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소강석] 동로마 제국의 멸망과 한국교회(하)
무능한 리더십이 교회 망친다
동로마 제국 패망의 세 번째 원인은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기중심적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신앙이 자기중심적이 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욕망과 탐심을 채우는 것이 우선이 된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먼저 추구한다. 동로마 교회가 그랬다. 성화 숭배파는 말할 것도 없고 성화 반대파가 교권을 잡을 때도 교권 연장을 위해서 반대파를 짓밟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사람은 한번 권력의 맛을 보면 교회나 국가보다는 자기 권력만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게 된다. 에미취어가 쓴 ‘제국의 나날’이라는 책에 보면, 역사적으로 흥한 제국과 망한 제국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약자에게 관용을 베풀었느냐, 안 베풀었느냐 라는 것이다. 그런데 동로마교회의 지도자들은 자기 배만 채우고 사익만을 앞세웠다. 그런 교회가 무슨 영적인 힘이 있고 시대의 버팀목이 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언제부턴가 우리도 너무 귀족화되었고 자기중심적 신앙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지 않은가. 겉으로는 교회 개혁을 위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내세우지만 사실은 그 동기가 내 이익과 기득권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는가.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앞세우지만 속으로는 교권을 장악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는가. 한국교회는 다시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 이익보다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 이름이 목표가 되고 함께 서민의 옷을 입으며 소외되고 낮은 곳에 있는 자들을 포용하며 섬겨야 한다.
넷째, 지도자의 지도력 부재나 무능한 리더십 때문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메흐메드 2세는 유능하고 리더십이 출중했다. 그리고 모든 각료와 부하들이 무조건 그를 따르고 순복만 했다. 그러나 동로마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너무나 유약하고 무능했다. 감상적 신앙에 빠져서 눈물이나 짜다가 저녁에 꿈을 꾸면 죽은 황후를 만나 이런 대화나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황후여, 너무나 보고 싶소, 난 너무 힘들다오.” 제국의 황제라면 백성들의 마음을 설득하여 군사를 모집하고 국방력을 강화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방위성금이라도 모금하여 화약을 만들어 튀르크군보다 더 강력한 대포를 쏘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지도자가 자기 연민에 빠져 눈물만 흘리고 있었으니 제국의 미래가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런데 황제를 그처럼 무능하게 만들었던 사람들이 바로 각료와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콘스탄티노플 도성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을 때 로마 교황청에서 이시도르스라는 대주교를 보내서 협상을 했다. “우리가 군대를 파송해 주겠다. 대신 우리와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 물론 실상은 동방 정교회가 로마 교황청에 예속하라는 일방적 통첩이었다. 그래도 황제는 제국의 등불을 꺼트리지 않기 위해 성 소피아 성당에서 사인을 하고 동서 교회 합동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당시 국무총리격인 노타라스 대공을 비롯하여 동방정교회 지도자인 게오르디오스 등이 반대하며 백성들을 선동했다. “우리가 옛날 십자군 전쟁 때 서방 십자군들에게 얼마나 수치와 모욕을 당했는가? 황제가 노망을 한 것이다. 황제를 따르지 말고 결사항전을 하자. 우리가 추기경의 모자를 쓰느니 차라리 술탄의 터번을 쓰자.”
그래서 그날, 각료와 주교, 백성들은 전혀 참석하지 않았고 황제의 인척들만 참석하였다. 이것이야말로 황제의 리더십에 완전히 재를 뿌려 버린 것이 아닌가? 결국은 나라도 망하고 교회도 망하고 노타라스 대공을 비롯한 반대자들 모두가 다 비참한 죽임을 당했다. 특히 노타라스 대공은 자신의 눈앞에서 자녀들이 참수를 당하고 자신도 처형을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오늘 한국교회는 지도자의 지도력도 부재하지만, 지도자를 끌어내리는 풍조가 얼마나 만연해 있는가. 연합기관은 분열되어 통일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역사는 여전히 우리에게 거울로 존재한다. 한국교회가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지도자의 리더십이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영광과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해 분열된 교계가 다시 통일성 있는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소강석 목사 (용인 새에덴교회)
동로마 제국 패망의 세 번째 원인은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기중심적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신앙이 자기중심적이 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욕망과 탐심을 채우는 것이 우선이 된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먼저 추구한다. 동로마 교회가 그랬다. 성화 숭배파는 말할 것도 없고 성화 반대파가 교권을 잡을 때도 교권 연장을 위해서 반대파를 짓밟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사람은 한번 권력의 맛을 보면 교회나 국가보다는 자기 권력만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게 된다. 에미취어가 쓴 ‘제국의 나날’이라는 책에 보면, 역사적으로 흥한 제국과 망한 제국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약자에게 관용을 베풀었느냐, 안 베풀었느냐 라는 것이다. 그런데 동로마교회의 지도자들은 자기 배만 채우고 사익만을 앞세웠다. 그런 교회가 무슨 영적인 힘이 있고 시대의 버팀목이 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언제부턴가 우리도 너무 귀족화되었고 자기중심적 신앙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지 않은가. 겉으로는 교회 개혁을 위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내세우지만 사실은 그 동기가 내 이익과 기득권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는가.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앞세우지만 속으로는 교권을 장악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는가. 한국교회는 다시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 이익보다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 이름이 목표가 되고 함께 서민의 옷을 입으며 소외되고 낮은 곳에 있는 자들을 포용하며 섬겨야 한다.
넷째, 지도자의 지도력 부재나 무능한 리더십 때문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메흐메드 2세는 유능하고 리더십이 출중했다. 그리고 모든 각료와 부하들이 무조건 그를 따르고 순복만 했다. 그러나 동로마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너무나 유약하고 무능했다. 감상적 신앙에 빠져서 눈물이나 짜다가 저녁에 꿈을 꾸면 죽은 황후를 만나 이런 대화나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황후여, 너무나 보고 싶소, 난 너무 힘들다오.” 제국의 황제라면 백성들의 마음을 설득하여 군사를 모집하고 국방력을 강화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방위성금이라도 모금하여 화약을 만들어 튀르크군보다 더 강력한 대포를 쏘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지도자가 자기 연민에 빠져 눈물만 흘리고 있었으니 제국의 미래가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런데 황제를 그처럼 무능하게 만들었던 사람들이 바로 각료와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콘스탄티노플 도성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을 때 로마 교황청에서 이시도르스라는 대주교를 보내서 협상을 했다. “우리가 군대를 파송해 주겠다. 대신 우리와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 물론 실상은 동방 정교회가 로마 교황청에 예속하라는 일방적 통첩이었다. 그래도 황제는 제국의 등불을 꺼트리지 않기 위해 성 소피아 성당에서 사인을 하고 동서 교회 합동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당시 국무총리격인 노타라스 대공을 비롯하여 동방정교회 지도자인 게오르디오스 등이 반대하며 백성들을 선동했다. “우리가 옛날 십자군 전쟁 때 서방 십자군들에게 얼마나 수치와 모욕을 당했는가? 황제가 노망을 한 것이다. 황제를 따르지 말고 결사항전을 하자. 우리가 추기경의 모자를 쓰느니 차라리 술탄의 터번을 쓰자.”
그래서 그날, 각료와 주교, 백성들은 전혀 참석하지 않았고 황제의 인척들만 참석하였다. 이것이야말로 황제의 리더십에 완전히 재를 뿌려 버린 것이 아닌가? 결국은 나라도 망하고 교회도 망하고 노타라스 대공을 비롯한 반대자들 모두가 다 비참한 죽임을 당했다. 특히 노타라스 대공은 자신의 눈앞에서 자녀들이 참수를 당하고 자신도 처형을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오늘 한국교회는 지도자의 지도력도 부재하지만, 지도자를 끌어내리는 풍조가 얼마나 만연해 있는가. 연합기관은 분열되어 통일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역사는 여전히 우리에게 거울로 존재한다. 한국교회가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지도자의 리더십이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영광과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해 분열된 교계가 다시 통일성 있는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소강석 목사 (용인 새에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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