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핍한 자의 부르짖을 때와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시72:3-12)
궁극이추천 2조회 5026.02.01 08:20댓글 1
72편 3절-12절: 의로 인하여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저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저희가 해가 있을 동안에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저는 벤 풀에 내리는 비 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같이 임하리니 저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저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 광야에 거하는 자는 저의 앞에 굽히며 그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공세를 바치며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만왕이 그 앞에 부복하며 열방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 저는 궁핍한 자의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3절: ‘의로 인하여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평강’이란 신앙적으로 볼 때 하나님과 대립이 없는 의사성을 말한다. 인간의 세계에서는 서로 의사성이 다르면 고통과 괴로움뿐이지 평강은 없다.
의로 인하여 큰 산들과 작은 산들이 백성들에게 평강을 준다고 하는 것은 신분이 높은 자들이나 낮은 자들이나, 높은 조직이나 낮은 조직이나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펼친다는 말이다. 주님의 의는 사회적 신분이 높다고 해서 이 사람의 편을 들거나, 사회적 신분이 낮다고 해서 멀리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의견대로 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주님의 의에, 하나님의 옳음에 맞춰질 때 평강케 해 주신다. 존비귀천이나 남녀 고하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의사에 맞추면 모두가 대립이 없이 평강을 맛보게 된다. 나는 하나님의 의사에 맞추는데 어떤 사람은 안 맞춘다면 여기에는 대립이 된다.
하나님의 의사는 항상 질적으로 임시성에 두지 않고 영원에 둔다. 이해타산, 가치평가성, 유익, 이익 전부를 죽음 저 넘어 신령천국에 두고 말씀을 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인간의 입장에서도 그러한 뜻으로 알아 들어야 한다. 그러니까 성경말씀에 ‘내 말에 순종하면 너희들에게 복을 준다’ 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어떤 복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거냐? 신령천국에 대한 복이다. 이게 원 축복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 의도성을 모르는 사람은 세상에서 물질소유를 많이 가지는 것으로 생각을 한다.
원 축복은 없어지는 게 아니다. 불에 타지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할 때는 불에 타지고 없어지는 것을 주겠다는 말씀이 아니다. 이런 것을 주겠다는 말씀이라면 하나님은 거짓말쟁이가 되고 이치에도 안 맞는 말이 된다. 왜냐? 안 믿는 사람도 부자가 많으니까. 그럼에도 신앙 믿음의 이치를 모는 사람들은 거짓 종들이나 사기꾼들의 그런 말에 잘 속아 넘어간다. 아무리 세상공부를 많이 했어도 신앙사상 면의 이치를 모르면 그냥 속는다.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주겠다고 하는 것은 말씀에 순종을 하면 참 사람이 되고, 영특해지고, 지혜로워진다는 거다. 이게 원 축복이다. 하나님을 닮아지는 게 원 축복이다. 신령계가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 당신의 지혜로, 지식으로, 그 성품으로, 그 만능의 능력으로 이 세상의 물질을 다 만들었다. 그렇다면 인간 편에서 생각을 할 때 세상 것을 차지하는 것과, 하나님 한 분을 차지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을 차지하는 게 더 좋겠느냐? 하나님 한 분을 차지하면 물질적인 것도 다 들어간다. 사람의 머리가 깨우쳐지면 세상을 이용 활용을 하게 되고, 물질을 이용 활용하게 된다. 그러니까 먹고 마시는 축복은 자기 손에 달려있는 거고, 또 말씀을 순종하는 성도에게 우로지택으로 비와 해를 비춰서 일반은총도 주시는 거다. 그러나 순종을 안 하면 모든 것을 빼앗긴다.
4절: ‘저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신원’이란 법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말인데, 억울한 누명을 벗겨준다든지 가슴에 한이 맺힌 것을 풀어준다는 의미가 있다.
너나 나나 다 부자인데 자기만 가난한 자로 사느냐? 왜 가난한 자가 되었나? 착취를 당해서 가난하냐, 노력을 안 해서 가난하냐? 착취를 당했다면 왜 당했느냐? 노력을 안 했다면 어느 면에 노력을 안 했느냐? 알고도 안 했느냐, 몰라서 안 했느냐? 자기가 몰라서, 못 깨달아서 거짓 것들에게, 비진리에게, 사망적인 것들에게 이용을 당했다면 억울한 일이다. 거짓 것들에게 속아서 죽도록 충성봉사를 한 것이, 즉 시간투자, 노력투자, 물질투자를 한 것이 자기의 사망성공이 되었다면 참으로 분한 거다. 이럴 때 쓸개가 있는 사람이라면 마음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올라오지 않겠느냐?
자기가 남에게 속을 때는 먼저 자기가 자기에게 속아 넘어간다. 얼마나 어리석으면 자기가 자기에게 속아 넘어가느냐? 이런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자기가 굉장히 똑똑하다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헛똑똑이다. 자기가 몰라서, 미련해서, 잘못 알아서 영적인 면에 원통한 일을 당했으면 영적인 면에 부요자가 되게 해 달라고, 즉 그 한을 풀어달라고 주님께 아뢰어야 한다.
‘저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무엇에 가난이냐? 물질적인 가난은 임시적이다. 물질적인 부요자 역시 임시적이고 천국에 가지고 가지 못한다. 그러나 영적인 면의 가난이나 부요는 천국에까지 가지고 가게 되고, 영원히 자기 것이 된다. 그러니 예수 믿는 자기는 진짜 가난이 뭔지를 바로 알고, 자기를 쳐다보면서 자기는 어느 면이 가난한 것인지 깨달아서 그걸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하라. ‘하나님 아버지, 내가 어리석어서, 미련해서 내가 나에게 속아 넘어가고 내가 남에게 속아 넘어갑니다. 이거 원통하고 분해서 못 견디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리하고 똑똑하고 지혜자인 것처럼 나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렇게 만들어 주십시오. 내가 미련하고 영적인 면에 가난하면 누가 봐도 하나님을 욕하고 하나님의 얼굴이 더러워지니 진정코 나를 영적인 면의 깨달음에 부요하게 해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하라.
자기의 영적인 가난성을 안다면 영적인 면의 부요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게 되고, 그 다음에는 영적인 면의 부요자기 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자기의 영적인 면의 가난성을 알면서도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요행을 바라는 거고 미련한 자다. 세상사람들은 자기가 물질 면이 가난하면 그걸 메우려고 피나는 노력을 한다. 믿는 사람들도 영적인 면에서 마찬가지다. 자기의 영적인 면이 가난함을 알 때 말씀을 한 번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둘을 알게 하시고, 두 번을 순종하면 그만큼 더 알도록 자꾸 도와주신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할 일은 전혀 안 하고 뭘 자꾸 달라고만 하면 주시겠느냐? 얻어맞지 않으면 천만다행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이런 정신을 고치게 하려고 이런 저런 사건을 막 몰아붙인다. 이 때 어리석은 사람은 대립을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대립을 안 한다.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궁핍’이란 가난한 살림살이를 말한다. 궁핍성으로 사는 사람은 자기가 부자가 되어서 남에게 나누어 주며 살고 싶듯이 자기 자손들을 부자로 살게 하고 싶다면 자손들을 잘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본문의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라고 하는 것은 구원의 자손들이 많은 부요성을 말한다. 구원운동을 하는 자손들이 많아진다는 거다. 또 하나의 뜻은 개체적으로 영적인 면에 궁핍을 느끼면서 영적인 부요성을 향한 열심자는 이루어지는 구원이 많다는 거다. 이것은 곧 자기의 후손과 같아서 천국에서 자기의 누림성이 많아지게 된다.
일반적으로 자기의 후손은 자기 뒤를 따른다. 개체적으로는 자기가 행한 대로 그것이 자기 뒤를 따른다. 그렇다면 자기는 어느 면의 궁핍성을 생각하며 살았느냐? 영적인 면의 궁핍성을 느끼면서 이것을 채우기 위해 말씀에 순종해 나가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 이러면 그 다음에는 언행심사로써 구원이 나온다. 구원의 활동이 나온다. 그러면 여기에 대한 적절한 보상들이 따라온다. 또한 영적인 면에 부요자가 되어서 교훈으로 자손들을 가르치게 되니 이 자손들이 구원 면에 부요자가 된다.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한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못 살고 가난한 사람들의 자손을 구원한다는 것으로 해석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게 없다. 안 믿는 사람도 이런 해석은 할 수 있다. 성경은 영원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기 때문에 해석을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어떤 사람을 압박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꺾어버린다는 거냐? 하나님 당신을 압박하는 자들이냐, 영적인 가난에서 탈출하려고 하는 성도를 압박하는 자들이냐? 후자다. 영적인 면의 궁핍을 느끼고 이룰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성도를 압박하는 자들을 말한다. 말하자면 교권과 세권을 가지고 내리 누르고, 직분을 가지고 내리 누르고, 공갈 협박으로 내리 누르고, 인간의 약점을 가지고 내리 누르고, 충성봉사를 안 하고 헌금을 안 한다고 내리 누르는 등 세상에 속한 요소를 가지고 내리 누르는 자를 말한다.
이런 압박의 요소가 교회 안에도, 노회나 총회 안에도 얼마든지 있다. 진리성도가 아니라면 이런 압박을 당해야 되겠지만 예를 들면 세상 속화된 교회에 다니다가 진리이치를 깨닫고 나서 영적인 면의 가난에서 탈출하려고 ‘아, 이 교회에 있어서는 안 되겠구나. 내가 이곳에 있다가는 평생 이용만 당하겠구나’ 해서 그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밤낮으로 전화를 하고, 찾아오고, 공갈 비슷한 말을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영적인 면의 가난을 면해보려고 애를 쓰는 성도를 핍박하고 압박하는 것이니 하나님께는 이런 자를 꺾어버리겠다는 거다.
성도가 영적인 면의 가난과 궁핍성에서 벗어나고자 진리를 붙잡고 생명 길 좁은 길을 갈 때 이 사람을 진리로 인도하고 당겨주고 밀어줘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막는 자를 꺾어버리시는 거고, 본인 스스로가 진리 길로 가기를 싫어하는 자도 하나님께서 꺾어버리신다. 그 방편은 여러 가지다.
5절: ‘저희가 해가 있을 동안에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해는 진리를 상징하며, 달은 진리생명 길을 가며 신정통치를 받는 성도요, 곧 교회를 말한다. 해는 어두움을 좇고, 생기를 주고, 생산케 하고,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자연은총을 준다. 우리는 이 해를 보면서 빛 되신 주님을 생각하게 되고, 주님의 살리는 역사를 생각하게 되고, 주님의 특수은총을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주로부터 일반 자연은총과 특수은총을 받지 못하면 지상에서 멸절이 된다. 일반적으로 악한 자들도 해를 피해 살 수 없다. 우리 인간은 수 개월간 비가 안 오면 두려움을 느끼는 존재요, 지진만 크게 일어나도 두려움을 느낀다. 이런 게 다 성도를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다.
‘해가 있을 동안에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달은 해의 반사체이듯이 교회는 하나님의 반사체다. 곧 교회는 진리의 주를 나타낸다. 그래서 진리의 종들이 진리를 밝히 드러내면 악한 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된다. 주 하나님의 역사가 있어서다. 말세에 교회 안에 세속화 된 종들이 많다. 그러나 이 땅에는 주 하나님의 역사가 있어서 진리의 교회가 지속하는 한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두려워한다. 그들이 아무리 큰소리를 칠지라도 실은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운 거다.
6절: ‘저는 벤 풀에 내리는 비 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같이 임하리니.’ 벤 풀에 비가 내리면 어떻게 되느냐? 뿌리가 땅에 박힌 있는 식물은 아무리 어려도 이슬비나 소낙비를 맞으면 청청하게 자라 올라오지만 벤 풀은 아무리 큰 억새풀이나 큰 나무라도 푹푹 썩어 들어간다. 그리고 아무리 큰 나무일지라도 베어진 상태에서는 큰 비가 오면 물에 둥둥 떠다니고, 물이 흘러 내려가는 낮은 쪽으로 따라 내려간다. 내려가면서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며 잔가지부터 꺾이고, 점점 굵은 가지도 꺾이면서 몸통만 남은 채로 껍질이 다 벗겨져 뒹굴다가 결국은 벌레를 먹고 썩고 만다.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인생들의 모습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베어지면 이렇게 된다. 뿌리가 없는 신앙은 일반은총을 주어도 계속 썩어 들어간다. 스스로 축복을 받았다고 해도 그 정신은 계속 썩는다. 깨닫는 것이 없는 누림의 사상은 계속 썩는 거다. 이 이치를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뿌리가 없는 이방사상은 아무리 잘 살아도, 아무리 명예 영광에 덜덜 굴려도 썩는 거다. 사람의 두뇌가 썩는다.
7절: ‘저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세상 속화된 거짓된 자들은 계속 썩어들어 가지만 하나님 앞에 의인들은 일반 자연은총에도, 특수사건에도 계속 평강이요, 흥왕이요, 이룰구원이 성장이 되고, 이 구원이 자타에게 연관이 되어 나간다.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평강’은 하나님과 의사단일이 되어야 가능하다. 하나님과 평강이 아니면 고통이 된다. ‘평강의 풍성함’이란 성격적으로나 성질적으로나 성분적으로 모든 면에서 자기의 내적 정신 사상에 부족함이 없이, 빈틈이 없이 하나님의 의사 단일성으로 대립이 없이 성화구원으로 성장하는 것을 말한다. 언제까지? 달이 다할 때까지. 이게 무슨 말이냐? 하나님의 특수은총이 있는 한, 그리고 진리를 반사하는 교회가 이 땅에서 없어질 때까지 계속이라는 말이다. 신정통치가 있는 한 계속 그렇게 간다. 큰 축복이다.
8절: ‘저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 역사적으로 보면 솔로몬 왕의 신정통치와 그 판도가 이랬다. 영적인 뜻은 주의 나라의 통치를 말한다.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바다에는 바람을 따라 출렁이는 큰 파도가 있다.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 강물은 계속 아래로 흐른다. 그러니까 흐르는 세상을 말한다. ‘땅’이란 공동적인 삶을 사는 자들을 말하고, ‘끝’은 땅에 사는 자들 중에 보잘 것 없는 자들을 말한다. ‘다스린다’는 것은 진리통치, 의의 통치, 선의 통치, 아가페 통치, 생명통치를 말한다.
이 세상에서 통치자가 아무리 통치를 잘 한다고 해도 진리통치 생명통치는 없다. 이방세상은 진리통치 생명통치가 없거니와 할 수도 없고, 또한 이런 통치를 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본질에 바로 서야 만이 신정통치를 할 수 있다. 이 통치를 받는 백성은 하나님과 대립이 없다. 하나님에게 안 얻어맞는다. 솔로몬이 통치할 때 그랬다. 우리도, 솔로몬도 다 같은 사람이다.
우리가 미래적으로 주님이 오시면 신정통치를 할 것이라는 것만 알아서는 안 되고 현재적으로 자기가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이 되는 교훈을 받고 하나님과 의사단일이 되어야 만이 그 날에 자기에게 진리통치 신정통치의 효력이 나타나게 된다. 예수 믿는 게 뭐냐? 하나님의 의사에 맞추는 거다. 세상 속화된 교회는 이게 아닌 충성봉사를 많이 하면 축복을 받는다고 한다.
9절: ‘광야에 거하는 자는 저의 앞에 굽히며 그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 여기서 말하는 ‘광야에 사는 자들’이란 배우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자들, 그리고 자기 힘만 믿고 사는 자들, 남의 간섭 없이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사는 자들. 영적인 인격성장이 없이 사는 자들. 본능적으로 미래 없이 사는 자들을 말한다. 이들 모두는 주님 앞에 굽히게 된다.
인간 자기가 어디에 살던 햇볕이 없으면 살 수 없듯이, 자연은복을 떠나서는 살 수 없듯이,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를 떠나서는 살 수 없듯이 심판의 날엔 결국 주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고 주님 앞에 굽힐 수밖에 없다. 인간 자기가 주님의 심판을 피해서 하늘로 올라가겠느냐, 땅속으로 들어가겠느냐? 안 죽으려면 결국 굽힐 수밖에 없다.
‘그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 티끌을 핥는다는 것은 인간 이하의 인격적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는 걸 말하는데, 신정통치를 대적하고 살던 자들은 결국은 주님께 정복이 되어서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한다는 거다. 인간 자기를 세상에 내신 하나님의 선하시고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것을 버리며 살다가, 진리통치를 대적하다가 이런 대우를 받겠느냐?
10절: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공세를 바치며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다시스와 섬’이란 역사적으로 고대무역의 중심지인 지중해의 스페인 섬의 연안과 그곳에 이르기까지의 섬들을 말함이고, ‘스바’는 아라비아 남쪽지역이고, ‘시바’는 아프리카 나일강 중류의 에디오피아를 말한다(열상10:7, 사43:3). 이 왕들이 모두 솔로몬에게 예물을 가지고 왔다.
다윗은 정복을 했고, 솔로몬은 지혜로 다스렸다. 이것은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정복을 당하고 굴복될 것을 예표 하는데, 진리에게 정복이 된 자는 진리의 사람이 되고, 생명에게 정복이 된 자는 생명의 사람이 되고, 사랑에게 정복이 된 자는 사랑의 사람이 되고, 지혜에게 정복이 된 자는 지혜의 사람이 된다.
역사적으로 솔로몬 왕은 산 아이의 어미와 죽은 아이의 어미를 찾는 재판을 했다. 이것은 현재 우리도 산 것과 죽은 것을 재판하는, 즉 구별하고 분별하는 능력을 가지라는 거다. 아이는 생명이요, 소망이요, 사랑이요, 영광이요, 기쁨이요, 행복의 상징이다. 그런데 이 아이가 죽었다. 이 아이를 누가 죽였는지 영적인 면으로 재판을 해 봐라.
진리생명을 죽인 자는 죽은 아이의 어미이고, 진리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산 아이의 어미다. 산 아이의 어미는 희망이 있으나 죽은 아이의 어미는 사망과 눈물과 형벌이 안겨진다. 이것이 과거의 재판이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 재판을 보면서 산 것과 죽은 것을 갈라내고 골라내고 생명을 살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믿는 게 뭔지 이치를 알아야 한다. 어린 생명을, 즉 진리생명을 죽인 자는 아무리 떼를 써도 그 형벌을 면키 어렵다.
솔로몬의 지혜는 산 정신과 죽은 정신, 산 사상과 죽은 사상을 쪼개낸다. 분별해낸다. 그러면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솔로몬의 재판을 할 수 있느냐? 솔로몬의 재판은 잠깐이었으나 이 재판은 우리들에게 ‘자기 속의 진리생명을 누가 죽였느냐?’ 하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즉 예수를 믿는 것은 자기의 심은 대로, 행한 대로 영원한 행불행이 뒤따른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이방세계와 세속화 된 왕들은 생명과 사망을 쪼개는 왕이 없다. 아무리 유명한 왕이라고 해도 이걸 쪼개는 왕이 없다.
아이를 살리는 엄마는 사랑이 있고, 아이를 죽이는 엄마는 사랑이 없다. 신앙생명을 살리는 성도는 아가페가 있고, 신앙생명을 죽이는 교인은 아가페가 없다. 아가페는 진리와 생명과 하나다. 같이 움직인다. 아이를 죽인 자는 형벌을 받는다. 아이는 자라야 미래가 있는 거고 이 아이가 죽으면 미래는 없다.
11절: ‘만왕이 그 앞에 부복하며 열방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 왕들이 왜 그 앞에 부복하며 열방들이 왜 그를 섬기느냐? 하나님의 지혜가 없고 무지하고 무능한 왕이라면 누가 이 왕을 섬기겠느냐? ‘하나님 말씀대로만 살면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게 하며,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 해와 같이 빛나리라. 열 고을 스무 고을을 다스리라’는 것은 무엇을 말함이냐? 우리로 당신처럼 온전자가 되라는 거다. 즉 우리를 영원히 영능의 실력자, 존귀 영광자로 만들어 주려 함이다.
‘만왕이 그 앞에 부복하며.’ 부복하며 그를 섬긴다고 하는 것을 노예나 종이 억압 강압에 의해 주인을 섬기는 것으로 생각을 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지혜지식성, 하나님의 도덕성, 하나님의 능력성을 알고 그것이 좋고, 그렇게 만들어지고 싶어서 자원적으로 섬기는 것을 말한다. 이 섬김이 아닌 것은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게 아니다.
시편 다른 곳에 보면 백성들이 다윗에게 복종한다는 말씀도 있는데, ‘순종’은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 되어서 자원적 소원적으로 되는 거고, ‘복종’은 정복을 당해서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명령을 따르는 거다. 다른 사람을 복종을 시키려면 싸워서 정복을 해야 한다. 그런데 다윗의 백성들이, 즉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복종을 한다는 것은 다윗에게 정복을 당해서 억지로 명령을 따르는 게 아니라 사울 왕의 장관들과 다윗의 형들이 누가 나타났을 때 누구를 못 죽였느냐? 골리앗이 나타나서 하나님을 욕하고 이스라엘을 욕할 때 아무도 이 골리앗을 죽이지 못했다. 이 때 아무도 때려눕히지 못하는 골리앗을 다윗이 때려눕혔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뻐서 자원적으로 다윗에게 복종을 할 수밖에 없는 거다. 해야 한다. 하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 다윗의 행동이 천 번 만 번 옳기 때문이다.
옳은 이치고 옳은 말씀이면 여기에 복종을 하라. 더 나아가 순종을 하라. 옳은 데도 복종을 안 한다는 것은 자기 속에 의사적 대립성이 들어있는 거다. 옳은 것에 복종을 하지 않으면 교만하고, 오만하고, 거짓된 것이니 이 사람은 악하다. 옳은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느냐? 이런 사람은 세상에서 버린바 되고, 저질적인 사람이 되고,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게 된다. 반대로 옳은 것이 즐거워서 기꺼이 순종을 하면 자기가 펴지고, 기쁨이 많아진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고, 사람으로부터도 은혜를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한 구원의 일을 하시는데 이 일을 사람을 통해 하시고, 사건을 들고 와서 하신다. 사건은 사람이 있어야 된다. 이 때 강압 억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원적으로 순종을 하면 자기가 하나님의 성품을 입게 된다.
12절: ‘저는 궁핍한 자의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부르짖는 자가 어느 궁핍에 대한 부르짖음일까? 물질소유에 대한 부르짖음이냐, 진리소유에 대한 부르짖음이냐? 살림살이가 궁핍한 사람이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부르짖으면 가난에서 부자로 건져주겠다는 말이냐? 이런 이방 불신적 세상소원 목적성으로 성경을 풀면 안 된다. 지혜의 왕이 어느 궁핍에 대한 부르짖음을 들어주겠느냐?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진리의 깨달음에 대해 가난을 느끼는데 도움을 구할 길 없어서 애타게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부요자가 되게 건지신다. 차원을 올린다. 진리의 종을 보내거나 말씀의 뜻을 깨닫게 해서 영적인 가난에서 부요자로 올린다. 영적인 차원에서 깨닫고 싶은데 도와달라고 할 사람도 없고, 도와달라고 할 데가 전혀 없을 때 말씀을 붙잡고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열어주시고 도움을 주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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