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편 11절-77편 2절.
궁극이추천 0조회 4026.06.28 08:22댓글 0
76편 11절-12절: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자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찌로다 저가 방백들의 심령을 꺾으시리니 저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
77편. 아삽의 시. 영장으로 여두둔의 법칙에 의지하여 한 노래.
1절-2절: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하나님께 내 음성으로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며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76편 11절: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자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찌로다.’ ‘사방에 있는 모든 자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찌로다.’ ‘사방에 있는 모든 자’란 누구를 중심한 사방이냐? 첫째는 주님을 중심한 사방의 모든 자들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온전자로 만들어지겠다는 서원을 하는 성도를 중심한 사방의 모든 자들이다. 즉 진리성도를 중심한 사방의 모든 자들이다. 이건 교회도 되고, 구역예배도 되고, 모든 교회도 된다.
사방의 모든 자들이 이런 복된 자를 보고, 즉 이룰구원 성화구원으로 생명 길로 걸어가는 성도를 중심해서 그렇게 살려고 하는 복된 자들을 보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물을 드리라는 거다. 이방 불신자들, 안 믿는 자들을 보고 하는 말이 아니라 믿는 자들 중에 진리를 붙잡고 이룰구원으로 온전자로 나가는 그들을 향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라는 거다.
첫째는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는 말이다. 영적 이스라엘이란 신구약을 통틀어서 하나님 앞에 온전자로 만들어지며 사는 성도를 가리킨다. 구약의 역사에 계시로 등용된 육적 이스라엘 안에는 우리까지 포함해서 영적 이스라엘 전체가 들어 있다. 두 번째는 사람이 온전케 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께 예물을 드려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아, 저 사람이 교회에 나가더니 저렇게 변하는구나.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라는 거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 이 말씀을 하는 속에는 ‘사람이 참 사람이 되고 온전케 되는 것이 물질이나 돈으로 따지겠느냐?’ 하는 뜻이 들어 있다. 돈을 가지고 사람의 이해를 따지는 사람은 사람이 안 된다. 물질이 있느냐? 물질을 가지고 이웃을 사겨라. 주님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물질을 가지고, 돈을 가지고 그 중심으로 사람을 따지는 자는 부모의 은혜를 재산을 가지고 따지는 것과 같으니 사람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깨닫고 보면 부모의 어려운 고생살이 속에서 자식이 깨달을 게 많다. 부를 물려주는 부모보다 깨달을 게 더 많다. 평생을 살아갈 때 깨달을 것이 더 많다. 그러니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냐?
사방에 있는 모든 자를 보고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리라고 했는데, 이 예물이 무엇이냐? 예물도 예물 나름이다. 무엇이 최고의 예물이 될까? 흔히들 물질에 국한시켜서 말을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초월해야 한다. 신앙이 바로 서면 지혜에 있어서 쓸 데 안 쓸 데, 낼 데 안 낼 데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들어간다.
선물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주는 것이라면 예물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드리는 거다. 그렇다면 예물 중에 최고의 예물이 무엇이냐? 최고의 높은 분으로부터 최고의 것을 받았다면 최고의 것으로 예물을 드리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정이다. 예물이나 선물이나 공통점은 마음의 표시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일반은총과 특수은총을 모두 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대단히 기뻐한다. 그렇다면 우리로서의 최고의 예물이 뭘까?
예물 중에 최고의 예물은 본인 자신이다. 하나님께서 뭘 바라시겠느냐? 주님과 똑같이 만들어진 본인 자신을 마땅히 드려야 한다. 우리가 최고의 것을 받았다면 그 분 앞에 최고로 만들어진 것을 보여드려야 한다. 이것이 최고의 값진 예물이다. 그런데 최고의 것을 받은 사람인지, 최저의 것을 받은 사람인지? 아무 것도 모르는 건지, 몰라서 모르는 건지? 하나님 앞에 만들어지고자 하는 소원이 없이 멍청한 사람이 많다. 말하자면 자기의 존재 가치로 하나님 앞에 예물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이런 사람은 왜 그렇게 세상물욕은 많은지? 안 만들어지면 그렇다.
우리가 일반적인 은혜를 입어서 세상으로부터 빠져나와서 점점 나아진다면 그 고마움을 표시하고자 하는 게 인간의 마음이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에게나 인간에게나 복음의 향기가 나는 기쁨을 만들 줄 아는 예물이 되어야 한다. 믿어갈수록 예수 믿는 향기가 나와야 한다. 사람의 성품이 예물로 되어야 한다.
예물은 은혜를 받은 것에서 나오지만 뇌물은 은혜를 받은 자가 아니기 때문에 속에 시커먼 마음이 들어 있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서원은 하나님 앞에 예물로 만들어지고자 하는 것이 최고의 서원이다. 이게 최고의 예물이다.
12절: ‘저가 방백들의 심령을 꺾으시리니 저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 방백들은 백성들을 지도하고 인도하고 재판하고 판단해 주는 지도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이 방백들을 꺾었다고 했는데, 무엇이 잘못되어서 꺾은 거냐? 이들이 하나님 앞에 잘 하고 있는데도 꺾었느냐? 그리고 방백들을 꺾어버릴 때 세상의 왕들이 왜 두려워했느냐? 그 이유는 방백들과 왕들이 단짝이 되어서 백성들을 착취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을 지도 인도하는 방백들이 자기 눈의 들보부터 빼고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하고 바로 만들어지지는 않고 어두운 세상에서 왕 노릇하는 자들을 슬슬 찾아다니며 그들과 손을 잡고, 내통을 하고, 그들에게 감염이 되어서 그들에게 배운 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써먹기를 물질적인 것으로만 서원케 해서 물질을 예물로 가져오라고 강요를 하는 강도짓을 했으니 하나님께서 가만 둘 리가 없다. 세상적인 옛사람이 커졌으니 하나님께서 칠 수밖에 없는 거다. 이것을 본 세상의 어두운 주관자들이 두려울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지도자들이 형벌을 받으니 이들과 손을 잡은 세상 주관자들이 두려워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성경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겪은 자들과 같이 살지는 않았지만 성경에서 그것을 보면서 현실에서 자기가 그런 일을 당한 것처럼 느끼면서 내 속에는 하나님께서 보시고 꺾어버릴 요소는 없는지 살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을 보고 깨달으라는 거다. 내 속에서 세상과 내통하고 있는 세상의 어두움의 왕과 같은 요소는 없는지 두려워하며 살필 줄 알아야 한다.
77편. 아삽의 시. 영장으로 여두둔의 법칙에 의지하여 한 노래.
아삽은 레위인으로서 다윗과 솔로몬 때에 찬송의 책임을 맡은 자다. 아삽은 선견자라고 불리기도 했고, 시편에서 12편의 시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찬송하는 자들이 됐고, 그의 자손들은 역사적으로 포로에서 귀환해서 스룹바벨 성전기공 때 찬송을 했다.
여두둔은 악사로서 다윗의 성막에서 연주를 맡았고, 그의 후손들도 계속 그 직무를 담당했다. 그런데 ‘여두둔의 법칙에 의지한 노래’ 라고 했으니까 여두둔의 연주에는 연주의 법칙이 있다는 것인데, 아삽이 이 법칙에 의지해서 노래를 한 거다. 그러니까 아삽은 여두둔의 연주의 법칙이 좋아서, 또는 성령께서 감화 감동을 시켜서 그 법칙에 의지해서 노래를 한 거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곡조와 말을 빌려서 그 속에 당신의 뜻을 담아 주었다는 거다. 누구에게? 믿는 나에게.
1절: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하나님께 내 음성으로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여두둔의 법칙을 따라 시를 읊는데 왜 노래를 한다고 하지 않고 부르짖는다고 하는 것일까? 노래를 할 때 악을 쓰며 부르짖었기 때문이냐? 부르짖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속의 비중성을 말한다. ‘부르짖는다’ 라고 표현을 할 수밖에 없는 마음속의 간절성, 급박성, 중요성을 말한다.
‘하나님께 내 음성으로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하나님은 영의 귀다. 따라서 성도들이 영적으로 말을 해야 하나님의 귀에 쏙 들어간다. 그렇다고 해서 방언을 하라는 말은 아니다. 세상 잡된 소리는 온 세상사람이 부르짖어도 안 들으신다. 그렇다면 지금의 내 음성은 무엇을 근거로 하여 어디로 향해 폭발이 되고 있느냐? 속에서 무엇을 향해 폭발이 되고 있느냐?
선악과 따먹고 나온 음성은 아무리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어도 그 목적이 세상과 세상을 향한 거다. 그러나 진리 생명과를 먹고 나온 음성은 그 목적이 하나님께 있고, 자타의 온전이라고 하는 구원에 있기 때문에 남이 볼 때는 세상을 구하는 것으로 들릴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아가서는 술람이 여자를 향한 솔로몬의 연애편지인데, 솔로몬의 이 연애가 타락된 세상의 연애냐? 지혜의 왕에게서 나오는 고상한 사랑이다. 따라서 이 안에는 성도의 구원에 관한 도리가 들어 있다.
주께 부르짖을 때 진짜 기도가 있고, 거짓 기도가 있다. 영 주격으로 자기 영이 잘 되기 위한 기도가 있고, 자기의 세상살이가 잘 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있다. 거짓에 속하는 기도는 옛사람 자기를 위한 기도요 세상 육에 속한 기도이니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기도가 아니다. 이것은 기도의 고상함은 없다. 이런 기도를 일반사람들은 가치 있게 볼지라도 주님을 믿는 자녀들이 보기에는 일반사람들보다도 더 가치가 없는 거다. 우리가 악을 쓰면 들어주시겠느냐? 금식기도 철야기도를 하면 들어주시겠느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영을 위한 기도를 들어주시겠느냐, 육을 위한 기도를 들어주시겠느냐?
2절: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며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자기에게 환난 때인 줄 알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 밖에서 놀던 아이가 밤이 되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 비바람이 치고 눈보라가 치면 자꾸 집을 나가야 하느냐, 집으로 들어와야 하느냐? 집으로 들어와야 한다. 이게 이치다. 그런데 아이들은 밖에서 친구를 만나서 놀다가 해가 졌는데도 집에 들어갈 줄을 모른다. 저녁 때가 되고 밥 때가 되어도 숨바꼭질을 하느라고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는 아랑곳이 없다. 그렇다면 믿는 우리는 평소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자기에게 환난 때인 줄 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더욱 더 주를 찾아야 한다.
환난 날에는 집을 찾아 들어와야 하는데, 기독자들이 환난관을 어떻게 보느냐가 문제다. 이방 세상사람들은 육신생활이 살기가 어려우면 환난으로 본다. 그런데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는 진리환난이 가장 중요하고 심각하다. 성도에게는 진리말씀을 받기 어렵고, 진리말씀을 찾기 어렵고, 진리말씀을 듣고 싶은데도 듣지 못하고, 옳은 교회나 옳은 목사를 찾기 힘든 게 환난이다. 교회인 자기가 어느 환난을 더 큰 환난으로 느끼느냐에 따라 신앙의 깊이가 달라지고 기도가 달라진다. 교회가 영적인 환난을 더 진하게 느낀다면 옳은 기도, 금 대접에 담겨 올라가는 기도를 하게 되지만 세상살이가 잘 되지 않는 것을 더 진하게 느낀다면 세상을 위한 기도를 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당신처럼 온전자가 되는 일을 하신다. 하나님께서 주님으로 통해 교회를 만들어서 교회로 하여금 온전자가 되게 하는 일을 하신다. 이 이상 최고의 일은 없다. 이 이상 가치가 있는 일은 없다. 안 믿는 세상에서는 할 수 없고 오직 교회에서만 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시고, 성령을 받은 종들도 이 일을 한다. 옳은 성도는 이 일에 수종을 들면서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으로 만들어진다. 이런 성도들이 모이는 곳이 성 안의 교회다. 진짜 교회다. 이런 교회는 모든 좋은 것은 다 받게 되니 온전자가 된다.
가정적으로도 역시 하나님의 온전이다. 가정으로 통해서 이걸 이뤄가야 한다. 가정에 속한 나도 하나님의 온전이다. 이걸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교회던, 가정이던, 나던 각자가 무슨 일을 만나던, 무슨 상황이던 하나님의 온전이다. 그런데 마귀는 이걸 깨려고 한다. 이 일을 깨는 것은 세상지식이요, 세상 것이요, 세상기준이요, 안 믿는 기준이다.
안 믿는 기준은 정확하지 못하다. 단지 상황을 어떻게 하자는 것뿐이다. 어려운 상황을 피하면 다냐?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게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교회나 가정에서 어떤 일이 생기면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온전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해타산 평가성을 온전에 두고 일을 처리해 나가야 한다.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는 이 일이 안 된다. 교회가 세상의 기준에 맞추면 세상교회다.
개인적이건, 가정적으로건, 교회적으로건 세상기준을 들어서 온전자가 되는 일을 깨지 말아라. 이렇게 되면 개인적이던, 가정적이던, 교회적이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심판을 받는다. 무슨 일이던 온전자가 되는 면에 소원과 목적과 결과를 두고 일을 처리해 나가야 한다.
누가 이 법칙을 만들었느냐?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만든 거다. 따라서 개인이던 가정이던 교회이던 온전자로 만드는 하나님의 이 법에, 하나님의 이 주권에 도전하면 안 된다. 도전을 하면 자기가 다친다. 온전자가 안 되면 불심판밖에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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