목사와 손을 잡겠느냐? 어떻게 이런 단체들과 손을 잡겠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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