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아멘. 아멘.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필하다(시72:18-73:2)
궁극이추천 1조회 4426.02.22 08:27댓글
72편 18절-73편 2절.
72편 18절-19절: 홀로 기사를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필하다.
73편. 아삽의 시.
1절-2절: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
기도: 말세 된 오늘날 교회 안에서 거짓된 자들이 진짜인 것처럼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로운 절대 정확한 것을 우리의 가슴 속에 심어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78편 18절: ‘홀로 기사를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기사’란 기이한 사건이요, 신비스런 일이요, 생각할수록 수수께끼 같고, 인간의 경험과 생각으로는 풀리지 않는 일들이고, 오직 신만이 풀 수 있는, 신께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이다. 하나님께서 기사를 행하시는 목적은 인간 나의 구원을 위해서다.
하나님께서 하신 기이한 일들이 많지만 몇 가지만 살펴보면, 1.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눈에 보이는 세상만물을 창조한 것. 무에서 유로 만들어 내는 게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어떻게 아무 것도 없는 데서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할수록 기이하다. 그런데 마술사들이 돈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데, 이것도 신기하기는 한데 알고 보면 사람의 눈속임이다. 인간은 무에서 유로 만들 수 없다.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다.
2.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서 이 땅에 오신 것도 신기하다. 인간의 두뇌로는 생각할 수 없는 거다. 그것도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에게 잉태가 되어서 사람이 나온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다.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3. 죽은 지 3일이 된 시체가 신령체로 살아나는 것도 신기하지만 부활 승천하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이걸 어떻게 사람이 과학적으로 푸느냐? 못 푼다. 과학적으로 푸는 것은 있는 것을 가지고 법칙적으로 푸는 것뿐이지 그게 왜 그렇게 되는지 원인은 알지 못한다.
4. 사람이 성품적 인격적 속성적으로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5. 부활체는 사람의 눈에 보일 수도 있고 안 보일 수도 있고,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다는 것이 참으로 기이하고 신기한 일이다. 이 외에도 사람 예수가 바다 위로 걷는 것이라든지, 오병이어의 표적 등등의 이적을 행하심이 많은데 이런 게 다 신기하고 기이한 일들이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에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은 다 나의 구원을 위해서다. 그러니까 ‘인간 나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못하시겠느냐?’ 하는 믿음을 준다. 요행을 바라는 게 아니라 말씀 순종자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못하시겠느냐? 예수를 믿으면서 이런 체험을 한 번이라도 해 봤느냐? 자기에게 이런 이적 기사가 나타나지는 않았어도 자기 속에서 이런 이적 기사가 믿어지는 것 또한 신기한 일이다. 기독교의 신앙은 인간 자기의 머리로 되는 게 아니다.
먹고 마시고 생활하는 것은 안 믿는 사람도 다 하는 거고, 눈에 보이고 일상적인 것이니까 별로 신기한 것이 없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런 것도 하나님의 허락이 아니면 안 되는 거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 중에는 기이한 일이던 일상적인 일이던 모든 것이 하나님이 허락 하에 된다는 생각이 희미한 채, 생각이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한 채 일반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 굳어진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은 자기에게 정말 전혀 생각지 않았던 일이 일어난다면 이때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믿어지겠느냐?
우리가 신앙의 마음을 가지고 하루의 생활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잠시라도 돌봐주지 않거나 역사하지 않으면 현재의 자기는 존재하지 못한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이런 생각을 못한 채 일반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사니 그저 덤덤한 거고, 그러다가 일하고 먹고 마시는 게 힘이 들면 괴롭고 고통스러운 거다. 안 믿는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육신의 생각으로 일상생활을 하지만 믿는 우리들은 모든 일상생활도 하나님의 보호가 아니면 못 산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불순종으로 살다가 하나님께서 특별히 콕 집어서 고난이나 고통이나 환난을 주면 그 때서야 ‘아이고 하나님’ 하면서 하나님을 찾는다. 자기에게 역사하는 것은 전부가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에서 하시는 역사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기이한 일들은 택한 선민 영적 이스라엘을 위해 하시는 역사라는 거다.
19절: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필하다.’ 인간은 희로애락을 느낄 줄 아는 존재다. 그러면 무엇이 영화로운 이름이냐? 이름이 영화롭다고 하는 게 무슨 뜻이냐? 영화로운 분은 영화로운 사람을 만든다. 자기가 영화롭게 만들어지면 자기를 영화롭게 만든 영화로운 분을 알아보게 된다. 자기가 누구 때문에 영원히 영화롭게 된 것인지 그 분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어느 스승에게 전문적인 기술을 배워서 그 분야에서 훌륭하게 됐다면 죽을 때까지 스승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당연한 거다.
계:에 성도들이 지상에 있을 때 특수한 은혜와 사랑을 받은 것에 대해 천국에서 찬양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의와 선을 많이 행해야 한다. 하나보다 열, 열보다 스물, 스물보다 백, 많이 하면 할수록 영화로운 사람이 된다.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할찌어다. 아멘. 아멘.’ 온 땅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이겠느냐? 성도가 땅에서 주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입는다면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다. 하나님의 속 성품으로 닮아지는 게 영광이다. 그러니까 온 땅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이 입혀지게 하는 게 하나님의 뜻인데, 이 역사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입혀지기를 바라는 염원의 기도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사람이 이렇게 되는 게 영광이다. 즉 영광스런 사람이 되라는 거다. 성도는 자타가 영광스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서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대화도 하고, 일도 같이 하는 거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역사하시는 것을 생각하면 발전적이고, 긍정적이고, 기쁘고, 즐겁다. 왜 그러냐? 네가 하나님 앞에 바로만 서 봐라. 하나님께서 너를 위해 무엇을 동원 안 시키시겠느냐? 그러니 늘 ‘내가 오늘날까지 살아나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구나’ 하는 생각을 가져라.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필하다.’ 본 시편 맨 앞에서는 ‘솔로몬 시’라고 하고서 뒤에서는 누구의 기도가 끝났다고 하느냐?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끝났다고 한다. 참으로 이상하다. 그러면 본 시편이 두 사람 중에 누구의 기도냐? 시작한 사람의 기도냐, 끝마친 사람의 기도냐, 둘 다냐? 아들 솔로몬이 기도를 시작을 해서 죽 기도를 하다가 아버지 다윗이 그 기도를 이어받아 하면서 끝마친 거냐?
맨 앞에서는 ‘솔로몬 시’라고 하고서 뒤에서는 ‘다윗의 기도’라고 한 이유가 뭘까? 1. 성령님께서 졸면서 기도를 듣다가 다윗이 기도를 한 것 같기도 하고 솔로몬이 기도를 한 것 같기도 해서 기록자에게 둘 다 공평하게 올리게 한 거냐? 2. 다윗이 기도한 것을 솔로몬이 베낀 거냐? 3. 솔로몬이 기도한 것을 다윗이 베낀 거냐? 4. 서로 베껴 썼는데 이것이 미안해서 상대방의 이름을 넣어주다 보니 이상하게 된 거냐? 5. ‘누가 기도를 했건 두 사람의 소원 목적이 똑같구나’ 하는 것을 알면 된다?
‘아멘’이 두 번 기록이 됐는데, 기도를 시작한 솔로몬이나 기도를 마친 다윗이 다 ‘아멘’을 했기 때문에 아멘이 두 번 나온 거냐? 아무래도 아들이 먼저 기도를 했겠느냐? 그러니까 아버지가 기도하는 것을 아들이 듣고 아멘을 했고, 또 아버지가 자기 기도에 아들이 아멘 하는 소리를 듣고 아버지도 아멘을 했기 때문에 아멘을 두 번 쓴 거냐? 어느 거냐?
참고로 킹제임스 성경에는 본 72편의 시제가 ‘솔로몬을 위한 시’로 번역되어 있다. 우리는 누구를 위한 시이던 우리를 위한 시로 받아들이고 깨달으면 된다. 그래서 우리도 이 기도를 듣고 아멘이 되는 거다.
성경에 보면 선지자 자기가 실컷 말을 해 놓고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라고 하는 것도 있고, ‘여호와 말이니라’ 라고 말을 해 놓고는 끝에 가서는 ‘나의 말이니라’ 라고 하는 것도 있다. 이게 무슨 뜻이냐? ‘여호와의 말이 내 말이고, 내 말이 여호와의 말’이라는 거다. 즉 소원 목적이 똑같다는 거다. 하나라는 거다. 신앙의 원리가 먼저 자기가 하나님의 것을 받고 그 다음에 그것이 자기 것으로 되어서 말을 하면 이 말은 자기의 말이요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거다. 내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의사와 뜻대로 되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것이고, 또한 내 말이 여호와의 말씀이 되는 거다. 우리는 다 이렇게 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네가 어찌 내 마음에 맞는 소리만 하느냐?’ 라고 하시면서 ‘아멘’을 하신다. 이것은 일반적으로는 이해될 일이 아니다.
본 시편은 다윗의 소원 목적과 솔로몬의 소원 목적이 똑같이 성령의 감화 감동에서 나온 것이다. 두 사람이 다 주의 나라가 그렇게 되어질 것을 말한 거다. 우리가 이것을 보면서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성을 생각해 보면,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신앙의 유산을 이어받는 거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아비는 아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내려줘야 한다. 스승이 제자에게 신앙유산을 물려줘야 하고, 목사가 교인들에게 신앙유산을 물려줘야 한다. 주님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본질인 신정통치의 계대가 흘러 내려가야 한다.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필하다.’ 기도가 끝났다는 것은 영능의 실력대로 영광중에 신령세계를 영화롭게 누리게 됨으로써 예수 믿는 목적이 성취가 되었다는 의미다. 본 시편에서 다윗의 기도가 끝났다고 했는데, 뒤로도 보면 다윗의 시가 또 나온다. 이것은 다윗이 기도를 마치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기도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또 다시 기도를 한 거냐? 그게 아니라 영광중에 신령세계를 영화로운 누림으로 누리게 됨으로써 예수 믿는 목적이 성취가 된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우리도 이렇게 되면 기도가 끝나는 거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은 신령계에서 주님과 함께 그 나라를 영광중에 영원히 누리는 것인데, 이것을 ‘영원 궁극적 최종적 목적적 결과적 구원’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게 뭘 말하는 거냐?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장차 그 나라에 가서 영광중에 살게 되는 결과성을 자기 앞에 미리 당겨다 놓고 현재 자기의 모든 이해타산을 거기에 두고 살아야 한다는 거다. 이게 계시적인 신앙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어 하신다. 이런 자식에게 신앙유산이 내려가고, 이런 교인에게 신앙유산이 내려간다.
우리에게는 이런 최종적인 구원이 있는데, 자기가 예수를 믿으면서 신앙유산을 못 물려받고 주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자기가 과거에 사람을 두들겨 팼던, 거짓말을 했던, 사기를 쳤던 과거 믿기 전에 몰랐을 때의 마음은 다 버리고 영원 궁극적인 구원에 목적을 두고 자기의 현실에서 이 구원을 위해 살아야 한다. ‘내가 대학교를 못 가도 좋다. 고등학교를 못 가도 좋다. 그러나 신앙유산만큼은 받겠다’ 하는 욕심을 품고 살아봐라. ‘세상 것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다 차지할지라도 나는 신앙의 유산만큼은 빼앗기지 않겠다’ 라고 하는 사람이 결국은 이 세상을 다 차지한다.
73편. 아삽의 시.
50편과 73편부터 83편까지가 아삽의 시다. 아삽은 레위인으로서 다윗과 솔로몬 치세 때 찬송을 책임 맡은 자다(대상15:16-19, 16:4-7, 대하5:12). 그의 아들들은 찬송하는 자들이 되었고,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해방이 되어 귀환을 해서 스룹바벨 성전의 기공식을 할 때 그의 자손들이 하나님을 찬양했다(느11:22). 그러니까 아버지의 찬송하는 감화를 받은 자손들이다. 그리고 아삽을 선견자라고 부르기도 했다(대하29:30). ‘아삽’의 이름의 뜻은 ‘모으는 자’인데, 아삽의 신앙은 그의 시로 보아서 찬송으로 많은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께 모이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시를 듣는 자로 하여금 마음이 하나님께 모아지도록 하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안 된다.
사람의 목소리가 아무리 고와도 다른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지 못하는 목소리가 있고, 목소리가 좋지 못해도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목소리가 있다. 찬송을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성령님의 감화 감동이 있는 사람은 그 감화 감동 속에서 찬송이 나오기 때문에 단순히 소리의 아름다움에 신경을 쓰는 게 아니라 가사에 신경을 쓰면서 영감에 감동 감화된 마음이 품어져 나온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할수록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가는데, 어떤 사람은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하나님은 생각지도 않고 마음이 자꾸 밖으로 나가고, 교회에 나가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면 그 마음이 즐겁겠느냐? 더 괴로워진다.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게 있으면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라고 해야지 자꾸 마음으로 부정적인 것을 생각하면 밥맛이 없어서 밥도 먹지 않게 되고, 이러면 누구만 배가 고프며, 언제 바로 설 거냐? 이러면 자기에게 고통과 괴로움만 자꾸 다가온다.
자기가 잘못한 것을 알아차렸으면 성경을 보면서 마음이 하나님 쪽으로 달려가고,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지 가만히 있으면 늘 그 자리다. 아무리 호의호식하고 호화찬란하게 살지라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는 자는 저주받은 사람이다.
1절: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백성인데, ‘이스라엘 중’이라고 했으니 하나님은 이스라엘 중에도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만 선을 행하신다는 거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면서 정결하지 못한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마음이 정결한 자’란 하나님으로부터 죄 씻음을 받고 세상 것에 소원 목적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자를 말한다. 자기를 늘 단속하는 사람은 거짓이 없다. 이 사람의 신앙심은 믿을만하다. 가난하던 부요하던 핍박과 환난이 와도 그 신앙심이 변질이 없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에게 선을 행하시는데, 이 사람에게 당신이 좋다고 여기시는 것을 모두 주신다. 나도 이것을 받고 싶으냐? 이것을 받는 사람은 선의 사람이 된다.
사람을 인격적으로 속성적으로 진리 자체화로 되게 하는 게 진짜 선이다. 이 외의 것은 따라가는 거다. 이 선은 세상사람들이 최고로 좋다고 하는 모든 것과는 비교도 안 된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아삽인데도 실족을 해서 미끄러질 뻔 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2절-19절 참조).
2절: ‘나는 거의 실족할 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 ‘실족’이란 발을 헛디뎌서 넘어지는 거다. 사람이 넘어지면 몸을 다치고, 고통이고, 일을 못한다. ‘실족’이란 또한 잘못 알고 딴 길로 가는 거다. 물론 자기는 옳다고 생각을 하고 그 길로 가는 거다. 언제까지? 잘못된 길인 줄 알 때까지 그 길로 간다. 끝내 알지 못한다면 끝내 그 길로 가다가 그 길에서 죽는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자기의 사고방식이 비뚤어져 있는데도 자기는 비뚤어진 것이 옳다고 하면서 계속 그 길로 가는 게 실족이다.
우리 인간은 영혼이 있는 존재인데, 인간으로 살면서 영적인 세계를 깨닫지 못하고 죽는다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오자마자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죽는 아이와 무엇이 다르겠느냐? 오히려 더 못한 게 아닌가? 그런데 2절-19절을 보면 아삽이 무엇을 보고 미끄러질 뻔 한 것일까?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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